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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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의 명신. 여요전쟁 당시 거란의 대군을 몰살해버린 귀주 대첩을 주도한 '''문신'''(文臣)으로,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 구국영웅이자 정치적으로도 고려의 리즈 시절을 이끈 현종의 치세에 큰 도움을 준 명재상이였다. 또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 등과 비견되는 명장으로 칭송받는다. 또한 서희, 윤관과 더불어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위인'''으로도 거론되고 세종대왕, 이순신과 더불어 '''서울이 낳은 위인'''이기도 하다.[4]'''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수였고, 죽어서는 설화가 되었다.'''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주로 거란을 물리친 장군으로 알려져 무신으로 오해받지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나중에 문하시중에 오른 문관이다. 강감찬은 정식 무관직에 봉해진 적이 없고 여요전쟁 때 받은 상원수 직은 임시 군단의 지휘관이라 비상설직이므로 품계가 있는 공식 무관직이 아니다.[5][6][7]
생전 받은 작위는 남작에서 진작된 후작(侯爵)이다. 분봉된 봉지는 천수현(天水縣). 아마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후작일 듯.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8]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9] 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10]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 강감찬이란 이름은 개명한 이름[11] 으로 언제 개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姜邯寶)로 기록되어 있다.
2. 역임 관작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지휘하며 남침하자 고려는 서북면 행영[12] 을 조성, 강감찬을 행영의 도통사로 삼는다. 이어 20만 대군을 소환하여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해 지금의 군단장과 같은 직위를 맡긴다.
3. 일대기
3.1. 출생과 성장
그의 선조는 고구려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15]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16] 강궁진(姜弓珍).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에 경주 지역[17] 에서 금천으로 이주하였고 거기서 감찬을 보았다.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18][19]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혹은 음양가에서 길흉을 점칠 때 쓰는 9성)의 네 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 이름이 낙성대(落星垈)이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하며,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20][21] 이 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983년 이후 목종 말년(서기 1009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22] 다만 《고려사》에 없는 26년간의 공백을 메꿀 만한 기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등의 조선시대 야사집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주로 여러 지방 관직을 전전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강감찬은 그야말로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거의 '만능 해결사'에 기지가 넘치는 인물.
그 후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제법 출세길이 트였는데,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이런 말로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그 후 하공진으로 하여금 거란 성종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했다. 뒷날 현종은 강감찬이 문하평장사에 임명될 때 2차 침입 때 몽진을 주장한 것을 언급하며 "그 때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23] 라고 그 공을 평가했다.'''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이후 한림학사승지 · 중추원사 · 이부상서 · 서경유수 · 내사시랑평장사에서 문하시중까지 올라가 승승장구했고,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해서 지금의 함경도 쪽으로 파견되어 이들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늦게 출세하고 그 능력도 늦게 발휘된 전적을 보면 '대기만성'형 인물에 가까웠던 것 같다.
3.2. 제3차 거란의 침입과 강감찬
서북면행영도통사였던 강감찬은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고려의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이때 고려군 사령부의 무관들은 성공적인 기선 제압, 거란군의 전격전을 대비한 청야전술과 유격전, 그리고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포위섬멸전까지, '''철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해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3.3. 큰 별, 지다
제3차 거란의 침입이 종전된 이듬해,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 토사구팽을 염려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74살이나 되는 고령에 전쟁터를 다녀왔으니 건강 문제였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사실 이 정도의 전쟁 지휘는 예나 지금이나 순식간에 수명을 깎아 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무이긴 하다. 몸도 몸이지만 머리 쓸 일도 많고 목숨이 달린 일이니 심적으로도 부담감이 심했을듯. 다만 훌륭한 왕들이 그렇듯, 현종은 강감찬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주고 3일에 한번만 출근토록 명했다.
1021년에 개경 흥국사에 석탑을 세웠는데 거기에 아래와 같은 글귀를 새겼다. 이 탑은 오늘날에도 북한 개성에 남아 있으며 북한에서 국보 문화유물 132로 지정했다고 한다.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며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 고려사 강감찬 열전 중.
이후 1030년 개경의 주위에 나성을 두르라는 간언을 올렸고[24] 곧 실행된 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문하시중이 되었고, 이듬해엔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 개국후(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 開國侯)에 봉해졌으며 1031년 8월, 향년 84세로 타계했다. 현종이 세상을 뜨고 3개월 뒤의 일이었다.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해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 천희(天禧) 5년 5월.
사후 내사령[25] 유진[26] 의 전례를 따라 조정에서 제사지내주었고,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 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4. 평가
앞에서 언급했듯 문곡성 강림 설화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이와 관련한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라고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도 있다.[27]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라 알려졌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는데 개경에 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고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고려사에는 그에 대해 '''평소에는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사람들이 평소에는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 이었다는 소리.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이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도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
또한 강감찬이 승리로 매조지은 귀주 대첩 이후 북송, 요나라, 고려는 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에 이르는,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게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평화가 오래 지속된 시기는 사실 찾아봐도 거의 없는 편인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동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 거란군을 귀주대첩으로 크게 무찌른 덕택에 거란은 정복전쟁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고, 송, 거란, 고려, 서하의 평화 속의 균형 체제는 훗날 금나라가 흥기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단순히 구국의 영웅 이상인,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셈.[28]
5. 강감찬 설화
- 소년 시절 너무 잘생겨서 고민하다가 스스로 천연두를 얽게 해서 추남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야사집에 언급된 내용으로 생각되는데, 과거 천연두는 생명에 관계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질병이었기에[29] , 고의적으로 천연두를 앓았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
- 강감찬이 젊었을 때 어느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아전이나 향리들은 새로 온 수령의 풍채가 볼품없고 나이도 젊은 것을 보고 그를 비웃었다. 그러자 강감찬은 이들을 불러놓고 동헌 뜰의 수수를 가리키며 "저기 수숫대를 모두 그대들 소매에 넣어 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수숫대가 사람 옷의 소매 속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걸 본 강감찬이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넣지 못하면서 감히 20년도 넘게 자란 나를 소매 안에 넣고 흔들려 했단 말인가!"라고 일성대갈을 날리자 아전과 향리들은 그저 데꿀멍할 뿐이었다고 한다.
- 장인어른을 골탕먹인 민담도 전해진다. 강감찬이 혼인을 하고 처가에 갈 때마다 장인에게 매번 큰절을 올려야 하는 것이 번거로웠다. 그래서 한 번은 처가집에 가서 큰절을 올리는데 강감찬은 장인의 바로 앞까지 가서 장인의 코에 얼굴이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머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깜짝 놀란 장인이 "내 콧등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다음부터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게"라고 말했는데, 강감찬은 다음에 처가에 갔을 때 장인에게 절을 올리지 않았다. 괘씸하게 여긴 장인이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따지자 강감찬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장인어른께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라고 하셨기에 문 밖에서 절을 올리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장인의 말을 잘 들은 것 뿐이며, 만약 그렇다고 장인 앞에서 한 번 더 절을 올리면 죽은 사람에게 절을 올리는 예법이 된다는 걸 노린 것이다. 이 민담의 결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강감찬의 이런 재치있는 대답을 들은 장인은 크게 웃으면서 앞으론 굳이 자신에게 억지로 절을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는 결말이 그나마 알려져 있다.
- 개구리 퇴치 설화는 여러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데, 개구리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서 관내 백성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자 강감찬이 이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강감찬이 이걸 어떻게 퇴치했는지는 지방 구전마다 다르다. 부적을 썼다는 전승도 있고 "니들 계속 울어대면 내가 도술로 이 연못의 물을 몽땅 없애버리겠다"는 협박문을 개구리에게 내보였다는 전승도 있다. 혹은 약을 풀어서 개구리들이 잠을 자게 했다는 전승 또한 있다. 몇몇 위인전에선 이걸 섞어서 수하들에게 약을 풀게하고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부적을 쓰고는 그걸 태워 뿌리며 위의 대사를 읊었다는 식으로 다 합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주민들 몰래 밤에 부하들을 시켜 대나무 장대로 연못을 마구 휘저어 개구리들이 울어댈 틈을 주지 않았다 카더라는 전승도 있다.
- 호랑이 퇴치 설화도 존재한다. 지금의 서울시인 남경[30] 의 판관에 재직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강감찬이 한 노승을 불러 오게 해서 강감찬에게 오자 "니들 무리를 이끌고 북쪽 땅으로 가거라!"라고 일갈했다. 그 노승이 바로 둔갑한 호랑이의 우두머리였던 것. 호랑이들의 수가 많음을 알고 있던 강감찬이 우두머리에게 3일간의 유예 기간을 주고 떠나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떠나기 하루 전에 우두머리가 암컷 호랑이 한마리를 데리고 강감찬에게 왔다. 보아하니 그가 데려온 암컷 호랑이가 이미 새끼를 밴 상태로 곧 있으면 새끼를 낳을 때가 되어 당장 떠날 수 없게 되어 그녀가 새끼를 낳고 몸조리를 하는 즉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강감찬은 처음엔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 암컷 호랑이만큼은 새끼를 낳고 떠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호랑이들은 서둘러 북방으로 전부 달아났고 임신한 암컷 호랑이는 새끼들을 낳은 뒤 서둘러 북방으로 갔다.
- 어린 시절에 한 혼례식에 갔다가 한 신랑을 봤는데, 그 신랑이 매우 미남이어서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강감찬은 이 신랑이 인간이 아닌 것을 알아채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이 부부의 첫날밤 신방을 급습했으며 어른들에게도 신랑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자 신랑은 당황해서 멧돼지로 변신해서 도망쳤으나 강감찬의 화살에 쓰러졌다. 신부의 아버지가 저 신랑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강감찬은 "신랑이 고기반찬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과 그림자에 꼬리가 달려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이런 일화도 있다. 말단 지방관 시절, 한 마을의 혼례식에서 난리가 났는데, 신부가 두 명이나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 즉 신부의 외모를 한 똑같은 여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는 건데, 쌍둥이였을 리는 없고 어느 한 쪽이 둔갑한 요괴였던 것이다. 이에 강감찬은 똥개 한 마리를 풀어 신부를 조사했는데, 한 명에게는 친근하게 들이댔지만 다른 한 명은 무서워했는데, 강감찬은 똥개가 무서워한 신부의 발바닥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러자 그 신부는 여우로 변해 피를 토하다 죽었다. 즉 백년 묵은 여우가 신부로 둔갑했던 것.
- 심지어는 염라대왕을 불러냈다는(...) 구전 설화도 있다. 강원도에서 채집된 설화로 이 설화에 의하면 강림도령은 본래 강감찬의 부하였다. 강감찬의 집 밑에서 술장사를 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남편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집에 잘 자라던 아들 둘이 갑자기 죽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한 집에서 어린아이를 둘이나 잡아간 염라대왕이 야속해서 집에서 심부름 하는 강림도령을 불러 자신이 염라대왕에게 쓴 편지를 주며 말하기를 "어느 곳 다리 밑에서 숨어있으면 사인교(四人轎: 네 사람이 드는 가마)가 하나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사인교의 문을 열고 이 편지를 넣어라."라고 하였다. 강림도령은 시키는 대로 그 다리 밑에서 숨어있었는데 새벽이 되자 가마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는데 강림도령은 놓칠세라 쫓아 달려가 가마의 문을 열고 편지를 넣자 염라대왕이 강감찬을 찾아왔다. 부른 이유를 묻자 장군은 한 집에 사는 아이들을 하루 저녁에 둘이나 잡아 갔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무랐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그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엿장수의 아이 둘이 한 짓인데 그 아이들은 술장사하는 집에서 기숙하다가 술장사하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해 원수를 갚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강감찬은 염라대왕을 나무란 것을 사죄하자 염라대왕은 심부름을 잘하는 강림도령을 탐내어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장군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미 늦어 강림도령은 벌써 죽어있었다. 염라대왕이 데리고 간 것이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엿장수 아들을 죽이고 수족과 같았던 강림도령마저 죽게 만든 술장사 내외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서 술장사 내외에 의해 죽었다는 엿장수 아이들의 시신을 찾아 술장사 내외에게 큰 벌을 주었다.
이렇듯 별의 정기를 타고 난 인물이라 그런지 다양한 설화(탄생 설화, 호랑이, 개구리 추방 설화 등등)가 전국 곳곳에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장군'이라는 이미지로 남은 것과는 달리 민간설화나 야사에서는 지략이나 담력, 혹은 '''도력'''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다. 심지어는 암행어사 비슷한 것을 했다는 설화도 있다. 관련 설화를 모아 보면 어쩐지 단순한 지략가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도인'''처럼 묘사되곤 한다. 과연 문곡성의 화신. 별 생각 없이 설화를 보면 거의 '강감찬 퇴마록'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고려사열전에서도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는 평가가 있는 것에 비춰 보면 당시 민간에서도 지혜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그 외 강감찬이 요물들을 퇴치하거나 설복시키는 설화들은 고려의 지방행정의 정비와 중앙집권 확립을 은유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호랑이나 멧돼지, 귀신 등 백성들을 괴롭히는 요물들은 사실 지방의 호족이나 향리를 상징하며, 강감찬이 지방관으로써 호족이나 향리들의 전횡을 엄히 다스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권위를 세웠으며, 나아가 지방행정 정비와 중앙집권 확립에 공헌했다는 것이다. 특히 위의 수숫대 일화를 보면 호족이나 향리들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무시했다는 당시 분위기가 드러나 있다. 마침 강감찬이 활약한 성종~현종 시대는 고려의 지방행정체계와 중앙집권화가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6. 오늘날의 강감찬
강감찬은 문관 출신으로 정식 무관직을 제수한 적이 없다. 84년간의 일생동안 갑주를 입은 건 거란의 제3차 침입 때의 3개월 남짓이었지만, 귀주 대첩의 의의가 워낙 엄청나다보니 항상 장군처럼 묘사된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31] 출신 인물이라 관악구에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인헌중학교·인헌고등학교[32] , 초명을 딴 은천초등학교가 있다. 2008년 관악구가 행정동 명칭을 변경하면서 강감찬 장군의 시호·초명·출생지를 딴 인헌동·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하였다.
또한, 관악구 낙성대동의 낙성대역의 부역명으로 '강감찬'이 붙어있다.
한때 수원 팔달산에도 강감찬 동상이 있었다. 강감찬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수원에 그의 동상이 들어선 사연은 1971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각 시군에 위인의 동상을 건립하라" 라는 밀어붙이기 식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결국 팔달산의 강감찬 동상은 2007년 이전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일제시대 때 파괴된 성신사가 복원되었다.
KDX-2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의 제5번함인 DDH 979는 장군의 함자(銜字)를 따서 '강감찬함'이라 명명되었다.
무공훈장 중 인헌무공훈장은 강감찬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서희 양규를 지나서 여요전쟁의 클라이막스를 책임지는 주인공으로 취급받는다.
7. 강감찬의 묘
강감찬의 묘라 추정되는 위치는 의외의 장소에 있다. 다름 아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33] 묘가 발견된 해가 '''1963년'''으로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금천 강씨에서는 조선 인조 때의 민회빈 강씨와 관련된 '강빈옥사'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에 따르면 강빈의 아버지인 우의정 강석기는 강감찬의 17대손으로 강빈 역시 강감찬의 후손이었는데, 민회빈 강씨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강빈은 비정한 시아버지 인조로 인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고 그 형제들도 모조리 장살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말로 다하지 못할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강석기의 친척들은 멸문지화를 모면하기 위해 성을 바꾸거나 조상의 묘에 성묘도 안 하는 과정에서 강감찬의 묘까지 실전되고 말았다고 한다.
본래 강감찬은 조선시대에 특별히 제사를 지내주던 고려시대의 명신에 포함되어 있었고, 실록을 보면 여전히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명신으로 대접받고 있었던 인물이다. 특히 선조 때와 광해군 때에 선조와 광해군 모두 강감찬의 묘 관리에 신경을 쓰고 나무를 심어 주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도 보인다.[34] 그랬던 묘가 정치적 옥사에 휘말려 묘까지 실전되어 버린 셈.
오늘날 강감찬의 묘가 있는 마을에는 발견 이전부터 '유명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왔으며 그 무덤 주변 역시 영험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한다. 금천 강씨 후손들은 이같은 구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 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해서 강감찬 묘로 삼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천만다행.
다만 유명 역사인물들의 묘소가 대개 사적지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는 편인데 강감찬 묘소는 사적지로 지정되지는 않은 상태다. 문화재 위원들이 지석이 너무 망실되어서 판독이 어렵다는 이유로 문화재 지정을 보류한 상태이기 때문. 또한 분묘와 석물 등 역시 발견 이후인 '''1964년'''에 만들어진 것이라서 강감찬의 진짜 묘가 아닐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강감찬 묘는 정확히는 '전(傳)' 강감찬묘인 셈이다. 대신 당시 청원군에서 강감찬 묘에 지내는 제례 비용을 문중에 대 주기는 했었다고 한다. 2014년 7월을 기점으로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이 되어서 현재는 흥덕구에서 이 묘를 관리하고 있다.
여담으로 강감찬의 출생지라는 서울 낙성대 근방이 공군사관학교가 있던 보라매 공원이었다. 그런데, 이전된 장소도 강감찬 묘역으로 강하게 추정되고 있어서, 만일 사실로 확인된다면 공군과의 인연이 기가 막히게 연동되는 셈이 된다.
8. 이름에 대해
8.1. 강한찬?
邯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설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이라 읽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감'''은 일본식 한자 독음이라고 하며, 한국어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한'''이 아니라 '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의 수도 邯鄲은 '한단'으로 읽으면서 姜邯贊의 邯은 '감'으로 읽는 것이 오류라는 것. 또 다른 근거로 초한지에도 나오는 진(통일왕조) 장군 장한(章邯)의 이름도 '한'이라고 읽는다는 것도 근거로 거론된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강감찬'이라고 읽는 것이 일본어의 잔재라는 주장은 '''낭설'''. 그냥 흔히 알려진 대로 '강감찬'이라고 읽으면 된다.
우선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글 문서에도 엄연히 강감찬으로 나온다. 한국에서는 형성자의 제자 원리에 따라 좌측에 있는 甘(달 감) 자에서 음을 취해서 '감'으로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 때문에 강감찬이라고 불린다는 말은 근거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 글을 참고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런 주장에서는, 중국의 자전에서는 邯의 발음을 ham이나 han으로 표시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사례). 邯의 독음은 표준중국어에서는 hán이고, 일본어에서는 gan(ガン, 오음) 또는 kan(カン, 한음)이기 때문에 언듯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일본 한자음에서 [k]가 중고 중국음의 [k]와 일대일 대응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옛 일본어에는 \h\] 발음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어의 [h][35] 발음을 [k]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36] 심지어 당시 曉모의 발음이 연구개음이었다면 음성적 유사성까지 맞아떨어진다.
더욱이, 한국 한자음의 관점에서 봐도 이 논리의 문제는 드러난다. 일단 한국 한자음은 중국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다. 당연히 중국어 원음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 아니기에 중국어 발음과 같지 않다. 그리고 음부인 甘에 이끌려서 잘못 읽던 게 전해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다(灣을 비롯해서 이런 사례는 많다).
사실 이 설에서 가장 큰 오류는 대조하는 중국어가 중고한어가 아닌 현대 관화라는 것이다. 중고한어에서 邯은 匣모로, 상고 및 중고한어에서 \ɣ\] 음가를 가진다(상고음 검색기). 현대에 hán으로 읽는 건 匣모가 曉모로 흡수되었기 때문.
여담으로 애당초 匣모에 속하는 한자는 한국 한자음에서 ㄱ과 ㅎ으로 제각각 갈라졌기 때문에 ㄱ이냐 ㅎ이냐는 별로 논할 필요도 없다(동국정운에서는 ㆅ을 만들어 이런 차이를 교정하려 했다).
다만, 강감찬의 이름에서 邯을 '감'으로 읽는 것의 영향으로 인해 한단이나 장한(혹 장함이라고도 함)을 '감단', '장감'이라고 하는 오류가 심심찮게 나온다. 邯의 음은 오직 '강감찬'에서만 '감'이고 그 외에는 '한', '함'이다. 대법원 인명용 한자표에서는 '감'과 '한'을 음으로 지정해 놓았다.
8.2. 姜邯贊과 姜邯瓚
'찬'에 대해서도 한자 표기가 조금 엇갈린다. 간단히 말하면 '찬'의 부수인 구슬옥변이 있냐 없냐 차이다.
오늘날에는 고려사의 표기를 따라 姜邯'''贊'''이라고 쓴 게 일반적이지만 姜邯'''瓚'''이라고 쓴 것도 발견된다. 위에도 있는 강감찬이 흥국사에 세운 탑에 쓰여진 탑명에는 '''姜邯瓚'''이라고 쓰고 있다. 조선시대 정조실록을 보면 위의 흥국사 탑을 거론하면서 예조판서 민종현이 이런 상소를 올렸다.
姜邯'''贊'''이라는 표기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의 표기이고, 강감찬이 세운 흥국사 석탑에는 姜邯'''瓚'''이라고 쓰여 있으니 석각이 목각 판본에 비해 믿을 만하다는 의미로 후자의 이름을 택하자고 건의하고 있는 것이고 정조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 무렵부터 논란이 된 이야기인지 정조 때의 한치윤도 <해동역사>에서 이 탑명을 근거로 들어 "고려사에서는 구슬옥변을 빼고 그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 흥국사 탑에 쓰인 것이 정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송경(松京: 개경) 흥국사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從之。 又啓言: “松京興國寺舊址有一塔, 塔面有陰記, 卽姜邯賛所書, 而其名以瓚字書之, 與公私書籍所載者不同。 蓋石刻之可信, 比諸登榟之本, 不啻懸隔。 自今以後姜邯賛名字皆以瓚字書之恐好矣。” 從之。
ㅡ<정조실록> 정조 20년 7월 21일
흥국사탑은 북한에 있어 지금은 확인할 수 없으나, 명문은 남아 있다. 링크 하지만 대부분 姜邯'''贊'''으로 기록되고 여기서만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구슬옥변은 노년에 붙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애당초 邯자는 '한단'이라는 지명으로만 쓰이는 한자이며 감찬이라는 말 자체가 한단을 구한 것을 칭찬한다는 뜻이고, 瓚자를 쓰면 아무 뜻도 없는 이름이 된다.[37]
8.3. 영문 이름
관악구에서 지정한 공식 영문 이름은 'Gang Gamchan'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