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돈

 


1. 여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권오돈
2. 안동시 출신 독립운동가, 권오돈


1. 여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권오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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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권오돈(權五惇)
이명
권오순(權五淳)

포명(抱溟)
본관
안동 권씨
생몰
1901년 1월 26일[1] ~ 1984년 2월 10일
출생지
경기도 여주군 점량면 덕곡동
(현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덕평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권오돈은 1901년 1월 26일 경기도 여주군 점량면 덕곡동(현 여주시 점동면 덕평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동학교를 졸업한 뒤 상하이의 호강대학(滬江大學)에 유학하였다. 1920년대 초 향리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다 1924년 11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엄항섭의 소개로 김구, 이동녕 등 임시정부 지도자들과 면담하고, 김구의 알선으로 무창(武昌)[2]의 서호서원(西湖書院) 관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26년 서호서원이 문을 닫자, 그는 1927년 중앙군사정치학교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그 뒤 상하이로 돌아와 항일비밀결사인 다물단(多勿團)에 입단, 다물단의 지령을 받고 군자금과 단원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몰래 들어와 활동하였다. 경기도 경성부 낙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 거주하던 그는 1929년 2월 18일에 충북 충주군 읍내리 금성여관 주인인 정운자(鄭雲慈)의 집에서 안동규(安東奎)·김학원(金學元)·정진복(鄭鎭福)·서상경·서정기 등과 함께 잡지 문예운동을 간행한다는 목적으로 문예운동사(文藝運動史)를 조직했다.
문예운동사는 표면적으로는 문예 부흥을 위한 잡지를 발간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아나키즘을 신봉하며 일제의 군국주의를 부정했다. 또한 인류는 모두 절대 자유 또는 평등하다는 인류평등원칙에 입각하여 현대의 국가 조직이 이 사실을 위배한다면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일본의 식민지 사상에 반기를 들었다. 이 조직은 충주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던 김현국(金顯國)을 포섭하는 등, 은밀히 세력을 확장하는 듯 했으나 곧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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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5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이후 경성지방법원으로 압송된 그는 법정에서 "나는 무정부주의자로서 내가 신봉하는 그 주의는 인류는 모두 절대로 자유 평등할 것을 요하며 따라서 현재의 국가 조직은 그 주의에 배반하는 것"이라고 담대히 외쳤다. 그는 193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그해 5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이때 그는 독립유공자 유림과 같은 호실을 썼다고 한다.
1935년 3월 27일 출옥한# 그는 일제 형사들의 감시에 시달리다 8.15 광복연세대학교 동양학과 등에서 교육활동에 종사했으며, 이후에도 유도회(儒道會) 고문 등으로 활동하다 1984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권오돈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안동시 출신 독립운동가, 권오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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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권오돈(權五敦)
족보명
권오상(權五尙)

전현(田賢)
본관
안동 권씨[4]
생몰
1900년 10월 12일 ~ 1928년 6월 3일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 가곡리 가일마을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5]
사망지
경상북도 안동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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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돈은 1900년 10월 12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에서 아버지 권동직(權東稷)과 어머니 고성 이씨 이종규(李鍾奎)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4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화요회(火曜會)계 청년운동단체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에 가입하며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1926년 4월 10일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한 그는 권오설의 지도 아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와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 후 학생운동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붕어하고 권오설과 연결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6.10 만세 운동을 추진했을 때, 그는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포섭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탄로나면서 권오설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 학생조직의 계획은 발각되지 않아 권오돈 등은 계획대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원래 태극기와 격문 등은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측에서 준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전 발각되어 모두 압수되었다. 이에 권오돈 등은 급히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기 등을 제작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 국장일에 권오돈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같은 해 8월 4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검거된 그는 1928년 2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8년 5월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끝내 고문의 여독으로 같은 해 6월 3일 숨졌다.
1984년 모교인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리는 독립유공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14년 8월 29일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졸업증서가 주어졌다.#

[1]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1월 2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 우한시 우창(武昌)구.[3] 1926년 8월 3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4] 복야공파 박(搏)계 35세 '''오(五)''' 오(悟) 숙(肅) 오(梧) 항렬.[5] 인근의 갈전리·구호리와 함께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권각·권오설·권준희·권혁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