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7호 작전
1. 개요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일본 본토 침공이 임박하자 대본영이 수립한 결호작전의 일부. 일본 본토가 아닌 지역으로는 유일하게 '''제주도'''가 포함된 경우다.
2. 배경
1944년 7월, 사이판 함락으로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본토가 미군기의 공습 가시권에 들어가면서 미군의 본토상륙에 대한 방어준비가 시작되었다. 이때 일본은 미군의 상륙방향을 두 경로로 예측하고 있었다. 하나는 사이판과 괌을 기지로 하여 일본 동남부의 오가사와라 제도를 점령하고 간토 평야로 직접 상륙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필리핀에서 오키나와 열도를 거쳐 일본 서남부의 규슈 방면에 상륙하는 것이다. 규슈 방면에 상륙하는 경로가 채택될 경우 미군의 전략상 제주도를 점령한 후 여기에 비행장이나 해군기지를 설치해 일본 본토 공격의 전진거점으로 삼을 가능성이 커졌다. 즉 미군은 제주도를 거점으로 삼아 일본 큐슈에 대한 상륙작전과 관동군의 일본 본토 합류를 차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일본의 남단 규슈지방과 중국 남부를 연결하는 직선상에 위치하면서, 필리핀과 한반도 사이에 놓여 있어 지정학적으로 한중일 3국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합군이 필리핀에 상륙한 1944년 10월부터 제주도의 방비는 초미의 과제가 되고 있었다.
1944년 11월이 되면서 일본은 대륙으로부터의 수송항로에 대한 해상공격과 함께, 제주도에 공격거점을 만들기 위한 상륙도 있을 수 있다고 가상하기 시작했다. 본토결전 구상의 부상과 함께 제주도는 ‘결7호 작전’의 중요한 군사거점으로 인식되어 간 것이다.
1945년 6월 8일, 도요다 소에무 군령부 총장은 천황이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미군이 취할만한 전략 중에서 제주도 방면의 공격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즉 '''“미군의 제주도 방면 공격은 일본과 조선 간 교통의 완전 분단을 목적으로 하고 또한 대일공격기지를 추진하기 위한 견지에서 이를 강행해올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해군으로서도 제주도에서의 결전준비를 더욱 진행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섰다.
3. 작전의 기획
1945년 2월 9일, 일본의 방위총사령관은 각 방면군 사령관에게 6월경을 목표로 한 일본 본토결전 작전준비의 완성을 명령하였다. 이를 암호명 '결호(決號)작전'이라 불렀는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미군이 필리핀에 이어 1945년 2월 이오지마를 공격하자 오키나와 본토와 규슈 등 서부 일본 상륙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12일 대본영은 각 군 작전주임참모회합을 갖고 그 자리에서 ‘결호작전’지역 중에서도 미군의 상륙지점으로 제주도와 훗카이도가 유력하다고 판단하여 '결1호작전'과 '결7호작전'이 보다 강도 높게 다뤄졌다.
이에 따라 3월 20일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결7호작전' 준비요강이 한반도를 관할하던 제17방면군에게 하달된다. 그 내용은 2~5개 사단 규모의 미군이 1945년 8월 이후 제주도 또는 한반도 이남 지역으로 상륙할 것을 예상하고, 그 지점을 집중 방어하는 한편, 상륙부대를 향해 적극적인 공격도 감행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때 제17방면군에게 지시된 '국토결전작전 준비요강'의 요지를 보면, '결7호작전'으로 명명된 제주도에서의 결전작전을 위해 제58군사령부와 주력병력으로 2개 사단 및 1개 혼성여단, 기타 예하부대를 배치하도록 했다. 기동병단으로 한반도에 제121사단을 대기시키고 포병과 전차부대를 중국과 만주등지서 이동, 제58군에 직할시키고 있다. 이와 함께 실제 '결7호작전'이 진행되면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관동군과 중국 방면군에거 2~3개 사단을 증강토록 했다. 이러한 지시대강에 의해 제17방면군이 마련한 '결7호작전'의 구체적인 준비요강은 아래와 같다.
적의 상륙판단
1. 북 규슈 방면 상륙 또는 조선해협 돌파를 위한 기지로 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공략함.
2. 위를 목적으로 한 남선(한반도 이남) 도서지대 공략.
3. 대륙 교통차단을 위하여 남선(한반도 이남)지구 일각에 상륙.
4. 위를 목적으로 하는 부산지구에의 상륙 강행.
5. 정략을 목적으로 한 조선본토 중심지대의 공략.
- 적의 사용병력: 2~5개 사단
- 상륙시기: 차기 작전의 준비기간으로 판단해서 8월 이후로 예상됨.
작전방침
1. 주력으로 적의 주요 상륙점을 확보하고, 적의 침공에 제(除)해서는 일체의 전력을 결승점에 집중하여 적을 격멸함.
2. 제주도는 당초부터 유력한 병력을 배치하고 독력으로 동 섬을 확보케 함.
3. 병력의 기초배치: 부도 제2의 1,2와 같음.
4. 작전준비 완료의 시기: 작전준비는 8월 말 개성(槪成), 10월 말 완성을 목표로 함. 단, 제주도에서는 개성 시기를 7월 말로 예정함.
제17방면군은 미군이 북 규슈 방면 상륙 또는 대한해협 돌파를 목표로 할 경우 제주도를 공략할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한 미군의 상륙 시기는 8월 이후로 예상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서의 결전작전 준비에 있어서도 주력을 투입해 미군의 상륙지점을 확보해하고 미군이 상륙작전을 전개할 경우는 전력을 기울여 이를 격멸토록 하고 있다. 이러한 작전준비는 다른 지역의 경우 8월 말에 기본골격을 완성하고, 10월 말에는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으로 했으나 제주도는 그보다 1개월 앞선 7월 말에 기본골격을 완성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정세변화에 따른 작전계획의 변경으로 1945년 6월부터 '제3차 병비강화'가 진행된다. 재17방면군의 전력강화 계획은 6월 25일 오키나와 함락, 마리아나와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군기에 의해 한반도 남부해안 등지가 공격받음에 따라 다시 수정되었다. 제17방면군은 미군이 월등한 항공력을 바탕으로 제주도나 남부지방에 상륙할 날이 멀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4. 작전의 준비
'결7호작전'을 위해 제주도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약 74,781명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수비군의 주력인 제58군의 작전목적은 미군이 제주도 지역에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공군 또는 해군기지 설정 시도를 막는 것으로써, 작전 초기부터 미군을 격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해군기지나 공군기지가 위치한 해안지역을 미군에게 내어 주지 말아야 했지만, 제58군은 초동결전보다 내륙 지구전을 염두에 두고 결전부대의 주진지선을 해안에서 후퇴시켜 후방배치를 하고 있었다.
제58군의 전투서열이 하달되던 1945년 4월 일본 본토에서는 전쟁종결의 임무를 지고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들어섰다. 1945년 4월 7일 성립한 스즈키 내각의 임무는 본토 결전의 준비와 명예로운 강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미 패전을 예감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종전에서의 유리한 협상을 위해 강온 양면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것이 결전작전 지역에서는 미군에게 가급적 많은 타격을 가함으로써 유리한 종전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한 결전의 강요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서 결전부대와 이보다 더 많은 작전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전개되었다. 제주도에서 결7호작전 역시, 이러한 일본 정부의 종전 전략 속에서 제주도민의 대량 희생을 볼모로 한 초기 결전작전이었다.
결7호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군 군사시설 구축작업에 제주도민은 다양한 형태로 동원되고 있었다. 진지 구축작업, 비행장 건설 및 위장 작업, 해안특공기지 구축사업, 군수품 수송 등 대부분의 전쟁준비 공사에 동원되었다.
진지 구축작업의 경우 제주시 별도봉과 원당봉, 어승생악, 조천읍(구좌읍) 교래리 부근 오름 등에 동원 됐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 중 일부는 노무동원, 일부는 징집 등의 형태로 동원되고 있었다. 작업은 대부분 일본군의 감독 아래 행해지고 있으나, 해군이 관할하는 공사에는 한국인 기술자들이 감독을 하기도 했다.
포진지 구축작업은 결7호작전 계획이 수립되면서 가장 시급하게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4월 8일 제408특설경비공병대가 경비소집되는데, 이를 위해 제주도내에서 207명, 육지에서 71명이 입대했다. 이 시기는 결7호작전을 위해 제96사단 제292연대 및 박격포대(독립속사포제32대대)가 모슬포에 도착하는 시점이었다.
징병자들은 대부분 1943년에 연성훈련을 받고 1년 정도 대기하다가 1944년 말~1945년 초 또는 봄에 소집되었다. 당시 제주시의 육군서비행장(정뜨르비행장)과 관덕정 부근 제주주재소로 소집된 징병자들은 제주공립농업학교로 이동해 부대편성을 한 후, 안덕면 군산과 당산 등지의 포진지 구축작업에 투입되었다. 시기와 부대배치 상 제96사단에 배속된 독립속사포제32대대가 이곳에 주둔하기 위한 진지구축작업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군산과 단산의 포진지 구축에는 20~45일 정도 동원되었다.
이들은 이후 바로 어승생악으로 이동해 진지 구축작업에 임하거나, 제주시 오라동으로 이동해 1개월여 진지구축 작업에 투입시켰다.[1]
노무동원자와 징병자들은 작업영역이 달랐다. 군수품과 식량들을 수송하기 위해 주민들을 동원했는데, 15세 전후의 미성년자부터 60세 정도의 노인까지 참여했으며, 이들은 주로 소와 마차 등으로 군수품을 목적지까지 수송했다. 모슬포해군비행장에는 쌀 등을 지하호에 운반하기도 했고, 제121사단 사령부가 있는 발이악(바리매)에서 유수암까지 군수품을 수송하기도 했다.
해안특공기지 구축에도 제주도 주민들을 동원했다. 이 경우 작업반장, 즉 작업책임자는 대부분 한국의 다른 지방 사람들이 맡았다. 1945년 3월부터는 모슬포 송악산 해안특공기지 공사에 도민들이 동원됐다. 공사기간은 4~5개월 정도였다. 서귀포 삼매봉 해안특공기지 공사에는 1945년 4월부터 주민들이 동원되어 2개월 동안 진행됐다. 조천면 함덕리 서우봉에서도 해군특공기지를 구축했는데 제주도민들이 동원됐다.
제주도민들의 노무동원은 1943년까지 집에서 드나드는 형태로 동원됐으나 1944년부터는 함바집에서 단체로 생활하면서 작업에 임했다.
이와 같은 병력 및 노무동원을 통해, 일본군 군사시설은 비행장과 엄체호(격납고)시설, 고각포(고사포)진지, 참호, 토치카, 해안특공기지, 동굴진지, 하치마키도로 등 다양하게 대규모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제주도 내 368개 오름 중 현재까지 약 120여개 오름 등지에서 일본군 동굴진지가 구축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군 군사시설은 해안과 오름 및 한라산 고지대에 이르기까지 미군 등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구축한 진지유형별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일본군의 제주도 방비를 위해 구축한 진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지도는 '제주도병력시초배치요도'와 '제58군배비개견도 제주도'(1945년 8월)등을 들 수 있다. 또 미군정보고서 자료인 ‘일본군 병력배치도’(1945년 9월)등이 있다.
'제주도병력시초배치요도'(1945년 8월)는 제주도를 3개 권역으로 나눠 미군 등 연합군과의 일전에 대비한 방어의도를 엿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오름군이 밀집된 산악지형이 많은 제주 동부지역은 ‘유격진지’대로 설정되었다. 동부지역은 다시 북쪽과 남쪽으로 나눠 각각 96사단과 108여단이 주둔한다. 제주서부는 ‘주진지’대로 설정돼 제주시를 중심으로 한 북쪽은 96사단이, 서귀포를 중심으로 한 남쪽은 108여단이 각각 주둔한 것으로 표시됐다.
'제58군배비개견도 제주도'(1945년 8월0는 구체적인 진지유형과 위치를 표시한 지도다. 이 지도에는 진지유형을 '위장진지', '전진거점진지', '주저항진지', '복곽진지' 등 4종류로 표시해놓고 있다.
'위장진지'는 적의 포 폭격의 흡수 등 적의 전개방향을 다르게 유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진지다. '전진거점진지'는 주저항진지의 전방에 위치한 부대를 파견하여, 요점이 적에게 빼앗기는 것을 방해하거나 적에게 잘못된 전개방향을 유도하여 주저항진지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주저항진지'는 말 그대로 주력을 다하여 방어하는 진지대로 보병의 항전지대와, 그 후방의 주력포병 및 그 설비로 이뤄진다. 후방배치형의 특징인 '복곽진지'는 후방배치형의 개요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저항진지가 함락됐을 경우 최후의 저항거점으로 마련됐다. '제58군배비개견도 제주도'상에 보이는 각 진지의 수는 1백 곳을 넘는다.
여기에다 해안에는 '수제진지'가 구축됐다. '수제진지'는 적의 상륙방면 해상 및 해안선 부근에 위치한 진지를 일컫는 것으로,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최전선진지, 즉 전진거점의 성격으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주로 미군의 상륙정과 전차를 공격하는데 주목적을 둔다.
육상의 진지와 함께 해안가에는 상륙하는 함정을 공격하기 위한 일본 해군 자살 특공기지가 구축됐다. 현재 이러한 특공기지는 제주시 지역의 경우 서우봉 해안과 수월봉 해안에, 서귀포 지역은 송악산 해안과 성산일출봉 해안, 삼매봉 해안 등 5곳에서 확인된다.[2]
또한 각 지역에는 군사비행장이 만들어졌다.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과 육군 동비행장(진드르비행장), 육군 서비행장(정뜨르비행장, 현재 제주국제공항의 활주로의 일부를 이룸), 교래 비밀비행장 등 4곳이다. 이 가운데 알뜨르비행장은 일본 해군이 만든 비행장이며, 동서비행장과 교래 비행장은 육군이 만든 비행장이다.
또한 한라산 중턱에는 '하치마키'라는 군사도로가 건설되었다. 하치마키도로는 한라산 중턱을 빙 둘러가면서 각각의 복곽진지를 서로 연결하는 모양으로, 그 형국이 마치 이마에 두른 머리띠와 유사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3]
5. 결말
전쟁이 말기로 치닫으면서 제주도 또한 미군기의 공습에 직면하였지만, 일본 제국이 본토 결전 직전에 항복함으로써 이 방어작전 계획은 무산되었다. 미군은 한반도 및 제주도에 관심이 없었기에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도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도서지역 요새를 다 무시하고 진짜 핵심지역들만 점령하며 나아간 것'''이 태평양 전쟁 내내 지속된 미국의 전재전략 이른바 '''개구리 뜀뛰기 전략'''이었고, '''오직 도쿄만을 목표로 한 몰락 작전'''에서 제주도는 미군의 관심 밖이었다.
몰락 작전의 1단계인 올림픽 작전을 수행하는 미군 함대가 제주도 기지의 항공기들 작전반경에 있었기에 대대적인 공습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그러기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 만약 미군이 본토 공략의 일환으로 제주도 및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다면 '''제주도는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과 같이 일본군 대 미군과의 참혹한 전장터로 초토화당했을 것이다.'''
제주도 주둔 58군의 항복은 9월 28일에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제주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항복을 접수할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제주도 주둔 일본군은 자체적으로 무장해제를 진행하였으며, 치하 전차, 항공기, 중화기, 소화기, 탄약 등을 모두 모아 놓고 일부는 이미 바다에 버리거나 소각, 포탄을 바다에 쏘는 등으로 폐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군이 도착한 후, 약 1주일에 걸쳐 잔여 무기가 모두 폐기된다.#
훗날 4.3 사건이 격화되자, 정부에서는 일본군이 항복하면서 무기를 제대로 폐기하지 않고 한라산에 대충 파묻어 놓은 것을 산으로 도망간 빨치산들이 획득하여 무장을 갖추었다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 일본군은 체계적으로 무기를 폐기했고, 굳이 무기를 숨겨두어야 할 동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개연성은 거의 없다. 물론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1달이 넘는 시간이 있었다는 점에서 총기류 등을 숨기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숨기거나 유출시킬 여유는 충분했고, 이 시기에 일부 흘러나간 총기가 빨치산들의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 4.3사건이 처음 발발했던 당시, 무장대는 겨우 일본제 99식 소총 27정과 권총 3정을 보유하고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죽창을 들었다. 이후 경찰지서 습격이나 토벌대와의 교전, 경비대 이탈자들의 무기 제공 등으로 무장을 더 보강한다.
6. 관련 문서
[1] 1926년생인 양경서 씨(당시 대정읍 무릉리 거주)는 “1945년 1월부터 2개월 동안 주 2회 특별연성훈련을 받고 1945년 3월부터 45~60일 동안 제주읍 삼양봉(원당봉)에서 진지 굴착작업에 임했다. 1945년 5월에는 모슬포 송악산으로 이동해, 송악산 정상으로 통하는 허리를 절개하는 작업에 투입됐다. 이 작업은 미군 전차의 진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한다.[2] 일부에서는 '카이텐'을 운운하지만 제주도에 배치되거나 배치될 예정이었던 것은 카이텐이 아니라 신요이다.[3] 오늘날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5.16도로의 일부가 하치마키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