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1916)
1. 개요
[image]
金學鐵
1916년 ~ 2001년 9월 25일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을 하였고, 경도되어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공산주의자이며, 광복 후에는 북쪽 지역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김일성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중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한 옌볜의 조선족 작가이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조선의용대 분대장 출신으로[1] 알려졌다. 본명은 '''홍성걸'''이다.[2]
2. 생애
1916년 함경남도 원산부 용동(현 강원도 원산시 남산동)에서 누룩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중이던 1929년 원산 총파업을 지켜보면서 사회 및 독립운동 의식에 눈을 떴다고 한다. 이후 항일 독립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1930년대 초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담[3] 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은 그를 1936년 난징으로 데려가 입당시켰다.
그는 민족혁명당의 지령을 받고 남경(南京)에 있는 중국 국민당의 중앙 군관 학교에 들어가서 제1대대 제 4중대에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좌경화되어 민족주의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하였고,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 중앙군관학교를 1녀 앞당겨 졸업하였다. 그는 1937년 10월 무한(武漢)으로 건너가 조선의용군 결성에 참가하였다. 1938년 한커우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에 가담해 무장 독립 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1940년 8월 29일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1941년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태항산에 들어갔다 1941년, 허베이성 일대에서 일어난 태항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4]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붙잡힌 뒤, 포로 신분으로 일본으로 압송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거기서 전향서를 쓰면 다리 치료를 해 주겠다는 일본의 제안을 끝내 뿌리쳐 3년 6개월 동안 피고름을 흘리는 고통을 견디다 결국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 형무소에서는 원래 다리 절단 역시 허용하지 않았으나, 그와 친분을 쌓은 의무관의 배려로 절단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5]
1945년 8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8.15 광복을 맞았고 그해 10월 19일 출옥해 서울로 귀국하였다. 이어 서울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박헌영이 집회 연설에서 "위대한 '''소련군'''[6] 과 미군에 의해 우리 나라가 해방됐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의 무장 투쟁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에 분개해 다음과 같이 박헌영에 반박했다 한다.
그 후 군정기 시기 1946년 10월에 월북하여, 《로동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다시 김일성과 김일성 정권에 깊은 환멸과 혐오감을 느끼고 195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우리 조선의용군은 일본이 투항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무장 투쟁을 견지했습니다.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 숱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또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남이 해방을 시켜줄 때만을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않았단 말입니다."
이후 중국에서 문학가로서 작가 생활을 보내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너무도 굴곡진 삶을 살았다….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가리켜 그는 '''"인민이 굶어 죽는데 웬 우상 숭배냐"'''고 비판했다. 특히 '20세기의 신화'에서는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자살로 인민들 앞에 사죄해야 한다'는 강경한 비판까지 내놓았다. 이로 인해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반동 분자'로 숙청, 10년간 옥고를 치렀고, 24년간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말년에는 연변에서 조선 의용군 활동을 정리하고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SBS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 조선 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에서 나눈 인터뷰를 살펴보면,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지키면서 북한, 중국, 소련식의 1당 독재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1년 종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자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한국에서 연변으로 돌아갔다. 별세 20여 일 전부터는 곡기를 끊는 한편 최후까지 조선 의용군 투쟁사 복원에 힘썼다. 9월 25일에 연변에서 서거했다.사후에는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한 후 상자에 담아 두만강에 띄워 고향인 원산 앞바다로 보냈다.…앞으로 먼 장래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안 될 수가 없지. (PD : 사회주의인 중국이나 북한도…(불평등이 심각한데)) 그 동안에 잘못해서 그런 거야. 시행 착오야. 시행 착오를 해서. 개인 숭배를 하고 이러니까 되겠어? 이번에 20세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뼈아픈 대가를 치렀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대가를 치렀어? 이제 다음 세대에 가면 다시는 그런 형태가 나오지 않아. 첫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이 없어져야 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당 독재고 1당 독재는 1인 독재야. 이건 20세기의 뼈아픈 경험이야. 그러나 다수당제 가운데서 공산당이 잘해서 정권을 쥐면 쥐는 거고, 놓치면 놓치는 거고, 이러면서 의회 투쟁, 국회에서 투쟁해 나가야지. 뭐 죽이고 하는 거는…(안 돼).
- SBS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 조선 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중 41분 50초 ~ 42분 55초
3. 저서
- 장편 소설 <격정시대>
- <20세기의 신화>
- <해란강아 말하라>
-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 2001년 서울 방문 때 출간한 수필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이 있다.
4. 어록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5. 외부링크
#, #
[1] 계급이 중사였다.[2] 상하이로 건너가 조선민족혁명당원이 되는 순간부터 가족이나 지인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해 이름을 김학철(金學鐵)로 바꾸어 사용했음이 사망 직전에 밝혀졌다.[3] 처음에는 김구의 임시 정부 쪽에 합류하고자 했는데, 막상 중국으로 건너가자 당시 임정이 윤봉길의 의거로 항저우로 거처를 옮긴터라 임정에 합류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4] 이때, 일본군 지휘관은 홍사익이었다.[5] 이후 김학철은 평생동안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다.[6] 박헌영답게 소련군을 미군보다 먼저 부른 것이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