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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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감독대행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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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감독 시절.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의 공포의 김씨(김봉연, 김종모, 김성한, 김준환, 김일권) 타선을 이끌었던 선수. 은퇴 이후 원광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었다.[3]
쌍방울의 마지막 감독이기도 하다.
2. 선수 시절
1972년 군산상고의 극적인 황금사자기 결승전 대역전극의 주인공 중 한 명이 김준환이었다. 당시 김봉연, 김일권 등과 함께 결승전에서 3점차로 뒤지던 경기를 9회말 4점을 뽑으면서 역전할 때 주역이었다. 바로 우승을 결정짓는 역전 적시타의 주인공이 김준환이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에는 말썽도 많이 부렸다고 한다. 당시 술먹고 싸우다가 걸려서 혼났다고. 그런데 당시 감독인 최관수씨가 "너희를 잘못 가르쳐서 일어난 일이니, 나를 때려라." 라고 한 말에 정신을 차리고 야구에 전념했다고 한다.[4]
1973년부터 상업은행에서 8년 동안 실업팀 선수로서 활약하다가 해태 타이거즈 창단 당시에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원래 포지션은 2루수였지만, 그 시점에서는 외야수로 전향한 상태였다. 그러나 수비 위치와 상관없이 이미 타격에 있어서는 궤도에 오른 선수였다. 초기 해태의 김씨 핵타선(김일권-김성한-김봉연-김준환-김종모)의 한 축이었다. 1982년 프로 원년시즌 그는 김봉연에 이어 백인천과 더불어 홈런 공동 2위에 오른다. 나머지 시즌은 성적이 아주 돋보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1985년을 제외하면 다소 평범한 수준.
특히 1987년은 완전히 실패한 시즌이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간호를 하면서 시즌을 치르다 보니 결국 타율 0.204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던 시즌. 그러나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과 4차전에서 잇따라 역전 홈런을 쳐내면서 맹활약, 정규시즌에서의 부진을 완전히 만회하며 그 해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역대 KBO 단일 한국시리즈 OPS 1위 기록'''은 덤. (타/출/장 .500/.625/1.083 '''OPS 1.708''')[5]
그 뒤 2년 정도 선수 생활을 더 하다가 고향인 전라북도에 생기는 쌍방울 레이더스에 합류한다.[6][7] 선수로서 뛴 것은 아니고 플레잉코치로 첫 해 전지훈련에 합류했다가 그 뒤 그대로 코치로 남게 된다.
3. 지도자 시절
새롭게 창단한 고향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주로 타격코치를 담당하면서 팀에 계속 있게 되었다. 워낙 프런트와 코치진, 코치진 내부의 갈등이 심해 자주 코치진이 바뀌는 쌍방울이었지만 창단 당시부터 있었던 선수단 구성원 중 전라북도 출신으로는 가장 유명했던 스타였기에[8] 그 와중에서도 팀에 꾸준히 남을 수 있었다.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도 여전히 타격코치를 맡았다.
1999 시즌 이미 주전 선수를 다 팔아먹은 쌍방울 수뇌부는 자존심이라고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김성근 감독을 중도 해임하고 감독 대행으로 김준환을 앉혔다. 그러나 이미 쌍방울은 쇠락하는 팀이었기에 쉽게 바뀌기는 어려웠다. 11승 38패를 기록했으며 해도 해도 안 되는 전력으로 분투하며 승과 패를 반복하지만 결국 시즌 말기 전력이 완전히 동이 남으로써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두번째 최다 연패인 17연패로 내몰렸다. 그나마 시즌 마지막 경기는 승리함으로써 18연패는 피하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시즌 후, 감독으로 정식 임명된다. 그러나 팀은 2000년 2월, 해체의 비운을 맞고, 그 해 3월 3일 쌍방울의 선수들을 주축으로 SK 와이번스가 탄생한다. 이 때 감독으로 임명되었다면, 정식으로 게임을 치뤘겠지만 신임 감독에는 강병철이 임명되고, 그는 수석코치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1년 뒤인 2001년 SK가 쌍방울의 색을 지우기 위해 대거 선수들을 방출하고, 코치진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그도 팀을 떠났다. 그래서 한국프로야구 감독 중에 유일하게 정식으로 임명되고서도 게임을 치르지 못한 감독이 되었다. 그래도 강병철 감독이 시드니 올림픽 코치진에 선임되어 준비하는 과정에서 잠시 감독 대행을 몇 경기 동안 맡기도 했다.
그 뒤 한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2003년 말 원광대학교 감독을 맡아 2005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우승, 2006년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2006년과 2008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2010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승, 2013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하계리그 우승을 거뒀고, 2016년까지 지휘한 뒤 손동일 코치[9] 에게 감독직을 이양하고 정년퇴임으로 물러났다.
원광대학교 감독 퇴임 후 아마추어 경기의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SPOTV에서 퓨처스리그 해설을 맡고 있다. 또 전주고등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를 맡는 등 고향인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야구계 재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원광대 야구부에 2,700 만원 상당의 야구장 외야펜스와 배팅케이지를 기증했다.
4. 연도별 성적
[1] 1976~1978년까지 군 복무.[2] 감독 대행을 맡고 감독으로 승격되었으나 쌍방울이 인수가 아닌 해체 후 재창단 형식을 취해 고용 승계가 되지 않아 수석코치가 되는 데 그쳐 프로 야구 팀 감독으로는 단 1경기도 지휘하지 못했다.[3] 10년 이상 길게 감독을 맡다가 정년퇴임으로 퇴임했다.[4] 실제로 감독이라 못 때리겠다고 하면, 때릴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5] 2위는 2010년 SK의 최정, 3위는 2015년 두산의 정수빈.[6] 해태 선수단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넘어 온 전북 출신 스타였다. 군산상고가 배출한 불세출의 슈퍼스타들이 해태에 많았지만 김준환을 빼면 모두 쌍방울로 넘어올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위에 언급된 김씨 타선 5명 중에 광주상고 출신인 김종모를 빼면 모두 군산상고 출신이었는데 김일권은 1988년 초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됐고 김성한은 이 당시 해태 타선의 핵심 멤버였으며 김봉연은 은퇴 후 해태에서 코치를 맡고 있었다. 그나마 상황이 자유로웠던 김준환이 해태를 떠나 고향팀에 오게 됐다.[7] 해태 시절 수석코치인 김인식과 투수코치였던 임신근도 같이 옮겨갔다. 김인식은 쌍방울 초대 감독이 됐고 임신근은 수석코치로 갔다.[8] 쌍방울의 창단식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선수단 소개 때 가장 많은 환호를 받은 사람이 김준환이었다. 전북 출신이었고 쌍방울 이전의 전북 연고팀이던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 출중한 활약을 펼쳤기에 쌍방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스타였다.[9] 1994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던 선수이다. 등번호가 8번이었고, 입단 당시에는 잠깐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이후에는 활약이 미미하여 외야수 백업을 전전하다가 1998시즌 이후 방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