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경
1. 개요
신라 후기의 왕족이자 추존 국왕. 본인은 생전에 왕에 오른 적이 없었고, 의흥대왕(懿興大王)이란 시호는 손자인 신라 제56대 경순왕에 의해서 왕으로 추존된 것이다.
2. 기록
그의 시호는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그의 이름은 삼국사기 효녀 지은 열전에서 찾을 수 있다.
第五十六 敬順王 [金氏 (名)傅 父孝宗伊干 追封神興大王 '''祖官(柔)[* 원문에는 한 글자가 결락되어 있는데,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 기록된 [[진성여왕]] 대(888년)의 집사시랑 관유(寬柔)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해당 비문에도 관유가 왕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삼국사절요]]에 따르면 [[김효종(신라)|김효종]]과 김계아의 혼인은 [[진성여왕]] 말기인 897년 이뤄졌으므로 이때까지 시랑직을 유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角干 (追)封懿興大王''' 母桂娥 (憲)康王之(女)]
제56 경순왕 [김씨이며 이름은 부이다. 아버지는 효종 이간으로 신흥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조부는 관유 각간이니 의흥대왕으로 추봉되었고''' 어머니는 계아로 헌강왕의 딸이다.]
『삼국유사』 왕력
삼국유사의 각간이나 삼국사기의 서발한은 신라 17관등 중 1관등 이벌찬의 다른 표기다. 합쳐보면 이름은 '관유' 또는 '인경', 시호는 '의흥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의 이름이 서로 다른데 관유는 아명이고 인(仁)경은 유교식 미칭인듯.孝宗 時'''第三宰相舒發翰仁慶'''子 少名化達
효종은 당시 '''제3재상 서발한 인경'''의 아들로 어려서의 이름은 화달이었다.
『삼국사기』 효녀 지은 열전
조선시대에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나 경주 김씨 족보에는 김실홍(金實虹)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역사적 근거는 없다.
3. 생애
신라의 46대 국왕인 문성왕의 손자.[1][2] 정확한 생몰년대는 알 수 없지만 진성여왕 초기인 888년 집사시랑을 지냈고 897년에는 각간으로 제3재상이 된다. 후삼국시대의 난세를 살았다. 아들로는 후에 고려를 개창하는 왕건의 장인이 되는 김억렴과, 효녀 지은 설화로 유명한 인물이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버지 화랑 김효종이 있었다.
본인이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는 기록이 부족해 정확히 알 수 없다. 비록 문성왕의 손자이긴 했지만 정작 문성왕이 사망하자 즉위한 것은 문성왕의 숙부이자 헌안왕이었기 때문에 방계 왕족으로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손자가 견훤 때문에 팔자에도 없이 즉위해 56대 경순왕이 되었고,[3] 그의 손녀는 경순왕의 천거로 고려태조 왕건과 결혼해 신성왕후가 되었고, 이후 고려 왕위는 왕위쟁탈전 끝에 신성왕후의 손자 현종(고려)부터 대대로 이어지게 된다. 자손들이 신라와 고려의 왕을 다 해 봤다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
[1]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불명. 삼국사기에 나온 문성왕의 폐태자일 수도 있지만 기록의 부재로 인해 알 길은 없다.[2] 신라경순왕전비에 따르면 문성왕-김안-김민공-김인경으로 이어지지만 '''불가능하다.''' 문성왕의 첫 아이는 842년생이고, 김효종은 늦어도 882년에는 이미 태어난 상태였다. 김안이 842년생이고 15살 성인이 되자마자 김민공을 낳았다면 김민공은 857년생이고 똑같이 15살 성인이 되자마자 김인경을 낳았다면 김인경은 872년생인데 김인경이 성인이 되자마자 김효종을 낳았다면 김효종은 887년생이어야 한다. 그러면 진성여왕 말년인 897년에 10살이 되어 혼인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애초에 신라경순왕전비는 조선 후기인 18세기에나 가서야 문중에 의해 지어진 것이므로 사료적 가치는 다른 족보와 다를 바가 없다.[3] 이미 신덕왕부터 박씨 왕조가 3대에 걸쳐 이어졌기 때문에, 927년 견훤의 사변이 아니었더라면 경명왕과 경애왕의 동생 박효렴이 신라의 왕위를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