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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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국 프로야구 원년 멤버이자 전 MBC 청룡의 야구 선수.
한일은행의 투수 출신으로 이후 쌍방울, 두산, 한화 감독을 역임한 김인식과는 동명이인. 이쪽은 내야수이며, 훨씬 후배다.
2. 선수 시절
동대문상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실업 팀 롯데 자이언트[1] -공군을 거쳐 1982년 한국프로야구 원년에 MBC 청룡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빠른 발을 무기로 한국프로야구 원년에 MBC 청룡의 1번 타자를 맡았고, 프로야구 원년에 세계선수권대회 참가로 뛸 수 없었던 김재박이 1983년에 MBC에 가세한 이후에는 작전에 능한 2번 타자로 활약했다. 포지션은 주로 2루수를 봤지만 상황에 따라 3루수와 유격수를 겸한 내야 유틸리티였다. 원년에는 3루수를 맡았는데, 이광은이 원년 후기리그 때 MBC에 가세하자 자신의 원 포지션인 2루수로 돌아가게 된다.
1982년 3월 27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한국프로야구 개막전부터 6년 동안 606경기 연속출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2016년 기준으로도 역대 5위(최태원-김형석-황재균-이범호)에 해당하는 기록.
현역 때는 안타를 못 치면 맞고라도 나가겠다고 노골적으로 홈 플레이트 쪽으로 바짝 붙는 투지 넘치는 자세, 공을 맞고 나면 '왜 나를 맞추느냐?'를 진심으로 표현하는 그 표정연기가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더불어 그렇게 온갖 엄살 속에 1루로 나가서는 번잡스레 도루를 할듯말듯 깔짝거리며 투수의 신경을 긁어대는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당시의 타 팀 팬들에겐 상당한 비호감 이미지였다. 하지만 위에 나와있듯 6년 동안 연속경기 출장과 당대 수비형 2루수로서는 OB의 김광수와 비교되기도 한다. 요즘 재평가하기로는 '''평범한 선수가 근성으로 부딪혀 어느 정도까지를 이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위대한 인간 승리자.''' 공필성 이전에 바로 김인식이 있었다.
168cm인 단신의 키[2] 를 근성으로 커버하는 스타일의 선수로, 한국 프로야구 '''1호 힛 바이 피치드 볼''' 기록 보유자다. 1984년에는 3타석 연속 몸의 맞는 공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3] 그 외에도 114타석 무삼진으로 연타석 무삼진 최다기록이고, 시즌 전경기 무병살타 기록 보유. 그리고 1982년 8월 26일 삼성 대 MBC의 대구 경기에서 '''프로야구 사상 첫 몰수게임'''을 만들어내기도.
1983년 장명부에게 3연속 몸의 맞는 공을 얻어 맞으며 벤치 클리어링을 이끌어내기도 할 정도로 악바리 근성도 두루 갖췄다. 김은식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위대한 선수들의 시절,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도 꾸준함과 근성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선수'''였다. 현역 시절 별명은 작은 키와 거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붙은 '''베트콩'''.
이때 장명부가 상습적으로 빈볼을 던진 걸로 악명이 높았는데 특히 김인식이 가장 많이 맞았다. 심판을 잡고 울면서 호소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번 또 제대로 맞자 성질이 폭발해 헬멧을 던지고 달려들었다가...막상 맞딱뜨리자 신장이 자기보다 20cm는 더 커보이는 장명부의 덩치를 보고서는 그냥 1루로 가는 개그신을 연출하기도 했다. MBC에서 장명부 관련 다큐를 다뤘을 때 나온 장면이다.
3. 지도자 시절
1988년에 은퇴했으며, 은퇴 뒤에는 LG 2군 코치와 감독, 1군 수석코치 등을 거쳐 사실상의 모교인 서울 청원고[4] 에서 감독 생활을 했고, 2006년에는 LG에 다시 복귀하여 2군 감독을 하였으나, LG가 2006년 시즌이 종료되고 2군 감독으로, 당시 1군 감독 대행이었던 감옥님을 내정하자[5] 한 시즌 만에 다시 팀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후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신생팀인 안양 충훈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 재직했다. 고교 야구계에서는 청렴결백한 분으로 통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15년 3월 20일에 창단 예정인 두번째 독립구단 ISG 미라클의 초대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LG 코치 재임 시절에는 훈련장에 빨간색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온 심재학의 싸대기를 갈겼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로 지도자로서 강성인 이미지였지만, 고교 감독, 그리고 ISG 미라클의 감독을 맡으면서 성격이 많이 유순해진 것으로 보였...으나, 다큐멘터리 촬영 카메라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선수들에게 원산폭격 기합을 넣어서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선수단의 버스를 직접 운전하기 위해 대형면허를 취득하였고, 또 실제로 직접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고 한다. 기사 연천에서 서산까지 4시간, 왕복 8시간을 운전한 적도 있다고 한다.
현재는 팀에 관련된 외부 인사들이 전부 발을 빼면서 구단의 대표이사 직을 겸하고 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5. 기타
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김준.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좌완 에이스로 활약하다 SK 와이번스의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평생 아버지를 존경해야 할 것 같은 느낌.(…)
김준은 SK 와이번스로부터 지명을 2번 받은 선수이기도 하다. 경기고등학교 시절에 SK의 지명을 받았을 때, 2004년 드래프트부터 지명 후 2년 간 입단하지 않으면 지명권이 소멸된다는 규정에 따라 김준은 아버지의 팀을 이어받은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고 싶어서 SK에 입단하지 않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시 SK의 지명을 받았다.
아이러니한 게 김준은 아버지가 데드볼왕으로 유명한 선수인데도 자신의 첫 1군 등판경기의 첫 타자에게 사구를 날렸다는 거다. 그 뒤로 잊혀지더니 KIA로 이적했다가 결국 퇴단했다. 이후 아버지가 있는 연천 미라클에 소리소문없이 입단했다가 대치중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고 한다.
현역 시절, 원정경기 간 도시의 사람 없는 동전 야구연습장을 찾아가서 공을 치지 않고 맞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었다고 한다. 위에 서술된 내용처럼 악착같이 공을 맞아서라도 출루를 하는 근성 플레이를 하던 선수라, 부상 없이 안전하게 공을 맞는 법을 연구하고 단련하기 위함이었던듯 하다.
이 분 역시 존경받는 야구인이지만, 김인식 옹이 더 유명한 것 때문에 부각이 안 된 측면이 많다. 어찌보면 묻어가기의 원조? 하지만 1980년대 프로야구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한두번은 거론되는 추억 속의 선수임에는 분명하다.
김은식 기자의 시리즈물인 '야구의 추억'에 맨 처음으로 연재된 선수였다. 본인 말로는 자신과 이름도 비슷하고 근성있는 모습에 좋아했었다고 회고했다.
[1] 실업야구 롯데다. 현재의 롯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2] 본인은 작은키가 콤플렉스인지 170cm이라고 우겼다고 한다.[3] 이 기록은 2017 시즌에 김태군에 의해 깨졌다.[4] 원래 청원정보산업고(동대문상고의 후신)에 있었던 야구부가 청원정보산업고의 폐교 후 청원여자고등학교를 신설하면서 2000년 12월 1일 같은 재단의 청원고에 이관했다. 따라서 일부 웹상에서 청원정보산업고가 청원고로 바뀌었다는 말은 엄밀히 말해 틀린 것이다.[5] 그러나 감옥님은 통수를 치고 모교인 고려대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결국 LG의 2군 감독으로는 김영직 2군 타격코치가 선임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