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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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4년에서 1949년 사이에 일어난 두 번의 내전을 통틀어서 부른다. 미국, 영국등 자본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왕국군과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등 공산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공산당(KKE)의 군사 조직인 그리스 민주군(ΔΣΕ) 사이에서 치러진 내전이다.
2. 배경
그리스에서는 터키 독립전쟁의 패전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1924년부터 1935년까지 '제2공화정'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결국 왕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막상 왕정복고를 하고 총선을 치러보니 제2공화정을 강력히 지지하던 자유당 등이 왕당파에 맞먹는 세력을 확보하여 정부 구성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공화파와 왕당파가 백중세로 씨름하는 틈에 공산주의자들은 공화파와 연정을 꾀해 세력을 늘려나갔다. 그러자 1936년 왕당파 군인 중 하나인 요안니스 메탁사스(Ιωάννης Μεταξάς) 장군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국왕을 무력화한 권위주의적 군사 독재 정부(8월 4일 체제)를 수립했다. 국왕 요르요스 2세는 꼴도 보기 싫은 공화파와 공산주의자들을 두고 보느니 메탁사스의 쿠데타를 지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메탁사스 정권에게 공화파와 공산주의자가 두들겨 맞으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답시고 1941년 그리스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이 워낙 못 싸우다 보니 핀다로스 산맥 등 그리스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한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장군의 그리스군에 막혀 진격이 지지부진했고, 이에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개시, 발칸반도 남부를 완전히 장악한다.
그리스 왕국이 추축군에게 점령되자 그리스 왕실은 영국으로 피신했고, 본토에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그리스국이 성립된다. 왕당파 장교들 다수는 1개 보병여단, 1개 특공대대, 2개 비행중대와 소수의 소형 군함을 이끌고 왕실이 있는 런던으로 망명했지만, 추축군에 맞서 그리스군을 지휘한 파파고스 장군은 부하들을 두고 어딜 가겠느냐며 포로가 되었다. 한편 메탁사스 정권에게 얻어 터지던 공화파와 공산주의자들은 각기 저항 점조직을 구성하여 대독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3. 내전으로의 길
그리스의 반추축군 저항조직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조직은 그리스 공산당이 비밀리에 조종하던 민족해방전선(EAM)의 산하 무장단체 그리스 인민해방군(ΕΛΑΣ, ELAS)과 이에 대항하는 공화주의자들의 민족민주그리스연맹(ΕΔΕΣ, EDES)이었다.
원래는 그리스군의 공화파 장교들이 상당수 가담한 EDES가 더 우세한 조직이었지만, EDES가 적극적으로 독일군과 교전하는 사이 EAM-ELAS는 비슷한 시기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의 어떤 공산당이 그랬듯이 적극적인 교전은 회피하고 군소 저항조직을 흡수합병하는 데 골몰하면서 급격히 세를 불려나간다.
1943년 10월 EDES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게릴라 부대를 소탕, 흡수하여 그리스 최대의 저항조직으로 떠오른 EAM-ELAS는 급기야 EDES까지 공격하여 소멸 위기로 몰아넣고, 1944년 초 그리스 산악지역에 임시정부를 세운 뒤 그리스 국왕과 그의 망명정부를 무효화하였다. 이미 독일군의 대전 패배가 가시화된 시점이니, 이후 벌어질 정권 쟁탈전에 대비해 미리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1944년 5월 영국과 소련은 전후 발칸반도 분할에 관해 논의한 끝에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세력권에, 그리스는 영국의 영향권 아래 둔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이 합의에 따라 EAM 본부로 파견된 소련 고문단은 영국 당국에게 협조할 것을 지시했지만, 이미 그리스 최대의 무장조직으로 떠오른 EAM-ELAS는 소련 고문단의 지령에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대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공격, 장악함으로써 이피로스 북서부의 EDES 지역을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넣는다. 뒤이어 1944년 10월에는 철수를 시작한 독일군의 물자를 곳곳에서 탈취하여 정규전을 벌일 물적 기반까지 구축했다.
4. 제1차 그리스 내전
1944년 10월 독일군이 철수하자 파판드레우의 그리스 망명정부는 영국군과 함께 아테네로 입성해 EAM과 EDES, 왕당파를 아우르는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연립 정부의 당면 과제는 공식적인 정규군 구성이었는데, EAM-ELAS는 말로는 정규군에 산하 저항조직을 편입시키는 데 동의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연립정부 수립으로부터 몇 주 지나지도 않은 1944년 12월 EAM-ELAS가 정규군 편입을 거부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EAM은 곧장 아테네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격렬한 시위 도중 시위대와 그리스 정부 경찰 사이에 총격전까지 발생했다. 더이상 거리낄 게 없어진 EAM-ELAS는 12월 3일 아테네에 3개 사단을 투입해 1개 보병여단과 1개 특공대대 규모의 자유 그리스군에 기반한 정부군을 가볍게 밀어내고 시가지 대부분을 점령했다. 1차 그리스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EAM-ELAS는 그리스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반응은 신속했다. 12월 5일 이탈리아에서 2개 인도인 여단을 긴급 공수받은 영국군은 보급품과 증원부대가 들어올 아테네 시가지 활주로를 결사적으로 방어하면서 버텨냈고, 12월 10일까지 이탈리아에서 1개 사단을 추가로 전개시키면서 형세를 역전시킨다. 그리스 정부 역시 구 친독 보안대대 구성원들을 사면하고 정규군에 편입하여 전력을 보강한 뒤 반격에 돌입했다. 격렬한 시가전이 12월 내내 이어졌지만, 영국군-그리스 정부군은 수적 우위와 항공지원에 힘입어 EAM-ELAS를 아테네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 결국 EAM은 1945년 1월 15일 체결된 정전협정에서 아테네, 펠로폰네소스, 테살로니키 지방으로부터 철수하기로 약속했다. EAM의 명백한 패배였다.
5. 제2차 그리스 내전
'그리스 내전'이라고 하면 보통 2차 내전을 말한다.
제1차 내전 후에 1945년 2월 12일에 열린 회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EAM-ELAS를 해산하는 대신 그리스 공산당이 그리스에서 합법적인 정당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합의를 맺었다. 그러나 1차 내전 종결 직후부터 X단을 비롯한 친정부 극우단체들이 백색테러와 고문을 저질러댄 탓에 정부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고조되었다. 45년 연말까지 이들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만 1,200명에 가까웠다. 특히 X단은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온건공화파를 비롯한 메탁사스 독재정권의 소극적 반대파까지 테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치안을 맡아야 할 그리스 정부군은 이를 방관했는데, 장교단이 왕당파 아니면 EAM-ELAS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았던 EDES 출신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백색테러에 무력으로 대응할 필요성에 합의한 그리스 공산당은 1946년 2월에는 1차 내전 패배 직후 북부 산악지대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빼돌려둔 구 EAM-ELAS 병력과 물자를 주축으로 그리스 민주군을 창설했다. 소련이 발칸반도와 흑해 연안으로 남하하고 소련과 서방 국가 사이의 관계도 악화되는 징후가 뚜렷해지자 공산 진영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그리스 공산당은 1946년 3월 31일의 그리스 총선 보이콧과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선거 바로 전날 밤, 그리스 민주군의 소규모 분견대가 올림포스 산 인근의 작은 경찰서를 습격했다. 제2차 그리스 내전의 시작이었다.
마르코스 비피아디스 장군이 지휘하는 그리스 민주군은 1946년 여름 내내 고립된 전진 초소들을 습격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46년 12월에는 북부 그리스 대부분과 그리스의 산맥줄기들이 10,000명 가까이로 불어난 공산 빨치산의 손에 떨어졌다. 불어난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재울 보급품은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 인접 공산국가에서 지원하기로 합의됐다. 그리스 경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지속으로 엉망진창인 상황이었다. 그리스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더없이 호의적인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한편 그리스 정부의 뒷배 역할을 하던 영국은 호전될 기미가 없는 경제 사정과 식민지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분쟁들 때문에 그리스를 도와줄 형편이 되질 않았다[2] . 1947년 2월 영국은 더는 그리스 원조프로그램을 감당할 수 없다고 미국에게 통보했고, 이전부터 소련의 발칸반도 정책을 의심스럽게 지켜보던 트루먼 행정부는 거리낌 없이 이 문제를 떠맡기로 결정했다. 1947년 3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여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대규모 원조 프로그램 실시를 본격화했다.
원조 초기 미국은 그리스에 대한 지원을 물적 지원에 한정했다. 경제가 원 궤도로 복귀하고 그리스 정부군에 충분한 장비가 갖춰진다면 공산 게릴라 정도야 자체 역량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1947년 차관과 공여를 합쳐 1억불 넘는 물자 지원을 받은 그리스 육군은 한 해 내내 졸전을 거듭하며 밀려나기만 했다. 알바니아 국경지대는 숫제 포기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1947년 말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 북쪽 산악지대에 임시정부를 세웠고 아테네의 그리스 정부는 이를 막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아직 서구권과의 관계를 끝장내고 싶지는 않아 코민테른이 그리스 공산당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스탈린은 자신의 활동에 사사건건 반발하던 티토가 그리스 공산당을 지원하자 그리스 공산당에 티토주의자들을 숙청하라는 지령을 내려 그리스 공산당은 분열되어 심각한 병력부족을 겪었다.
게다가 1948년부터는 미국이 단순 물자 지원을 넘어 그리스군의 작전 및 교육훈련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고 나섰다. 장교단의 질적 문제와 쿠데타 우려로 인한 제약으로 숫자만 많았지 적극성이 결여된 오합지졸이던 그리스 육군은 이제는 일선 소부대까지 '조언'하기 위해 내려오는 미군 고문관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특히 새로 부임한 군사고문단장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그리스 육군의 영관급 이상 장교들에게 공격성이 결여돼 있다고 질타하며 대담한 공격과 적극적인 추격을 주문했다. 1948년 겨울에는 양측의 작전이 중단되는 동계 기간 동안 그리스군에게 빡센 교육훈련 커리큘럼을 소화하라는 지시도 하달됐다. 여기에 그리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장군의 지원사격이 가세했다. 독일군의 침공 전까지 이탈리아군을 잘 막아내 명성이 높던 파파고스 장군의 밴플리트 지지는 미군의 작전 간섭에 반감을 품은 그리스 장교단 내에서도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장교단의 질적 향상과 엄격한 교육훈련이 궤도에 오르자 드디어 일선에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49년 봄부터 그리스군은 연이은 산악지대 포위 및 소탕 작전을 펼치며 매번 수천명 단위의 사살 및 포로 획득 전과를 올렸고, 이런 수준의 피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리스 민주군은 한 해가 가기 전에 붕괴했다. 1949년 10월 16일 그리스 공산당 방송국은 내전이 끝났음을 발표하고 많은 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이웃나라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으로 도망쳤다.
6. 영향
3년 간의 내전으로 양측 모두 5만 명이 전사하고 50만 명의 그리스인이 난민이 되는 대재앙이 일어났다. 대전쟁으로 페허가 된 그리스는 이 내전으로 기둥 뿌리까지 파괴되어 버렸다.
제1세계 진영은 내전의 승리로 발칸반도 전체의 공산화와 공산주의 세력의 지중해 진출을 막을수 있었다.
제2세계 진영은 제1세계 국가인 터키가 막고있는 보스포루스 해협 대신 그리스와 아드리아 해를 통해 지중해로 나가려 했으나 내전의 패배로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내전으로 인해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생겼고 내전이 끝나고 1년후인 1950년 6.25전쟁이 벌어지자 UN군의 일원으로 참전을 하게 된다.
내전을 계기로 그리스 공산당은 불법 정당이 되었다. 이는 1974년에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되면서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