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학

 



심재학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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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0
2001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8

1990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s-2 MVP
강상수
부산고등학교

심재학
(충암고등학교)


조준혁
(경남상업고등학교)

[image] 1990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s-2 MVP




1996 KBO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자



LG 트윈스 등번호 14번
신동수(1994)

심재학(1995~1999)

류택현(2000~2010)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14번
송신영(1999)

심재학(2000)

박우호(2002~2004)
두산 베어스 등번호 10번
강혁(2000)

심재학(2001~2003)

황윤성(2004~2005)
KIA 타이거즈 등번호 14번
박진철(2001~2003)

심재학(2004~2008)

박경태(2009~2010)
우리 / 서울 /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8번
팀 창단

심재학(2009~2018)

김태완(2019~)



심재학
沈哉學 | Sim Jae-hak [1]

<colbgcolor=#d02c20> 출생
<colbgcolor=#fff>1972년 10월 18일 (51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83cm, 98kg
학력
영중초 - 충암중 - 충암고 - 고려대
포지션
투수[2], 우익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5년 1차 지명(LG 트윈스)
소속팀
LG 트윈스 (1995~1999)
현대 유니콘스 (2000)
두산 베어스 (2001~2003)
KIA 타이거즈 (2004~2008)
지도자
서울 - 넥센 히어로즈 2군 타격코치 (2009~2010)
넥센 히어로즈 1군 타격코치 (2011)
넥센 히어로즈 1군 외야수비코치 (2012)
넥센 히어로즈 1군 작전주루코치 (2013)[3]
넥센 히어로즈 1군 주루코치 (2013~2014)
넥센 히어로즈 1군 타격코치 (2015~2016)
넥센 히어로즈 1군 수석코치 (2017~2018)[4]
화성 히어로즈 타격코치 (2018)[5]
해설위원
(2019~)
1. 개요
2. 프로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3.1. 2012년
3.2. 2013년
3.3. 2014년
3.4. 2015년
3.5. 2016년
3.6. 2018년
4. 해설위원
5. 기타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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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프로야구 화성 히어로즈 前 타격코치. 2019시즌 부터 MBC SPORTS+ 야구해설위원이다.

2. 프로 선수 시절



2.1.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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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고려대학교 시절 4번 타자에 엄청난 강견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1995년 LG 트윈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다.
신인 시절의 성적은 썩 좋지 못했는데, 1군 108경기에 출장해서 타율 .230 4홈런 18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타격 폼이 워낙에 특이해 교정에 교정을 거듭했다고 한다.
다음 해인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LG의 4번타자로 자리잡았고, 아마 시절 및 프로 입단 당시의 기대만큼은 못했지만, 1998년까지 두자릿수 홈런을 치며 활약하게 된다. 1996년에는 전해보다 기량이 일취월장하며 .285에 18홈런 72타점을 기록했다. 특이한건 18홈런 중 14홈런이 잠실에서 나왔다는 점. 타이론 우즈 이전 잠실에서 한 시즌에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로 이름을 올린다. 1997년에도 똑같은 .285에 15홈런 84타점으로 이승엽양준혁에 이어 타점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타팀의 중심타자들인 홍현우김기태보다 많은 갯수였다. [6]
1998년에는 성적이 다소 하락했다. 시즌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할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부상으로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빠진 강동우 대신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대체선수로 선발되었고, 금메달을 따내어 덕분에 기대하지 않았던 병역 특례를 받게 된다.
1998년의 부진 때문인지, 심재학의 강견을 눈여겨보던 LG의 천보성 감독과 정삼흠 투수코치는 1998 시즌 종료 후 심재학을 투수로 전향시켰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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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당시 LG의 사령탑이던 천보성 감독은 투수가 필요하게 되자, 당시 투수코치인 정삼흠과 의논 끝에 중심타자 심재학을 좌완투수 심재학으로 전향시켰다.[8][9] 정삼흠 투수코치가 심재학에게 투수 전향을 권유할 때, 용병이 외야 한 자리를 차지하는게 대세[10]라는 근거를 들어 '계속 외야에서 뛸 경우 돌아올 것은 트레이드다!'라는 말로 투수전향을 강제한다. 심재학의 회고담
강한 어깨 탓에 최고 구속은 145km/h를 찍었으나 제구가 전혀 되지 않았고, 아무래도 타자투수가 쓰는 근육이 다른 탓에 투구하는 내내 어깨 근육통에 시달렸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투수를 하는 내내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고. 결국 투수로 15경기(선발 10경기)에 등판해 3승 3패 평균자책점 6.33을 기록하며 망했어요로 전락했다. 결국 시즌 막판 타자로 다시 전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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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image]

LG와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심재학은 시즌 후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결국 자신의 생일인 1999년 10월 18일에 투수 최원호를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됐다.[11][12]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한 심재학은 다시 방망이를 잡으며 2000 시즌 .265 21홈런 75타점을 기록하며 현대의 2번째 우승을 견인한다.
사실 이 시절 성적만 보면 초라해 보이지만, 선구안이 괜찮은 편이어서 출루율이 높은 편이었다. 시즌 초에는 2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할 만큼 불타오르기도 했었다. 당시 연속경기 안타 기록으로는 3위였고, 현재는 9위다.

2.3. 두산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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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에서 뛰었을때의 리즈 시절
그러나 당시 선수협 사태로 미운 털이 박혔던 심정수의 보복성 트레이드 맞상대로 지목되어 2001년 2월 9일 두산 베어스트레이드됐다. 당연히 두산 팬들은 심정수를 왜 내보내냐며 분노하였고[13] 이는 조직적인 항의 운동으로까지 발전하며 공식 홈피 곰대가 1주일 폐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저 당시 두산 팬들에게 심죄악이라고 대차게 까인 건 덤.[14] 그리고 11년 후인 2012년 역사는 반복된다.[15]
그러나 심재학은 두산에서 대폭발하며 2001년 1군 117게임에 출장, .344 24홈런 88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결국 개인 통산 2번째 우승 반지이자 2년 연속으로 우승 반지를 끼는 영광을 얻었다. 2001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2루에서 3루로 주루도중, 김한수의 송구를 머리에 맞았지만,[16] 고통을 참고 홈까지 달려 득점 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6차전에서는 장종훈이 그랬듯 희생플라이로 두산의 승리를 매듭지었다. 2001 시즌 외야수 부문 KBO 골든글러브도 획득.
하지만 2002년 .245 15홈런 57타점에 그치며 전년도에 비해 타율이 1할이나 떨어지는 등 부진했고,[17] 2003년에는 .236 5홈런 27타점이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들었다. 첫 해 심재학이 미친 활약을 보여주며 양측 모두가 만족할 만한 전형적인 윈-윈 트레이드로 심정수-심재학 트레이드는 남게 될 줄 알았으나, 심정수는 해가 갈수록 리그 최강의 타자로서 현대 유니콘스 왕조 건설에 결정적 역할을 한 선봉장이나 다름 없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심정수는 트레이드 후 2년 된 2003년, 53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리그 최고의 홈런타자로 군림했다. 결과적으로 두산 베어스의 완패 트레이드로 남고 말았던 시절이다.

2.4. 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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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시즌 종료 후 두산 베어스는 리빌딩을 목적으로 KIA 타이거즈와 심재학 = 황윤성 + 박진철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18] KIA로 이적한 심재학은 2004 시즌 128게임에 나와 타율 .281 22홈런 81타점 OPS.940을 기록하며 팀의 4강행에 큰 힘을 보탠다. 부상으로 신음하던 홍세완, 삼성시절과 비교하면 비교적으로 먹튀짓에 가까운 활약을 하던 마해영과 부상에 시달리고 태업 의혹이 있었던 박재홍의 몫까지 활약하며 시즌 종료 후 3년 총액 18억 원에 FA 계약을 한다.[19]
그러나 FA 계약 후 2005 시즌에는 부상에 시달리며 부진, 1군 94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치며 .254 12홈런 39타점을 기록했다. 2005년 4월 30일 대구 삼성전에서는 신용운을 울리는 수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신용운에게 담배셔틀을 시킨 모양이다.
2006, 2007 시즌에는 부상에 허덕이며 1군 56게임과 25게임에만 출장했으며, 결국 2008년에는 개막전에서 단 1타석에만 들어서고 2군으로 내려간 후 안재만과 함께 6월에 웨이버 공시되었다. 웨이버 공시된 후 그는 KIA 구단에 지도자 연수 요청을 하면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심재학의 선수 경력은 이것으로 끝났다.

2.5. 평가


이러한 전적 탓에 대다수의 야구 팬들은 심재학을 FA로이드의 덕을 본 그저 그런 선수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 생각을 해 봐야할 것이 심재학은 생각보다 괜찮은 선수였다.
반짝 활약에 불과했다는 말을 듣긴 하나, 최전성기인 2001년의 RC/27은 94이종범, 02이승엽과 동급이고 03이승엽보다 높다.[20]
또한 통산 타율은 .269로 2할 7푼도 채 되지 않는 평범한 기록이지만, 통산 출루율은 무려 .378로 타율과의 격차가 1할이 넘는다. 게다가 타율과 출루율의 차이가 크고 작고를 떠나서, 통산 출루율 .378과 통산 OPS .827은 3,000타석 이상 뛴 선수들 중에서도 각각 16위와 26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또한 홈런 역시 통산순위에서 현재 공동 26위.(다른 한 명은 김한수) 이미지와는 달리 생각외로 잘 치는 타자였음에는 틀림없다. 타율이 매우 낮아보여서 그렇지, 타율만 중시하던 예전과는 달리 OPS가 일반화되면서 출루율을 많이 고려하는 등 야구에 관한 시각 자체가 많이 진일보한 요즘에 뛰었다면 또 어떻게 평가받았을지 모르는 부분.
문제는 타격시 스윙 스피드가 굉장히 느렸다는 것. 몸집만 보면 거포이고, 때리면 홈런인 것 같은 타구를 날렸는데 플라이가 된다든지... 그렇기 때문에 타율이 낮았던 건지도 모른다.
수비에 있어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엄청난 강견으로 유명했다. 동 시대를 풍미한 강견 심씨 외야수 심성보, 심정수와 묶여 3심이라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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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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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시즌 후 김시진 감독의 부름을 받아 히어로즈의 2군 타격코치로 선임되어 2009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1군 타격코치로 승격됐다.
장민석을 2군에서 지도하여 이택근 이후 넥센 히어로즈의 주전 중견수로 키워낸 사람이긴 한데...타격코치로서의 평은 그리 좋지 않다. 2011년 1군 타격코치 시절 히어로즈 물타선의 주범으로 까이곤 했다.

3.1. 2012년


과거 이승엽을 키워 냈던 박흥식 히어로즈 2군 감독이 1군 타격코치로 올라오면서, 외야수비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가끔씩 TV에 시프트를 옮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옮기는 장면이 나온 다음 공은 옮기기 전 위치로 날아가는 일이 자주 있어서 시프트를 옮기는 장면이 나오면 '죄악시프트' 라고 부르며 긴장타는 사람이 어느정도 있다.

3.2. 2013년


2012 시즌 종료 후 염경엽 감독 취임으로 공석이 된 작전, 주루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21] 대신 외야수비코치는 한화 이글스에서 최만호 코치가 옮겨왔다.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에서 선수들의 뇌주루가 속출해 심죄악으로 불리며 적잖이 비판받았다. 염경엽 감독의 질책 및 격려와 본인의 공부를 통한 노력으로 주루 지도 능력이 어느정도 향상될 줄 알았으나 2013시즌 넥센의 도루 성공률이 최하위를 달리면서 회의론이 대세가 되었다.
2011년엔 팀 타자 수준 자체가 낮아서 실드가 쳐졌지만 12년에 도루 성공율 1위했던 팀이 2013시즌에 바로 꼴찌로 떨어진 걸 어떻게 실드칠 수 있는가?[22] 그리고 최만호는 한화에서 주루코치로 호평받았던 코치여서 최만호와 심재학의 보직을 바꿔야 한단 소리도 꽤 있었다.
결국 2013년 8월 28일 심재학 코치 본인의 요청으로 최만호 코치와 보직을 맞바꾸었다.
하지만 이후 충격적인 이야기가 드러났으니.......
2014년 베이스볼긱과의 인터뷰에서 선수 시절 총 도루 개수가 25개란 사실이 나온 데다, 2015년 인터뷰에서 심재학이 가장 많이 도루를 한 것이 2001년 두산 시절의 7개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염경엽 감독의 사악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되었다.

3.3. 2014년


넥센의 1루·외야수비 코치를 맡고 있다. 작년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을 토로하는 인터뷰도 했다. 참고로 인터뷰 내용에 나오고, 밑의 각주에도 있지만, 그렇게 자기 마음고생을 심하게 만든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인 염경엽이라고.... 염 감독이 자기한테 보고 배운 게 있으니까 잘 할 거라고 하면서 맡겼단다.

3.4. 2015년


1월 15일 스프링캠프 출발 직전에 1군 타격코치였던 허문회와의 계약이 불발되면서 공석이 된 1군 메인 타격코치 자리를 맡았다.[23] 이로서 심재학은 2012년 역대급 주루 시즌 다음 연도에 주루코치를 맡고, 2015년에는 2014년 역대급 타격 시즌의 다음 연도에 타격코치를 맡는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게 된다.
심재학이 타격코치를 맡았던 2011시즌의 엄청난 물빠따를 경험했던 넥센팬들은 불안감에 휩싸였고, 그 불안은 현실이 되어 시즌 초부터 방망이의 기복이 상상초월이었다. 한 경기 메가히어로즈포 터지고 나머지 경기는 개점휴업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4월 9일 잠실서 두산의 유네스키 마야에게 136구 노히트노런을 내주는 참변을 초래했다. 심판이 노골적인 넥센안티 박근영임을 고려해도.
6월 30일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심재학 코치 “뭘 치라는 얘기 안 해…확신만 심어줄 뿐”
후술하듯 특이한 티배팅 공을 직접 고안해 냈는데, 이게 의외로 괜찮은 효과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
7월 31일 마산 NC 1차전에서 홈런 4방이 터지며 타격에서 봇물이 터지자 해설자 왈 심재학 코치가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다며 활짝 웃는 모습을 카메라로 잡아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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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포텐이 터지면서 혀갤엔 이런 글이 올라왔다

3.5. 2016년


2014년의 클린업 트리오가 모두 증발해 버린 상황에 전력이 당연히 약화될거라는 예측이 팽배했던 상황에서 나머지 선수들의 타격이 향상되면서 그 구멍을 나름 메우고, 특히나 유재신, 박정음 같이 타격이 좀 아니다 싶은 선수들이나 신진급 선수들의 타격이 좋아지는 게 확연히 보이면서 지도력 논란은 조금 사그러드는 편이다.
티배팅 공이 진화해서 이번엔 강속구 대처용으로 공에 색을 칠해 피칭 머신으로 돌려서 선수들이 타격하지 않고 색깔만 맞추며 동체시력을 키우는 새로운 훈련법을 고안해냈다. 처음엔 잘 못보더니 며칠 해보니까 공 색깔을 금방 다들 알아보더라고. 성공 여부를 떠나서 선수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6월 24일에는 심재학이 뜬금없이 엔트리에서 말소되고 2군의 송지만 코치가 콜업되었다. 성적이 나빴던 것도 아니고 코칭에 큰 문제도 없어서, 아니 오히려 성적이 더 좋아지고 있는 와중이라 도대체 교체될 이유가 없어서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전날 훈련 때 속이 안 좋아 병원에 갔고,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아 그랬다는 소식에 팬들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다행히 회복이 빨랐고, 본인의 의지도 강해서 주말 3연전만 빠지고 28일에 다시 복귀했다. (그리고 그렇게 심재학 없이 치뤘던 4경기에서 넥센은 1승 3패를 당했다. 그것도 3연전 상대가 친정인 LG였다.)
선수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면서도 애정어린 조언과 기술적인 부분을 같이 짚어주는 코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선수와 격이 없으면 선수에게 구타당하면서도 좋다고 웃는다. (박정음의 데뷔 첫 홈런이 나왔는데, 언제나처럼 선수들은 무관심 세레머니를 하려고 준비중이었고, 코치님도 하시라고 선수들이 그러니까 심재학 코치도 슬쩍 끼었다. 근데 박정음은 코치님까지 그러실 줄은 몰랐다며 마구 때렸다. 근데 고유라 기자의 트윗에 의라면 그 와중에 박정음이 힘이 많이 세졌다고 또 칭찬을 섞는다.)
9월 19일 롯데와의 경기에서는 김하성의 타구를 2루수 김대륙이 실책 하여 모든 주자가 싹쓸이로 들어왔는데 단 1점만 인정하여 기록원들에게 "감정적으로 야구할 거예요?" 라고 무섭게 따졌다(...). 결국 실책이 아닌 안타로 정정되면서 3점 모두 인정되었다.
2016 시즌 후 염경엽 감독이 사임하자 넥센의 차기 감독 후보로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오며 심재학 차기 감독설이 돌기도 했으나, 프런트 출신의 장정석 운영팀장이 차기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대신 수석코치 자리를 구단에서 제안받았고, 수석코치로 보직 변경됐다.

3.6. 2018년


장정석 감독과 야구관 문제로 갈등이 생기면서 5월 5일부로 출근하지 않고 잠수를 탔다가 5월 9일부로 허문회 화성 타격코치와 자리를 맞바꿔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결국 2018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나게 됐다.

4. 해설위원


2019년부터 고려대-LG 시절 선배였던 이상훈과 함께 MBC SPORTS+ 해설자로 합류했다. 두산 베어스 출신 해설자가 희귀한 상황에서[24] 사실상 두산 출신 해설자의 맥을 잇고 있다.
동기 이상훈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때때로 편파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으며 목소리가 작아서 졸음이 온다는 평가도 많다. 오죽하면 해설 첫해 반응이 ASMR을 한다는 반응이었다(...). 목소리도 은근히 고음인데다 코막힌 듯한 느낌도 들어 듣기 불편할 정도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버벅되는 느낌이 너무 심할 뿐만 아니라 했던 말을 또 하는 습관마저 가지고 있다.
다만 한가지 팬들에게 호평을 받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심판의 오심이 나오면 확실히 깐다는 것. 안그래도 오심 때문에 열불 터지는데 "심판도 사람이다, 오심도 게임의 일부다"라며 운운하는 다른 해설들보다 저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맘에 든다는 반응이 많다. 또한 지도자 생활 대부분을 히어로즈 구단에서 했기 때문인지 반 키움 스탠스가 강한 엠스플에서 몇 안 되게 키움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5. 기타


  • 이 분이나 저 분, 그 분들에 가려져 있어 크게 주목받지 않았지만 빵 사건의 제4 용의자로 추정되었다. 그래서 빵재학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나 위의 세명에 비해 그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게다가 이 분의 증언으로 범인이 사실상 요 분으로 확정되는 분위기라 묻혔다. 그리고 현재는 그 분으로 확정.
  • 프로야구매니저의 2013년 6월말 업데이트에서 OB-두산의 3번째 레전드 카드로 추가된다. 팬들은 심정수나 우즈를 냅두고 고작 입단기간 3년에 1년 반짝한 선수한테 레전드를 주냐며 어이없다는 반응. 물론 우즈는 나중에 추가 되었지만 정작 심정수는 두산 버젼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박재홍도 현대와 SK 두가지 버젼이 모두 있는데다가 심지어 용병인 다니엘 리오스마저도 기아와 두산의 2가지 버전으로 나왔다는걸 생각하면 심정수 두산버젼을 추가하지 않고 심재학의 소개란에 당당히 우동학 트리오라 적은것은 누가 봐도 프야매 측의 병크.
  • 1985년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한국이 우승할 때 주요 선수였다. 그래서 2014년에 한국이 29년만에 리틀야구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 경기를 허구연과 함께 해설을 했다. 참고로 상대 팀엔 제이슨 배리텍이 있었다. 영상
  • 지금이야 죄블리로 까임의 대상이지만, 대학 재학 중에는 엄청난 악마로 이름 날렸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야구부의 경우 예전부터 타 대학 야구부에 비해 상당히 군기가 세고 구타, 얼차려가 심하기로 악명높은 편이었는데, 오죽했으면 야구계에서 한성깔 하기로 유명한 김동주진갑용도 심재학만 보면 여전히 얼굴을 제대로 못 볼 정도라고. 프로팀에 오고 나서도 군기반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프로팀에도 별 선수들이 다 있다 보니 대학 시절만 못했던 모양. 가장 대표적인 안습한 예로 4살 어린 동생인 정수근과(정수근이 빠른 생일임을 감안하면 별 차이는 없다만, 워낙 체육계가 위계 서열이 철저한 걸 생각하자.)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던 짬뽕 사건이 있다.[25][26]

  • 2015 시즌 들어가면서 독특한 티배팅 공을 고안해냈다고 한다.기사
  • 2001년 그의 맹활약으로 인해 심슨이란 팬클럽까지 생겨났다. 지금도 그의 01년을 기억하는 팬들은 그를 심슨이라고 부른다.기사
  • 예전부터 방송인 이혁재와 비슷하다. 물론 본인도 닮은 걸 알고 있다고. 즉 두 사람 다 닮았다 보니 싫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예전 2006년에 이휘재의 생일파티 때 초대되었는데 우연히 화장실에서 마주쳐서 두 사람 다 깜짝 놀랐다는 후문.. 이후엔 친해졌다고.[27]
  • 현대로 트레이드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집에 불이 나서 그 동안 자기 사진 앨범은 물론이고 야구하면서 받은 상이나 영상, 신문 등 모든 자료들이 다 사라졌다고 한다.
  • 박명환야구TV에서 조용훈이 푼 이야기에 따르면, 2군 코치 시절 카니발을 운전하고 다녔는데 전날 술마셔서 제 컨디션이 아닌 조용훈이 쿨쿨 자고 있자 "쟤는 코치가 운전하는데도 자냐?"하면서 유재신에게 한탄했다고 한다.
  • 2020년 6월, 방송에서 SK 염경엽 감독이 쓰러진 사건을 전하는 와중에 감정이 복받쳐 눈시울이 붉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 수십년 동안 선수와 코치로 현장에 있으면서 이제 눈감고 타격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공이 맞았는지 알 정도라고 한다
  • [28] 이 썰에 대해서는 심재학 본인도 야구인들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베이스볼 투나잇에 나와서 자기 이름하고 사진을 왜 쓰냐고 황당해했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안타
타율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5
LG
106
239
55
.230
10
4
4
18
32
2
57
.356
.376
1996
118
389
111
.285
15
1
18
72
59
1
75
.468
.395
(5위)
1997
117
411
117
.285
23
1
15
84
(3위)
54
5
56
.455
.363
1998
124
412
110
.267
22
1
11
70
47
0
66
.405
.360
1999
1
0
0
.000
0
0
0
0
0
0
0
.000
.0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안타
타율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현대
130
430
114
.265
30
1
21
75
66
3
66
.486
.36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안타
타율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두산
117
369
127
.344
(2위)
20
1
24
88
84
7
93
.599
(3위)
.473
(2위)
2002
119
383
94
.245
16
3
15
57
56
2
73
.420
.361
2003
111
276
65
.236
16
0
5
27
28
1
42
.348
.33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안타
타율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4
KIA
128
372
105
.282
23
2
22
81
64
1
85
.532
.408
2005
94
252
64
.254
9
0
12
39
34
3
50
.433
.373
2006
56
119
21
.176
5
0
2
7
7
0
16
.269
.268
2007
25
51
12
.235
4
0
0
4
9
0
7
.314
.328
2008
1
1
0
.000
0
0
0
0
0
0
0
.000
.000
<color=#373a3c> KBO 통산
(14시즌)
1247
3704
995
.269
193
14
149
622
539
25
686
.449
.377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1999
LG
15
48⅓
3
3
0
0
6.33
48
5
36
32
1.70
<color=#373a3c> KBO 통산
(1시즌)
15
48⅓
3
3
0
0
6.33
48
5
36
32
1.70

7. 관련 문서


[1] 1985년 리틀야구 시절 영어표기는 Shim Jai-Hak 이었다.[2] 1999년에 투수로 전향했으나 1년 후에 다시 타자로 재전향했다.[3] 8월 28일 최만호 외야수비코치와 보직을 바꾸었다. 그리고 최만호가 심재학보다 못한 코칭(사실 심재학은 도루와 거리가 먼 선수였다. 다만 최만호는 한화 시절 보직이 주루코치이기도 했고... 이걸 감안하면, 최만호는 더 비난받는다.)을 보이면서 새로운 금지어가 되었다.[4] 5월 5일까지[5] 5월 8일부터 시즌 끝까지[6] 이승엽과 양준혁은 1997년 당시 팀 타격 WAR 역대 1위의 타선의 일원이었고 최익성이 리드오프로 출루하면 쓸어담는 구조였다. 이승엽과 양준혁이 못해도 뒤에 신동주, 김한수, 정경배, 김태균이 타점을 먹다보니 타점 20위 안에 삼성 타자만 7명이었다. 홍현우는 97년도에 하필이면 빵횽이 세운 3030에 고무되어 3할 3030을 달성한 어떤 신 때문에 도리어 홍현우는 타점 손해를 많이 봤다.(...) 김기태의 경우 쌍방울 특유의 리드오프 부족 문제 때문에 홈런수에 비해 유독 타점운이 없는 편이다.[7] 현재 시점에서 보면 출루율을 무시한 무식한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때 당시에는 다 그랬다. 그 메이저리그도 타율, 승리 등 투승타타가 주였고 세이버는 구단 운영에 쓰이지도 않던 시절이다. 빌리 빈이 출루율을 머니볼의 핵심 요소로 삼은 이유도 출루율이 저평가된 스탯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개념이 없던 과거의 일을 현재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역사의 상대성을 무시하는 것이다.[8] 심재학은 충암고등학교 시절 투수로도 활동한 경험이 있지만, 고려대학교 진학 이후에는 줄곧 타자로 출장해 왔다. 때문에 단순히 어깨가 좋고, 한때 투수를 해 봤다는 이유로 프로에서 투수로 전업하는 것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9] 본래 심재학의 투수 전향은 전임 이광환 감독도 추진했던 일이다. 이를 앞장서서 반대한 사람은 당시 수석코치를 맡고 있었던 천보성... 이를 두고 벌어진 이광환 vs 천보성의 갈등은 이광환 감독이 중도 퇴임한 여러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코치 시절에 반대했던 천보성이 정작 감독이 되고나서 다시 추진하는 어색한 광경이 벌어진 셈.[10] 이 시기에 주니어 펠릭스가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이클 앤더슨이 LG와 재계약에 실패한 후 쌍방울 레이더스로 떠나면서, 마무리가 공석이었다.[11] 이 당시 LG는 투수가 없어서 심재학을 투수로 전향시킨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재학의 투수 전향이 실패로 끝나자 심재학 만큼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였던 최원호를 트레이드로 받아온 것.[12] 심재학은 96~97 시즌에 날아다녔다. 또한 95시즌을 앞두고 1차 지명으로 데려온 선수였다. 그리고 최원호는 98시즌에 10승을 거두었으며, 96시즌을 앞두고 1차지명으로 데려온 선수였다. 둘 다 99년에 부진했으니, 다시 잘하겠지라는 생각으로 트레이드해 버렸다.[13] 심정수는 2000년 당시, LG 마무리인 장문석을 탈탈 털고서 플레이오프에서 한국시리즈로 두산을 보냈기에 더욱 분노했다. 더군다나,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한몫 했었고...[14] 이 때문에 심정수는 정들었던 두산을 떠난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15] 그리고 오재일은 2016년 25홈런을 치면서 심재학의 2001 시즌 기록을 깨버린다. [16] 그리고 공은 이상한 곳으로 튀어 버렸고, 심재학이 득점 주자가 되었다.[17] 그래도 이 해 출루율은 타율에 대비해 1할이 높은 .361을 기록하면서 선구안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 시즌이었다.[18] 베이스볼 투나잇 프리뷰톡에서 밝힌 이야기에 의하면, 트레이드 될 당시에 아내를 붙잡고 울었는데, 결혼하고 집을 산지 3개월 만에 트레이드가 됐다고 한다.[19] 이후 스톡킹 제1화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마이너스 옵션이 6억원으로 실제 받은 돈은 3년간 12억.[20] 다만 이승엽의 경우 홈런 신기록을 달성한 2003년 시즌이 상징적인 의미는 크더라도, 스탯상으로는 1999년도와 2002년도가 더 높이 평가받는다.[21] 2014시즌 중 인터뷰에 의하면 이 자리에 오른 이유가 사실 염경엽 감독의 제안 때문이었다고 한다. 1년 동안 본 게 있을 것이라면서 시켰다고.[22] 사실 2012년에는 염경엽 감독이 주루코치였으므로 염경엽의 주루코치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2011년에도 팀 도루는 꼴찌였다.[23] 하지만 허문회는 당일 자로 넥센과 재계약한다.[24] 안경현은 지역 비하 및 자질 미달 해설로 두산 팬들에게도 외면받는다.[25] 그런데 이게 빵 사건마냥 두 가지의 바리에이션이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설은 전날 술 마시고 해장으로 경기 도중에 멋대로 짬뽕을 시켜먹는 정수근을 보고 화가 난 심재학이 이를 꾸짖고, 정수근이 이에 반발해 서로 방망이 들고 대치했다는 것이다. 다만 방망이 들고 대치했다는 것은 2019년 정수근이 박명환의 인터넷 방송에서 와전된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다른 설로는 배가 고팠던 심재학이 마침 짬뽕을 맛나게 먹고 있는 정수근을 보자 자기도 한 입만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삐쳐서(...) 싸우게 되었다는 웃지 못할 카더라도 있다. [26] 공교롭게도 이 사건이 벌어진 2003년 시즌이 끝난 후 심재학정수근 둘 다 두산을 떠나게 된다..[27] 이혁재는 한때 현대 유니콘스 팬으로 유명했다. 그러다가 현대가 서울로 야반도주하자 당시 신생팀 인천SK로 갈아탔다.[28] 심재학 닉의 유저가 기사보다 앞서서 정보를 흘려 주목받았는데 키움 관련해서 내부 관계자만이 알 만한 썰을 풀어서 심재학 본인 아니냐는 강려크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 유저는 심재학 본인 아니냐는 의혹에 팬일 뿐이라며 강하게 부인하였으나 이미 심재학 본인이 자기 닉 걸고 쓴다고 기정사실화 되었다. 야구부장도 정체를 궁금해 할 정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