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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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5대 국왕이자 건길지. 제4대 개루왕의 맏아들이며 제8대 고이왕과의 관계는 불확실하다.
155년[2] 신라의 반역자 아찬(阿飡) 길선(吉宣)의 송환 문제로 양국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이로 말미암아 초고왕의 즉위 후 신라와의 공방전이 되풀이됐다고 한다.
2. 신라와의 공방전
- 167년 7월에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해 2개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왔다. 신라는 167년 8월 반격으로 일길찬 흥선이 2만여 명의 병력으로 백제 동쪽의 여러 성을 공략했고 곧이어 신라 왕이 직접 정예 기병 8천여 명을 이끌고 한수(한강)까지 침입해 초고왕은 신라 대군을 보고 점령했던 지역을 돌려주고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 170년 10월 신라의 변경을 침공했다.
- 188년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했다.
- 189년 9월 구양(狗壤)[3] 에서 신라와 싸웠으나 500명의 전사자를 내며 패배했다.
- 190년 8월 신라의 서쪽 변경의 원산향[4] 을 공격한 뒤에 구도[5] 가 이끄는 신라군이 추격해오자 와산[6] 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 199년 신라의 변경을 공략했다.
- 204년 신라의 요차성[7] 을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전사시켰다. 신라의 내해 이사금이 분노해 백제 사현성에 반격했다.
3. 말갈과의 공방전
북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210년 적현(赤峴)[8] , 사도(沙道)[9] 두 성을 쌓았다.
214년 진과(眞果)로 하여금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하여 탈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갈의 기병으로 인해 술천[10] 지역까지 침략당하여 역관광당하기도 하였다.
말갈은 말갈 문서에 있듯 만주의 말갈이 아니라 위말갈, 즉 동예, 대방군 등 예맥계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4. 고이왕과의 관계
고이왕과의 관계는 불확실하다고 언급했는데 왜냐하면 삼국사기에는 초고왕의 동생이 고이왕이라고 서술했기 때문.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고이왕은 초고왕이 사망한지 20년이나 지나 왕위에 올랐고 다시 50년을 재위하였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개루왕의 아들이나 초고왕의 동생으로 보기 어렵다. 기루왕의 사례에서 보듯이 개루왕은 38년을 재위했고 기루왕이 100살을 넘겼다면 아들인 개루왕도 최소 60살은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개루왕도 무려 38년을 재위했으니 아들인 초고왕은 50살이 넘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생이라면 무려 70살이 넘는 나이에 50년을 재위하여 120살을 넘게 살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책계왕이 고이왕의 증손자라면 모를까, 여긴 또 아들이랑 아버지 관계다. 이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고이왕은 초고왕의 동생이 아닌 초고왕의 동생의 아들이라는 견해도 제법 있는 편이다. 대한민국 역사학자 노중국에 따르면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등장하는 백제 국왕 가운데 실존했던 최초의 군주로 지목되는 왕이다.[11] 역사학계의 대세는 백제 초기 기록은 제8대 고이왕부터 신뢰가 가능하다고 보는 편인데 노중국은 좀 더 초기 기록을 폭넓게 신뢰한 편이다.[12] 마침 활동 기록이 대폭 늘어나는 재위 21년차는 186년으로 삼국시대(중국)의 기점과 일치하는데 중국 내에서도 여러 군벌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시기이다.
5. 기타
- 고고학상 나타나는 바로는 백제 또는 전신이 되는 부여 - 고구려 계열 유이민들이 마한의 영역으로 도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가 초고왕 시절이라고 한다[13] . 나중에 고구려와 대결하면서 자신들이 고구려와 대등함을 표방하기 위해 건국 시기를 앞당긴 걸로 보인다고 한다.
6. 삼국사기 내용
'''《삼국사기》 초고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초고왕이 즉위하다
二年秋七月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하다
二年秋八月 신라가 군사를 보내 동쪽 변경을 공격해 오다
五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冬十月 신라 변경을 공격하다
二十一年冬十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二年夏五月 서울의 우물과 한강이 마르다
二十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고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나타나다
二十四年秋七月 신라와 구양에서 싸워 패배하다
二十五年秋八月 신라의 원산향을 공격하고 부곡성을 포위하다
二十六年秋九月 치우기가 각·항에 나타나다
三十四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고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三十九年秋七月 신라의 요차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를 죽이다
三十九年冬十月 혜성이 동정에 나타나다
四十年秋七月 금성이 달을 범하다
四十三年 곡식이 익지 않아 도적이 일어나다
四十四年冬十月 겨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四十五年春二月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다
四十五年冬十月 말갈이 사도성을 공격하다
四十六年秋八月 누리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리다
四十六年冬十一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四十七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四十八年秋七月 회회가 흰 사슴을 바치다
四十九年秋九月 북부의 진과가 말갈의 석문성을 공격하다
四十九年冬十月 말갈이 침입하여 술천에 이르다
四十九年 초고왕이 죽다
신라, 말갈과 투닥투닥. 그리고 자연 재해가 거의 전부다. 심지어 5~21년 사이는 공백이고 2~5년차 기록도 천문 현상 아니면 신라본기에서 베껴온 거라서 실질적인 백제 측 기록은 21년(서기 186년)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1] 《삼국유사》.[2] 개루왕 문서에 서술되어 있듯이 이 사건은 155년이 아니라 165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3] 現 충청북도 옥천군.[4] 現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5]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다.[6] 現 충청북도 보은군.[7] 現 경상북도 상주시.[8] 적현성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라는 설과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일대라는 설 2개가 있다. 문제는 초고왕 시대에 적성 일대는 신분활국이 있었고 세종시 일대에는 마한의 맹주 목지국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는 것. 초고왕과 구수왕 시절의 백제는 적성이든 세종시든 어느 쪽이든 간에 백제의 영토로 지배하지 못한 상태였다.[9] 후보지라도 있는 적현성과 달리 초고왕의 사도성은 대체 어딘지 연구조차 되어 있지 않다. 한국사에 등장하는 사도성은 沙道城으로 하나 더 있는데 경상북도 영덕군 후포면 일대로 추정된다. 이 사도성은 아달라 이사금 시절 이미 있었고 유례 이사금이 사도성을 재건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초고왕 시절 백제가 영덕까지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라 추정하여 영덕 사도성이랑 별개의 성이라는 점만 연구되어 있다.[10] 現 경기도 여주시.[11] 출처: 백제 정치사 연구.[12] 신찬성씨록에 초고왕, 구수왕, 사반왕의 후대 가문이 존재하는 이유가 큰 듯. 전임자 온조왕,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은 일본 측 문헌에서 나타나지 않는다.[13] 북사에서도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2세기 후반 활동한 위구태왕과 동일인물로 보이는 구태가 백제의 건국자로 나오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