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당파

 

1. 개요
2. 각국의 왕당파


1. 개요


王黨派. 를 지지하는 사람들 혹은 그 사람들이 뭉쳐 만들어진 정치적 연합체를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근왕파(勤王派)라고도 한다. 공화정을 지지하는 공화파(共和派)와 대립한다.
왕정이 시행되고 있는 나라라면 공화파에 반대하여 현재의 왕정을 강력히 지지하는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며, 왕정이 있다가 없어진 나라에서는 왕정복고를 추구한다. 후자의 경우 복벽파(復辟派)라고도 한다.

2. 각국의 왕당파


오늘날까지도 왕정인 나라의 대표격인 영국의 경우 국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공화파의 세력은 크지 않다. 그런데 북아일랜드의 경우 역사적 문제로 인해 영국 연합왕국을 지지하는 세력과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지지하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세력이 극한의 정치 대립을 보이고 있는데, 이 중에서 영국 연합왕국을 지지하는 세력을 연합주의자(unionist) 혹은 왕당파(royalist)라고 한다. 정당으로는 민주통일당이 대표적인 북아일랜드 왕당파(연합주의자) 정당.
영국인들이 많이 진출했던 식민지에서는 단순히 왕실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영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보내는 정치세력을 왕당파로 싸잡아 부르는 경향이 있다. 위의 북아일랜드 연합주의자를 왕당파로 부르는 예도 하나이고, 예를 들면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도 독립에 반대했던 몇몇 미국인들은 왕당파(royalist)로 불렸는데, 이들은 미국 독립 이후 탄압을 받아 대다수가 본국이나 캐나다로 망명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에 반대해 스페인 제국의 통치를 지지했던 사람들을 왕당파(Ejército realista)라 한다.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혁명으로 왕실이 무너진 이후에도 100년 가까이 왕당파가 강고하게 존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혁명 이후에도 예전 프랑스 왕국의 왕조였던 부르봉 왕조를 강하게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보나파르트 왕조오를레앙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는 이들을 지지하는 왕당파들도 있었다. 19세기에만 해도 이들은 상당히 세력이 강고해서, 프랑스 공화파가 보통선거의 실시를 망설였던 이유도 '''보통선거를 하면 선거에 따라 왕정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고''' 실제로도 성인남성들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한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합법적으로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되고, 친위쿠데타로 3년안에 헌법을 뒤엎고 군주정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보불전쟁에서 패전한 뒤에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아돌프 티에르에 대한 실망감으로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던 보수층들이 대거 왕당파를 지지하며 의회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이 때문에 몇년만에 다시 군주정으로 복귀할듯 싶었지만 왕당파가 부르봉 지지파와 오를레앙 지지파 등으로 분열한데다가 앙리 5세가 사실상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면서 왕정복고 여론은 사그러지게 되었고, 이전 공화국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를 하게 되면서[1] 20세기 중반 68운동 이후에 정치세력으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역시 이탈리아 통일 이후부터 왕당파와 공화파가 극한 대립을 보였던 나라 중 하나. 결국 2차 세계 대전 이후 파시즘을 방치한 책임을 물어 1946년국민투표로 왕정을 폐지하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됨에 따라 왕당파는 소멸해갔다.
왕정이 유지되고 있는 나라 중 비교적 공화파 세력이 큰 스페인에서는 공화주의가 진보좌파 이념과 연계된다면 왕당파들은 보수우파 이념과 연결된다. 이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독재 당시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자신이 죽을 때 왕정복고를 하여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도록 했기 때문. 오늘날 스페인에서 프랑코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대개 보르본 왕가에도 우호적인 왕당파들이다.[2]
부탄의 경우 좀 특이한데, 국왕이 입헌군주제를 위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걸, 왕당파가 전제정을 지지하는 상황이라 거부한적이 있다.
대한제국한일합병 이후 왕정이 폐지되고 엄청난 격변을 거쳐 탄생한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왕당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비록 내각이 1년도 못가 무너지는 혼란이 이어졌지만 매일이 전쟁과 숙청이 이어졌던 제1공화국이나 4년밖에 못간 제2공화국에 비하면 안정적이었다.[2] 프랑코가 시행한 왕정복고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어떤 사람들은 프랑코도 민주화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민주화가 이뤄지더라도 자신의 세력을 온존시키기 위해 왕정복고를 택했다고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자신의 뒤를 이은 독재자가 되길 바랐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