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맥

 





1. 개요
2. 예맥
3. 예(濊, 穢) - 부여, 동예
4. 맥(貊) - 고구려, 옥저
5. 예와 맥은 같은 종족인가?
6. 표기 문제
7. 같이보기


1. 개요


濊貊
고대 한반도 북중부와 만주 중남부에 거주하던 반농반목 민족이자 한반도 중남부에 주로 거주했던 한(韓)족과 함께 현 '''한국인'''의 주류 조상이 되는 민족. 고구려, 발해 멸망 이후 중원세력과 유목민 세력에게 동화되거나, 한(韓)족과 융합하여 현재의 한민족 계보로 이어졌다. 랴오둥 반도 및 랴오시(요서)의 예맥인들은 발해멸망 이후로도 수백여년에 걸친 발해부흥운동과 원갑섭기에 심양왕 자리에 고려왕족을 임명한 사례,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요동 정벌 사례 및 시도, 그리고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여겼다는 조선초기의 기록을 보았을 때 조선 초중기까지는 예맥인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던 것으로 보이나 박씨 등 일부나 광해군 시기에 조선으로 이주한 이들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한족 및 만주족들에게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1]

2. 예맥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실상 예맥이라는 명칭은 고대 사서에서부터 매우 넓은 범위로 제시되는 일반적인 종족명이다. 위의 동이전이라는 하나의 사료 내에서도 예맥은 고구려와 동옥저의 남쪽, 즉 한반도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동예) 혹은 부여와 같은 만주 동북지방의 초기국가와도 연관을 가진다.
한편으로 예맥은 예+맥 이라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이는 아래 항목들을 참조할 것.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예족(동예를 의미한다)은 호랑이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곽박의 《이아(爾雅)》, 《일본서기》 등을 근거[2]로 '맥(貊)'이 을 의미했고, 예족과 맥족의 관계가 단군신화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로부터 단군신화(檀君神話)에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토템(totem)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신화(神話)로 남아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3]

3. 예(濊, 穢) - 부여, 동예


일단 아래의 모든 항목은 학문적으로 현재 완전히 정립된 관점은 아니다. 예는 다양한 형태로 사서에 제시되는데, 동예라고 흔히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알려진 영동 지역의 예(濊)가 예족의 대표적인 일파이다.

당나라 가탐(賈耽)은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계인 명주(강릉)는 예(濊)의 고국’이라고 썼다.

또 다른 하나의 예와 관련해서는 예(穢, 동사강목 등에서는 濊로 혼용하여 기재.) 세력을 말한다. 이 예 세력은 위만조선의 북부, 한사군 중 현도군, 부여 등의 만주계 고대 국가 집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다가 한대 무제 시기에 창해군 복속 사업과 당시의 군주 예군 남려와 관련된 기록으로 인해 처음 알려지게 된다. 위만조선과 느슨한 형태의 연맹을 이루었거나 한 것으로 보이며 무제에 의한 별도의 창해군 복속사업은 실패하였으며, 이후 위만조선 멸망 당시 현도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가 고구려 등의 기반 지역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명확한 구분 기준은 아직 알 수 없다.

4. 맥(貊) - 고구려, 옥저


맥이라는 민족에 관해서는 조선시대 실학자들 이후 다양한 가설들이 나왔으나 근래의 가설은 맥을 주로 고구려와 연관지어 이해하고 있다. 여호규, 송호정, 김현숙 등 고대사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가설은 예맥으로 분류되는 만주 일대의 집단 중에서 기원전 3세기 이후 구별되어 구려, 고구려 등으로 분류되는 집단이 주변의 '예'와 구별되는 '맥'의 정체성을 발현시켰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맥계는 이와 같이 고구려 건국 및 확장 시에 보다 확실하게 대두된다. 물론 고구려 세력이 유일한 맥계 공동체는 아니었고, 고구려 통합 과정에서 대수맥(大水貊), 소수맥(小水貊), 양맥(梁貊) 등이 편입되어 나간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세력이었기 때문인지, 중국에서는 맥을 고구려 세력의 비칭으로 사용한 예가 많다. 대표적으로 북송 시대에 고려 사신의 행패를 소동파가 비난할 때 비칭으로 쓰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근대의 사학자들의 경우 과거 맹자 등의 중국 고서에 나오는 맥적 내지 맥을 예맥과 연관시켜 왔지만 맹자나 한서가 저술되던 시대에 이민족의 족보를 따져 가면서 종족 명칭을 기술하지는 않아 역사학계에서는 이제 진지하게 다루지 아니한다. 대체로 선진시대 문헌의 맥은 북방민족의 범칭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표적으로 '동이'라는 명칭은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는 한반도 고대 국가와 연관되지만, 맹자 이전의 선진시대 문헌 중에서는 산동 지방의 래이 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명칭의 혼용은 고대 중국에 흔히 발견되는 사례이다.) 게다가 맥이라는 명칭은 예맥 외에도 호맥 만맥 등 매우 많으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맥은 이민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에 가깝다고 인지해야지 아무 맥이나 다 예맥에 갖다 붙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현대적 관점이다.

貊賊入貢 無絲髮利而有五害 今請諸書與收買金箔 皆宜勿許.

"맥적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맥은 고구려에서 비롯하여, 그 이후 한반도 북부와 영서의 고구려 세력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변화해 예(동예)와 대비되어 쓰이기도 한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之印: 예왕지인)을 발견해 바쳤다.”

춘주(春州)는 예전의 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국(貊國)이다.”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마한 中.

삼국유사의 지역 인식은 이러한 변화를 잘 반영한다. 여기에 나오는 명주는 영동이며, 삭주는 영서지방을 의미하는데, 현대의 영동지방은 예로 불렸으며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세력과 평양성 (왜 평양성을 놔두고 영서를 고구려 취급하냐고 할 수 있는데 평양성은 삼국통일 이후에는 중국에 의해 대규모 사민정책이 실시되어 고구려색이 퇴화하였다. 통일신라 당시 신라에 남은 고구려 유민들의 중심지는 평양이 아닌 영서와 패서지역, 한반도 중부 일대로 보아야 하며 이는 후고구려 세력의 중심이 단순히 평양 등 서북한 지역이 아닌 주로 철원 등 영서인 것과 무관하지 아니하다.) 등 고구려계 세력을 주로 맥으로 칭하는 현실을 잘 알 수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4]

에 드날렸다.

부여융 묘지명, 682년

부여융 묘지명의 양맥은 두 예맥족이란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예맥을 계승하였음을 알 수있다. 이와 같이 어느 시점에서는 단순히 예와 맥을 영동/영서로 구분하지 않기도 하며, 이러한 인식은 예맥이 예+맥으로서 , 또는 예맥이라는 삼한일통 이후의 단일민족적 관점에서도 동시에 인지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바이다.
이후에도 맥은 예와 함께 한반도 고대의 고구려 세력을 의미하는 말로서 고유 풍습과 관련된 말로 '맥궁(貊弓)'이나 '맥적(貊炙)' 등의 말을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맥적은 한국 요리너비아니의 기반이 되었으리라는 추측을 받고 있다. 참고로 백제기록에서도 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책계왕낙랑이 주동이 되어 맥인과 함께 백제에 쳐들어가서 책계왕이 맞서 싸웠으나 전사했다고 한다. 이것 역시 낙랑이 주동이 되어 고구려계 용병과 함께 백제(한성백제)와 대결했다고 하면 해석이 매우 부드럽다.

5. 예와 맥은 같은 종족인가?


'''예맥(濊貊)'''은 고대 만주 지방과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종족명으로, 삼한계 민족들과 함께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 민족들 중 하나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동안 '''예족'''과 '''맥족'''을 사실상 동질적인 민족들로 보는 견해가 주류였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이에 관한 다양한 이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 令備洒掃言教如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서.

한예(韓穢)를 한과 예가 섞인 별도의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한과 예를 연칭한 것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는 동예, 옥저와 같이 고구려 이외의 북쪽 한반도인을 지칭하는 언급이며, 한은 당연히 삼한 즉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제 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봄이 매우 타당하다.
북쪽의 한민족과 남쪽의 한민족, 즉 예인(穢人)과 한인(韓人)들의 차이에 대해서는 백제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간의 언어 차이를 하나의 단서로 들 수 있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에 의하면 "왕의 성은 부여씨(夫餘氏)이고 이름은 '어라하'라 하는데 백성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른다. 이것은 한자어로 왕(王)과 같다. 처는 '어륙(於陸)'이라 하는데 한자로 비(妃)가 된다."고 하여 부여계 언어와 한계(韓系) 토착 언어와의 차이를 단적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지배층 언어와 일반민의 용어 차이로도 해석할 수 있으므로 '''확실한 근거가 되지는 못하나'''[5] 동시대 신라 사회나 고구려 사회가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왕을 서로 달리 부른 적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확실히 백제만의 특징적인 차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상 한 나라의 국민들이 국가 지도자의 관명을 달리 부르는 현상은 이중 언어 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로서 결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백제어 문서의 '이중 언어 체계' 문단을 참조.
또한, 맥=고구려라는 관점을 보강해서 설명하자면, 광개토대왕릉비의 저 비문만으로 고구려가 같은 예맥계인 예족들도 아예 다른 민족으로 인식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애초에 고대에는 같은 민족끼리도 부족별로 나뉘어서 싸우거나 각각 다른 나라들로 나뉘어서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그 탓에 서로를 별개의 집단으로 구별해서 인식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다. 비유하자면 한국전쟁북한남한의 국군 포로들을 노역에 동원했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남한과 북한이 서로 다른 민족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그 당시 고구려 또한 전쟁 포로들을 활용했다고 해서 같은 부여계인 예족과 맥족이 서로 아예 다른 별개의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전근대에는 혈통과 언어가 비슷한 같은 민족들을 부족이 서로 다르고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침략해서 노예로 삼는 경우가 매우 흔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시대 여진족들만 해도 서로 부족별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웠었고, 정복한 타 부족민들을 전부 노예로 만든 경우가 많았었다. 극단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부족들을 아예 대규모 인신공양과 식인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즈텍 제국이 있다.
또한 앞서 명기했듯이 예맥이 항시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동등한 존재로서 나타날 필요는 없으며 이것이 인류유전학적 관점이나 고고학과 반드시 조응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인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 왜곡되며 이를 후대에 압축해서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편향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근대사학이나 현대의 재야사학의 대표적 오류이다.
예맥의 뿌리는 같으나 시대에 따라 예와 맥으로 분류되어 호칭되기도 하였으며, 다만 그 기준이 과학적이고 혈통적인 것이 아닌, 고구려, 동예/옥저 등 영동계열, 후대 백제 등으로 이주한 북방계 남부한반도인, 부여인 등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6. 표기 문제


이들 세력이나 종족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헌상으로 예와 맥은 '예(濊)', '맥(貊)'으로만 존재할 뿐 '예족', '맥족'이라 기록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대로 예맥을 예와 맥이라는 특정 혈연 민족으로 보는 경우 이들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헌상에는 羌(강), 氐(저), 凶奴(흉노)라고 나타나는 민족을 강족, 저족, 흉노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극 초반에 등장하여 충돌하는 영서, 영동의 말갈세력을 활동영역과 기록시기로 보아, 한반도 중남부에서 활동하던 이질적인 예맥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위말갈 항목 참조.


7. 같이보기


[1] 한민족의 경우 예맥 중심의 국가였던 고조선과 부여와 옥저, 백제를 계승했지만 한족들과 만주족들은 해당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계승하지 않았었다.[2] 고구려박(狛)이라고 쓰고 코마(こま)라고 읽었다.[3] 출처 : 위키백과 한글판, 원출처는 한국사 1권(1973), 한국민족문화대백과로 제시되어 있음. 추가로 제시된 링크 (# 부분)의 경우, 신용하 교수의 저작을 언급하는데 신용하 교수는 2000년대, 즉 70대까지는 일정기와 독립운동 단체, 독도 영유권 등을 다루던 학자였지 고대사학자는 아니다.[4] 두개의 맥족이라는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의미함[5] 실제로 조선의 경우에도 사대부와 신하들은 '주상' 혹은 '전하'라고 부르고 일반 평민, 백성들은 '나랏님'이나 '임금님', 또는 '상감마마' 같은 식으로 서로 다르게 부른 사례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