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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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이다.
2. 상세
동아일보 창업주인 인촌 김성수의 4남으로 1919년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맏형 일민 김상만은 동아일보 사주를 지냈다.[1]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에 고영완, 서영원,[2] 윤주연,[3] 백재호[4] 등과 함께 조선학생동지회를 결성하여 봉기를 기획하였다. 그러나 1941년 7월 동지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의 조직이 일경에게 발각됨으로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일본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그 후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은 다음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때 그의 아내 고완남[5] 도 함께 수감되었다.
8.15 광복 이후 동아일보에서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을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후 민주당에 복당하였다가 다시 민주당 구파 출신 인물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전라북도 고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때 조병옥의 아들 조윤형, 신익희의 아들 신하균도 당선되었기에 조윤형, 신하균과 3총사로 불렸다. 그러나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민주공화당 신용남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진의종에 밀려 공천탈락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공천을 받았으나 민주공화당 이병옥, 무소속 진의종 후보에 밀려 3등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진의종에게 공천을 양보하였으나 진의종은 낙선하였다. 2년 뒤인 1980년 조직정비에 의해 고창군-부안군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1991년 11월 2일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보다 자세한 가계도는 동아일보 가문 문서를 참고할 것.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