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야스 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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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인물이 나가야스.
이름
나가야스 마사유키(永易 将之)
생몰
1942년 1월 1일 ~ 2003년 4월[1]
국적
일본
출신지
오사카부 모리구치시
학력
오사카 공업대학 고등학교 졸업[2]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1. 개요
2. 선수 경력
4. 이후


1. 개요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승부조작 범죄자.''' '''검은 안개 사건'''의 발단이 된 장본인으로 승부조작을 저지르며 퍼시픽리그의 명예와 인기를 나락에 빠트리고[3] 소속 팀이던 니시테츠 라이온즈를 망테크로 몰아넣은 자이다.

2. 선수 경력


오사카 공대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야구 NTT 서일본 팀[4]에 입사, 1961년 오사카 지역대회 에서 니혼신약 팀을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고 1962년 제 33회 도시대항 야구대회 1회전에서 니혼맥주(삿포로맥주 전신)를 상대로 무려 21과 1/3이닝 동안 270개를 던지는 강견을 자랑했다.[5] 그날 시합은 22회말 1아웃 상황에서 니혼맥주의 오타 마코토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패배했지만, 당시 나가야스의 투구수 270개는 아직도 도시대항 야구대회 한 경기 최다 기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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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테츠 라이온즈 시절의 나가야스.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하여 주로 중간계투로 활동했지만, 1965년 시즌 40경기에 출장했고 그중 10경기를 선발로 마운드에 올라 '''10승 3패 평균자책 1.93'''의 준수한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 시즌은 평범 이하의 성적을 남겼고, 1967년 웨이버 공시되어 이듬해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2시즌을 플레이한 뒤 후술할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1969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6시즌 통산 성적은 '''133경기 등판, 17승 17패 평균자책 2.81.'''

3. 검은 안개 사건


1969년 정규시즌 도중 요미우리 신문과 호치 신문이 당시 니시테츠 라이온즈 소속 외국인 선수 칼 보레스의 '''"경기 중에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는 동료가 있다"'''는 제보를 바탕으로 취재를 진행한 결과 나가야스가 야쿠자와 결탁하여 승부조작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포착, 그해 10월 8일 그 전모를 보도했고 일본 야구계는 물론 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 해 7월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난카이 호크스 와의 원정 경기에 등판한 나가야스는 난카이 타선에 된통 두들겨 맞았음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은 당당한 태도를 보였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당시 니시테츠 구단 사장인 '''쿠니히로 나오토시'''가 직접 나가야스를 불러 '''"자네 승부조작 하는거 아닌가?"''' 라고 물었는데 나가야스는 부정도 긍정도 않은 채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쿠니히로 사장은 그의 태도에서 ''''이놈은 승부조작범이다'''' 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요미우리, 호치 신문의 취재 시 승부조작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쿠니히로 사장은 '''"구단 내부에서도 극비 조사를 실시했다. (승부조작은)유감스럽지만 사실이다"''' 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당시 니시테츠 감독 겸 선수이던 나카니시 후토시는 승부조작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으로 구단주의 강력한 만류를 뿌리치고 그 해 10월 22일 현역 은퇴와 동시에 감독직 사임 및 퇴단을 선언했다.[6]
승부조작 사실이 보도되고 후쿠오카 시내의 나가야스의 자택에 기자들이 몰려 들었지만, 나가야스는 "난 승부조작 같은건 한 적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무엇을 말한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이라 코멘트한 후 평상복 차림으로 외출하여 그 길로 자취를 감췄다. 이후 나가야스는 1969년 12월 본처와 이혼하고 세간의 눈을 피해 내연녀의 고향인 삿포로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 사이 나가야스 건으로 발각된 승부조작 사건은 이듬해인 1970년 3월 '''검은 안개'''라 불리며 국회에서 까지 거론될 정도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고, 나가야스는 알고 지내던 '''주간 포스트''' 기자이자 르포작가인 '''오오타키 죠지'''를 만나 자신과 더불어 승부조작에 연루된 니시테츠 팀 동료들 명단과 니시테츠 구단으로부터 입막음 댓가로 550만엔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이 인터뷰 내용은 주간 포스트, 내외 타임즈 등의 잡지와 후지 테레비의 심야 프로그램 '''텔레비전 나이트 쇼'''를 통하여 대중에 알려졌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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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자회견 장면(사진 좌측 하단에서 두 번째가 나가야스)
1970년 4월 10일, 나가야스는 중의원 제 2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출두하여 승부조작 사실에 대해 실토하면서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니시테츠 소속의 연루자 6명과 '''다나카 츠토무''', '''사토 키미히로''' 등 은퇴 선수들의 이름을 폭로했다. 나가야스의 발언에 대하여 니시테츠 구단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이후 구단주 '''쿠스네 무네오'''가 갱생자금 명목으로 나가야스에게 돈을 건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 밖에도 나가야스는 전 소속팀 도에이의 선수이던 '''모리야스 토시아키''', '''다나카 미츠구''' 에게도 승부조작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여, 모리야스는 50만엔을 받았고 다나카는 이를 거절했지만 그 사실을 함구한 점도 밝혀졌다.[8] 더불어 수사 과정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이 오토바이 레이스 불법 도박에 가담했다는 사실도 들통났고, 다수의 선수들이 소환되면서 파문은 더욱 확산되었다.
나가야스는 1969년 11월 28일 커미셔너 위원회의 결정으로 영구제명 처분을 받고 야구계에서 영원히 추방당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내려진 영구제명 이었다. 그 외 연루된 선수들도 1970년 5월 죄목의 경중에 따라 영구제명 부터 출장정지, 근신, 엄중경고 및 주의 조치를 받았다. 이 때 나가야스를 포함하여 '''이케나가 마사아키(니시테츠)'''[9], '''오가와 겐타로(주니치)'''[10] 등 총 6명의 선수들이 영구제명 이란 오명을 뒤집어 썼다.
상세한 내용은 검은 안개 사건 항목 참조.

4. 이후


야구계에서 쫓겨난 나가야스는 삿포로에서 를 운영했다고 하며 죽을 때 까지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주간신조 2005년 6월 9일자 기사를 통하여, 나가야스는 2003년 4월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1] 사망일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 2008년 죠쇼학원 고등학교로 교명 변경.[3] 사건 이전에도 센트럴리그에 비해 인기가 밀리던 퍼시픽리그는 이 사건으로 속절없이 추락하게 된다. 그 이후 검은 안개 이전의 인기를 회복하기 까진 30여년 가량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4] 당시 팀명은 '''전전 긴키(電電近畿)'''[5] 이날 9회부터 등판하여 나가야스와 같이 22회 까지 던진 니혼맥주의 투수가 오가와 겐타로 였고, 공교롭게도 오가와 또한 후일 검은 안개 사건(오토바이 레이스 불법 도박)에 연루되어 나가야스와 더불어 NPB에서 영구제명 당했다.[6] 나카니시의 후임으로 이나오 카즈히사가 감독에 취임했고 나가야스의 영구제명이 확정된 이틀 후인 11월 30일, 쿠니히로도 구단 사장직을 내려놓았다.[7] 단, 조작 연루자들의 실명은 숨겼다고.[8] 이후 모리야스는 영구제명, 다나카는 엄중 경고조치로 둘의 희비는 갈렸다.[9] 특히 이케나가의 제명처분은 니시테츠로선 최악의 치명타였다. 1965년 데뷔 첫해 20승에 신인왕을 차지한 이래 매년 두 자릿수 승수를 뽑았고, 1967년 시즌엔 23승으로 다승왕 타이틀 까지 따낸 이나오 카즈히사의 뒤를 이을 당시 24세의 젊은 에이스 투수를 잃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케나가 자신 또한 한창 그라운드에서 뛸 나이에 야구계에서 내쳐졌으니 절망이 이만저만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이케나가는 선배의 체면을 세워주려 어쩔 수 없이 금품을 받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재심의를 거쳐 2005년 4월 영구제명 조치가 해제되었다. 야구계로 돌아온 이케나가는 현재 야구 해설가로 활동 중.[10] 심지어 이 인간은 1967년 시즌 '''MVP사와무라상을 받은 잘 나가던 에이스 급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사건을 저질렀다. 일본판 마재윤 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