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본청
1. 개요
신사본청(神社本庁)은 이세신궁과 기타 일본의 신사 8만여 곳을 관리하는 일본의 '''민간종교법인'''이다.
대외적으로는 신사본청의 기원이 1872년 신궁교 창교라고 주장하지만, 직접적인 기원은 일본제국 시기의 황전강구소(皇典講究所)ㆍ대일본신기회(大日本神祇会)ㆍ신궁봉재회(神宮奉斎会)가 세계 대전 이후 1946년에 통합한 것이다. 민간종교법인인데도 관공서처럼 '청'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전신인 위 3개 단체가 모두 반쯤 국영단체였던 전적에서 기인한 듯하다.[1]
2. 연혁
- 1872년 - 이세신궁의 궁사 우라다 나가타미(浦田長民 1840-1893)가 신토 교파 신궁교(神宮教)를 제창.
- 1890년 -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신토는 종교가 아니라고 결정, 국가에 신고할 의무를 지지 않음.
- 1898년 - 전국신직회(이후 '대일본신기회'로 개칭) 설립, 일본 전역 신사들의 결집 강화.
- 1899년 - 신궁교가 신궁봉재회(神宮奉斎会)로 개칭, 문부과학성과 깊은 관계를 맺음.
- 1940년 - 전시 국가신토적 체제 하에 '신기원'이 설립.
- 1946년 - 전후 GHQ가 신도지령으로 신기원을 해체함. 대일본신기회, 신궁봉재회 등이 연합하여 현 신사본청 설립.
3. 상세
본래 신토는 자연발생하여 이교와 융합하거나[2] 각 지방의 토속 문화에 적응하는 다신교적 측면을 보이는 종교지만, 일본 제국 시기 국가신토 정책에 따라 일본인의 정신 체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통치하기 위하여 전국의 신사를 일원화하는 관리체계를 설립했다. 전국의 신사들을 '사격제도'로 등급을 매기고, 국가 차원에서 신토 관련 제례나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을 만들었다. 1871년 메이지 정부는 신기성(神祇省)을 만들어 신토를 관리토록 하였다. 이후 신기성은 교부성(教部省)이나 신기원(神祇院) 등으로 명칭이 바뀌고 조직의 격 또한 달라졌으나, 국가가 직접 신토를 관리한다는 점은 매한가지였다.
한편 신기원이 위에서 관리하는 조직이라면 밑에서 관리하는 조직도 필요했으므로, 메이지 정부는 '황전강구소'라는 국립신토학교를 만들고, 신궁봉재회 등 친정부적이고 우익적인 신토계 인사들이 모인 조직을 후원하였다.
세계대전 패전 후 1946년 미군정이 국가신토 체계를 유지하던 신기원 조직과 사격제도를 폐지했다. 기존에 일본 정부와 관련되어 운영되던 황전강구소나 대일본신기회, 신궁봉재회 등은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어 저마다 생존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위 3개 단체가 서로 조직을 합친 뒤 '''민간종교법인'''으로 등록한 단체가 바로 '신사본청'이다. 다만 현재 신사본청 내에서는 표면상 과거의 흑역사인 국가신토의 관련성을 최대한 부정하는 방침이다. 그 연혁도 이세 신궁 내 신관들의 모임을 기원으로 두거나 대일본제국 헌법의 종교의 자유 조항을 강조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신사본청의 총본사는 이세신궁이지만 실질적으로 운영을 담당하는 본부는 도쿄도 시부야구 요요기에 있다.
사격제도가 폐지된 뒤 신사본청에 소속된 모든 신사는 이론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아무래도 역사나 규모 등에서 일반 신사처럼 처리할 수 없는 곳들이 있었다. 1948년 신사본청은 별표신사(別表神社)라는 이름으로 묶어 관리하기로 하였다. 별표신사는 그저 신사본청에서 행정적으로 따로 관리하려는 구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사본청에서 평범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 등급이 되어버렸다. 이세신궁 역시 본래는 '평범하게 대할 수 없는 신토시설'이지만, 너무나 존엄하단 이유로 어떤 구분도 하지 않았다.
신사본청이 일본의 모든 신사를 다 관할하는 것은 아니다. 가마쿠라궁(鎌倉宮), 닛코 토쇼궁(日光東照宮) 등 유명한 신토시설이면서도 신사본청에 가입하지 않은 곳도 있다. 가입 여부와 신사의 성향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한중일의 뜨거운 감자로 유명한 야스쿠니 신사도 신사본청 소속이 아니지만, 일본회의나 자민당과 정치적으로 관계가 깊다. 일본 신사의 총본부 같은 위치지만, 과거에 신사합사정책으로 지방신사들로부터 거하게 원한을 산 적이 있어서 여기 가입된 신사라도 딱히 신사본청에 충실하다고는 볼 수 없다.
신사들이 신사본청에 등록해야 한다고 강제하는 법규는 없지만 상당수 신사들이 신사본청에 소속되었는데, 비소속 신사는 신토가 아니라 사이비(컬트: カルト)로 취급받아 지자체의 공식행사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3] 신사본청이 관공 소속이 아닌 민간종교법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계부락[4] 으로 지정될 정도인 시골 깡촌에는 본청에 등록 안 된 신사들도 소수 있긴 한데, 이런 신사들은 '니들이 우릴 이단 취급하든 말든 우리 고향에서는 조상 대대로 모시던 신을 모신다.'는 식으로 무시한다.
제정 시대에는 일본 정부가 종교정책에 어긋나는 불순한 신사나 신위를 '신사합사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강압적으로 폐지하기도 했다. 현대에도 비록 신사본청이 공식적으로는 '민간종교법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사본청과 일본 정부 간 연결 및 신토 고위급 인사의 교권 파시즘을 꿈꾸는듯한 우경화가 계속 논란이 된다. 일본 최대의 극우단체 일본회의의 회원 중에도 신사본청 소속이 있을 정도.
과거 우생보호법 폐지 시 존속을 주장하여 막장성을 인증했다.
한때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포스터로 일본의 자국 찬양을 홍보했다가 물의가 많았다.
신사본청이 예하 신사들에게 공포정치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내부사정이 꽤나 복잡하다고 한다. 메이지 신궁이 2004년에 신사본청에서 탈퇴했다가 2010년에 복귀하기도 했다. 2020년 6월에도 카가와현 코토히라 궁(金刀比羅宮)[5] 이 신사본청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단 소식이 보도되어 신토계가 크게 놀라기도 했다. 도쿄신문 기사 신사본청에서도 코토히라 궁의 탈퇴를 두고 메이지 신궁이 탈퇴하기로 결정했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판.
코토히라 궁이 밝힌 공식적인 탈퇴이유는 다음과 같다. 2019년 나루히토 천황의 대상제(大嘗祭)[6] 때 신사본청이 여러 신사에 돈을 나누어주는데, 코토히라 궁에는 제때 전달해주지 않아서 더 이상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복잡한, 신사본청과 신토계 내부의 정치적 알력싸움이 원인이라고 보는 일본인들이 대다수이다.
[1] 황전강구소는 국립신토학교쯤 되는 곳이었고, 대일본신기회는 일본 내 관폐대사 등 '격을 받은' 신사에서 일하는 신토가들이 모인 단체였으며, 신궁봉재회는 신궁교가 개칭한 단체로 이세신궁 신앙을 퍼트리는 곳이었다.[2] 불교의 영향을 받은 신불습합이나 전국시대에 기독교의 영향을 받는 등의 예를 들 수 있다.[3] 그런데 불합리하게도 야스쿠니 같은 곳들은 예외다.[4] 고령인구가 너무 많고 인구가 적은 마을[5] 패전 이전의 사격은 고작 국폐중사에 불과했지만, 일본 전역에 6백여 말사가 있고 역사도 깊으며 영향력도 큰 신사이다.[6] 천황이 즉위하고 처음으로 아마테라스에게 바치는 추수감사제. 신토적으로는 이 의식을 해야만 비로소 새 천황으로서 종교적인 인정을 받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