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왕
1. 개요
신라의 제39대 국왕. 원성왕의 손자로 본래 태자였던 김인겸의 아들이다. 김인겸이 아버지보다 단명하는 바람에 원성왕에 이어 왕위에 대신 오르게 되었다. 왕비는 김숙명의 딸로 계화부인(桂花夫人) 또는 계화왕후[2] 라고 불린다. 애장왕과 흥덕왕의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3] 의 아버지.
2. 생애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789년 대아찬의 직책을 받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다.
791년 1월 아버지 김인겸이 죽었고 791년 10월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792년 8월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 때부터 몸이 건강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버지가 죽은 직후이니 상을 치르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성왕은 태자로 책봉되기 이전부터 중앙 정치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점은 신라 중대와는 비교되는 점이다.
791년 김인겸이 죽은 후 태자 자리는 원성왕의 둘째 아들이자 소성왕의 숙부가 되는 의영(義英)에게 넘어갔지만 의영 역시 794년 2월 죽어서 결국 795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799년 원성왕이 승하한 이후에 즉위하지만 소성왕 역시 즉위 1년만에 요절한다. 어린 아들이 있던 것으로 봐서 최소한 20대 이상의 나이는 먹은 듯 싶지만 오래 살지는 못한 듯하다. 동생 흥덕왕이 777년생이고 소성왕과 흥덕왕 중간에 아랫동생 헌덕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760년대 후반~770년대 전반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일찍 죽는 바람에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는데 원성왕이 죽고 소성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나라 조정은 위단이라는 인물을 사신으로 보내 원성왕 조문 겸 소성왕 책봉 사절로 신라에 파견했다. 그런데 위단 일행이 당나라 수도 장안을 떠나 운주에 이르자 소성왕이 죽고 애장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이 이들에게 들어갔다. 헛걸음을 하게 된 위단 일행은 장안으로 돌아갔다.
3. 주요 치적
재위 기간이 짧지만 소성왕은 국학의 학생들에게 거로현(오늘날의 경상남도 진주시 지역)을 녹읍으로 하사한다. 국학 학생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 준 셈으로 오늘날로 치면 국학 학생들에게 국가장학금을 수여한 것인데 원성왕 대에 유명무실해진 국학을 진흥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이런 조치에도 국학 대신 당나라나 해외로 유학가는 학생들이 많아져서 이후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소성왕 때는 특이한 생물을 발견한 기사도 있는데 한 번은 9척이나 되는 인삼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1척은 오늘날의 1척보다 짧지만 그걸 감안해도 엄청 큰 인삼인 것은 사실이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소성왕은 당덕종에게 인삼을 선물했지만 덕종의 반응은 "이거 인삼 아닌데?"라며 인삼을 받지 않았다.
소성왕 2년 5월에는 우두주(오늘날의 강원도 춘천시 일대) 도독의 보고에 이런 보고가 있다.
기록을 보면 짐승의 정체는 코끼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코끼리가 왜 신라에 나타났는지는 의문이지만 남중국이나 이슬람과의 교역 흔적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해석대로라면 장사하러 온 외국 상인이 신라에 데리고 왔다가 놓친 코끼리일 수도 있겠다.기이한 짐승이 있는데, 소 같으면서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 길이가 3척 정도에 털이 없고 코가 길었습니다. 현성천(峴城川)에서 오식양(烏食壤) 방향으로 갔습니다.
ㅡ 《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소성왕 2년 5월 기사
4. 삼국사기 기록
二年春一月 소성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三月 청주 거로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삼다
二年春三月 냉정현령 염철이 흰 사슴을 바치다
二年夏五月 아버지를 혜충대왕으로 추봉하다
二年夏五月 기이한 짐승이 나타나다
二年秋七月 9척의 인삼을 당에 진봉하였으나, 당에서 받지 않다
二年秋八月 어머니를 성목태후로 추봉하다
二年秋八月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치다
三年春一月 왕후를 봉하고 충분을 시중으로 삼다
三年夏四月 폭풍으로 궁궐이 피해를 입다
三年夏六月 왕자를 태자로 봉하다
一年夏六月 왕이 붕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