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왕태후

 

'''고려의 역대 왕후'''
세조
위숙왕후

'''태조비'''
신혜왕후
장화왕후
신명순성왕태후
신정왕태후
'''신성왕태후'''
정덕왕후

혜종
의화왕후
'''안종의 어머니
神成王太后
신성왕태후
'''
'''시호'''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작위'''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1]
'''본관'''
경주 김씨(慶州 金氏)
경주 이씨(慶州 李氏)(?)
'''왕자'''
안종(安宗)
'''능호'''
정릉(貞陵)
'''생몰연도'''
? ~ ?
1. 개요
2. 상세
3. 출자에 대한 논란


1. 개요


고려 태조 왕건의 5비. 경주 김씨 집안 사람이다.

2. 상세


고려 전 왕조 신라진골이자 왕족 출신이다. 신라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김억렴의 딸이며 경순왕에게는 사촌이 된다. 왕건이 전국 여러 지방의 유력 호족과 정략결혼을 해서 부인이 29명에 달하지만, 그 부인들 중에서도 가장 집안의 격이 높은 호족(?) 집안인 셈이다. 후삼국시대에 신라 중앙정부가 아무리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후삼국시대 후반부까지도 신라 왕실을 지지하고 따르는 호족들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다른 일개 호족 집안들과 일대일로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결혼한 시기는 935년 사촌인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하고 나라를 바친 직후다.
신라는 성씨가 다른 사람이 국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사례가 기록상 몇 번 있었다. 고대에도 석탈해, 김미추 등 몇 번 있었고, 당장 '''왕건과 동시대 사람'''인 신덕왕도 있었다. 이제 왕건이 경주김씨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전왕조 신라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도 왕씨의 나라를 이제 순순히 따르게 하는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왕건이 이미 50대 후반~60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왕욱이 태어났다.[2] 그래도 집안의 신분이 어쨌든 그녀는 왕건과 상당히 늦게 결혼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 왕욱은 임금의 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차기 왕위는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혜종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왕건은 부인과 아들이 너무 많았고, 고려 초기는 왕위쟁탈전으로 얼룩졌다. 그러다 결국엔 신성왕태후의 손자 대량원군이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니 그가 고려 제8대 현종이고, '''이후 마지막 34대 공양왕까지 모든 고려의 임금들은 모두 현종의 후손이었다.''' 어찌 보면 왕건의 29명이나 되는 부인 중 최후의 승자(?)라고 볼 수도 있는 셈.[3]
사후인 1009년 3월, 손자 현종에 의해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로 추존되었으며, 능은 정릉(貞陵)으로 추봉되었다.

3. 출자에 대한 논란


대량원부인은 고려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조선시대의 역사서 동국통감에만 나타나는 왕건의 부인 중 한 명이다.

김관의(金寬毅)ㆍ임경숙(任景肅)ㆍ민지(閔漬) 세 사람의 글에는 모두,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李氏)가 태위(太尉) 정언(正言)의 딸로서 안왕(安王, 곧 현종의 아버지 안종(安宗) 왕욱(王旭))을 낳았다.’ 고 하였으니, 어디에 근거한 주장인지 알 수 없다.

≪동국통감≫12 <신라기> 경순왕

고려사에는 후대량원부인 이씨後大良院夫人 李氏(협주 이씨俠州 李 이원李元의 딸)가 나오는데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 자매의 자매가 혜종의 아내가 되자 후광주원부인이라 불린 걸 고려할 때 후대량원부인 이전에 대량원부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신성왕태후가 김씨가 아니라 이씨이며 이정언의 딸이라는 기록도 있다.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대위(慶州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합주(陜州)를 다스리고 있을 때 태조가 이 고을에 행차하였다가 왕비로 삼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김부대왕 인용 왕대종록(王代宗錄)

신성왕후가 이정언의 딸이라는데 안종을 낳았으니 대량원부인과 기록이 일치한다. 하지만 신성왕후는 일반적으로 김씨이며 김억렴의 딸이라고 기록된 것과는 모순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도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할 것이라고 언급하며 신성왕후가 김씨가 맞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정언이 합주를 '''다스릴 때''' 납채했다고 나와서, 둘 간의 혈연관계가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국통감의 찬자들이 혈연관계가 없는 두 인물을 부녀관계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신성왕태후의 아버지인 김억렴의 지위는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 신성왕태후=대량원부인으로 불릴 근거가 충분하다.
한편 안종 왕욱이 신성왕태후 김씨의 아들이라 나온 것에 대해서는 정사인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을 우선적으로 신뢰하여 신성왕후가 김씨가 맞으며 안종 욱 역시 그녀 소생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한편 오기로 인해 착각했을 것이라는 추측과 후대의 조작으로 보는 설도 제기되기도 한다.
대량원부인 이씨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신성왕후 김씨와 대량원부인 이씨를 동일인으로 보았다.
  • 이상각의 <고려사 - 열정과 자존의 오백년>에서는 대량원부인 이씨의 기록이 고려사에 누락되었다면서 왕건의 부인은 고려사의 29명에 대량원부인 이씨를 더해서 총 30명이라고 보았다.
  • 김창현의 <광종의 제국>에서는 대량원부인 이씨가 현종의 아버지 왕욱의 친모인데, 신라계가 현종을 옹립하고 나서 현종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종의 부친 왕욱을 신라 출신인 신성왕후 김씨의 소생으로 조작하고 대량원부인 이씨를 고려사의 기록에서 삭제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1] "출자에 대한 논란" 문단 참고.[2] 여성이 나이가 많으면 임신이 어렵지만 남성의 경우 건강만 괜찮다면 노년까지도 아기를 볼 수 있다. 조조도 아들 조간을 환갑 넘겨서 봤고 북한김일성은 70 넘겨서도 딸을 낳았다.[3] 다만, 태조의 왕후들 중에서 가장 많은 고려왕을 후손으로 둔 사람은 신성왕태후가 아니라 신정왕태후다. 자세한 사항은 신정왕태후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