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회의

 


日本会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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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설립 및 기원
3.1.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3.2. 일본을 지키는 모임
3.2.2. 생장의 집(세이쵸노이에)
3.3. 두 조직의 결합
4. 주장과 활동
5. 사건 사고
6. 위기?
7. 관련 도서
8. 관련 기사


1. 개요


약 38000명(2016년 초 기준)의 회원과 243개 지부, 약 1700명의 지방의회 의원이 활동하고 있는 일본회의는 일본 최대 우익단체 또는 아베정권을 조종하는 거대 세력으로 불리기도 한다.

- 일본회의의 역사인식과 교육관: 무라야마 담화 정신에 대한 도전, 조진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아베 총리의 정책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회의는 현재 일본 최대의 보수계 단체이다. 일본회의는 정계, 재계, 사법, 교육, 종교 등의 보수계 단체 및 개인과 연계된 우익 및 보수단체의 결합체이자, 우익의 내셔널 센터로 기능하고 있으며, 보수계 단체 및 우익 성향 단체 간의 연락기관의 역할도 하고 있다.

- 일본회의와 아베 정권의 정책 성향과의 상관관계 연구, 김숙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일본 최대 규모의 극우 정치 결사 조직.
정치·경제·문화·종교·예술 분야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결집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평화헌법으로 대표되는 '''현행 전후체제를 부정하고, 전쟁 전 및 전시의 일본 체제와 사상을 복원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헌법 개정·수정주의 역사 교육·제국 시기의 법제 보존 및 부활 등을 추진하고 있고, 이 중 상당부분을 이미 실현시킨 단체이다. 일본의 모든 우경 활동과 논란들을 추적해보면 정점에 항상 이 조직이 있을 정도. 일본 종교계 우익의 구심점이 신사본청이라면, 정치-사회계에서는 바로 이 일본회의가 있다. 전반적으로 전체주의, 군국주의, 파시즘 성향이 짙다.
일본내의 주요 우익집단들 중에서도 가장 자금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조직들이 협력해서 만들어진만큼 일본사회에 있어서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하부에 수 많은 프런트 조직을 두고 있어 그 규모가 매우 방대하다. 일본 아베 정권 및 자민당과의 긴밀한 연계가 의심되고 있다. 외신에서는 이 단체를 극보수[1], 국수주의[2] 로비단체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3]

2. 상세


1997년 5월 30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두 단체가 통합해 발족한 민간조직이다. 2017년 8월 기준 회장은 다쿠보 다타에.[4] 회원수는 2017년 기준 약 4만 명이고, 일본 도도부현 47개 전체에 본부가 있으며 시정촌 241곳에 지부를 두었다. 브라질에도 해외 지부가 있다.
일본 국회의원 중 약 270여 명 정도가 일본회의 회원이라고 한다. 이는 '''일본 국회의원의 40%'''에 달하는 숫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의원연맹 하의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라는 것도 결성해 현재 원외, 원내 포함해 국민민주당, 일본 유신회도 있으며, 95% 이상이 자민당이다. 그 외에도 지방의원, 경제인 동지회까지 결성했고, 일본 정책 연구 센터라는 싱크탱크도 있다.
일본회의 창립 멤버인 전 총리 '''아베 신조'''를 포함해, 4차 아베 내각 당시 기준으로 각료 총 20명 중 15명이 일본회의 회원이었다. # # 극우적인 말을 자주 하는 아소 다로가 일본회의 멤버이며, 자민당 정조회장 기시다 후미오와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도 회원. 일본의 대표적 우익사관론자인 가세 히데아키 역시 이 단체의 대표회원을 역임하였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자민당 내 상대적 온건파로 알려진 이시바 시게루도 일본회의 소속이다.
공식 회원만 해도 4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조직인 만큼 엄청난 자금을 휘두른다.[5] 단순 연간회비 수입만으로도 1년에 약 4억 엔을 벌어들이고, 협력단체가 보내는 기부금과 협찬금도 상당하다고 한다. 일본회의가 본격적으로 발족하기 이전인 1970년대 중반 메이지 신궁은 원호법제화운동을 성공시키고자 억 단위의 돈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마구 뿌려댈 정도로 자금력이 막강했다. 이런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인 만큼 막대한 자금을 움직이리라 추측, 아니 확신한다.
이러한 자금은 일본 전국의 지방조직을 만들어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 사용된다. 상술했듯 일본회의는 일본 전국에 지부 243곳을 두어 이들 지부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의원들을 당선시키고 성장시키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일본회의 사무총국의 홍보담당자는 최종적으로는 일본 전체 소선거구 수와 비슷하게 3백여 개 지부를 각 선거구에 설립하여, 모든 선거구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후보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천황제 국가의 복원을 꿈꾸는 신흥종교 생장의 집(生長の家) 원리주의자 무리가 그 배후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곧 후술하겠지만 '천황제 국가의 복원'을 노린다면서 한편으로는 '''황태자'''였던 나루히토와 노골적으로 갈등을 빚었던 모순적인 집단이기도 하다. 결국 천황의 권위는 일본제국 수준으로 높이되 실권은 현재 수준으로 묶어버려 자신들이 호가호위를 하겠다는 것.
그동안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었지만,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와 이로 인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 2019년 들어 한일 양국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한국 내에서도 일본회의가 주목받았다. 아베 정권 들어 극심해지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이해하려면 일본회의를 반드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다스 뵈이다 70회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가 일본회의에 대해 소개[6]했으며,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08회[7], MBC 스페셜 816회[8]에서 일본회의에 대해 심층 분석했다.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수석·보좌관 회의에 일본회의의 정체를 파헤친 책 《일본회의의 정체》를 들고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 《주전장》에도 일본회의가 등장한다.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지만 우익사상의 기원과 일본회의 조사 또한 겸한 작품이다.
매달 '일본의 숨결(日本の息吹)'이란 기관지도 발행한다. 표지 그림[9]부터가 일본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나 명절을 쇠는 모습 등 전통적인 가치관을 반영하며, 2017년 4월호의 표지를 보면 쇼와 덴노고준 황후로 보이는 사진이 노골적으로 걸려 있다.

3. 설립 및 기원


일본회의는 공식적으로는 1997년 5월 30일, 유력한 우파단체였던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하면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양 조직의 실질적인 사무를 이끌어나가던 핵심 인사들이 설립 이전부터 동일했던 점이나,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두각을 드러낸 1979년 경의 원호법제화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일본청년협의회'의 인사와 조직이 이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에서도 핵심을 차지한 것을 보면 사실상 이 두 단체는 1970년대 후반부터 그 행동과 목표를 같이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즉, 일본회의의 실질적인 시작은 1970년대부터이다.

3.1.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일본회의의 근간이 되는 조직 중 하나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1981년 10월, 당시 성공리에 목표를 달성한 원호(연호)법제화 운동을 추진한 조직들과 인원을 기반으로 탄생하였다. 헤이세이나 쇼와 등 일본 특유의 연호 관련 법령은 황실전범에 규정되었는데, 패전 이후 GHQ가 관련 규정을 황실전범에서 삭제하였으므로 더 이상 법률적 근거를 상실해버렸다. 물론 관용적으로 계속 쇼와 연호를 사용하긴 했지만 언제 사용을 중지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익계 인사들은 연호제를 지지할 법률을 다시 제정하여 법적 근거를 갖추고자 하였다. 이것이 '원호(연호) 법제화 운동'이다. 이 운동은 당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일본 우파계 조직이 한데 모여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일본 우파가 전개하는 '국민운동'의 큰 기반이 되었다.
쇼와 천황 재위 50년째인 1975년부터 운동을 시작했는데 1979년 일본 국회에서 원호법이 제정됨으로써 겨우 4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함께 운동에 참여했던 우파조직들이 이대로 해산하기에는 아깝다는 공감대를 이루어 재계, 정계, 학계, 종교계에 흩어진 우파인사 대표들이 한 데 모여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발족 당시 의장으로는 유엔 대사 등을 지닌 가세 도시카즈가 참여하였고, 사무총장으로는 메이지 신궁의 부대표 소에지마 히로유키가 그 역할을 맡는 등 당시 일본의 많은 고위층들이 이 국민회의라는 조직에 참여하고있었다. 특히 이 국민회의는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인 신편 일본사를 편찬하여, 오늘날 일본 교과서왜곡의 핵심이되는 복고조의 역사관을 주창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10]
이 조직에 가입한 인원 중 상당수가 전후 탄생한 우파단체의 소속원이었고, 일부는 현재까지도 극우 및 신우익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국민회의' 계통의 현대 일본의 역사적 우파 조직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3.2. 일본을 지키는 모임


다른 한 중심축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국민회의'보다 좀 더 앞선 74년에 결성되었다. 우파계 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그 시작에는 임제종 승려 아사히나 소겐(朝比奈宗源)이 있었다. 가마쿠라 엔카쿠지(円覚寺) 주지를 맡기도 했던 아사히나는 이전까지는 평화운동에 주로 참여하던 종교인이었지만, 70년대 초반 이세신궁을 참배하던 도중 갑자기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전까지 알고지내던 메이지 신궁과 도미오카하치만궁 등의 주요 종교단체들에게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창설하자고 호소하면서 이들을 모아 조직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쟁 당시 '천황 신앙'을 신자들에게 호소하며 전쟁 선동과 선전에 앞장섰으며, 전후에도 헌법을 부정하는 등의 저작을 내며 영향력을 확장하던 신흥종교단체 생장의 집(生長の家)의 창교주 타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가 가담하여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타니구치 마사하루는 조직의 설립 이전부터 아사히나 소겐과 회동을 가져왔으며 이후 '일본을 지키는 모임', 더 나아가 '일본회의' 전체의 조직의 인적 구성 측면에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일본의 유명 역사소설가 야마오카 소하치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본 신토의 중심이자 신사본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메이지 신궁의 (국가)신토계 주요인물들과, 신흥종교단체들 중에서도 규모가 큰 생장의 집이 만나자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일본 내 우파조직들 중에서도 종교계인사들이 모인 막강한 곳으로 성장했다. 이후 쇼와 천황 즉위 50주년 봉축운동이나 원호(연호)법제화 운동을 추진하며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3.2.1. 신사본청


이세 신궁을 본종으로 하는 신사본청은 일본 신사계의 중심이자 정점에 군림하는 조직이며, 일본 전국에 퍼진 8만여 개 이상의 신사 중 9할 이상을 그 산하에 두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일본에서 신관이 되기 위해서 취득해야 하는 신관 자격을 수여하는 곳 역시 신사본청이며, 이름만 들어도 안다는 메이지 신궁이나 이세 신궁 등 부유한 종교법인들이 다수 소속되어 그 자금력과 인원동원능력이 어마어마하다.
신사본청은 전후 GHQ가 '신도지령'을 발표해 국가신토를 완전히 철폐하면서 탄생한 조직이라 표면적으로는 국가신토와 관계를 부정하지만, 실제로는 '메이지의 정치체제와 이념을 부활시킬 발판이 되는 시책을 강하게 지원'[11]하면서 국가신토의 부활을 꿈꿔왔다. 신사본청이 발급하는 신관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 수료해야 할 교육과정에서 그 면면이 드러나는데, 신관 자격을 취득하는 학과를 운영하는 두 사립대학은 모두 국가신토를 뿌리로 하고 있으며, 그 중 하나인 고갓칸 대학은 지금도 '황국의 도의를 가르치고 황국 문학을 배워 운용하는 것'을 건학의 이념으로 받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황국'이란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 천황을 최고 정신적 통합자로 섬기는 나라'라는 의미다.
이러한 신사본청의 극우 성향, 전쟁 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본심은 후술할 생장의 집 정치연맹의 조직에 자극을 받아 신사본청이 창설한 '신토정치연맹'의 정책목표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황실과 일본의 문화전통을 소중히 하는 사회건설을 지향한다
  • 일본의 역사와 특성을 고려한 자랑스러운 신헌법의 제정을 지향한다.
  • 일본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야사쿠니의 영령에 대한 국가의례 확립을 지향한다.
  • 일본의 미래에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을 키우는 교육 실현을 지향한다.
  •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도의 국가,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국가확립을 지향한다.
심지어 이들은 이러한 이념에 찬동하며 이를 정책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하부조직인 '신토정치연맹 국회의원간담회'를 조직하였으며, 여기에 가담한 국회의원의 수는 중참 양원을 합해 304명에 이르며 당적을 초월한 결사를 이루고 있다. 일개 종교가 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에 투영하기 위해 국회의원의 4할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신사본청의 힘은 정계 장악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본회의 성립의 뿌리가 되는 운동인 천황 즉위 50주년 봉축 행사부터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회의 주도의 신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 천만 명 서명운동에 이르기까지, 신사본청은 소속되어있는 신사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금·인력·홍보를 지원해왔다. 일본에서 부유함으로는 손꼽히는 메이지 신궁이 봉축 행사 당시에 몇 억엔에 달하는 자금을 내주었으며, 지금도 일본회의의 집회 활동에 들어가는 비용 중 30~40%를 항시 지원한다. 집회에 동원되는 인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으며, 신사본청 산하의 신사들 다수가 아베 정권이 주장하는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서명을 받는 홍보 부스를 운영한다.
일본회의 성립 이전부터 성립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사본청과 신사본청이 대표하는 일본 신사계는 자금력과 인원, 그리고 '천황 중심 국가'라는 사상적 지향점을 제공해오는 뿌리이자 한 축이라 할 수 있다. 신사본청의 본종은 이세 신궁이나, 자금력이나 권력 측면에서는 메이지 신궁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이후 일본회의의 설립 과정에서 메이지 신궁의 신관인 도야마 가쓰시가 핵심 역할을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3.2.2. 생장의 집(세이쵸노이에)


생장의 집은 1930년 타니구치 마사하루가 창설한 종교로,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원래 또다른 신흥종교 오모토(大本)에서 편지 포교라는 일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이후 오모토를 탈퇴해서 개인잡지 <생장의 집>을 발간했는데, 여기서부터 종교단체 '생장의 집'이 시작했다. 타니구치 마사하루가 생명의 실상을 깨달았기있기 때문에, 마사하루가 쓴 책을 열심히 읽기만 하면 모든 병이 치유되고 인생고가 해결된다는 흔한 사이비종교적인 교리를 주장하는데, 역시 성공한 사이비 종교가 늘 그렇듯, 실제로 병이 나았다는 신자가 쇄도하면서 그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와 별 다를바가 없으나, 타니구치 마사하루는 신흥종교를 세우기 이전부터 '일본은 세계의 지도국이며, 일본인은 세계의 지배자로서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자민족 중심주의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생장의 집이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는 한창 태평양 전쟁이 임박한 시기였다.[12] 이 시기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예수 그리스도도 천황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둥 '천황 신앙'을 설파했다.출처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대일본제국은 신국이고 천황은 절대적인 신'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교리로 발전했다.
이러한 '천황 신앙' 중심의 교리와 전쟁 당시의 광기를 발판으로 생장의 집의 교세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나, 그 교세가 육군과 해군에 전투기를 헌납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 종전 후 GHQ는 타니구치 마사하루에게 집필활동을 금지했지만, GHQ 체제가 종결된 후 생장의 집은 다시 활동을 시작, 전후 헌법을 '점령헌법'으로 규정해 부정하고, 모든 주권을 천황에 봉헌해야 한다는 등의 극우적 발언을 담은 저작을 연이어 출간하여 우파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렇듯 전후 체제에서 두각을 드러낸 생장의 집은 1964년에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정치결사 '생장의 집 정치연합'(이하 생정련)을 조직하고, 당시 전공투가 맹위를 떨치던 안보투쟁 국면의 학생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생장의 집 학생회전국총연합(이하 생학련), 생장의 집 고교생연맹(생고련)을 결성하였다. 생정련과 생학련에 소속 인사들은 종교계 출신 인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대다수가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천황 신앙'과 극우적 논조가 가득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체화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우파 내에서 촉망받는 인사들로 성장하였다.
생정련은 적극적인 로비 및 지원을 통해 정계 인사들 사이에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국회의원 후보 17명 중 13을 당선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전 참의원이며 노동성 장관이었던 무라카미 마사쿠니다. 이렇게 생정련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의원들은 교조인 다니구치 마사하루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아 활동하며 생정련의 핵심 정책 목표 중 하나인 우생보호법 개정에 힘썼다.
생학련은 각 대학에서 전공투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몇몇 대학에서 우파계 학생조직이 학생회 선거에 승리하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우파계 학생회 전국 조직인 전국학생자치회연락협의회(전국학협)의 결성을 이루어냈다. 이렇게 성장한 우파 학생회 조직은 안보투쟁의 국면을 뒤집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일본 내 좌파 운동권 세력의 소멸이라는 전환을 이루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생장의 집 계열 우파 활동가들은 이후 '일본청년협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은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양쪽 모두에서 핵심 사무를 맡으며 우파 조직 실무진의 인적 구성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2009년 창교주 타니구치 마사하루의 손자 타니구치 마사노부(谷口雅宣)가 생장의 집 3대 교주로 취임한 후 색깔을 바꾸었다. 3대 교주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정련과 생학련 등 정치결사 일체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의 중지와 특정후보의 선거운동 지원 중지를 발표하며 정계와 스스로 단절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2010년대 들어서는 창교주의 극우적 사상을 비판하고 이런 교리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극우 인사들의 행적, 즉 일본회의의 활동과 아베 총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면서 교단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따라서 현재 생장의 집은 일본회의 및 일본 내 우익과는 연관이 없다. 그러나 1-2대 교주 시절 생장의 집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당시의 교리를 믿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그러한 행동들이 일본회의의 운영과 행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베 신조의 씽크탱크이자, 일본회의와의 연관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일본정책연구센터의 장이자 아베 신조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이토 데쓰오(伊藤哲夫), 2019년까지 총리보좌관이었던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가 생학련 출신이다. 또한 일본회의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1970년 경 원호법제화 운동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회의의 모든 '국민운동'을 설계하고 실무를 책임져온, 현 일본회의 사무총장 가바시마 유조 역시 생학련 출신이다.

3.3. 두 조직의 결합


이 두 조직이 결합한 데에는 당시 두 조직의 사무국이 하나였다는 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두 단체는 당시만 해도 공식적인 간판을 달고 활동하는 단체가 아닌 어디까지나 우익계열 유명인사들의 사모임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양 단체 모두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사무국장 역할을 형식적으로 맡았다. 당시 양 단체의 사무국장을 겸임하던 인물은 메이지신궁의 전 신관 도야마 가쓰시와, 생장의 집 학생조직 출신이었던 가바시마 유조였는데, 원호법제화 운동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이후 이들은 서로 협력하여 양 조직의 임원회에 조직의 통합을 설득하였고, 이를 각 단체의 대표가 받아들이면서 1997년 일본회의가 탄생했다.
일본회의의 설립대회는 1997년 5월 30일 도쿄 기오이초에있는 호텔 뉴오타니에서 열었다. 당시 일본회의의 기록에 따르면 설립대회에는 우익인사 약 1천여 명이 집결하였는데, 신사본청 총장에서부터 당시 메이지대학의 총장, 유력기업가와 예술계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상당히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설립대회가 열리기 바로 전날인 29일 뉴오타니에서는 일본회의 국회의원간담회의 설립총회가 열렸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개별 의원들이 우익계단체와 연동하여 활동하거나 소규모 단위의 파벌에서 함께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100여 명이 넘는 국회의원들이 이 총회에 참여했다는 기록을 통해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우익계열 의원들의 대규모결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회의 측 자료에 따르면 대리출석을 포함하여 설립총회에서는 115명이 참가하였고, 총회 이후 보름이 지나자 입회자 수가 2배가량 증가하여 중의원 133명, 참의원 71명이 이 모임에 이름을 올렸다.

4. 주장과 활동


우리 나라는 자연과 공생하면서 전통을 존중하고, 해외 문명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승화하면서 국가건설에 최선을 다해 힘써왔다.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된 최초의 근대국가 건설은 이러한 국풍의 눈부신 정수였다. 또한 유사 이래 전대미문의 패전을 경험하면서도 천황을 국민통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국가의 특색은 전혀 변함없이 이어져 왔으며, 황폐해진 국토와 정신적인 허탈감 속에서도 국민의 충실한 노력을 토대로 나라를 경제대국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런 놀랄 만한 경제적 번영의 그늘에서 일찍이 우리 선조가 키우고 계승한 전통문화는 경시되었고, 빛나는 역사는 잊히고 오욕되었으며, 국가를 지키고 사회공공에 힘쓰던 기개는 사라졌다. 그 결과 오직 개인의 보신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사회 곳곳에 만연하여 바야흐로 국가를 무너뜨리고 있다.

아울러 냉전구조가 붕괴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오류는 철저히 폭로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는 각국이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혼돈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본에는 이 격동의 국제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확고한 이념과 국가목표가 없다. 이대로 무위도식한다면 망국의 위기가 소리 없이 닥쳐오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으로서 혹독한 자각에 근거하여, 국가발전과 세계공영에 공헌할 수 있는 활기찬 국가건설과 인재육성을 추진하고자 본회를 설립한다.

다나카 야스히로, 메이지 신궁 신관, 초대 일본회의 이사장. 일본회의 설립대회 연설 중 일부.[13]

1. 아름다운 전통의 국민성을 내일의 일본에

- 국민통합의 중심인 황실을 존경하고, 동포애를 함양한다.

2.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헌법

- 우리 나라 본래 특색에 바탕을 둔 '신헌법' 제정을 추진한다.

3. 국가의 명예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정치를

- 독립국의 주권과 명예를 지키고,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는 정치실현에 이바지한다.

4. 일본의 감성을 키우는 교육의 창조를

- 교육에 일본의 전통적 감성을 되찾아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지닌 청소년을 육성한다.

5. 국가의 안전을 높이고 세계 평화에 기여를

6. 공생공영의 마음으로 이은 세계화의 우호를

일본회의 홈페이지 내 '설립목적' 페이지[14]

얼핏 보면 번듯한 목표이나, 상세설명을 보면 전통의 국민성을 수호하기 위해 부부별성제도나 새로운 가족관 등의 도입을 반대한다거나, 국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야스쿠니신사 참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거나,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자위대의 역할 확대를 추진해야 한다거나, 자학사관과 반일 사관으로 찌들은 교육을 혁파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우익 논조를 담아내고 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표방한 목표 외에도, 이들이 설립 이전 내지는 이후에 꾸준히 추진해온 이른바 '국민운동'에서 내건 ''''아름다운 일본의 재건과 자부심 있는 나라 만들기''''라는 슬로건과 하위 조직 및 연관 단체 등의 구성을 미루어보면, 일본회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활동을 이어나간다.
  • 천황
    • 남계(男系)에 의한 황위의 안정적인 상속을 목적으로 한 황실 전범 개정[15][16][17]
  • 헌법
    •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
    • 일본 헌법 제 9 조 통칭 '평화헌법' 폐기 및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에 명기함[18]으로서 확실하게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전환할 법적 근본 확보.
  • 사회
    • 반일 발언하는 외국인 추방[19]
    • 외국계 이민자(귀화인)의 사후 활동 감시
    • 외국인 지방 참정권 반대
    • [20]
    • 인권 기관 설치법 반대[21]
    • 자치 기본 조례 제정 반대
  • 교육
    • 학교 교과서에 있어서 '반국가적' 서술의 시정
    • 일본의 역사를 모욕적으로 단죄하려는 자학사관 교육[22]의 시정
    • 학교에서 국기 게양 · 국가 제창 추진[23]
    • 애국심, 공공예절 교육 등을 담은 '신교육 기본법'의 제정
    • 국기국가법의 제정
  • 역사
    • 대동아전쟁미국과 영국 등에 의한 경제 봉쇄에 저항한 자위적 전쟁임을 명시
    • 총리야스쿠니 신사 참배 실현
    •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국립추도시설' 건설 반대[24]
  • 일본식 성풍속 복고
    • 천황 중심의 전통적 남성 중심 사회 건설[25]
    • 소수자 혐오 성향[26]
    • 젠더 프리 교육의 시정[27]
종합하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사회 뿌리부터 전부 과거 제국주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미쳐 날뛰던 그 시절로 되돌리자'''는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다. 아베가 누누히 강조하였던 일본을 되찾겠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28]

5. 사건 사고


  • 아베 신조 내각의 지지율 하락을 불렀던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도 일본회의와 깊숙한 연관이 있다. 해당 사건 모리모토 학교 법인의 이사장은 일본회의 임원, 학교의 명예교장은 일본회의 회원 아베 신조의 부인 아베 아키에다.
  • 모리토모 학교 법인에서 운영하는 쓰카모토(塚本) 유치원은 2016년 12월 혐한, 혐중 통신문을 학부모들에게 보내 한국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해당 유치원은 원생들에게 중대 사태가 발생하면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등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에 관한 칙어를 낭독시킨다. 당연히 타 유치원과 다르게 원생들을 굉장히 군대식으로 혹독하게 교육시키며, 이로 인한 아동학대 문제도 뉴스로 폭로된 바 있다.

6. 위기?


현재 일본회의는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다. 먼저 첫번째는 상술했듯이 아키히토 상황의 생전 퇴위 및 왕위 계승으로 인해 딸 1명뿐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가 되어버리면서, 일본 국민들의 80% 이상이 나루히토의 다음 덴노는 나루히토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가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만큼 여성 덴노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증거. 게다가 일본회의와 자주 연대하던 전통적 보수층이 아이코 공주가 덴노가 된다고 해도 별다른 반발도 없을뿐더러, 구 황족과 결혼한 아이코 공주라는 조건을 건다면 덴노가 되는 것에 반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남성덴노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일본회의는 다소 난감해졌다. 실제로 이러한 입장은 집권여당인 자민당 내부에서도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남계 덴노제를 통해 과거 남성 우위에 있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일본회의의 계획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회의가 강력하게 지지를 표명하는 아베 신조 당시 총리는 자신과 측근들의 온갖 재난 대응 무능, 경제 정책 실패, 그리고 온갖 망언과 모리카게 학원 및 벚꽃 스캔들 등과 같은 각종 정치적 악재들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29] 더군다나 일부 혐한 성향의 인물들조차 2019년 무역제재 실패 및 2020년 코로나19 방역 실패로 오히려 한국을 옹호하며 아베를 비난했다.[30][31] 즉, 아베 정권의 붕괴가 위험한 수준에 도달한 셈.[32] 한 술 더떠서, 아베 총리가 2020년 8월을 마지막으로 사임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아베 총리를 통해 헌법 개정을 도모하던 일본회의의 입장에서는 매우 난처 할 수 밖에 없다.[33]
다만 일본회의는 막대한 자금으로 전국의 선거구에 지부를 설립해서 입김이 닿는 정치인들을 양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야를 가리지않고 이들의 영향력 안에 있는 정치인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워 아베 일당을 토사구팽하더라도, 이후 제2, 제3의 아베정권을 배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34] 실제로 아베 총리가 삽질을 반복하면서 가장 강력한 후임으로 주목받았던 이시바 시게루 의원의 경우, 일본회의와 달리 호헌입장이지만 이시바 의원 또한 일본회의의 산하조직인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 정도로 일본회의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35] 사실상 아베파벌과 경쟁중인 자민당내 다른 파벌들 뿐만 아니라, 야당인 민주당내의 의원들도 상당한 수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본회의의 영향권에 있다보니 일본회의 자체가 붕괴하지않는 이상 군국주의 부활 세력의 목표를 대변하는 정권은 계속 등장할 수 밖에 없다.

7. 관련 도서


  • 스가노 다모쓰(菅野完) 著 《일본 우익 설계자들》
  • 아오키 오사무(青木理) 著 《일본회의의 정체》
  • 동북아역사재단 편찬, 《'일본회의'와 아베 정권의 우경화》

8. 관련 기사



[1] "Tokyo's new governor defies more than glass ceiling". ''Deutsche Welle''. 8 July 2020. Retrieved 2 August 2016. In 2008, she made an unsuccessful run at the LDP's chairmanship. Following her defeat, she worked to build an internal party network and became involved in a revisionist group of lawmakers that serves as the mouthpiece of the ultraconservative Nippon Kaigi ("Japan Conference") movement.[2] "Nippon Kaigi: The ultra-nationalistic group trying to restore the might of the Japanese Empire". ''ABC News''. 8 July 2020. Retrieved 3 December 2015. Nippon Kaigi, or Japan Conference, is an ultra-right-wing lobby group reshaping Japanese politics.[3]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극우, 극단주의, 일본 정체성 정치 단체로 분류하고 있으며 # 심지어 일본어 위키백과에서조차도 정치적 극우로 분류하고 있다.#[4] 1933년 2월 4일 생이며, 표면적으로는 교린대학 명예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다.[5] 또한 우익 가맹단체까지 합하면 실질적인 회원수는 약 800만 명에 육박한다.[6] 1시간 54분부터[7] <긴급 추적! '일본 회의'>, 2019년 8월 1일 방영[8] <아베와 일본회의>, 2019년 8월 12일 방영[9] 다케나카 도시히로(竹中俊裕)라는 삽화가의 그림이다.[10] 본격적으로 교과서 역사왜곡이 표면화된 것은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부터지만, 일본 우파단체들은 8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교과서 역사왜곡 물밑 작업 중이었다. 이런 행각을 일본 내 주요좌파조직인 일본교원노조가 어떻게든 막았지만, 90년대 이후 교원노조의 힘이 약화되자 역사교과서왜곡이 가속화되었다.[11] 국민의 천황 :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천황제, 케네스 루오프 저.[12] 본래 오모토도 상당히 우익적이고 일본중심적인 종교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극렬한 우익사상과는 선을 그은 데다가 한편으로는 좌파적인 세계보편사상을 주장했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오모토가 불손한 종교단체라 하여 정부 차원에서 탄압할 정도였다. 이러한 오모토의 양면성은 마사하루 같은 우익인사들이 오모토에 입교하는 계기이자 탈퇴하는 이유가 되는 등 양날의 칼처럼 작용했다.[13] 아오키 오사무 저, 일본회의의 정체 30p.[14] 이는 설립 당시 선언한 '기본운동방침'이기도 하다.[15] 정치개입이 막혀있는 덴노의 계승에 관한 것인데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만 있어서 문제가 된다. 남계만이 상속할 수 있게 되면 차기 황위는 아키히토 전 천황의 둘째 아들인 후미히토 친왕의 아들인 히사히토가 잇게 된다. 후미히토는 평소 행실도 문제고 정치적으로 극우로 의심받을만한 모습을 자주 보였기 때문에 일본회의에서 황실을 컨트롤 하기 쉬워진다. 그래서 주간지 등을 동원해 나루히토+아이코 공주를 엄청나게 공격하고, 히사히토가 황위를 계승하려는 압박해왔다. 그런데 그걸 이전부터 걱정했던 아키히토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생전 덴노 양위라는 기습적인 결정으로 극우세력의 뒤통수를 갈기면서 스텝이 심하게 꼬여 버렸다.[16] 그리고 이때부터 수면 위로 드러난 마코 공주의 결혼 스캔들과 후미히토 본인의 추문이 줄줄이 이슈가 되면서 일본 대중에게 후미히토 친왕의 이미지가 크게 더러워졌다. 마사코는 1993년 나루히토와 결혼하고 수십 년간 와병생활을 하느라 나루히토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까임거리가 되었지만, 2019년 황후가 되자마자 그 까다로운 트럼프 대통령 입에서 칭찬이 나올 정도로 훌륭하게 대처했다. 그래서 극우세력의 조종을 받아온 궁내청과 언론, 그리고 후미히토 일가를 바라보는 반감은 더욱 커졌다. 또한 나루히토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도 뛰어난 성적과 그 어느 누구도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훌륭한 성품 등이 다시금 알려지자, 2019년 5월 이후 일본 내 진보이든 보수든 그 어떤 매체에서 조사해도 나루히토 다음 천황은 후미히토나 히사히토가 아니라 아이코 공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80%를 돌파할 정도이다. 아베를 위시한 우익 세력들이 최대한 막으려고 하지만,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이들의 반발을 꺾고 아이코 공주를 천황으로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카드가 있기에 이들이 원하는 대로 황실이 움직이진 않으리라 보는 의견이 많다. 현 황실 전범대로라면 히사히토가 도중에 급사하거나 히사히토에게 자녀가 없는 경우 혹은 여성 황족들만 태어난 경우 일본 황실이 작살나기에, 일본 국민들 입장에서 그나마 합리적인 방안이 바로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되는 것이므로 여성 천황 찬성여론이 80%가 넘어간다. 게다가 일본 역사에서 여천황은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문제될 것도 없다. 여계천황이 문제가 될 뿐... 참고로 2019년 5월 기준으로 구 황족 전면 복귀 찬성은 거의 극소수 여론이고 여성 미야케 제도 신설은 찬반이 절반 정도로 갈린다.[17] 신적강하된 황족 중에는 다케다 쓰네야스 같은 미친 놈들도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다케다 쓰네야스는 신적강하 이후에 출생한 삼남의 장남이기에 과거 사례 등을 감안하면 구 황족이라기 보다는 구 화족에 가까운 인물이다 보니 어찌저찌 구 황족 가문들 중에서 복수의 남성이 있는 다케다 가문이 복권이 가능하다 한들, 당주의 직계후손들이 엄연히 살아있기에 복권 대상도 아니며 계승권도 없기 때문에 다케다 쓰네야스 같은 망나니가 황족이 될 확률은 없다. 다케다 일가는 신적강하 이후의 행적들이 하나같이 가관이다. 일부 후손들이 유흥업소에 들락날락거리다가 적발되어 여론의 질타를 받은 적도 있을뿐더러, 2015년에는 후손 중 다케다 쓰네아키(竹田恒昭)가 대마초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 3대 당주의 막내 동생 다케다 쓰네카즈(竹田恒和)는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뇌물 혐의로 2019년에 IOC 위원 및 JOC 회장직을 사임한 데다가, 쓰네카즈의 장남 다케다 쓰네야스(竹田恒泰)는 극우활동뿐만이 아닌 올림픽을 두고 망언을 하고 연예인들과 각종 스캔들을 저지른 탓에 구 황족 전체를 바라보는 여론을 악화시킨 장본인이다. 특히 체네야스는 자기 집안 혈통팔이가 너무 심하다는 비판과 '넷우익의 아이돌'이라는 멸칭을 우익들 사이로부터 받는 이이다. 한 가지 웃긴 건 쓰네야스가 '메이지 덴노의 현손(4대손)'이라는 타이틀로 혈통팔이를 한다는 점이다. 정확히 따지면 여계 혈통 쪽으로 메이지의 현손이 되는데, 그는 남계 기준으로 천황가를 정립하라고 주장한다. 만약 정말로 남계로 쓰네야스와 천황가의 관계를 따지면, 무려 남북조 시절인 1600년대에 태어난 천황의 xx대손 정도에 불과하다.[18] 실제로 2019년 중의원 선거 당시 아베 총리가 평화헌법 관련해서 주기적으로 이야기하던 게 바로 이 내용으로, 이는 연립 여당인 공명당에서도 부정적으로 봤으며 선거 결과 집권 여당들은 과반수를 차지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일단 무산되었지만 아베를 포함한 우익 세력은 여전히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노력 중이다.[19] 참고로 이들 입장에서 반일 발언하는 외국인은 극우들 사이에서 특아라고 불리는 한국, 중국, 북한 출신자들을 의미한다. 결국 일본 거주 한국인, 북한인, 중국인들을 모조리 추방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인 셈.[20] 다만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할 가능성이 있다. 참고[21] 일본의 인권은 이러한 감시기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보장되기 때문에 필요없다는 논리.[22] 말이 자학사관이지 실제로는 근현대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온갖 반인권 범죄들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단어이다. 이 자학사관을 일본에 퍼트린 원흉이 누구인지를 두고 일본 우익들은 크게 2가지 견해로 나뉜다. 하나는 GHQ, 다른 하나는 특아라고 주장하는 한국, 중국 등의 스파이라는 것.[23] 이 때문에 과거 아베 정권에서 한 학교의 일교조 교원이 이를 하지 않았다고 처벌해야 한다며 난리를 피운 적이 있다.[24] 타쿠보 타타에 일본회의 회장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중국 · 한국 등 외국의 주장대로 "A 급 전범을 제외하면, 다음은 B, C, 마지막으로는 야스쿠니 신사 자체를 없애 버리라고 할 것은 눈에 선하다.", "외교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25] 일부는 여성참정권 박탈을 내세우기도 한다. # 다만 공식입장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이 유독 여성 미야케, 남계 여성황족이자 나루히토 덴노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의 덴노 등극을 의미하는 여성 천황, 여계 천황을 강하게 반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쪽 영향이 큰 편이다.[26]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재일 등 실로 다양하다.[27] 여기서 말하는 젠더 프리 교육이란 젠더 이분법에서 자유로운 교육과 성소수자 권리를 지지하는 서양식 교육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28] 만에 하나 이것을 실현한다면 물주 인 미국부터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 중국, 러시아, 기타 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 자칫 잘못하면 유엔헌장에 있는 사문화된 적국조항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29] 열렬한 아베 신조 지지자였던 오쓰카 아키오가 2019년 11월을 마지막으로 정치 관련 트윗을 일절 올리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암묵적으로나마 이제 더이상 아베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도의 표출인 셈이다.[30] 특히,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발표한 무역제재 3개월분의 결과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은 쪽은 일본이며, 그 피해는 한국에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셀프 경제 제재라는 단어가 유행할 정도이다.[31] 또한 아베의 형편없는 코로나 대응 탓에 열렬한 지지자였던 오가타 메구미마저 아베를 지지했음을 후회한다며 지지를 철회하였다.[32] 극우 혐한 언론사인 산케이 신문마저 내각의 붕괴를 우려하고 있으며, 자민당의 연립 정당인 공명당조차 총리를 비호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위험하다.[33] 또한 2020년 1월 17일. 지지통신이 시행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아베 총리가 주도하는 헌법 개정에 대해 31.2%가 긍정, 45.9%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34] 그리고 이러한 우려대로 아베 총리의 사임 후 아베 내각을 계승하겠다던 스가 요시히데 내각이 출범하였다.[35] 또한 이시바 시게루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 걸림돌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민중으로부터 인기가 하늘을 찌를지 몰라도 당 의원들로부터의 인기는 영 아니올시다 수준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원내1당의 당 대표가 되어야 하는데, 이 당 대표를 가리는 방법이 당 의원투표이다 보니 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우려대로 이시바 시게루는 2020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위로 낙선하게 되었고, 이시바는 총재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본인의 계파인 수월회의 회장 직에서 사퇴하였다. 사실상 나가리가 되어버린 셈. 또한 이시바 사퇴 이후 수월회는 집단관리 체제로 전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