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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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이며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함께 마라톤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한 주인공이다.
2. 생애
1932년 전일본마라톤선수권과 1933년 극동선수권에서 잇달아 우승했으며, 일본건국기념 국제마라톤에서는 1934년과 1935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그 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손기정을 제치고 1위로 골인하며 일본 대표로 뽑혔다. 원래 일본에서는 손기정은 세계 최고기록 보유자이니 마지못해 선발하더라도, 남승룡은 뽑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권태하 코치[2] 와 당시 조선 육상계의 후견인 격이었던 기업인 정상희가 "선발전 1위를 한 선수를 탈락시키자니 무슨 헛소리들이냐"고 강하게 반발했고,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일본 최초의 금메달을 딴 육상 영웅 오다 미키오가 남승룡을 지지하면서 논란이 정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2시간 31분 42초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땄다. 2위로 앞서 골인한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는 거의 실신할 듯이 기진맥진한 반면 남승룡은 완주하고도 기운이 남아서 제자리뛰기를 하며 손기정에게 축하의 말을 건낼수 있었다. 그의 동메달 획득은 막판 스퍼트로 30명 정도의 선수들을 앞지른 결과였다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본래 남승룡은 후반에 전력 스퍼트하는 스타일이었고, 만약 조금만 빨리 역주하기 시작했다면 손기정과 함께 금-은메달 석권도 가능했을 것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당시 로마자 표기는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은 '난 쇼류'(Nan Shoryu)를 사용했다.
그는 당시 금메달을 차지한 손기정을 평생 부러워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메달의 색 때문이 아닌,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서." 라고 회고했다.[3]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해방 후인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마라톤 선수로써는 많은 나이로 출전하여 10위권 안의 성적을 거두며 건재를 과시했다. 출전한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가슴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달고 뛰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후배인 서윤복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다.[4] 이후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를 지내고 전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국민체육진흥공단으로부터는 '경기력 향상 연구 연금'을 받았다.
2001년 2월 20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별세했다. 유해는 화장 후 경기도 용인시 용인공원묘지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평생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료였던 손기정도 이듬해 11월에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수상 기록
4. 기록
- 제 20회 전일본선수권 마라톤 2위(2시간 32분 33초. 1933. 11. 3.)
-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파견 최종 선발전 1위(2시간 36분 05초. 1936. 5. 21.)
-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2시간 31분 42초. 1936. 8. 9.)
-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10위(2시간 40분 10초 .1947. 4.)
5. 기타
- 금메달을 딴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많은 관심을 못 받았는데, 절친한 친구였던 손기정이 입버릇처럼 "같이 고생했는데 나만 대접받는 것 같아서 언제나 미안하고 큰 빚을 진 기분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를 두고 일본에서는 손기정은 반일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조선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았지만, 남승룡은 반일 성향 없이 일본에 순종적이어서 조선에서 외면받았다는 설[6] 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단지 세상이 1등만을 기억하기 때문이지 반일, 친일 성향과는 전혀 무관하다. 손기정이 눈에 띄는 반일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고, 남승룡이 친일 행동을 취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 일본이 남승룡과 손기정을 어떻게든 대표에서 탈락시키려고 올림픽 개최지인 베를린에 도착한 후 일본 선수들조차 반기지 않은 '마라톤 일본 대표 최종 선발'을 한번 더 자체적으로 열었는데[7] , 일본 선수들이 두 선수 몰래 지름길로 왔음에도 일본 선수들을 이기고 손기정 선수와 나란히 1, 2등으로 들어왔다. 그 결과에 너무 화가 나서 선발 레이스 후 일본 선수들은 질책과 구타를 당했다는 후문이다.
- 경기 전에는 꼭 찹쌀떡을 먹어야 제 기량을 발휘하는 징크스가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 때도 이 찹쌀떡 징크스는 여전해서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
- 1982년 KBS 1TV에서 한국 최초의 스포츠 드라마 《맨발의 영광》이 5부작으로 방영되었는데, 여기서 손기정의 명성에 가려져 있던 남승룡의 역할이 매우 비중있게 다뤄졌다. 손기정 역은 김영철이, 남승룡 역은 강태기가 연기했다.
-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가 3부작 47편으로 제작 방영되는데, 손기정과 남승룡 역은 누가 맡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드라마의 공식 사이트도 일본내에서만 볼 수 있게 막아놓은 상황이다. 이러는 것을 보면 이름만 거론되거나, 아니면 일본측 관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어서 안 나올 가능성이 있다. 허나 주인공이 마라톤 선수이고, 일본 입장에서는 첫 메달[8] 의 주역이다 보니 애매한 입장이다.
- 드라마 이다텐에서 2019년 9월 15일 방영분에서 베를린 올림픽을 다루면서, 결국 등장했다. 직접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 실제로 촬영되었던 영상들을 이용하여 등장시켰다. 해당 화 내내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조선인' 손기정과 남승룡이라고 언급을 하며, 주인공 카나쿠리 시소와 같은 신발을 신고 마라톤에 출전하는것으로 나오며, 제일 마지막에는 손기정과 남승룡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을 당시 일본인들이 손기정의 금메달에 환호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와 함께, 나레이션으로 손기정과 남승룡은 수상식때 국기가 올라가고 국가가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라는 이야기가 부연되며 등장인물 중 한 명이 '과연 저 사람들 심정은 어떠 할까'하면서 침울해 하는 장면이 나온다.[9] 다만, 작중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조선인임을 꽤나 강조하고 올림픽 정신과 연결하는 온정적인 형태의 저러한 표현과는 별개로 당시에 여러 일본인들이 손기정과 남승룡을 일본 대표에서 배제시키기 위하여 내내 벌였던 여러가지 치졸한 악행들은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 남동생인 남기룡 씨도 형처럼 마라톤 선수로 활동하였다. 구글에서 남승룡을 검색하면 프로필에 남기룡 씨의 사진이 나오며, 해당 사진은 순천시에서 열린 제6회 남승룡 마라톤 대회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이다.
[1] 現 순천시 저전동[2] 4년 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출전해 9위를 했었던 선수[3] 당시 시상대 사진을 잘 보면 손기정이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는 가운데, '''남승룡은 어떻게든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일장기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한다.[4] 서윤복은 이 대회에서 손기정의 올림픽 최고기록을 앞서며 손기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5] 다만 광복 이후로 따진다면 1948 런던 올림픽 남자 역도 미들급의 김성집(서울 출신)이 최초다.[6] 일례로 2019년 드라마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 방영 당시 '다들 쉬쉬하는 불편한 진실'이라는 식으로 일본 넷상에서 상당히 확산되기도 했다.[7] 월드컵에서 개최지에 도착해서 본경기가 열리기 바로 전에, 선수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평가전을 한 번 더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무리수이다.[8] 어디까지나 마라톤에 대한 거다. 일본이 딴 올림픽 메달은 전에도 많았으며, 손기정이 딴 메달은 일본의 역대 15번째 금메달이다.[9] 일단은 전반적인 뉘앙스상 조선인임에도 일본 국적으로 출전하여서 일본 국가를 수상대에서 들어야하는 저 선수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할까 하는것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