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창(1953)

 


'''이해창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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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KBO 리그 도루왕 '''



'''MBC 청룡 등번호 1번'''
김인식(1982)

'''이해창(1983~1984)'''

안언학(1985~198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1번'''
정성룡(1984)

'''이해창(1985~1986)'''

홍성연(1988)
'''청보 핀토스 등번호 87번'''
결번

'''이해창(1987)'''

팀 해체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1번'''
팀 창단

'''이해창(1988)'''

이광길(1989~1990)


[image]
MBC 청룡 시절의 모습
[image]
1983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홈에 뛰어들다 아웃된 후 허탈해 하는 이해창.
웃고 있는 포수는 해태의 김무종이다.[1]
'''이름'''
이해창(李海昌 / Hae-chang Lee)[2]
'''생년월일'''
1953년 4월 23일
'''출신지'''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image]
'''가족관계'''
아내 풍옥희, 아들 이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선린상고 - 건국대
'''프로입단'''
1983년 1차 지명 (MBC 청룡)
'''소속팀'''
농협 야구단 (1975)
육군 경리단 (1976~1978)
롯데 자이언트 (1979~1981)
한국화장품 야구단 (1982)
MBC 청룡 (1983~1984)
삼성 라이온즈 (1985~1986)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1987~1988)
1. 소개
2. 선수 경력
3. 은퇴 후
4. 기타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소개


한국프로야구 선수. 등번호는 1번(MBC) - 11번(삼성) - 54번(청보) - 87번(태평양)

2. 선수 경력


학창 시절부터 야구 센스가 굉장히 뛰어났지만 고아였던 형편 때문에 야구를 그만둬야 할 상황에서 원로 야구인 풍규명[3]이 그를 거두어 주며 야구 생활을 지속하였다. 그런데 풍규명씨의 집에 기거하던 이해창이 어린 시절부터 누나로 모시던 2살 연상인 그의 딸 풍옥희를 임신시키는 사고를 쳤고(...) 이 사실이 들통나자 풍규명은 이해창을 죽일놈 살릴놈 하며 두들겨 팼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때까지 자식처럼 키운 정을 끊을 수 없어 일찌감치 결혼시키고 장인-사위지간이 되었다고 한다.
선린상고를 졸업할 무렵, 장인어른의 주선으로 김동엽이 초대 감독으로 부임한 신생 건국대학교 야구부로 진학했다. 도중에 선린상고 선배들의 강권으로 인해 중앙대학교로 진로를 틀 뻔 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김동엽이 중앙대로 쳐들어가 야구 선배인 김진영 감독에게 다짜고짜 '''"야 이 자식아, 남의 선수나 가로채고 니가 선배냐? 이해창이 당장 내놓지 못하갔네?!"'''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따졌다(...). 김동엽의 기세에 질린 김진영은 "미안하다. 우리 애들이 뭘 모르고 그런것 같으니 그냥 후배가 데려가시게;;;" 라며 사과했고 이해창은 예정대로 건국대 유니폼을 입었다.
건국대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 입단[4]했는데 72학번 동기들이 당시 창단한 롯데 자이언트에 거액을 받고 입단하는 것을 보고 심사가 뒤틀린 이해창은 이듬해 육군 야구단에 입대하였다.[5] 문제는 당시 실업야구 선수들은 입대 시엔 대부분 휴직을 했지만 이해창은 아예 '''농협에 사직서를 던지고''' 입대해 버린 것. 제대 후 롯데 입단을 염두에 두고 그랬던 것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이해창은 '''육군 야구단에서 제대한 후 기어이 롯데 유니폼을 입었고''', 이는 실업야구 사상 선수 자의로 팀을 옮긴 최초의 사례였다.[6]당시 기사 1982년 프로 출범으로 실업 롯데가 프로팀으로 전환되면서 해체되자,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화장품으로 옮겼다.
[image]
(1982년, 홈에서 열린 세계야구 선수권 대회의 시상식에서, 주장으로서 우승컵을 든 모습)
평소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여 특히 국제대회에서 맹활약 한 적이 많았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에서 미국과의 결승전 때 쐐기 적시타를 날렸고, 1982년 서울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대회 내내 공격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일본과의 최종전에서는 8회말 김재박의 그 유명한 개구리 번트 성공 후, 찬스를 이어가는 중전 적시타로 한대화의 결승 스리런 홈런의 발판을 놓기도. 결국 한국이 일본을 꺾고 우승하는데 대표팀 주장으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image]
(프로 입단 첫해인 1983년 후기리그 우승컵과 함께. 왼쪽은 이종도, 오른쪽은 김재박)
1982년 MBC 청룡에 지명[7] 되었지만 세계선수권 대표로 선발되어 프로진출이 1년 유보되며[8] 이듬해인 1983년 MBC에 입단한 이해창은 김재박테이블 세터를 이루며 '''쌕쌕이'''[9] 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라운드를 휘젓는 주루 플레이로 맹활약 했지만 연봉협상 과정에서 구단과 충돌을 일으켜 1984년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다.[10]
[image]
(삼성 시절)
삼성에서도 1985~1986년 두 시즌을 치른 후, 연봉협상으로 구단과 마찰을 빚었다. KBO에 연봉조정 신청까지 갔는데, 당시 성적 면에서 활약이 큰 이해창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지자, '선수에게 지는 것은 망신'이라고 판단한 구단에 의해 1987년 청보 핀토스로 현금 트레이드 되었다.[11]
이 때 뒷이야기로 이해창은 당초 선린상고 선배인 배성서가 감독으로 있던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을 원했고 배성서 감독도 신생팀으로서 한 명이라도 전력보강이 절실했던 지라 이해창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당시 빙그레 단장이던 노진호와 삼성의 윤경헌 단장 또한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 시절 한솥밥을 먹은 인연까지 묶어 이해창의 빙그레 행을 추진했지만, 삼성은 이해창+정진호를 묶어서 보내려고 했던 반면 빙그레는 부상으로 실력이 저하된 정진호 대신 김동재오대석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청보의 박정삼 단장[12]한국일보 수습기자 선배였던 윤경헌 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저번에 김기태를 데려갈 때 내야수 좀 달라고 했는데 힘들다고 하더니,[13] 빙그레와는 정진호가 어쩌구 김동재가 저쩌구 하느냐" 라고 섭섭함을 토로하자 머쓱해진 윤 단장은 박 단장에게 "미안하게 됐다. '''그럼 이해창이라도 데려 가겠는가?'''" 라고 제의했고(마침 빙그레가 이해창에 대한 영입 의사를 철회한 시점이라 가능한 얘기였다), '''으아니 이게 웬 떡이냐''' 싶던 박 단장은 즉시 김정우 구단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강태정 감독과도 신속한 협의 끝에 OK 사인을 받아내어 거의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이해창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14]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청보 핀토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이해창은 1987년 시즌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54개의 도루로 생애 첫 타이틀을 따내기도 했다.[15]
1988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하였다. 6시즌 통산 성적은 타율 0.271, 32홈런, 181타점, 144도루, 317득점.
전성기 시절 김일권과 일생의 라이벌으로 치열한 도루 대결을 벌였지만 대부분 김일권의 승리로 끝났다.

3. 은퇴 후


은퇴 후 1991년 KBS 라디오 해설을 맡은 걸 빼면 야구계를 떠나 유통업, 건설업 등의 사업을 벌였지만 두 차례나 사기사건으로 쇠고랑을 차는 등 인생이 순탄치는 않았던 듯 하다.
이후 서울에서 쇠고기 식당을 차려 조용히 살고 있던 중 2018년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져 6개월 정도 휠체어에 의지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재활치료 끝에 현재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여 의사소통이나 걷기 등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어 보인다.
2019년 2월 22일 방영된 TV는 사랑을 싣고홍성흔리틀야구 선수 시절 팀을 방문하여 원 타임 코칭을 해준 인연으로 출연했다. 홍성흔은 잠실야구장에서 이해창과 32년만에 감격스럽게 해후했고, 이해창이 어린 홍성흔에게 조언해준 "절대 포기하지 마라", "넌 긍정적으로 잘할 수 있다", "네가 열심히 하면 야구장에 너의 이름이 울려퍼질 것이다" 라는 세 마디를 금과옥조로 삼아 야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다며 이해창에게 다시금 감사를 드렸다. 이에 이해창도 홍성흔이 코치로도 성공한 것이 뿌듯하다며 그를 대견해 했다.

4. 기타


아들인 이준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야구를 했다. 선린상고 졸업 후 삼성에 지명되었으나 건국대 진학을 선택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LG에 지명되었으나 미국 진출을 한다고 LG 입단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했다. 제대 후 2003년 삼성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정식 선수가 되어, 10월 2일 이승엽이 56호 홈런을 기록한 경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군 등판을 하여 1.2이닝동안 3피안타 1탈삼진 1자책점을 기록하였으며, 그 해 은퇴했다. 은퇴 뒤에는 방황하다가 대만프로야구로 진출하였는데 거기서도 털리는 바람에 결국 세미프로인 중국으로 가서 베이징 야구팀에 입단했다는 기사가 있으며, 이후 불명.
참고로 한국 야구계가 알루미늄 배트를 도입하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16]
고우영 화백과 친분이 있어서 현역시절 그를 모델로 한 전기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가 도루왕을 차지한 해에 동명이인의, 아들뻘 후배 선수가 태어났다. 1987년생 이해창은 현재 한화 이글스의 포수로 높은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고 있어서 재미있는 대조점을 보여주고 있다.
모 정치인과 이름이 흡사한 관계로, 마구마구에서 삼성 or 청룡덱 VS (빙그레) 이글스덱이 맞붙을 경우, 이글스 측 게이머가 빙그레 김대중을 투수로 등판시켰을 때 위엄차게 대타로 등장하기도 한다.
마구마구 모바일에는 윤보현이라는 가명으로 들어가있다. 청보덱에서 그나마 쓸만한 유격수 테이블세터..였는데 2016년 중순쯤에 갑자기 엘리트카드로 승격되었다.
위에 언급한 대로 홍성흔이 도봉리틀야구단에서 뛸 때 잠깐 그를 지도한 연이 있다. 정확히는 리틀야구단 선수들을 상대로 하루 동안 재능기부를 했던 것인데 그 팀에 홍성흔이 있었던 것. 그 어리고 암울했던 시절[17]에도 야구에 열정적으로 임하던 홍성흔을 눈여겨봤다고 하며, "꼬마선수도 선수고 나도 선수였으니 선수끼리 보고싶었다"며 자신을 찾아준 홍성흔에 대한 반가움을 드러냈다.

5.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MBC
100
388
.294
'''114'''
(3위)
'''21'''
(3위)
'''4'''
(4위)
8
46
'''65'''
(1위)
'''26'''
(3위)
48
.430
.372
1984
100
374
.273
102
16
'''6'''
(4위)
7
36
'''62'''
(1위)
'''36'''
(2위)
48
.404
.35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5
삼성
109
352
.270
95
12
3
7
43
'''63'''
(5위)
14
54
.381
.367
1986
95
238
.315
75
14
2
3
19
44
7
18
.429
.36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7
청보
105
327
.232
76
14
3
3
23
55
'''54'''
(1위)
38
.321
.31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8
태평양
68
194
.237
46
11
1
4
14
28
7
36
.366
.357
'''KBO 통산'''
(6시즌)
577
1873
.271
508
88
19
32
181
317
144
242
.390
.352

6. 관련 문서


[1] 이 때 김무종이 한 말이 '''"아웃이에요 아웃ㅋㅋ"'''[2] 한화 이글스동명이인 포수와 한자까지 똑같다.[3] 馮圭明. 고교야구 기록원으로 활동하였고 대한학생야구연맹 상무이사, 대한연식야구협회 총무이사, 대한야구협회 경기이사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고교야구 전성기 시절엔 해설가로도 유명했는데 애주가 였는지라 중계 직전엔 항상 소주 한병을 마시고 해설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2001년 노환으로 작고했다.[4] '''대학 졸업도 하기 전'''인 '''4학년 2학기''' 때부터 농협 선수로 뛰었다. 물론 규정 위반이었으나 야구계의 거물이던 장인어른이 뒤를 봐준 덕분이었다(...).[5] 다만 이에 입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따르는데, 천일평 기자의 회고에 따르면, 우선 이해창은 고아에 독자였기 때문에 당시 군입대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 당시 육군 경리단의 전력이 하락하자 높으신 분이 강제로 입대시켜 버렸다고 한다. 장인이었던 풍규명이 국회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야구단에서 군 생활을 해야 했다.[6] 팀의 해체 또는 인수합병으로 인해 소속을 옮긴 경우야 많았지만...[7] 당시 지역연고 선수는 무조건 그 지역 팀에서 선출했지만, 서울은 MBC 청룡과 OB베어스가 2:1로 나눠먹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 때문에 첫해 1라운드로 MBC청룡은 이해창과 실업야구 최고 스타중 한명인 김재박을 지명했고, OB는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던 박철순이었다.[8] 세계대회는 아마추어만 출장할 수 있기 때문에, 프로 입단으르 하면 안되었다. 이 때문에 1982년 세계선수권 대회에 출장한 선수들은 프로구단에 입단할 연령이 되었고, 실제로 선출도 결정된 상태였지만 아마추어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실업야구에서 뛰었다. 이런 일은 1986년 아시안게임이나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도 벌어졌다.[9] 이해창이 쌕쌕이라고 불릴 만큼 엄청난 주력에 관한 일화가 있다. 1983년 9월 14일, 잠실야구장 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2대 3으로 뒤진 8회말 1사 후에 김재박이 권영호에게 내야안타를 뽑으며 출루했고, 이광은은 2루수 플라이에 그치며 투아웃이 되었지만 이해창이 좌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터뜨렸다. 좌익수 정현발의 송구가 유격수 오대석의 글러브에 들어간 시점에서 3루를 돌아 불과 두세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김재박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홈에 뛰어들었다'''. 누가 봐도 자폭이 분명한 무모하기 그지 없는 주루 플레이였는데 깜짝 놀란 오대석이 포수 이만수에게 송구한다는 게 그만 김재박의 헬멧을 맞고 백스톱 쪽으로 빠지면서 김재박은 행운의 득점을 올리며 3대 3 동점을 만들었다(사실 행운이라기 보단 김재박이 이만수의 미트 위치를 보고 주루 방향을 잡아서 송구를 지능적으로 방해한 고단수의 주루 플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 공이 뒤로 빠진 사이에 2루를 거쳐 3루까지 진루한 '''이해창도 망설임 없이 홈을 향하여 질주하였고''', 백스톱으로 달려간 이만수가 홈 커버를 들어온 1루수 함학수에게 황급히 공을 던졌지만 이해창은 태그를 피하며 결승 득점을 올렸다. 이날 경기는 MBC의 4대 3 승리로 끝났고 그 해 MBC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당시 3루 코치로 나가 있던 김동엽 감독은 인터뷰에서 '''"김재박이 홈에서 살았길래 '아 이제 3대 3 동점이니 해볼만 하겠다' 생각하는데 누가 눈앞을 쌩 하고 지나가더라고. 이해창이야. 깜짝 놀라서 아이고 저 미친 놈! 스톱 스톱!! 했는데 벌써 홈에 들어갔더라고. 사람이 그렇게 빠른 줄 진짜 몰랐지"''' 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10] 당시 트레이드 상대가 프로원년 결정적인 만루홈런 2방(을 허용한)의 주인공 이선희였다.[11] 연봉조정 신청에서 선수측이 승리한 것은 이후 LG의 유지현이 첫 사례가 되었다.[12] 이 분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5공 초기 언론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당한 후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언론계로 돌아와 국민일보 부사장, 굿데이 대표이사를 거쳐 노무현 정권 시절 초기에 무려 국가정보원 국내정보 담당 2차장으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는 한국관광공사 산하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13] 당시 청보는 김기태를 삼성에 내주고 반대급부로 내야수 김근석과 외야수 정현발을 영입했는데, 내야수가 더 필요하다는 청보의 요청에 삼성은 '''"강기웅류중일을 둘 다 잡지 못하는 한 우리도 내야수 사정이 빡빡하다"''' 라며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14] 후일 박정삼 단장은 인터뷰 때 "중간에 끼어들어 이해창을 채간 격이라 빙그레에게 미안한 감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해창이란 베테랑을 영입하여 적어도 우리 팀 전력이 15%는 상승했다고 본다" 라며 털어놓기도 했다.[15] 더불어 삼미시절을 포함한 청보 역사상 최초로 획득한 타자부문 타이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 이해창의 타율은 0.232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몇 번 안 되는 출루하는 족족 베이스를 훔쳤다는 이야기니 어찌 보면 또다른 의미에서 대단한 거다.[16] 1975년 4월 건국대가 하와이 원정을 갔을 때 자비로 알루미늄 배트를 사들여와 소개한 바가 있다.[17] 당시 홍성흔은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지방 근무로 인한 양친의 부재, 그리고 가난 때문에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해창도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으니 동병상련을 느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