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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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4]
- 코미디언 이주일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유행어.
'''코미디의 황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코미디언이자 '''1980년대 한국 방송계의 아이콘'''이다. 정치권에서 그 이름값 하나만으로 서로 먼저 모셔가려고 다툰 유일한 연예인이다. 참고로 1980~90년대 당시 아무리 인기많은 연예인이라도 실상 무식한 광대, 딴따라 취급받던 게 현실이었는데[5] 지금보다 더 콧대높고 권위적이었던 정재계 엘리트들이 먼저 주목을 하고 캐스팅을 서로 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 그의 위상을 말해준다.'''"정치를 종합예술이라고 하지만 코미디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4년 동안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 국회를 떠나 방송계로 복귀하면서 했던 이주일의 명언.
대머리로 인해 전두환을 닮은 것은[6] 물론, 저질이라 낙인 찍혀 방송정지가 된 사연으로 유명한데[7] , 방송정지가 풀린 사연도 특이하다. 막상 전두환은 이주일의 개그를 꽤 즐겨봤던지라 이주일이 방송에 나오지 않자 어리둥절했고 사정을 알고나서는 윗분의 취미를 모르는 아부성 충성으로[8] 이주일에게 방송정지[9] 를 먹인 아랫사람들을 크게 문책한 뒤, 여러 번 자택으로 불러 술자리 독대를 가졌다고 한다.[10] 이 이후로는 이주일과 전두환의 관계는 오히려 친밀하게 보일 정도였는데, 이는 중간에 이주일 친구인 박종화 감독의 인연도 있다. 또한 당시 재계 서열 1위 현대그룹의 왕회장 정주영도 개인적으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분을 맺고 후에 정치권에 나설 때 이주일을 먼저 캐스팅 할 정도였다. 대통령과 재계 서열 1위 회장이 먼저 찾아오게 만들 정도의 유명세와 네임밸류를 가진 한국 연예인은 이주일 이전, 이후에도 없다.
2. 소개
대한민국의 희극인. 본명은 정주일. 가천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코미디계의 전설로 남은 인물이다.
당시를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연예인 한 명이 이 정도 규모로 하나의 사회현상을 일으킨 인물은 대한민국 역사상 이주일이 유일하다. 이름이 유래된 그대로 ''' '2주일'(이주일)만에 신드롬급으로 떠서 업계 1등 국민스타가 된 유일한 연예인'''이다. 심지어 그 엄청난 가왕 조용필조차 당시 연예인으로서 가졌던 위상과 인기, 하나의 사회현상의 크기로 따진다면 이주일의 상대가 못된다.[11]
훗날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에 폭풍을 일으키지만 충격의 여파는 가요계 흐름변화에 그쳤고 연령대 역시 사회 장년층과 노인층에게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대한 충격의 크기로는 역시 이주일 신드롬에 비해 다소 약한 편이라 볼 수 있을 정도이다.[12] 당시 이주일은 그야말로 이제 말을 이해하기 시작한 어린 아이부터 80대 노인까지 TV를 보는 한국 사람 전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TV를 지배했다.
'''단 한 명의 연예인이 사회 전체에 이 정도 파장을 남긴 일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지상파의 위상을 알려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1980년대 지상파 방송의 위상은 경제적으로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면서 여가를 즐기기 시작한 대중들이 컬러TV 시대가 시작됨과 동시에 이전 시대보다 더욱 방송매체에 몰려들기 시작한 시점이다. 라디오의 시대는 완전히 저물고[13] 케이블 방송이나 인터넷 매체는 출현하기도 이전이다 보니 지상파 방송이 대중매체의 모든 걸 독점하던 것과 다를 바 없던 셈.
그런 시대에 압도적인 업계 원톱의 위상을 가졌던 이주일은 한 마디로 '현 시대의 유재석급 국민MC + 젊은 층에게 어필되는 케이블 방송 예능인과 유명한 인터넷 방송인들'을 모조리 종합한 위상 및 파급력 혹은 그 이상이었다고 봐도 좋은 셈이다. 사실상 '''조용필과 더불어 딴따라 광대 취급받던 연예인이 정재계 인물급으로 존경받는 유명셀럽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포문을 연 인물이라 볼 수 있다.'''[14]
어려웠던 1980년대, 국민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사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그 이유인즉, 코미디언으로서의 업적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금연운동에 기여한 공로(...)였다[15] . 어쨌건 이주일의 메시지는 역대 금연 광고 중에서도 가장 높은 효과를 냈다고 한다.
이주일식 코미디의 백미는 문장들을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시청자의 예상을 뒤엎는 타이밍에) 실없는 소리를 툭하고 던져서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이용식과의 콤비 개그나[16] 이 장면을 보면 잘 나타난다. 특히 얘기를 시작하면 그 주제에 집중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은 제대로 하는데 이것저것 두서없이 말하고보니 나중에는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더라라는 방식을 많이 썼다. 지금 스타일로 비교하면 당시 시대감안을 해서 약간 템포가 느긋한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아무말 대잔치 스타일의 스탠드업 코미디나 만담이 주요 스킬이었다. 중간에 분위기가 지루해질 틈이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수지큐 음악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거나 슬랩스틱 콩트, 못생긴 얼굴컨셉 개그를 선보인 것 역시 이주일 개그의 백미 중 하나이다.
'이주일'이라는 본인 그 자체 역시 주무기였는데 수많은 후배 코미디언들이 개인기로 선보인 특유의 어리버리한 말투와 독특한 허스키 보이스는 물론이고 눈이 풀린듯한 바보스러운 표정과 흐물거리는 듯한 몸짓 등 이런 점들이 당시 대중들에게 있어선 이주일이라는 인물이 하나의 캐릭터로서 받아들여진 큰 흥행요소였다. 이런 자체적인 캐릭터성이 심형래를 비롯한 일반적인 콩트 시대 코미디언들과 확실히 다른 부분이었다. 심형래는 뛰어난 바보연기를 통해 '영구', '펭귄', '바보 권투선수'등등 가상 캐릭터를 만들어서 웃겼던 콩트 원툴에 가까운 코미디언이었다면 이주일은 가상 캐릭터가 아닌 이주일이란 사람 자체의 본연적인 말투, 몸짓, 표정이 워낙 특이해서 어떤 코미디 무대에서든 먹히는 케이스였다. 즉, 심형래를 비롯한 당시의 코미디언들은 컨셉을 잡고 가상의 인물을 연기해야 웃겼는데 이주일은 등장만으로 웃긴 셈이다.
욱하는 성격을 자체적인 캐릭터로 컨셉잡아 호통치는 아저씨로 어필한 이경규, 박명수나 어리버리하면서 친근한 소시민적인 성격으로 어필한 김국진등이 종류는 다르지만 이주일과 비슷한 내추럴한 접근법으로 인기를 끌은 후배 코미디언이라 볼 수 있다. 어찌보면 콩트 시절보다 현 시대의 버라이어티 예능계에서 더 먹힐법한 사람 자체가 특이해서 웃긴 캐릭터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최불암과 동갑이다. 둘 다 1940년생. 또한 이소룡과 척 노리스 역시 이 두 사람과 같은 나이인 1940년생이다.
3. 생애
3.1. 관련 자료
- 한국일보 <나의 이력서> - 이주일 편 (2002.3.18 ~ 7.24일자 연재)
- 제1회: "이대로 무너질 수 없어"
- 제2회: 월남비사
- 제3회: 한국전쟁과 우리집
- 제4회: 불량학생 이주일
- 제5회: 군예대 시절(상)
- 제6회: 군예대 시절(하)
- 제7회: 유랑극단 시절
- 제8회: 돈 벌러 베트남으로
- 제9회: 스타로 가는 험난한 길
- 제10회: 하춘화와 나
- 제11회: 방송에 출연하다
- 제12회: 최고의 TV스타 이주일
- 제13회: TV출연 정지와 복귀
- 제14회: 밤무대의 황제
- 제15회: 호텔 피습 사건
- 제16회: 안병균씨와 나
- 제17회: 나의 인기 비결
- 제18회: 퇴출 위기와 미국 공연
- 제19회: 친구 박종환(상)
- 제20회: 친구 박종환(하)
- 제21회: 호텔 디너쇼
- 제22회: 어머니, 나의 어머니
- 제23회: 술집 사장 이주일
- 제24회: 모든 게 술 때문입니다
- 제25회: 내가 남을 돕는 이유
- 제26회: 서로를 불신하는 사회
- 제27회: 정주영과 나
- 제28회: 통일국민당 창당 발기인대회
- 제29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제31회: 홍콩의 밤
- 제32회: SBS로 납치되다
- 제33회: 총선 출마 프로젝트
- 제34회: 14대 총선 후보등록
- 제35회: 선거에서 이기는 법
- 제37회: "주일이, 당선될 줄 알았어"
- 제38회: "정주영 대표는 독재자다"
- 제39회: 정치판과 연예계
- 제40회: 의정생활 시작되다
- 제41회: 너무 일찍 찾아 온 화의
- 제42회: 교육청소년위 국정감사
- 제43회: 14대 대통령선거 유세
- 제44회: 14대 대선에서 패한 이유
- 제45회: 정주영과 국민당의 몰락
- 제46회: 사퇴 선언과 번복
- 제47회: 난 이렇게 돈을 모았다
- 제48회: 대치동 땅 사기 사건
- 제49회: 덩샤오핑 아들을 만나다
- 제50회: 국민당 탈당과 교육위 국감
- 제51회: 민자당 입당
- 제52회: 서울시장 선거 출마설
- 제53회: 15대 총선 불출마 선언
- 제54회: 내가 호화주택을 구입했다고?
- 제55회: 국회의원 생활을 해보니
- 제56회: 다시 방송으로
- 제57회: 북한에 납치될 뻔한 사연
- 제58회: 선배 코미디언들과 술
- 제59회: 조용필과 나와 술
- 제60회: 이경희와 최무룡
- 제61회: 축구와 나
- 제62회: 전두환과 나
- 제63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다
- 제64회: 연예계 어제와 오늘(상)
- 제65회: 연예계 어제와 오늘(중)
- 제66회: 연예계 어제와 오늘(하)
- 제67회: 내가 암에 걸렸다고요?
- 제68회: 계룡산 기(氣) 치료
- 제70회: 제2의 고향 제주도
- 제71회: 1960년대 스카라극장 주변
- 제72회: 옛 스타들의 콧대
- 제73회: 집 없는 설움
- 제74회: 과거를 묻지 마세요
- 제75회: 연예인들의 바람기
- 제76회: 축구 사랑 영원히
- 제77회: 스타의 비애
- 제78회: 앙드레 김과 나
- 제79회: 미주순회공연(상)
- 제80회: 미주순회공연(중)
- 제81회: 미주순회공연(하)
- 제82회: 코미디 소재 이렇게 구했다
- 제83회: 외국 여행지에서 생긴 일(상)
- 제84회: 외국 여행지에서 생긴 일(하)
- 제85회: 아직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 제86회: 암이란 놈은
- 제87회: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
- 제88회: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제89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상)
- 제90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하)
- 제91회: 박정구 금호그룹 회장
- 제92회: 정치인들에게 드리는 말씀
- 제93회(최종회): 연재를 마치며
3.2. 데뷔와 악단 사회자 시절
1940년 10월 24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태어나 운양초등학교, 경포중학교,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경원대학교(現 가천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춘천고 재학 시절 축구선수로 제법 활약을 보였고, 친구 박종환과 함께 신흥대학교 축구부로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이주일은 고향에서 보내 준 대학 등록금을 섯다판에서 모두 털리는 사고를 쳤고(...) 도피처로 군 입대를 선택했다. 군 제대 이후에도 곧바로 대학교를 못 갔다.
이주일은 1960년 현재의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 해당하는 문선대에 뽑히면서 처음 코미디를 시작했고, 1965년부터는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연예계에도 진출한다. 하지만 그는 1971년 베트남 파병 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 길에 지원하여 조금 이름을 알린 것을 제외하면 10여년 동안 무명의 코미디언의 설움을 겪으면서 상당히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 라는 그의 유행어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먹을 반찬이 직접 기른 콩나물 뿐이었던 에피소드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주일은 하춘화 공연의 전속 사회자로 대중들에게 처음 인지도를 얻었다. 1977년 11월 11일, 이리 시내의 극장에서 가수 하춘화의 리사이틀 MC를 맡고 있던 이주일은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하자 폭발로 인하여 무너진 극장 천장에서 떨어진 벽돌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 후두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고도 일어나서 하춘화부터 찾아 '''"내 머리를 디디고 내려오라!"'''고 다그쳐,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끌어내린 하춘화를 업어들고 전력질주로 사고현장에서 벗어났다. 이주일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하춘화는 다행히 찰과상 정도로 그치게 되었지만, 정작 이주일 본인은 후두골이 함몰된 후유증으로 수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이후 하춘화는 항상 자신이 공연하는 쇼의 사회자는 "이주일 아니면 안된다!"고 공연 관계자들에게 강력히 공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주일은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면서 한참 여동생 뻘의 연하인 하춘화를 자신의 은인으로 존경했다.#[17]
3.3. TV 진출과 전성기
1979년 하춘화가 결혼으로 인하여 연예계를 떠나게 되면서 (그러나 수년 후 복귀했다) 이주일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런 그를 위해 하춘화는 MBC에 이주일을 추천하였고 이주일은 당시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이던 '''웃으면 복이와요'''에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TV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40세'''였으니 코미디의 황제라는 명성에 비하면 굉장히 늦깎이로 방송에 데뷔한 셈이다. 참고로 당시 방송에 출연하던 코미디언 중 유일하게 서영춘 만이 방송국 대기실에서 이주일을 처음 보고 속으로 ''''저 친구 TV에 나오면 반드시 뜬다!!'''' 라면서 이주일의 재능을 간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존에 출연 중이던 선배 코미디언들의 견제와 '''"뭐 저렇게 못생긴 놈을 내보내느냐?"'''는 시청자들의 불같은 항의로 인하여 이주일은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단 1회 출연만에 강제 하차 당했다(...). 그래서, 나중에 '''"얼굴이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이주일의 유행어가 된다. 이후로도 ~~해서 죄송합니다[18] 등의 바리에이션으로 리그베다 위키나 나무위키 등지에서 많이 쓰이는데, 원류는 바로 이주일인 셈.
다행히도 연예계 선배인 송해의 주선으로 이주일은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김경태 PD에게 발탁되어 TBC의 코미디 프로그램 '''토요일이다 전원출발'''[19] 에 캐스팅 되었다. 첫 방송에서 이주일이 맡은 역할은 당시 청춘스타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가수 '''윤수일'''이 타잔 흉내를 내면서 줄을 타고 공개홀 한가운데 만든 연못을 가로지르는 콩트의 단역(정확히는 인디언#s-2)이었다.[20] 그런데 여기서 너무 긴장했던 이주일은 조연출의 큐 사인을 무대로 올라오라는 지시로 착각하여 바로 '''무대 중앙으로 올라가 버렸고, 결국 줄을 타고 내려오던 윤수일과 부딪쳐서 연못 속에 빠져 버렸다.''' 한술 더 떠 당황한 이주일은 연못에 빠진 상태에서 그대로 얼굴을 들어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 모습은 가히 물에 빠진 ET 꼴이었다. 그것도 '''생방송'''에서 말이다. 이 날 방청객과 시청자들은 "저놈 뭐하는 거냐?"면서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1996년 방영된 이주일의 투나잇 쇼 3화에서 다시 한번 언급된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당연히 두 번 다시 TV 무대에 얼씬도 못할 수준의 초대형 방송 사고였지만[21] , 이 때 빵 터진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재차 출연하게 된다. 이 때 맡은 배역은 의사였는데, 환자 역할을 맡은 코미디언 최용순[22] 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는 "운명하셨습니다"라고 한마디 할 뿐인 단역이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병실에 뛰어들어 오자마자 '''운명하셨습니다!''' 라고 외쳤고 이에 조연출 PD가 '환자 눈이라도 까뒤집고 대사를 쳐야 할 거 아니냐?' 라는 신호로 눈을 까뒤집는 시늉을 보이자 이주일은 그만 '''자기 눈을 까뒤집어 보이며''' '''운명하셨습니다!'''를 읊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생방송'''에서... 이 애드립 아닌 애드립에 방청객들은 물론 출연자와 방송 스탭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뒹굴어야 했다.
단 2번의 방송 출연에서 이처럼 엄청난 임팩트를 선사한 코미디언의 이름이 궁금해진 시청자들은 TBC에다 문의 전화를 계속해서 걸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반응을 본, 아직 정주일이라는 본명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딱 2주일만에 떴다'''는 뜻에서 이주일로 예명을 정하게 된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프로그램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에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 기라성 같은 유명 코미디언들이 출연하고 있었는데, 이후 대부분의 코너가 이주일을 전면에 내세우는 코너로 바뀌게 된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얼핏 보면 못생겼지만 자세히 뜯어보시면... 더 못생겼습니다"''', 라는 대표적인 유행어도 이 때 나왔다.
1980년에는 이상해[23] 와 콤비를 결성하여 판토마임[24] 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수지 큐(Susie Q)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독특한 춤은 이주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 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주일 추모 다큐멘터리에서 한 초등학교 교장의 증언에 따르면 "애국조회 마치고 '교실로 갓!'이라는 구령이 나오면 천 명에 가까운 전교생이 동시에 수지 큐 춤을 추면서 교실로 들어갔다니까."라는 반응까지 있었단다. 한마디로, 한 시대를 풍미한 코미디계의 절대황제였다.
이후로도 이주일은 '''"따지냐~?"''', '''"콩나물 팍팍 무쳤냐?"''' 등의 유행어를 선보이면서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서 이주일은 농심 전속모델로서 1982년부터 1984년에 강부자에게 승계하기까지 라면 CF에 많이 출연하였다. 라면 CF를 찍은 이유는 이주일 본인이 라면을 좋아해서였다고 한다.
다만, 일부 교사들과 특히 학부모들은 이주일을 굉장히 싫어했다. 이유는 "멀쩡한 애들 다 버려놓는다"(...)여서... 물론 학부모들이나 교사들의 이유가 타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게 이 당시만 해도 '보고 흉내내는 그대로 된다'고 믿던 때였으니[25] ... 그러자 이주일은 "내 프로그램을 보고 바보가 된 아이들은 나에게로 보내달라, 내가 일주일안에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라고 어이없어했었다.
여담으로, 심형래도 학부모들에게 이런 비슷한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학부모 曰 "애가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살펴볼려고 방문을 열고 봤더니 거울 앞에 서서 "띠리리리리리~ 소쩍꿍, 소쩍꿍" 하면서 춤추고 있더라." 라면서 심형래를 질책하는 말을 했었다. 그러자, 심형래는 크게 불쾌해하면서 '''"그 애가 중학생이 되도록 그러고 있으면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지?"'''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그맨 '옥동자#s-2' 정종철도 역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고 한다. 개그콘서트 시절 당시 갈갈이 삼형제에서 초등학교의 조회 흉내를 냈다가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사연인 즉 조회의 교장선생님 훈시 때가 되면 사방 여기저기에서 '킥킥'대는 바람에 난처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학생들만 그랬다면 좋았을텐데 선생들까지 이 'ㅋㅋ' 행렬에 동참(?)하는 통에 권위가 안 서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코너에서 나왔던 온곡초등학교는 '''실제로 정종철의 모교였다'''.
3.4. 방송출연 중단
이처럼 전성기 시절에도 너무 못생겼고, 저질이란 시청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항의[26][27] 를 계속해서 받았던 이주일은 결국 1980년 연예인 사회정화운동에 따라 해당 사유로 8월 29일에 열린 5개 TV/라디오 방송사 심의실장 회의에서 9월 1일부로 이기동, 배삼룡, 태진아, 나훈아, 심수봉 등 24명의 연예인들[28] 과 함께 출연금지 연예인으로 지정되어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고 1981년 신정에 출연금지가 해제되었다. 이후 KBS1 <100분 쇼> 등을 통해 방송에 복귀했다. 이주일이 방송에서 퇴출되기 직전에는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그 영화에서는 바지사장으로 사기당하는 시골 총각으로 등장한다. 제목은 리빠똥 사장#.
복귀 이후에는 TV보다 '''극장식당 무랑루즈''', '''초원의 집'''[29] 등의 밤무대 에서 많이 활동했는데, 지금보다 밤무대가 훨씬 비중도 크고 돈도 많이 벌던 시절이라[30] 그의 코미디계 원톱 지존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밤무대의 제왕이었다. 1980년대 초 전속금 1억[31][32][33] , 연예인 납세 1, 2위를 다툴 정도. 실제로 '''1980년도부터 86년까지 7여년 이상 연예인 수입랭킹 1, 2위'''를 도맡을 정도였다.[34] 쉽게 말하자면 80년대를 풍미한 트로이카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급이나 가왕 조용필 정도는 되어야 이주일이 돈 버는 정도로 엇비슷하게 벌었으며 그마저도 버금갈 정도이지 전부 이주일이 벌어들인 수입에는 못미쳤다. 오죽하면 소속사에서 '''보너스'''로 당시 최고급 수입차였던 토요타 크라운[35] 을 이주일에게 선물했을 정도.# 이 시기에 이주일을 TV에서 볼 수 있는 건 주로 청보식품을 비롯한 식품 회사의 광고들 뿐이다. 이 때의 유행한 유행어가 '''"일단 한번 와보시래니깐요~!"'''
당시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이주일의 개그를 직접 목격한 어르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주일의 진짜 지존 개그는 방송에서 보여주는 그런 건전개그가 아니라 밤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EDPS(...)."''' 약한 예를 들자면, 수캐가 소변을 볼 때 한 쪽 발을 드는 이유는?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이주일이 방송출연을 금지 당했던 것은 전두환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당대에는 프로그램 제목이 외래어 단속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방송시간이 당국에 의해 정해질정도로 방송에 대한 통제가 매우 강했던 시절이었고,[36] 서울의 봄이 끝내 좌절되고, 전두환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나서는 사회분위기가 다시 박정희때의 그 것으로 돌아오면서 방송사 관계자들이나 심의를 당담하던 사람들도 자연히 전두환의 눈치를 보는것이 당연했다. 그 당시 이주일 외에도 대머리였던 연예인들이 방송에 거의 나오질 못했다. 덧붙이자면 그 사람을 닮은 배우 박용식은 그 사람을 닮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한동안 방송을 쉬어야만 했고, 방앗간을 운영하며 참기름을 팔아 근근히 생활하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이후 MBC의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그 사람의 연기를 맡게 된다는 거다.
일단 명목상 대머리라서 잘린 건 아니지만... 전두환 관련 조크 가운데 이주일에 얽힌 것이 많긴 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전두환이 미국 순방을 갔는데, 마중 나온 교포 가운데 한 어르신께서 반갑게 악수를 하며 "어이쿠! 이주일씨, 먼길 잘 오셨습니다!" 했다던가? 여담으로 이런 개그도 존재했었다. 이주일과 전두환의 공통점: 1.)머리가 벗겨졌다. 2.) 축구를 좋아한다. 3.)푸른집에 산다(전두환: 청와대, 이주일: '초원의 집'(당시 이주일이 밤무대로 자주 섰던 극장식당의 이름; 유투브에 이에 대한 광고도 있다)).
일부 증언에 의하면 그 사람 정권 초기에 사회 분위기를 휘어잡는답시고 시범 케이스로 언론탄압을 하던 와중에 이주일에게 '저질 코미디언' 딱지를 붙여 퇴출시켰는데, 막상 전두환 본인은 이주일이 자취를 감추자 '''"아니, 그 웃긴 양반 요즘은 왜 안 나와?"'''라면서 의아해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얼마 안가 출연금지조치가 해체된 후에는 춘천고 동기생인 박종환 감독을 통해 전두환과 친분을 쌓게 된다. 이유는 전두환 본인이 축빠였기 때문이다.
3.5. 전두환과의 관계 그리고 축구
이주일 본인이 한국일보 <나의 이력서> 연재 당시 자신이 전두환을 풍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자신은 전두환을 경애하며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전두환과 이주일이 '''축구'''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일은 춘천고 시절 축구선수로 뛰었으며, 춘천고 동창생이 바로 1983년 멕시코 U-20 월드컵 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룬 박종환 감독이다. 전두환 역시 대구 공고와 육사 생도 시절에 축구부 골키퍼를 하였다.
이주일이 무명시절에 고생을 할 때, 박종환이 가끔씩 도와줬다고 하는데 이주일의 부인이 출산 후 몸조리는커녕 먹을 게 없어서 고생하고 있을 때 박종환이 미역과 쌀을 사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주일은 항상 박종환을 고맙게 생각했고, 유명 코미디언이 된 이후에는 박종환 감독에게 승용차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토크쇼에서 여러번 언급하였다. 본인도 고인이 된 이주일을 언급하면서 "그 친구만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며 각별한 우정을 과시했다.
이주일은 박종환 감독과 인연으로 전두환과 만났고, 이후로도 줄곧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사실 방송출연 금지 크리를 맞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당시로서는 '''방송출연보다 벌이가 좋은 밤무대에 전념할 수 있었고''', 생계에 지장은커녕 방송에서 얻은 지명도와 방송에서는 볼 수 없다는 희소성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경제적으로는 윤택해진 데다가 방송출연금지조치도 얼마 안가 해제되었기 때문에[37] 전두환의 조치에 불만을 크게 가질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예능 프로에서 개그맨 최병서가 이주일이 사기를 당해서 충격을 받고 포장마차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옆에 위로차 같이 있던 자신에게 뜬금없이 '전두환한테 억울함을 호소해야겠다.'며 술에 만취한 채로 오밤에 전두환 집에 찾아갔더니 전두환이 흔쾌히 맞이하며 술상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왔다고 하는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 여담으로 전두환과 이주일 앞에는 고기반찬이 최병서 앞에는 묵반찬이 있었는데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손을 뻗기가 눈치보여서 앞에 있는 묵만 묵묵히 먹었다고 한다. 이를 본 전두환은 최병서가 묵을 굉장히 좋아하는 줄 알고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묵을 더 갖다달라고 얘기했다고(...)
그밖에 잔디구장 건립기금으로 1천만원을 내기도 했고, 연예인 축구단인 무궁화 축구단 단장을 지낸 바 있으며, 상기했듯, 2002년 월드컵 당시 투병 중인 몸을 이끌고 직접 경기를 관람하기도 하였다.[38]
3.6. 구봉서와의 관계
'''일진 - 빵셔틀'''
대략 이걸로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구봉서가 진짜로 일진 날깡패였다는 건 아니고 그 정도로 이주일이 구봉서에게 쩔쩔맸다. 그것도 '''평생동안!''' 구봉서 때문에 이주일은 영원히 큰형님이 될 수 없었다.
구봉서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에 인격이 온화해서[39] 이주일이 구봉서 때문에 심한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그래도 같은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에 나이는 '''14살''' 차이, 방송데뷔는 '''4년''' 차이라는 만만치 않은 선배인지라 절대로 가벼울 수가 없는 상대였다. 코미디언의 군기가 얼마나 악랄한지 생각해보면 눈조차 함부로 마주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구봉서는 이주일에게 선배로서 그나마 잘 대우해준 편이다. 주병진이 이경규에게 보였던 태도보다 강도가 약했던 것은 확실하고 김형곤의 경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실,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을 비롯한 1세대 희극인들은 TV 방송이 존재하기 이전인 40~50년대 부터 만담꾼, 희극단을 전전하면서 희극인으로서의 경력이 수십년 이상 쌓였던 베테랑이었다. 그러니까 60년대 중후반에 데뷔하고 70년대 후반에서야 유명해지기 시작한 이주일이 40~50년대부터 활약한 한 세대 전의 인물이었던 구봉서에게 쩔쩔맨 것도 당연. 쉽게 비유하면 이경규 - 박명수의 관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구봉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정말로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딱 맞다.
이주일이 MBC로 복귀한 후 일요일밤의 대행진에서는 이런 이주일과 구봉서와의 관계를 이용한 개그 코너도 있었다. '이주일의 카운터펀치'라는 세태풍자 코너에서 마지막에 구봉서가 등장해서 이주일을 골려주는 게 포인트인데, 카운터펀치란 코너가 이주일이 굉장히 센 척하며 실컷 사회풍자를 하는 코너기 때문에(카운터 펀치라는 이름도 그렇고, 아예 펀치볼을 갖다놓은 이유가 이것이다. 사회의 나쁜놈들을 욕하며 진짜로 펀치볼을 두들긴다.) 일종의 반전 기믹인 셈이다.
3.7. 조용필, 이덕화, 최병서와의 관계
이주일은 이덕화, 조용필, 최병서와는 분야와 나이를 모두 초월한 절친이었다.[40] 특히 조용필과는 둘도 없는 술친구였다고. 두 사람 다 주량이 가공할 만한지라 주사도 끝내줬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심지어 조용필이 모친상을 당했을때는 이주일이 운구를 맡기도 했다.)
이외에도 최병서가 이주일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이덕화와 조용필을 전화통화로 낚거나, 심지어는 이주일의 사인을 똑같이 흉내내어(!) 술값을 결제한 에피소드 등이 유명한데 이덕화나 최병서가 방송에 출연하면 꼭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이들은 이처럼 친했었고, 1952년생인 이덕화는 12살이나 아래였지만 서로 의형제처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 이덕화가 당시 신한국당 광명시 갑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을 때 국회의원 시절을 생각하며 이덕화에게 '''정치 하지마라, 내가 그 판에 몸소 경험해봐서 아는데 그거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근데 왜 너는 그 판에 가려고 출마를 하느냐, 차라리 출마하지 말아라'''라며 충고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덕화는 이런 이주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한국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였고 결국 낙선하게 되면서 이주일과 마찬가지로 배우로 방송계에 돌아오게 되었다. 1997년에는 북한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아들인 이한영이 피살되자 북한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서 한때 이덕화의 자택에 은신한 적도 있다고 한다.[41] 이덕화는 이주일이 죽기 직전에 시한부 인생인 이주일에게 가발을 맞춰주기까지 했다. 이덕화 항목 참조.
최병서와는 전두환 집에 찾아간 일화 이외에도 여러 일화가 있다. 한번은 미국에서 후배들과 순회공연이 끝나고 기념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던 중 사진기가 없어서 근처 상점에 들렸을때 이주일이 최병서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야 카메라가 영어로 뭐냐?"''' 그러자 최병서는 "'''알면서 그렇게 캐므러?"'''라고 답했다고.
3.8.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1988년 4월 MBC의 한 코미디 프로에 나와서 "이제 13대 국회가 시작됐습니다. 13대 국회도 횡설수설을 즐겨하는 국회가 된다면 이 이주일도 14대 총선에 자신있게 출마하겠..."라는 개그를 시전한 바 있는데 4년 뒤인 1992년 스스로 뱉은 개그가 현실이 됐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으로 진출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통일국민당을 결성하였을 때 처음에는 참가할 듯하다가 마음이 심란해져서 홍콩을 다녀온 이후[42]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은 노구를 이끌고 그 날 이주일이 게스트로 출연한 SBS 본사 앞[43] 에 가서 '''10시간'''을 기다렸다. 이주일이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방송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뒷문으로 빠져나간 뒤인지라 정주영 회장은 헛걸음한 셈이 되었지만, 국민들에게 '정주영은 아직 늙지 않았다'는 믿음을 퍼뜨린 사건이었다. 결국 이주일은 왕회장의 노력을 차마 못 본 체 할 수 없는지라 출마를 결정하게 되었고 당당히 경기도 구리시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국민당은 '당원이 1000만인데 득표수가 400만에 못 미치는' 기현상[44] 과 함께 푸시식 가라앉았고, 도중에 민주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 이주일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정치판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 당시 연예계에 복귀하며 뱉은,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는 말은 전설로 남았다.
이주일은 후일 정치인 시기를 회고하면서 '''역시 여당이 좋더라'''라는 말을 남겼다. 정주영 정계은퇴 후 본인도 국민당을 탈당하고 정치에 의욕을 잃어가면서 지역구인 구리에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다고 생각하여 미안해했는데 마침 안정의석 확보에 나서던 집권여당 민주자유당이 입당을 제의하자 (어차피 정치에 뜻을 잃어 다음 선거 불출마할거니 지르고 보잔 식으로) '''구리에 실내체육관 하나랑 구리여고에 강당 좀 지어주소'''라고 조건을 내걸었더니 바로 조건을 콜했고, 예산이 반영되어 체육관과 강당이 지어졌다고 한다. 또한, 이주일은 국회의원 세비도 반납하는 등 차별화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시대를 앞선 세비 반납과 연예인 출신이라는 점 등으로 동료 의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국회 국정활동이 생방송으로 중계되었을 때 이주일이 질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 동료의윈들이 킥킥 웃는 장면이 방송에 나갈 정도였으니... 실제로 이주일은 국회의원이던 당시 상당히 진지하게 국정활동을 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딴따라 따위가 뭘 안다고 정치냐?"란 말을 들을까봐 열정적으로 임했다고.
1996년, SBS에서 방영을 시작한 이주일의 투나잇 쇼로 다시 연예인으로 돌아온 이주일은 복귀 뒤에는 꽤 수위 높고 풍자성 강한 개그를 선보였다. 너무나 강렬해서 방송위원회에서 경고를 수 차례 받았을 정도. 하지만 흑역사도 있었으니... 링크
3.9. 정주영과의 관계
그는 현대그룹 명예회장인 '''왕회장'''으로 불렸던 아산 정주영과도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미국 LA에서 이루어졌는데, 당시 LA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때였고 다음 개최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왕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홍보를 위해서 LA에 방문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주일은 1915년생인 왕회장보다 나이가 30살이나 어렸지만 같은 강원도 영동지방 출신이기도 해서[45] 왕회장과 의형제로 보일 정도로 친분을 가졌으며 이같은 인연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주일에게 '''정치 한 번 해보는게 어떠냐'''고 먼저 제안하던 사람 역시 왕회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로 그는 왕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하고 1992년 14대 대선 때 왕회장의 유세를 지원하고 상대방 후보로 있던 김영삼, 김대중을 강도높게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왕회장은 특히 김영삼을 강도높게 비난하였던 편으로 이주일이 개인적으로 김영삼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왕회장의 뜻이 그렇고 왕회장 지원유세로 나왔던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 개인이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10. 금호그룹 박삼구 회장과의 관계
아산 정주영 이외에도 경제인으로 금호그룹(현재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삼구 회장과도 면식이 있는 사이로 알려졌다. 이는 고인이 한국일보 <나의 이력서>에 연재할 때부터 밝혀졌다.
3.11. 흡연, 그리고 사망
'''"내가 막상 이렇게 되니까 그 때 비로소 믿는거에요. 이 얼마나 늦었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보고 빨리, 지금 빨리, 하루빨리 내일 모레 미루지 말고 빨리 끊으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 2001년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암 치료를 받으며 경기 고양 일산 국립암센터에 입원했을 당시.
'''"담배를 끊어버리지, 그러면 나같이 고통을 안 당할텐데. 이 얘기를 국민들이 알아듣고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 폐암 말기 투병중 MBC와의 인터뷰에서
'''"한때는 나도 담배를 자주 피웠던 골초였다. 지금 생각만해도 내가 저 때는 왜 저랬었는지 후회가 사무친다."'''
中에서
- 한국일보사 刊 저서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46]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 갑씩 피웠습니다. '''하… 이젠 정말 후회됩니다. 1년전에만 끊었어도 말입니다.(기침)'''"
원래부터 애연가였지만, 1991년 11월, '''7대 독자'''였던 외아들인 정창원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더더욱 담배가 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대신 사위가 상주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3일 후 SBS 개국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여러분 죄송합니다.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씨와 박철언 씨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태연하게 청중을 웃긴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다 2001년 가을 들어서 자신의 농장에 칩거하며 비밀리에 폐암 치료를 받다가[47] 10월 폐암 진단을 받고 국립암센터로 옮겨 통원치료를 받았다. 2002년 1월부터 금연 광고를 하기 시작하여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갑씩 피웠습니다"'''라고 호소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금연하도록 권장하였다. 이 광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담배의 해악성을 진지하게 고려하였고, 담배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성공적인 금연 광고였다.[48] 지금도 이 광고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폐암 판정을 받을 때 의사로부터 3개월 시한부 인생이라고 선고받자 축빠 이주일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월드컵 개막까지 6개월이나 남았기 때문에 조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혹여 보지 못하게 될까 눈물까지 흘렸으며, 의사에게 월드컵이라도 보고 죽게 해달라고 빌었고, 본인도 살아있을 때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활약하는 걸 꼭 보고 싶다고 염원하였다.
다행히 시한부 판정인 3개월을 훨씬 넘겨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팀의 4강 신화를 휠체어를 타고 관람할 수 있었다. 월드컵 첫 승 제물이었던 폴란드전에 이태복 당시 보건복지부장관의 초청을 받아 직접 경기를 관람하였으며, 이후 대표팀이 포르투갈을 이기고 16강에 진출하고 이탈리아전에서는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뜨렸을 때는 너무 기뻐서 암까지 이겨내고 건강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인터뷰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씁쓸한 부분.
결국 2002년 8월 27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49]
그가 사망하고 SBS에선 이주일 추모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는데, 내레이션이 성우 홍승옥이다.
3.11.1. 이주일의 사망 원인은 흡연이 아니다?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방송국에서 찾아가 인터뷰를 했고, 당시 이주일은 내 병은 담배와 관련이 없다는 말을 했으며, 사후 이주일의 사인이 '''"선암"'''(폐에서 발생하는 암의 일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KT&G 관계자 및 골수 애연가들은 "죽기 전에 좋은 일 하겠다는 뜻은 알겠지만, 안 그래도 무시당하는 우리까지 물고 가느냐"며 고인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의학적 지식이 잘못 알려진 것인데, 폐암에는 네 종류(소세포암, 편평세포암, 큰세포암, 선암)가 있고, 이 중 선암은 80년대 말까지 다른 폐암에 비해 여성/아동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흡연과 무관하지 않느냐는 말이 의학적인 통설이었다. 선암은 국내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폐암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흡연을 해도 폐암에 잘 안 걸린다'라는 미신까지 흡연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초 국민 보건 사업을 위한 암발생 실태 조사에서 국내의 선암 역시 흡연과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고, 동시에 미국와 유럽에서도 선암과 흡연의 발생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가 나오면서 선암이 흡연과 무관하다는 것은 완전히 헛소리가 되었다. 이로써 이주일과 선암을 둘러싼 논란은 일단락 되었다. 참고로 선암은 폐암 환자의 35~40%정도를 차지하며 비흡연자의 비율이 높다. 폐암 중 가장 흡연과 관련성이 적은 암이긴 하지만 흡연과 무관하지는 않다. 다만 비흡연자가 폐암에 걸렸다면 높은 확률로 선암인 것이다.
4. 기타
- 90년대까지만 해도 코미디언들의 세대 구분법은 이주일과 코미디를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2010년대 기준으로 희극계에서 고참급이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이주일과 같이 코미디를 해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이제는 공개 코미디의 큰형님격 인물들이 된 SBS 5기 코미디언들인 심현섭, 김준호, 강성범도 까마득한 신인 시절 때나 이주일이 진행하던 코미디 쇼에 출연했다. 이때 심현섭은 이주일이 MC 역할인 코너에 출연해서 옆에서 이주일이 설명하는 표정이나 행동을 재현해주는 역할을 맡았다.[50]
- 정치인 이회창과 목소리가 굉장히 흡사하다.
- 걷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거리가 50m를 넘어가는 곳이라면 자동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자동차는 당시 우리나라에 흔치 않던 토요타 크라운으로, 과거 신진자동차에서 국산화한 3세대/4세대 크라운도 아닌 6세대 모델을 수입한 것이다. 참고로 이 차는 소속 프로덕션에서 선물받았다고 한다. #
- 재미동포들을 위한 위문공연때 망중한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관람하던 중, 자버린 일화가 있다. 그냥 조용히 잤으면 됐으련만 코골이까지 동반되어 난처한 상황이 되자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한다고 한게 밖으로 나가서 극장 관람석 입구문을 열고는 '야, 재팬! 재팬 다 나와라!!"라고 외치고는 문닫고 나갔다고(...).
- 못생긴 외모로 괄시아닌 괄시를 받던 이주일에게도 외모로 이긴 상대가 있었으니 바로 가수 조영남이었다. 한 번은 그가 야간업소(당시엔 가족들이 같이 외식하면서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극장식당이 성행했다.)에 출연했는데 조영남도 같이 출연했다. 그런데 관객들 중 어린이 한명이 조영남을 보곤 울음을 터뜨렸는데 이유인즉 험상궂은 조영남의 외모 때문이었던 것. 그걸 보고 이주일이 날린 촌철살인 코멘트,
>"그래도 전 애가 울어버리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제 얼굴이 아무리 못생겼다지만 조영남이 보단 잘생겼습니다. 절 너무 괄시하지 마십쇼. 전 정말 조영남이 하나 바라보고 삽니다."
- 방송과 밤무대 겸업 시절 라면 광고는 꼭 출연했을 정도로 엄청난 라면광이었다고 한다. 최전성기 때 농심 전속모델로 활동했으며, 1985년에 청보식품이 런칭될 때 청보식품에서 전속모델로 모셔가기도 했다.
- 연예계에서도 손꼽히는 축빠였지만, 프로야구단 홍보대사 역할을 한 적도 있다. 청보식품 모델 시절이던 1985년 청보 핀토스의 홍보대사 겸 일일 응원단장으로 나섰다. 당시 이주일이 청보식품의 모델이기도 했고 청보 핀토스의 연고지가 이주일이 학창시절을 보낸 강원도라는 점도 영향이 있었다.[51] 창단식 때는 유니폼을 차려입고 사인볼을 주고 파도타기 응원을 주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 자유북한방송에서 내놓은 만화 김정은에 의하면 남한방송을 즐겨보던 북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52] 어렸을 때 이주일을 데려오라고 땡깡을 부려 측근들이 충공깽에 빠진 적이 있다고 한다. "이주일은 남조선에 있으니 못 데려 온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남조선이든 달나라든 그건 내 알바 아니니 데려오라!"고 들어먹질 않아서 김일성에게 보고하니 "알아서 해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결국 양강도에서 이주일하고 가장 닮은 농민을 찾아내서 분장/연습시켜 제법 비슷하게 따라할 정도가 되자 김정남 앞에 데려가 공연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20분 동안 말없이 공연을 보더니 "연극 하느라 수고 많았다"라고 가짜 이주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칭찬하고 그 농민에게 술과 양복을 내렸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 증언은 북한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장엽의 자서전에도 나오며, 김정일의 처조카이자 김정남의 이종사촌형인 이한영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사상 최고위층 탈북자 둘의 증언이 함께 나온 것이다. 다만 결말은 다른데 칭찬한 위의 서술과는 달리, 1996년 6월 이주일의 투나잇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이한영은 김정남이 저건 가짜라면서 마구 생떼를 부렸다고 한다. 그리고 토크쇼 MC였던 이주일은 이 사건을 이한영에게 직접 듣게 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고 8개월 후 이한영이 분당의 본인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신의 이모부 김정일의 문란한 사생활을 방송 출연을 포함, 각종 언론과 책으로 까발리는 바람에 북한 당국의 지령을 받은 남파 간첩 최순호 일당 2명에게 벨기에제 소형 브라우닝 권총으로 왼쪽 이마와 가슴을 저격당하여 암살되고 말았다. 이한영의 집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이주일은 공포에 질려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 코미디언으로써의 이주일은 두 말 할 것 없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한 집안의 남편이자 아빠로써는 그렇게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는 인물인데, 그 이유는 바람기가 있어서 결혼 후 외도를 꽤 한 것 때문이다. (본문에도 링크된) 한국일보에서 연재된 에세이나 기타 인터뷰를 보면 간접적/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래서 아내분의 속을 무척 썩였다고 한다. 여고생과 눈이 맞은 일, 용돈 대주는 여성과 데이트 한 일, 사창가에 간 에피소드 등 요즘 연예인이었거나 지금 시절에 이러면 구설수에 오르는 건 둘째치고 아예 매장당할 만한 부분들이 참 많다.
- 1991년, 7대독자 아들인 정창원을 잃었다. 선보러 가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훗날 수양아들을 두 명 두었다고 한다. 본인으로선 너무나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이 아들을 잃은 비보를 들은 이튿날 방송 녹화를 해야 해서 장례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 방송사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정말 잔인한 놈들"이라는 욕과 함께 말이다. 더구나 자신의 일생을 소재로 한 극화 '이주일의 울고 웃긴 30년'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을 때 제작진들이 이 비극도 같이 넣는 패륜(?)을 저질렀는데 이주일의 부인은 그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53] 이주일도 공연 마지막에 무대에 올라가서 관객들을 향해 "나는 울고 있는데 여러분은 왜 웃으십니까?"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많은 관객들이 울면서 돌아갔다고...
- 정치인으로서 활동을 마감하고 본업과도 같은 연예계로 돌아온 후 날린 멘트도 백미다. 방송 복귀 이후 한 프로에서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라고 한 후 궁금해 하는 시청자들에게 촌철살인으로 날린 멘트가 있었는데...
- 성우들 중에서는 박일이 이 분의 성대모사를 무척 잘 한다. 미중년 전문 성우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정말 싱크로가 좋다[54] . 박일은 격동 50년,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삼국지에서 방통 역할로 이주일의 성대모사를 제대로 선보였다.[55]
- 하지만 여러 성대모사 중 가장 압권은 후배 개그맨 이봉원으로, 이봉원은 과장된 표현이 아닌 이주일 생전의 디테일한 모습 그대로를 표현한다는 점 때문에 이주일 본인에게도 공인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이봉원은 이주일이 사후에 출연한 광고에서 이주일의 음성을 성대모사로 그대로 재현해냈다. 특히 SBS "웃으며 삽시다"에서는 한국 희극 발전사를 재조명한 코너 "코미디 천국"에 등장하는 이주일 역할을 맡았는데, 이주일의 성대모사와 용모를 완벽히 재현해서 "리틀 이주일"이라고 불릴 정도. KBS 폭소클럽2에서도 이주일이 이승[56] 의 풍자를 꼬집는 내용의 코너를 진행했었다. 다만, 이봉원이 성대모사를 하는 코너인만큼 이주일의 입을 빌려 이봉원이나 박미선을 극찬하는 자화자찬 개그를 보였다.
- 또다른 개그맨들 중에선 이주일의 절친한 친구이자 원조 인간복사기로 유명한 후배 최병서도 대단히 흉내를 잘낸다. 이주일, 이덕화, 조용필과 같이 술을 먹다가 최병서가 각자의 집에 다른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나 오늘 늦는다~"라고 하면 부인들이 전부 속았다고[57] . 이 외에도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야인시대의 신불출로 등장했던 중견 개그맨 김종국 역시 이주일의 성대모사를 많이 해서 잘 알려지기도 했다.
- 2017년부터 KBS는 <감성과학 프로젝트: 환생> 방송을 위해 이주일을 닮은 사람을 모집하고 있다.
- 개그콘서트 10주년 특집 때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분장실의 강선생님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김미화가 후배들 군기를 잡았는데, 강부자 역시 게스트로 나와서 이주일 오빠 심부름도 제대로 못해서 맞고 산 주제에 많이 컸다고 갈군다.
5. 흥국화재 보험 CF 주인공으로 등장?
- 대역 목소리 : 코미디언 이봉원
2008년 TV 광고에 사후 6년만에 생전 모습으로 흥국화재 보험 CF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흑백 분위기 속에 전성기 모습으로 나오게 되었으며 목소리가 생전 목소리와 흡사해서 일부에서는 '''이주일씨 죽었는데 어떻게 CF에 등장했냐'''는 의문이 나돌 정도였다.
참고로 이주일의 목소리는 후배 코미디언 이봉원이 대역으로 이주일 성대모사로 목소리를 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생전 목소리와 흡사해서 마치 고인이 부활한 것처럼 보였다는 반응이 많았다.
흥국화재측에서는 유족과의 동의를 얻어 과거 코미디 황제로 불리웠던 고인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부르기 위해서 광고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으며 광고출연료는 불우이웃돕기에 쓰인다고 하였다.
비슷한 사례로 2002년에 제작된 고려제약의 감기약 하벤플러스 CF에도 1987년에 작고한 서영춘과 두 자녀인 서현선, 서동균이 출연한 바 있었는데, 사실은 서영춘의 공연 영상에 이 둘이 춤추는 모습을 합성한 것이다. 실제로 해당 CF를 제작한 애드씨씨는 서영춘 공연 영상을 찾기 위해 국정홍보처 산하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를 찾아갔다. 배우 김인문의 경우에는 마지막 광고 촬영 때 병이 깊어져서 목소리를 낼 수 없자 그의 성대모사로 유명했던 개그맨 김준호가 대사를 더빙했다.
6. 저서
- 뭔가 말되네요(칼럼집)
- 이주일 평전 - 삐딱한 광대
- 이주일 인생 이력서 -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2002, 한국일보사 刊)' : 고인이 생전에 한국일보에 연재한 <나의 이력서> 연재분들을 엮어낸 유작. 아쉽게도 책 발행일이 고인이 사망한 직후에 나왔던지라 끝내 고인은 책이 발행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7. 출연
- 웃으면 복이와요 (1979/1982~1983, MBC)
- 토요일이다! 전원출발 (1980, TBC)
- 코미디출동 (1981~1984, KBS2)
- 쇼 2000 (1982~1984, MBC)
- 쇼 일요특급 (1983~1984, KBS2)
- 일요일밤의 대행진 (1984~1987, MBC)
- 텔레비안 나이트 (1984~1985, MBC)
-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1985~1987/1988~1989, MBC)
- 웃으며 삽시다 (1987~1988, MBC)
- 쇼 특급 (1987~1988, KBS1)
- 일요일 일요일 밤에 (1989, MBC)
- 스타탄생 (1990, KBS2)
- 현장쇼 주부만세 (1991~1992, SBS)
- 이주일의 투나잇쇼 (1996~1997, SBS)
- 이주일의 코미디쇼 (1997~1998, SBS)
8. CF
- 농심 안성탕면
- 농심 클레오파트라(포테토칩)
- 청보식품 곱배기라면
- 청보식품 아줌마우동/아줌마매운탕면
- 청보식품 열라면
- 청보식품 영라면
- 청보식품 육개장
- 한국통신 국제전화 001
- 보건복지부 금연 캠페인
- 흥국화재 이유 다이렉트(대역 목소리 : 이봉원) : 이주일 유족의 동의하에 고인의 생전 모습을 통해서 방영하였다.
9. 필모그래피
이주일은 브라운관을 넘어서 영화배우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정극에서도 개그 연기를 보여주었다.
- 평양 맨발 (1980.5.17) - 맨발 역[58]
- 뭔가 보여 드리겠읍니다 (1980.6.6) - 주일 역[59]
- 열번 찍어도 안 넘어진 사나이 (1980.10.14) - 만수 역[60]
- 이주일의 리빠똥 사장 (1980.10.18) - 김돌 역[61]
- 조용히 살고 싶다 (1980.11.28) - 조용근 역[62]
- 별명 붙은 사나이 (1981.2.28) - 살쾌 역[63]
-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1983.11.19) - 경일 역[64]
10. 디스코그래피
이주일은 코미디언 이면서 무려 3집까지 음반을 내어 가수활동을 한 경력이 있다.
- 이주일 1집: 노래하는 이주일 (1980.6.20) 듣기
자신의 캐릭터를 살린 코믹 음반으로 발표한 기념비 적인 첫 앨범. 타이틀곡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는 자신의 유행어이자 그동안 쌓였던 본인의 한을 풀어낸 구슬프게 표현한 트로트 곡으로 가수 현미의 남편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색소폰 연주자인 이봉조가 작곡을 담당했고 당시 유명극작가 겸 대중음악 작사가인 유호 선생이 작사를 맡았다. 또한 이주일만의 전매특허 댄스인 오! 수지큐가 2번트랙으로 수록되어 있다.
- 이주일 2집: 우주시대/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1982.5.13) 듣기
1집 이후로 2년만에 선보인 두번째 음반. 한국 대중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명작사가인 장경수 (대표곡:젋음의 노트, 꼬마인형, 꿈 이었나봐), 유명 싱어 송라이터이자 풍문으로 들었소로 유명한 가수인 함중아가 전곡에 참여하였다. 타이틀곡은 A면에 수록된 '우주시대'와 B면에 수록된 코믹한 노래인 '시골참새 서울참새'라는 노래이다.
- 이주일 3집: 버스의 손잡이가 불평을 하는데 (1989.5.10) 듣기
2집의 발표이후 무려 7년후에 내놓은 3번째 음반이자 이주일 본인의 마지막 앨범. 1980년대 후반 청소년의 세태를 재미있게 풍자한 '버스의 손잡이가 불평을 하는데'가 타이틀 곡으로 각종 쇼 프로그램에서 자주 불렀다. 또한 이 음반에는 SBS 예술단장으로도 매우 유명한 작곡가 김정택, 가수 이진관의 노래인 인생을 미완성이라는 곡으로 유명한 작사가 김지평, 당대 최고의 여가수인 윤복희가 참여하여 크게 화제를 모았다.
11. 소속 정당
12. 선거 이력
13. 사건사고
'코미디 황제' 이주일 묘소가 사라졌다… “유골 파내지고 비석 버려져”
일단 링크된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이주일의 부인이 유골을 정리해 갔고 비석은 버려진 상태라고 한다. 다만 이주일의 여동생은 묘지 관리비가 체납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이주일의 장녀는 관리비가 체납된 일은 없었다고 증언하고[66] 10년이 지나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외롭게 계시니 엄마가 모시는게 낫겠다고 하였으나 진의를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1] 정치인 생활 때는 당연히 본명인 정주일로 활동했다.[2] 네이버 프로필 참조.[3] 1991년, 교통사고로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4] 나중에 이 유행어는 노래로도 만들어졌으며 앨범으로 발매했다.#[5] 오죽하면 부모들이 공부 안하는 자녀들을 야단칠때 나온 말이 "너 정말 커서 뭐 될려고 그래, TV에 나오는 딴따라 될려는 거야!?"가 레퍼토리였다.[6] 사실 엄밀히 말하면 닮았다고만 방송정지가 된 것은 아니고 이주일이 “대한민국에 ‘빛나리’가 나만 있나?”라며 전두환을 풍자하는 듯한 대사를 치기도 했다. 애당초 저 정도의 저강도 풍자를 탄압하는 것 자체도 말이 안되지만, 해당 대사가 전두환을 지칭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전두환을 닮았다는 이유는 맞긴하다.[7] 이주일은 이때 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며 공연을 이어갔다. 당시 본인은 업소에서 “턱 나온 년도 있고, 까진 놈도 있고…”라며 정부를 향해 비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주일은 이 당시 "초원의 집" 전속 공연을 통해 방송 출연시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8] 신군부나 국보위가 직접 나서서 제지한건 이주일이 아니라 언론통폐합 및 김수정 작가의 사례이다.[9] 80년 8월~81년 1월[10] 북한의 김정일도 이런 사례가 있다. "그 웃긴 친구 어디 갔어?" 라는 김정일의 한 마디에 바로 현장 복귀. 다만 북한의 경우 무대에 못 나온 정도가 아니라 해당 사회자가 3년간 노동교화소(...)에 처박혀 있었다고 한다.[11] 지금 시대로 비유하자면 현시대 방송계, 가요계에서 각자 최고의 위상을 지닌 유재석과 방탄소년단 같은 느낌이라고 볼 수 있다. 조직적인 거대 팬덤과 가수라는 직업 특성상 순간적인 폭발성, 파급력은 방탄소년단이 더 높지만 매주 대중매체를 통해 국민들과 쌓아온 어마무시한 인지도와 친숙함, 종합적인 연예계에서의 입지는 유재석이 우위에 있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다만 현재는 조용필에 대한 평가, 위상이 이주일보다 더 높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 이유는 조용필이 역대 가요계를 통틀어서 가장 압도적이고 긴 원톱의 전성기를 누렸던 국민가수였으며 그가 남긴 커리어와 음악적 성취등이 수많은 명곡, 명반으로 남아 현 세대의 대중들에게도 강렬하게 어필되는 것에 있다. 동시기에 엇비슷한 위상을 가졌을지라도 프로그램이 끝나고 전성기가 지나면 다소 희석되는 경우가 빠른 예능인과는 달리 가수의 위상이 훨씬 더 오래가기에 일어나게된 현상이다.[12]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으킨 충격이 약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후로 가요계의 흐름과 판 자체를 뒤바꿔 버린 케이스이기에 후대에 끼친 영향력으론 이주일 신드롬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13] 물론 먼 훗날(?)인 2005년까지도 지상파 TV에서 평일 낮시간대에 방송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낮시간대를 때울려는 목적으로 라디오를 듣는 수요는 남아있었기는 했다.[14] 이주일 이후 코미디/예능계에서 시대를 지배한 원톱급 연예인들은 상당수 나왔으나 임팩트면에서는 앞서는 인물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 굳이 비교라도 가능한 사람들은 전성기의 심형래나 김국진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봐도 좋다. 이 둘 조차 비교가 겨우 가능한 정도이지 앞서거나 버금갈 정도는 결코 아니다. 당장 지금 국민MC라고 불리는 유재석조차도 60대 이상 넘어가는 중노년층 이상되시는 분들께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있을 수 있어도 팬덤이나 극도의 호감도까지는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대부분의 노년층들이 현재 예능MC들의 위상이나 임팩트가 옛날 코미디언들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때 가장 많이 손꼽히는 비교대상이 바로 이주일이다. 그만큼 당시 한국의 유아기부터 노년층까지 '열광'시켰던 유일한 코미디언이었다.[15] 2000년대 이후에야 한류니 뭐니해서 '''그나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은 연예인에 대한 대접이 좋지 못하기로 유명하다. 영국의 문화를 전세계에 전파해 국위선양을 했다는 공로로 기사작위까지 수여하는 영국과 비교해보면 천양지차로 다르다.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로완 앳킨스까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봉화기수 역할을 맡았던 것을 예로 들지 않아도 이들에 대한 영국의 대접은 한국의 그것보단 낫다.[16] 원래 이 콤비 개그는 예전에 고영수와 같이 해서 인기를 끌었다. 즉 이용식이 맡았던 역할은 원래 고영수가 맡았던 것.[17] 2002년 이주일이 사망하자 하춘화는 조사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너무 가슴에 사무친다며 고사했다.[18] 이를테면, '9이닝 1실점 해서 죄송합니다' 같은...[19] 제목만 보면 알겠지만 일본의 전설적인 예능 프로그램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을 카피한 프로였다(...).[20] 연못 무대 장치 건너편에서 "도와줘요 타잔!" 하며 타잔을 부르고 기다리는 제인 역할은 당시의 미녀 인기 가수 정윤선이었다. 얼마 후 배우 정동환과 결혼하며 은퇴했다.[21] 까마득한 후배들은 신인 시절 때 대사 한마디 잘못 쳤다고 퇴출당하기까지 했다. MBC 7기 최현진이나 KBS 13기 이승환이 그랬다.[22] 1946년 ~ 2000년 3월 11일. 한국에서 '''백금녀'''의 뒤를 이어 여자 뚱보 컨셉을 내세운 코미디언. '뚱순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주로 서영춘과 콤비를 이루어서 공연했다. 1969년에 KBS 공채 8기 탤런트로 출발했다가 1973년 동양방송 코미디언으로 희극계에 발을 내디뎠다. 또한 1992년에 여성으로서 최초로 KBS 희극인실 실장이 됐고 1996년에는 제3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희극인상을 받았으며, 당뇨병으로 인해 2000년에 세상을 떠났다.[23] 초반에는 선배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과 콤비였으나 4,5회 방송후 이상해로 교체[24] 사실 이 판토마임은 일본의 유명 코미디 그룹 더 드리프터즈 소속의 시무라 켄과 카토 챠 콤비가 1979년 8시라구! 전원집합에서 선보인 '''수염 댄스(ヒゲダンス)''' 코너를 표절한 것이었다.[25] 더구나 외모도 그런 사람이 혼자서 두서없이 말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헤에~'하고 어벙한 모습으로 웃고는 뜬금없이 음악이 나오자 춤추니 당시 어른들이 보기에는 '뭔 병신짓이냐?'란 반응이 없다면 이상할터였다.[26] 얼굴도 못생긴 사람이 바보, 천치 역할을 하니 꼴보기 싫다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많았다. [27] 웃긴 이야기지만, 80년대는 코미디언을 희극인이라고 하고 정극 연기를 하는데, 추남보다는 그럭저럭 외모가 되는 희극인을 우스꽝스럽게 분장시켜서 바보 연기를 시키는 것이 주류였다. 살살이 서영춘,맹구 이창훈, 바보 배삼룡,구봉서등을 보면 이목구비가 반듯한 스타일로 분장만 지우면 상당히 미남상이었다.[28] 사유들은 뭐 제각각이다. 당시엔 쉬쉬했던 정치권의 직접압력을 제외하면 문란한 사생활, 경제사범 같은 범죄사항 등의 이유로 지정되는 건 요즘이랑 비슷하다.[29] 해당 밤무대 경영자가 안병균 나산그룹 창업주였다.[30] 참고로 이 시기에는 지상파 TV에서도 밤무대 광고가 나왔었다. "일단 한 번 와보시라니깐요!" 문구도 TV CF 때문에 알려진 것.[31] 1984년부터 1987년까지 MBC 전속출연.[32] 이 돈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 당시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이 액수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로또에 혼자서 1등 당첨되었을 때 받는 액수와 느낌이 비슷한 돈이다.[33] 은마아파트 최초분양가가 2천, 즉 은마아파트 5채 값이다.[34] [image] 위의 이미지처럼 86년도 당시 3년 연속 연예인 수입랭킹 1위를 찍을 정도였다.[35] 이주일이 몰던 차는 82년식 6세대 크라운[36] KBS 9시 뉴스와 MBC 뉴스데스크가 9시에 방영되었던것도 당국에서 밤 9시로 방송시간을 결정했기 때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정도였을 정도이니 정치적인 검열은 어떨지는 안 봐도 비디오인 수준이고, 코미디 프로그램을 아예 금지하려다가 철회되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질때도 이 때였다.[37] 방송출연 금지를 당한 사유도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어이가 없지만 카더라처럼 전해지는 해금 사유도 다소 어이가 없다. 어느날 전두환이 TV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다가 이주일의 방송 등장이 뜸하다는 사실을 알고 "어? 그 웃기는 양반 요새 왜 안 나오나?"라고 측근에게 물었고 결국 얼마 후 방송출연 금지가 해제됐다는 이야기가 있다.[38] 다만 그 이전 히딩크 감독을 꽤 까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박종환이나 다른 축구인들도 엄청나게 까던 일이라서 이주일만을 비난할 건 못된다. 정확히는 '''"히딩크란 사람 하나에 너무 의존한다. 그에게 줄 돈으로 유망주 발굴을 해야할 거 아니냐? 감독 하나 바꿔서 월드컵 얼마나 잘하겠느냐?"''' 인터뷰했는데... 막상 월드컵 4강이란 신화를 실현시켰으니(...) 아니, 유망주 발굴 운운하면서, 국제 무대에서 활약할 인재는 해외에서 뛴 지도자를 빼놓고는 대다수가 무시한 것은 2002 월드컵 전까지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몰랐지만...[39] 90살 이상 장수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분석해보면 보통 이런 사람들이 많다. 젊어서 종교에 귀의하기 전에는 방탕하게 살았거나, 자식들에게 호랑이같이 엄했다는 일화를 보면 나이가 들어 자연스레 성질이 꺾인 쪽이 맞다.[40] 조용필이 1950년 생, 이덕화가 1952년 생.최병서가 1958년 생으로 세명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리다. 모두 이주일보다 10살 이상이나 차이가 나며 특히 최병서의 경우 이주일과 18살 차이로 거의 삼촌-조카뻘이나 부모-자식뻘 나이차다.[41] 이한영의 자택과 자신의 집이 얼마 안 떨어져 있었다고... 심지어 이한영이 죽기 몇 개월 전에 문서 하단에 있는 김정남이 이주일을 보고 싶어했다는 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42] 다만 홍콩 방문에 대해선 누군가가 손을 써서 출마를 막으려고 한 일이란 설도 있다.[43] 당시 SBS 본사는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었다. 현재의 태영건설 본사 건물. SBS 본사가 현재의 목동으로 이사간 것은 2004년.[44] 국민당 당원수에 허수가 많았다는 뜻. 이웃, 친척, 친구가 국민당 입당신청서에 그냥 이름만 올려달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허락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45] 아산 정주영은 강원도 통천 출신으로 이주일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지역이다.[46] 2002년 사망 전에 고인이 직접 한국일보 <나의 이력서>에 연재한 것을 묶은 자서전. 아쉽게도 이 책은 고인이 사망한 직후 발간되어서 끝내 책 발간을 직접보지 못하였다. 고인이 신문 연재 당시 병상에서 저술하여 탈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책으로 묶어져 발행되었을 즈음에 이미 사망한 직후였다. 한국일보사에서도 고인이 사망하기 전이라도 책으로 묶어 조속히 발행하려고 노력했다지만 예상 외로 고인이 사망하게 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실상 이 연재분과 책은 고인의 유작이 되었다.[47] 그러나 그해 5월 KBS2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의 객원 MC로 나왔고, 여름에는 종합검진 결과 이상이 없어서 2002년 설날 하춘화와의 공연도 준비 중이었다.[48] 이 시기만 해도 왠만한 장소에서는 다 재떨이가 있을 정도 였다.[49] 그 탓인지 2001년 가을 기획된 SBS 개그 프로그램<이주일 최양락 남희석쇼>가 무산됐고, 이 과정에서 최양락의 SBS 복귀도 없었던 일이 됐다. 최양락은 이후 오래 뒤에 SBS에 복귀하였다.[50] 세월이 흘러 강성범이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 서열 1위였을 당시, 남호연이 그를 디스하면서 이주일과 함께 코미디를 했느냐면서 자기 할머니 세대라고 과장되게 말했다.[51] 이 당시 청보 핀토스는 인천직할시, 경기도, 강원도, 이북5도를 아우르는 크고 아름다운 광역연고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1홈구장인 숭의야구장 외에 춘천시 온의동에 있던 야구장(현 KBS춘천방송총국 터)에서 홈경기를 치르기도 했는데 이 당시 이주일이 춘천 홈경기에 종종 초대됐다고 한다.[52] 원래 김씨 일가들은 남한 방송을 정말 좋아했다. 김정일도 술만 취하면 나훈아, 이미자 등의 남한 노래를 불러댔고 누가 북한 노래 부르면 재미 없으니 여기선 부르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53] 집에 돌아가서 앓아누웠다고 한다.[54] 송도순에게 전화로 흉내를 냈는데, 거기에 깜빡 속아 넘아갔다는 일화가 있다.[55] 참고로 김현정이 달려라 하니에 등장하는 고은애 성대모사도 엄청난 싱크로를 자랑하는데 박일이나 김현정이나 둘 다 실제 목소리는 상당히 매력적이며 (당장 직업부터가 하나는 정상권에 오른 성우, 또 하나는 정상권에 오른 솔로 가수이다. 목소리가 나쁠 수가 없다.) 그 성대모사는 자신의 목소리를 뭉개서 만드는 것이다.[56] 가끔 보면 이주일 역할의 이봉원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저승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57] '인간 제록스'라는 별명이 붙여졌을 정도로 성대모사에 극강의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출연정지중이던 이덕화와 낚시여행을 가서 일어난 에피소드에서 선보였던 이덕화 성대모사는 진행자들뿐 아니라 패널들까지 똑같다며 감탄할 정도.[58] 남기남 감독의 작품으로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코믹 액션물. 이대근 주연의 평양 박치기를 모티프로 삼아서 만든것으로 보이는데 공교롭게도 평양 박치기의 스탭진이 그대로 만든 작품이며 당연히 둘다 남기남이 감독하였다.(각본가만 변경.) 그리고 여기에서 나왔던 배우인 허진, 마영달, 남포동도 그대로 출연한다.[59] 김수형 감독이 만들었으며 자신의 실제 일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명배우 김희갑 선생, 고교얄개의 이승현, 당대 최고의 인기 코미디언인 김병조, 애로배우 출신의 김윤미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60] 주인공이 사회의 악을 뿌리뽑으려는 열혈청년인 라이터 수리공으로 나온다. 또한 극중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조직폭력배 박쥐파의 두목 역활로 배우 백일섭이 출연하였다. 이 작품 역시 남기남 감독의 작품.[61] 사회풍자를 소재로 한 다수의 영화를 만든 김인수 감독의 영화로 부동산 투기 붐이 유행할때쯤 물질만능주의를 풍자한 영화. 이주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영화중 하나이며 유일하게 단독항목으로 등재되어 있다.[62] 뭔가 보여 드리겠읍니다의 김수형 감독 작품. 의형제인 삼보 역으로 배우 손창호가 출연했다.[63] 배역명의 뜻은 살쾡이로 추정. 주인공의 아버지가 간첩에게 살해당하자 경찰이 되어서 복수를 꿈꾸는 반공액션물이며 이 작품의 히로인 역활로 배우 박원숙이 출연했다. 또한 이혁수 감독은 돌아이 3, 알바트로스, 퀵맨을 감독한 바 있다.[64] 영화제작자이면서도 서양화가 겸 소설가로 유명한 이형표 감독의 작품이며 주인공의 누이동생역으로 배우 원미경이 출연했다. 자동차에 생활용품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하며 생활하는 소시민의 일상을 그린 작품. 그밖에 조연으로 가수 혜은이의 남편인 배우 김동현, 중견배우 박원숙도 등장한다.[65] 1993년 통일국민당 탈당
1994년 민주자유당 입당[66] 활동 기간이 긴 편은 아니나, 유산이 적지는 않았다.
1994년 민주자유당 입당[66] 활동 기간이 긴 편은 아니나, 유산이 적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