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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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고영완(高永完)

무계(霧溪)
본관
장흥 고씨[1]
출생
1914년 2월 11일
전라남도 장흥군 부동면 평화리
(현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2]
사망
1991년 8월 6일 (향년 77세)
종교
불교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가족관계
5.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고영완은 1914년 2월 11일 전라남도 장흥군 부동면 평화리(현 장흥읍 평화리)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인[3][4] 아버지 고동석(高東錫)과 어머니 백종규(白鍾圭)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와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서 도쿄 센슈대학 경제과를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시절인 1939년 12월에 김상흠, 서영원[5], 윤주연[6], 백재호[7] 등과 함께 조선학생동지회를 결성하여 봉기를 기획하였다. 귀국 후 동지들과 함께 1940년 2월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남한산성, 냉천동 약수터, 벽제관 등지에서 모임을 갖고 세부계획을 세우는 한편 해외 유학생들과도 긴밀히 연락하며 조직확대와 보안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41년 7월 동지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의 조직이 일경에게 발각됨으로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일본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그 후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은 다음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해방 전까지는 좌익 성향을 띄었으나, 8.15 광복우익 정치인이 되어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에 가담하였다. 족청 전남 장흥군 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잠시 장흥 군수를 지냈다. 그러다가 이승만 및 이범석과 결별하고, 인촌 김성수, 송진우 등이 창당한 한국민주당에 몸담았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장흥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같은 우익 계열인 손석두가 고영완을 지지하며 자진 사퇴하였으나, 좌익계열의 지지를 받은 중도성향의 무소속 김중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 인촌 김성수와 해공 신익희, 지청천 등이 손을 잡고 만든 민주국민당에 참여하였다.
1948년 11월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 감찰위원회(오늘날의 감사원) 정보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8] 그러나 초대 감찰위원장 정인보가 장관 파면의결과 관련하여 국무위원들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1949년 7월 자진사퇴하자, 그와 함께 사퇴하였다. 이때부터 이승만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무소속 김중기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그 후 소장파 젊은 의원으로 이승만 정부의 최대실정인 국민방위군 사건을 국회에서 파헤쳤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관련하여 연일 중대한 사실을 폭로하고 있던 고영완을 잡아넣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 관하여 운위하는 것은 '치안교란죄'에 해당한다는 등의 협박을 가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손석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통합야당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이철승과 조직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자유당 손석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1년 초 민주당 산업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인하여 의정활동은 거의 해보지 못하고 국회를 나와야 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병로, 허정 등이 만든 국민의당에 입당하였다.
1967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장흥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길전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에 전라남도 장흥군-영암군-강진군-완도군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황호동에 밀려 탈락하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전라남도 선거대책본부 본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영삼을 지지하였다.
1991년 8월, 77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3. 기타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그가 태어난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생가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련 포스팅 이 집은 그의 할아버지인 고재극이 만든 집인데,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4. 가족관계


여동생 고현남이 인촌 김성수의 맏아들 김상만과 결혼하였고, 그 뒤로 여동생 고완남이 또 다시 김성수의 넷째 아들 김상흠과 결혼하였다. 말 그대로 인촌 김성수의 울산 김씨 가문과는 겹사돈간이 되었던 셈.
고영완이 조선학생동지회를 결성했을 당시, 여동생 고완남도 연락책으로 참가하였기 때문에, 고영완이 체포되었을 때 여동생 고완남도 함께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오빠 및 남편과 함께 6개월간 복역하였다.
장남 고병선은 중앙일보 기자를 했으며, 현재 고영완의 고택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둘째 딸 고은숙(高殷淑)은 판사 이용훈과 결혼하였는데, 고영완의 둘째 사위 이용훈은 나중에 대법원장이 되었다.

5. 관련 문서




[1] 충렬공파-유계공파 25세 영(永) 항렬.[2] 평화리 89번지에 무계 고택(장흥 고영완가옥)이 있다.[3] 이전 리비전에서는 고경명의 직계 15대 종손이라고 했는데 사실과 다르다. 고씨장흥백파대동보 1·2·6권을 참조하면, 고경명 차남 고인후(高因厚)-고인후 3남 유계(柳溪) 고부즙(高傅楫)-고부즙의 적장손 고세형(高世亨)-고세형 4남 고응수(高應壽)의 후손들이 전남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에 세거한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이들을 '평화 고씨'라고도 한다.# 고영완은 고응수의 3남 고만거(高萬擧) 종가의 종손이다. 다만, 고인후 종가의 종손인 고영준(高永俊)이 양자로 입적되기 전에는 고영완의 고조부 고언주(高彦柱)의 동생 고방주(高邦柱)의 현손으로 10촌 지간이었다.[4] 고경명은 슬하에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족보상 장남 고종후(高從厚)와 6남 고용후(高用厚)의 종가는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 차남 고인후의 종가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 3남 고준후(高遵厚)는 요절하여 후손이 없으며, 4남 고순후(高循厚)의 종가는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와천리 와촌마을에, 5남 고유후(高由厚)의 종가는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서재필의 손자[6] 고산 윤선도의 자손[7] 고영완의 외종사촌, 광복회 사무국장[8] 당시 감찰위원회는 감찰관 7인, 정보관 14인, 서기관 2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