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엽

 



'''이름'''
김재엽(金載燁, Kim Jaeyup)
'''국적'''

'''출생'''
1963년[1] 5월 17일 (60세)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명동[2]
'''학력'''
대구남산초등학교 (졸업)
대구중앙중학교 (졸업)
계성고등학교 (졸업)
계명대학교 (상업교육학 / 학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석사)
경기대학교 대학원 (경호안전학 / 박사)
'''종목'''
유도
'''체급'''
-60kg
'''신체'''
163cm, 60kg
'''가족'''
아버지 김경윤(金慶潤)[3]
前 배우자 김경순(1965년생)[4]
아들 김관우(1992년생), 딸(1993년생)[5]
1. 개요
2. 선수 경력
3. 수상 기록
4.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유도 선수이자, 現 동서울대학교 경호스포츠학과 교수이다.

2. 선수 경력



2.1. 1982년


6월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청소년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유도 최초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이 시절 100연승의 대기록을 세워 주위를 놀라게 했다.

2.2. 1983년


계명대학교 1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2.3. 1984년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결승전에서 일본의 호소가와 신지[6]에게 누르기 한판 패를 당하면서 은메달을 받았다.[7]

2.4. 1986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

2.5. 1987년


서독 에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호소가와 신지와 또 다시 결승전에서 맞붙어 통쾌한 허벅다리 걸기로 한판승을 거두면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2.6.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 출전하지 못할 뻔했으나 후배 윤현[8]의 눈물겨운 양보로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예선 첫경기부터 결승까지 전 경기에서 상대 선수에게 한 점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여유있게 금메달을 받았다. 경기를 앞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1987 세계선수권 우승자 김재엽과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호소가와 신지가 결승전에서 맞붙을 것이다'라고 예상을 했으나, 호소가와가 준결승에서 미국의 무명 선수 케빈 아사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면서 금메달의 주인공이 손쉽게 판가름이 났다.
결승전 당일이었던 9월 25일이 마침 추석이어서 한복을 입고 금메달을 수상해 눈길을 끌었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설날에 금메달을 수상한 스켈레톤윤성빈이 큰절을 올렸다.

3.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88 서울
-60kg
은메달
1984 로스앤젤레스
-60kg
세계선수권
금메달
1987 에센
-60kg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6 서울
-60kg

4. 기타


  • 1988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하였으며 지도자의 길을 걸었으나 제자의 판정 시비로 인한 항의, 유도 파벌에 대한 폭로로 결국 유도계에서 퇴출되었다.[9] 그 이후에 사업자의 길로 들어섰으나 수십억을 사기당하고 노숙 생활을 전전하다가 자살 시도까지 하는 등 암울한 생활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해서 동서울대학교 스포츠학부 교수가 되었다.
  • JTBC의 예능 프로그램인 뭉쳐야 찬다의 축구팀 어쩌다 FC에 입단을 신청하였으며, 조기축구 30년 경력자 답게 자신의 실력을 뽐냈다. 그리고 53화에 정식으로 입단해 등번호 88번을 받았다.
  • 이만기보다 1살 어린데도 편하게 친구처럼 반말을 터놓고 지낸다. 프로필에서는 1964년으로 표시되어있다.
  • 뭉쳐야 찬다에서 58세의 고령의 나이에 수많은 스포츠 강자들을 철봉 씨름으로 전부 이기는 운동 능력을 과시했다.[10] 게다가 같은 날 치러진 관세청 팀과의 경기에서 2골을 넣기까지 했다.
[1] 뭉쳐야 찬다에서 이만기와 친구라고 밝혔다.[2]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3] 전직 복싱 선수 출신이다.[4] 전직 핸드볼 선수로 1988 서울 올림픽 금메달과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했다. 본인이 유도계에서 제명을 당한 이후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수십억을 사기를 당했다. 이 때문에 빚이 쌓여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이혼했다.[5] 아들은 과거 청소년 대표 축구 선수였고 딸은 뭉쳐야 찬다 경기에 응원을 왔었다.[6] 당시 세계랭킹 1위였다.[7] 은메달을 따게 된 이유가 웃픈데 결승전 시작 2시간을 앞두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근처 한인 타운 곰탕집에서 곰탕을 먹었다고 한다. 먹고 나니 식곤증이 와서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뼈 마디마디에 힘이 없어지고 급하게 결승전을 치루다보니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했다.[8] 훗날 윤현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으나 다른 후배의 양보로 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땄다.[9] 그의 코치를 받았던 선수가 윤동식추성훈이었다. 이들도 역시 그와 같은 유도 파벌 피해자들이었다. 이후 추성훈이 뭉쳐야 찬다에 용병으로 출연 하면서 다시 만나기도 했다. 추성훈은 귀화 전까지 경쟁 상대들의 실력도 무시할 수 없어 일부 반론이라도 존재하지만, 윤동식은 현역 당시 동체급 세계 최강으로 불렸는데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10] 유도선수 훈련 중에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훈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