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호
1. 소개
前 태평양-현대, SK 와이번스 소속의 포수이자 前 현대 유니콘스, 우리 히어로즈, LG 트윈스, SK 와이번스의 배터리코치.
인천야구의 프랜차이즈 선수지만 태평양 시절에는 김동기라는 큰 벽으로 인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가 현대 유니콘스가 되면서 주전으로 자리를 확고하게 잡으려는 와중에 큰 부상과 박경완이라는 또 다른 벽에 부딪혀 백업으로 전락한 비운의 선수.
차남인 장승현 역시 포수로, 제물포고를 거쳐 두산 베어스 소속이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지금의 자동아웃 이미지와 달리 프로 입단 이전에는 김동수 다음가는 공격형 포수였다. 동산고를 거쳐 인하대 4학년 때는 1989년에 대학 포수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고, 실업야구 한국화장품 시절에는 '''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 KBO 드래프트에서 태평양 돌핀스의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아 입단한다.
2.2. 프로 시절
1993시즌 종료 후 현역 입대하면서[2]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았으나 생계 유지 곤란 사유[3] 로 의가사 제대하면서 팀에 복귀해 계속 백업 포수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로 팀의 간판이 바뀌고 노장 김동기가 오른발 마비 증상으로 프로 은퇴 수순을 밟으면서 1996년 부동의 주전 포수가 돼 팀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끌었다.[4] 특히 해태 타이거즈와의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광주 2차전에서 중견수 박재홍이 홈으로 송구한 공이 홈플레이트 앞 그라운드에서 크게 한 번 튀었고 그 공이 장광호의 얼굴을 직격으로 강타했다. 이 부상으로 장광호는 눈썹 주변 부분을 11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남은 한국시리즈 경기는 백업인 김상국과 백업의 백업(...)인 신인 포수 김형남이 치러야 했는데 한국시리즈 최초의 노히트 노런인 정명원의 노히트 노런을 도운 것은 '''사실 장광호가 아니라 김형남이었다.''' 김형남이 1회부터 8회부터 볼을 받았고 김재박 감독이 9회초에 장광호를 내보내 정명원의 노히트 노런이 완성됐다.[5] 5차전부터는 장광호가 마스크를 썼고 결국 팀의 준우승으로 그 시즌이 끝났다.
그러나 1997년에는 부상으로 전 커리어 내내 부동의 주전은 1996년이 처음이자 마지막. 결국 1998년 박경완이 이적하여 팀에 합류하자 백업으로 밀렸다. 그나마 콩라인은 아니라는 점이 위안이랄까.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하면서 신생팀 전력보강선수로 지명되어 현금 10억에 SK로 트레이드되었다.[6] 그러나 1년만에 방출된 뒤 현대로 돌아왔고 2001시즌 후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이후 현대 유니콘스, LG 트윈스에서 배터리 코치를 하다가 2016년, 고향팀에서 배터리 코치를 맡았지만, 시즌 후 재계약 불가로 인해 팀을 떠났다.
4. 연도별 성적
5. 기타
- 잘 안 알려졌는데, 태평양 - 현대 시절 같이 한솥밥을 먹었던 염경엽 前 SK 와이번스 감독 못지 않은 물방망이였다. 통산 타율이 염경엽보다 1푼 9리가 높았을 정도.
6. 관련 문서
[1] 1986학번[2]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고등학교 때 양친이 모두 돌아가셔서 당연히 면제될 줄 알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영장이 왔다고 한다(...).[3] 병역법 상 3명 이상의 부양 가족이 있어야 제2국민역 처분을 받는데, 이등병이던 94년 3월에 부인이 둘째 아들을 출산한 덕에 94시즌 개막을 며칠 앞두고 극적으로 제대했다고 한다. 그 둘째가 바로 장승현.[4] 이 당시 장광호의 백업 선수가 1996년 현대 창단 과정에서 영입된 김상국이었다.[5] 노히트 노런의 수모를 당한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은 잠실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몽둥이찜질을 당했다는 일화가 있다.[6] 두산 투수 강병규, LG 외야수 김종헌, 삼성 내야수 송재익, 해태 투수 권명철 등이 SK로 이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