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샴의 법칙

 


1. 개요
2. 정의
3. 자주 하는 오해들
4. 레몬 시장에 적용될 수 있는 법칙인가?
5. 사례
6. 관용적 의미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


Gresham's Law

'''Bad money drives out good.'''

가치 나쁜 돈은 가치 높은 돈을 몰아낸다.

영국경제학자 토머스 그레샴(Thomas Gresham, 1519-1579)이 발견했다고 알려진 경제 이론. 일반적으로는 위 문장을 줄여 쓴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하다. 이 문구는 그레샴이 1558년 즉위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졌으며, 기록에 의하면 그가 한 말은 "좋은 돈과 나쁜 돈은 같이 돌 수 없다(good and bad coin cannot circulate together)."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이 이론은 약 300년 뒤에 이를 발굴한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헨리 더닝 매클라우드(Henry Dunning Macleod, 1821-1902)에 의해 '그레샴의 법칙'으로 명명되었다.

2. 정의


서로 대등한 '''액면'''가치를 갖는 재화 A와 B가 있다고 하자. A는 순수 금화이고 B는 합금으로 된 저질 주화라고 한다면, B의 소재 가치는 A보다 재질 가치가 훨씬 낮고, 당연히 B의 생산 원가도 A보다도 훨씬 싸다. 그러면 사람들은 남에게 지불할 때는 B를 이용하고 실질적인 가치가 높은 A는 자기가 보관하려고 할 것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장에서 양화인 A는 사라져 가고 악화인 B만 통용된다.
즉, 화폐로서의 가치는 똑같지만 재물로서의 가치가 다른 두 재화가 있다면 사람들은 재물로서의 가치가 더 높은 재화(양화)를 저축하고 재물로서의 가치는 낮지만 화폐로서의 가치, 즉 액면가는 같은 재화(악화)를 주로 사용하면서 시중에서 유통되는 악화(화폐로의 가치>재물로의 가치)의 양이 늘어나고 양화(재물로의 가치>화폐로의 가치)는 점차 시중에서 그 모습을 감춘다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금괴 1kg과 바위 1kg으로 똑같이 물물교환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금괴를 주고 과자를 사겠는가, 바위를 주고 과자를 사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을 보관하고 바위만 쓸 것이기에 시장거래는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질 것이고 금괴는 모습을 감출 것이다. 악화(바위)가 양화(금괴)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시중에서 돌아다니는 악화가 많아져 양화의 양이 적어지니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위의 예만 보면 단순히 질이 나쁜 화폐가 악화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예도 함께 참고해보자. 역사상 있던 일을 바탕으로 한 예이다.
두 종류의 화폐가 있다고 하자. 화폐 A는 금화, 화폐 B는 은화이며 무게는 둘다 1g이다. 그리고 조폐국은 화폐 A를 1만원권, 화폐 B를 1천원권으로 지정하여 발행하였다. 즉 A=10B가 공식적인 화폐간의 교환비이다. 그런데 시중에 은 품귀현상이 벌어지게 되었고 금은방에서는 은괴 10g을 1만 2천원에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화되면 사람들은 점점 은화를 돈으로 사용하지 않고, 녹여서 주괴로 만든 다음 팔아먹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화인 은화는 점점 시장에서 사라질(구축될)것이고, 악화인 금화만이 시장에서 거래를 목적으로 유통될 것이다.
이것은 주화의 가치에서 액면가와 그것을 구성하는 금속의 시장가격(실제가치)에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실제 가치가 액면가보다 높은 주화가 있고, 실제 가치가 액면가보다 낮은 주화가 동시에 유통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실제 가치가 높은 주화는 땅에 묻든지 장롱에 쌓아두든지 해서 계속 저축하거나 심하면 이걸 주조해 악화로 만드는 등, 실제 가치가 낮은 주화만 교환을 하는데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에는 실제 가치가 낮은 주화만 유통하게 되며, 가치가 낮은 주화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일은 과학적인 주조 및 위폐방지기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전근대에 굉장히 빈번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금화 끝을 미세하게 갈아내거나 성분을 달리 해서 주조하는 등 화폐 위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났으며, 따라서 근대 이전 은행과 금융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 중 하나는 화폐 및 금속 감별사였다. 또한, 화폐를 위조하는 일은 국가경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므로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반대로 금속으로써의 가치가 높은 화폐(금)가 악화가 되는 케이스도 역사상 존재했고 이것이 브래튼우즈 체제 전까지 유지된 금본위제가 발생한 원인중 하나였다.
이 법칙이 성립하려면 가치의 보존과 유통 기능을 모두 가진 두 종류의 재화 사이에 법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교환비가 있어야 한다. 보존 기능의 유무를 고려하면 당연히 같은 값일때 보존성이 높은 쪽이 비축되고 낮은 쪽이 유통된다. 그리고 강제된 교환비가 없다면 그냥 시장 원리에 따라 비싼 녀석은 비싼 값에, 싼 녀석은 싼 값에 책정되어 잘 돌아다닌다.
학부 수준의 경제학 개론에서 나오는 '''화폐의 정의와 기능''', '''통화량''', '''이중 화폐 체계''', '''화폐간 법적 교환비''' 이 네 가지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이해 할 수 있다. 단어의 정의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고, 이러한 정의의 기반이 되는게 상기 네가지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서 이 네가지를 모르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오용사례가 괜히 나온게 아니다.
정리하자면 그레샴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면 두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
  1. 가치의 보존과 유통 기능을 모두 가진 두 종류 혹은 그 이상의 재화가 있을것.
  2. 두 재화간에 법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교환비가 있을 것.
특히 두번째 조건인 일정한 교환비의 존재가 만족되지 않으면, 그레샴의 법칙과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Thiers' Law(티어리의 법칙)은 더 좋은 화폐가 더 나쁜 화폐를 몰아낸다고 한다. 이 예로는 달러가 구 소련 붕괴 직후 기존 화폐를 대체한 건, 짐바브웨의 하이퍼인플레이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해서 나오는 예가 화폐의 질(예를 들면 동일한 화폐가 구겨져서 품질이 안좋다던가 발행년도가 옛날이라던가)에 따라 양화와 악화를 나누는 것이다. 신용화폐는 법적 교환비가 동일하고 내재가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양화와 악화를 구분할 수 없다.

3. 자주 하는 오해들


이 법칙은 우리나라에서 유독 정반대의 뜻으로 인용되는 일이 잦으며, 심지어 경제학 이외의 분야에까지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전문적인 경제학 용어가 하필이면 일반 사람들이 쓰는 단어와 발음이 같아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구축'이라는 용어에 대한 것인데, '구축(驅逐)한다'라는 말은 영어의 'Drives out'으로 '내쫓다', '몰아내다'라는 뜻이다. 한자로 몰 구(驅), 쫓을 축(逐)인데 주로 경제학에서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구축(構築)'은 의미가 정 반대이다.[1] 즉, 한자어 혼동에서 비롯된 착각인 것이다. 또한 한자 학술용어라 일본어의 잔재라며 순화를 시도하는 세력도 있는데, 구축(驅逐)은 조선시대에도 잘만 사용하던 단어이다. 반대로 요새 흔하게 '쌓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구축(構築)이야말로 일본식 한자어다. 다만 현대에 와서 '구축(驅逐)하다'는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실질적으로 사어가 되었고, 구축함(驅逐艦) 정도에서나 간신히 용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인 것도 사실이다. 진격의 거인 때도 번역체 얘기가 나온 것이 그 때문.
그레샴의 법칙을 잘못 인용하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오해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축(驅逐 쫓아내다)을 구축(構築 만들다)으로 이해한다.
  2. 악화(惡貨, 실물가치가 액면가보다 낮은 화폐)를 악화(惡化, 일의 형세가 안 좋게 흘러감)로 이해한다.
  3. '양화'는, 언뜻 들었을 때 악화의 반대말 같으니까[2] 대충 '일의 형세가 좋게 흘러감'이라고 이해한다.
위 1번으로 오해하면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악화가 오히려 양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해석한다. 2번과 3번 오해까지 할 경우 ''''나쁜 일이 벌어진 덕에 오히려 좋은 일이 일어난다\''''라는 해석이 되어, 뜻도 정반대로 경제학 이외의 분야에까지 인용하게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악화(惡貨)라는 건 화폐경제의 기초를 배워야 이해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개념어이고 비유적 표현이 아닌데, 이것이 악화(惡化)와 발음이 동일하기 때문에 마치 '일이 뭔가 안 좋게 흘러가는 상황'이면 어디나 갖다 붙여도 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왔던 것이다.
이런 오해가 만연한 이유를 굳이 이해해 보자면, 현대 한국어에서 구축(驅逐)이 일반인에게 친숙한 단어가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기껏해야 구축함에서나 들어 볼 수 있는데, 그마저도 대부분 구축함의 구축이 이런 뜻이란 걸 모른다. 일본에서는 자주 쓰는 단어이다.
재물 貨를 그림 畫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좀 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쓰면 '나쁜 화폐가 좋은 화폐를 몰아낸다.' 정도로 바꿀 수 있다.
실제로 중·고등학교 숙제나 대학 과제 혹은 저학년 대상으로 하는 발표 및 토론 강의 등에서 이러한 실수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어리니깐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과제를 채점하는 교수 입장에서는 그냥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유식한 척 인용하는 것 마냥 보일 수도 있다.
'악화'라는 용어를 비유적 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라면, '악화'는 엄연히 경제학 용어이고 '''경제학 용어에서 비유적인 단어는 드물다'''.[3] 즉 확실히 정의된 단어로 설명되어 있다. 아래는 단어의 정의.
  • 양화: 법정 교환비하에서 실물가치 > 액면가 인 돈(좋은 돈)
  • 악화: 법정 교환비하에서 실물가치 < 액면가 인 돈(나쁜 돈)
  • 구축: 시장에서 몰아낸다(시장에서 양화의 거래를 줄여버린다)

4. 레몬 시장에 적용될 수 있는 법칙인가?


또한 재화 품질의 비균등성및 정보의 비대칭성에 의하여, 품질이 좋지 않은 물건이 상대적으로 시장가격이 높게 책정되는 경우 혹은 양질의 재화의 시장 노출이 적어지는 경우를 이 법칙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중고차 시장을 들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슷하기 때문에 많이 착각하지만 이러한 케이스는 그레샴의 법칙이 아니라 레몬 시장(Lemon Market)이다. 여기서 레몬은 영어권에서 좋지 않은 물건을 비유하는 것으로, 그에 반대되는 대상은 복숭아(Peach)로 비유된다. 레몬 시장이라고만 하면 직관적으로 의미가 와닿지 않아서 개살구 시장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레몬 시장인 중고차 시장을 보면, 신차가 아닌 자동차가 중고차 시장 매물로 들어오는 요인은 다양하지만, 그 요인은 딜러만이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 차주가 몇 개월만 타고 차에 하자가 없음에도 싫증이 나서 바로 팔아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고, 침수차거나 부활차인 것처럼 사실상 시장에 나와서는 안 될정도의 폐급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때 딜러는 가성비가 좋은 중고매물은 잘 팔려고 하지 않고, 어디인가 하자가 있는 불량품을 먼저 팔아버리려고 하는 유인이 있다. 차량에 원래 있는 하자는 딜러가 알려 주지만 않는다면 구매자가 쉽게 발견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고차 구매자가 나중에 하자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이 전 주인의 잘못으로 생긴 것인지 밝히기 어려워 발뺌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다른 딜러들도 비슷하게 판단하기 때문에 시장에는 멀쩡한 중고차는 잘 돌지 않고 무언가 하자가 있는 형편 없는 중고차만 자주 보이게 된다. 때문에 많은 경우 이 경우를 "악화(형편 없는 중고차)가 양화(질 좋은 중고차)를 구축한다(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의 대표적 사례로 오인하고 그레샴의 법칙이 적용되는 경우로 언급하는 일이 많다. 앞 문장에서 보듯 비유의 대상이 딱딱 맞게 들어가고, 현상에 대한 설명도 직관적이고, 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 격언을 창시한 그레샴은 이러한 상황을 전제해서 쓰지는 않았다는 점, 무엇보다 원전이 "Bad money drives out good"이므로 원 저자의 의도는 '통화'에 관한 설명으로 한정되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원 저작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비슷한 예로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격언을 들 수 있다. 해당 격언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의 시에서 나온 것인데, 유베날리스는 검투사들이 저마다 온몸에 기름을 바르고 칼싸움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풍자시에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들면 바람직할 것이다.(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말을 적었다. 즉, 원 저자의 의도는 육체가 건강하다고 해서 건전한 정신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은 아니고, 근육돼지처럼 육체적인 단련에만 힘쓰는 세태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위 격언이 정 반대의 의미로 오역되면서, 본 의도와는 다르게 정 반대의 의미, 즉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는 육체적인 단련에도 힘써야 한다는 체육관스러운 격언으로 자주 인용되고 만 것이다.

5. 사례


이런 현상의 실제 예로 고대 로마를 들 수 있다. 네로 황제 전까지의 데나리우스 은화는 순 100%였는데, 네로부터는 안에 구리를 넣어 오현제 시대까지는 92%로 떨어뜨렸고, 콤모두스 황제 때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에는 70%로 떨어지더니만 카라칼라 황제부터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까지는 50%, 그리고 발레리아누스 황제 이후로는 '''5%'''였다. 쉽게 말해서 은화가 은도금된 동화로 바뀐 셈.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10원짜리를 잘 안 쓰게 될 정도로 물가 상승이 지속된 9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중반 디자인과 재질이 바뀌기 전엔 10원짜리 동전 원가가 34원이어서 실제로 10원짜리 동전을 녹여서 '''악세사리를 만들어 주는 가게들까지 있었으며''' 그 결과 바뀐 현 10원 주화는 장난아니게 얇다.
게다가 2000년대 후반까지도 10원짜리 훼손 행위의 처벌 법규가 없었다. 2011년 12월 와서야 처벌규정이 나올 정도. 그리고 아직까지도 시장에 유통되는 구 10원 동전을 녹여서 동괴를 만들어서 판 일당이 검거됐다는 뉴스가 매년 나온다. 2014년에도 20억 원 가까이 부당이익을 챙긴 일당이 검거되었다. 수집책들이 전국 금융기관에서 보유 중인 10원짜리를 "인테리어 장식용으로 쓸 계획이다"는 핑계로 개당 몇원의 웃돈을 주고 수천만 원씩 사들인 뒤, 이를 녹여서 동괴로 만들어서 내다 팔았다.
조선 시대에는 상평통보에 대해서 사람들이 정확히 이 짓을 했다는 민담이 있다. 맨 처음에는 돈을 쓰더니 돈을 녹여서 그 금속으로 물물교환을 하는 게 낫다고 해서 마을 대장간에서 돈을 전부 다 녹이니까, 정부가 그걸 알아채고 상평통보 엽전을 여러 금속의 합금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양반들이 한수 위여서, 그 합금의 레시피를 알아내서 마을 대장간에서 돈을 직접 찍어내서 썼다는 이야기.
물론 조선시대에는 상평통보를 녹이는 것도 처벌 대상이었으며, 합금으로 당백전을 직접 찍어낼 경우에는 화폐 위조죄로 '''그 자리에서 사형'''이다. 화폐위조는 나라(정확히는 정권)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심각한 행위인지라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이 반역에 준하는 중죄로 여겨 극형으로 다스렸다. 금속화폐에서 종이(신용)화폐로 넘어간 다음에는 전시에 적국의 화폐를 위조해서 적국에 대량으로 뿌려 경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반면 당백전이라는 악화가 나온 흥선대원군 시기에는 양화인 상평통보를 죄다 숨겨버리고 당백전만 유통되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당시 당백전은 실제 가치가 액면가의 6/100의 가치 밖에 없는[4] 악화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수된 것이 청나라 화폐의 위조품들인데 이걸 청전이라고 했다. 가치는 상평통보의 1/3. 하지만 당백전에 비하면 양화이다. 그런데 당백전이 폐지되고 오히려 청전 유통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부터는 청전이 악화가 되었고, 상평통보는 여전히 창고속에서 나오지 않았다라는 이야기. 결국 조선정부는 대원군이 물러난 다음에 청전마저 폐지해야 했다. 청전과 당백전의 유통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화폐에 대한 불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
실물화폐와 전자화폐는 법정 교환비가 동일한 완전 대체재이므로 양화와 악화를 나눌 수 없다. 제조단가는 물물교환과는 아무 상관없는 팩터다.
다만 위 단락에서 언급된 인플레이션의 근본적인 이유는 당백전을 '''너무 많이''' 발행했기 때문이다. 소량만 찍어냈다면 당백전을 모을 만큼 여유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상평통보를 숨겨놓고 당백전으로만 거래 했겠지만, 상평통보(양화)를 대체할 만큼 당백전(악화)이 많지가 않다면 그레샴의 법칙처럼 완전히 구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대에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총액은 약 1천만 냥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풀린 당백전의 총액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1천6백만 냥 정도나 되었다.
현대의 화폐에 비하면 위조하기가 쉬운 옛날 금속화폐의 특성상 금속의 가치가 액면가치랑 비슷한데, 상평 6냥짜리 동전이 100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쏟아져 나오니 기존의 상평통보는 모조리 장롱행... 그런데 총 통화량은 2천6백만 냥으로 증가했으므로 물가는 최소한 이론적으로 2.6배 뛰었을 것이기 때문에 당백전(100냥 단위)으로 거래할 만한 부자들이 아니면 죄다 물물교환으로 회귀하고 화폐경제는 파탄나고 세금도 제대로 안 걷히고...
생각해보면 상당히 특이한 상황인데, 북한처럼 새 화폐가 구 화폐를 100:1의 비율로 대체한 것도 아니라서 여러모로 곤란하다. 공식수치만 두고 보자면 기존에 1천만 냥 분량의 상평통보가 있었고 새로이 당백전 1천6백만 냥(액면가)을 발행했는데, 이 당백전들의 금속가치는 96만 냥(1600 / 100 * 6)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1천만 냥의 양화가 모두 사라져버리고 실질가치 100여만 냥의 악화만 유통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이는 디플레이션 상황이었다. 현대의 신용화폐(지폐, 은행예금 등)는 내재가치가 제로에 가까우므로,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윗 사례는 금화가 양화이지만, 반대로 화가 악화가 된 사례도 있다. 금본위제도가 바로 그것인데,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금 자체가 귀한 화폐다보니 비싼 화폐로 통용됐으나 사람들은 더 작은 단위이면서 쓰기 편한 은화를 즐겨 사용했었다. 그러나 실제 시장에 돌아다니는 금의 양이나 은의 양이나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금의 실제 가격은 낮아지고 은의 가격이 높아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결과는 '''양화였던 은화가 악화였던 금화에게 구축당했다'''. 즉, 주화의 가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액면가와 실제가치를 재서 실제가치가 낮다면, 즉 화폐로 사용하는 게 다른 용도로 쓰는 것보다 나은 화폐라면 그것이 악화라는 것이다. 금이 귀하다고 해서 무조건 양화라고 생각하면 오산.
실제로 이런 과정을 통해 변동환율제가 될 때까지 국제 표준화폐가 금화가 되는 금본위제도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금화가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금화야말로 모든 금속화폐를 구축한 최악의 악화였기 때문에 그렇다. 금이 가치있는 귀금속임은 분명하지만, 타 금속화폐보다 실질가치 대비 액면가를 높게 만들어 버리면 악화가 될 수밖에...
실제로 금본위제를 연구하는 학자는 이 시기에 정상적으로 금화가 구축당했다면, 브레튼우즈 체제가 은본위제로 굴러갔었을것이고(금이 민간의 손에 들어가서 시중에 유통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공급 유연성이 좋은 은화를 기축통화로 했다면 고정환율제가 좀 더 버티지 않았을까 라고 하는 전망을 내놓는 학자도 있었다. 뭐 그렇다고 브레튼우즈체제의 불안정성 때문에 몇 년 더 갔을 정도에 그칠 게 뻔하다는 게 일반적인 중론이라 그다지 지지받고 있지는 않다. 어차피 원인은 달러화의 불안정성이 제일 크기도 하고...

6. 관용적 의미


실생활에서는 관용적으로 '나쁜 것이 좋은 것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의미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살펴봤지만 이런 관용적 의미는 원래 이 말이 의도했던 의미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원래 화폐, 혹은 자산가치를 저장 가능하고 환금성이 있는 재화에 한정된다.
이런 관용적 의미로 사용되게 되는 이유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 자체가 관용적 의미가 뜻하는 현상에 맞아 떨어지는 중의적인 의미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나쁜 것이 좋은 것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관용적인 의미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지식인 층에서도 널리 사용되어 왔다. 사실 고대 로마 시절 당대 철학자들이 철학적으로 뭔가 비슷한 이론을 굳이 연결하려고 하면서 이같은 발언을 했던 것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화폐가 신용카드나 수표 지폐 같은 신용화폐로 전환되면서 화폐시장과 관련한 경제학에서는 의미가 희미해지면서 이제는 경제학속에서도 환율 관련한 토픽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다만 개론시간에 이 이론에 시간을 할애해서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현대경제학의 화두인 트리핀의 딜레마가 발생하는 직접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개방경제 하에서 기축 통화가 유동성을 확보하도록 하려면 결국 해당 통화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하고 이 때문에 기축통화의 신뢰성이 저하되는 딜레마가 발생하는데, 그렇다고 통화 공급을 안하게(혹은 적게 하게) 되면 기축 통화가 양화가 되어 시장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관용적인 의미를 어차피 다른 문맥에서 다른 의미로 쓰니 괜찮다'라는 주장이 있는데, 잘못된 건 잘못된 거다. 이러한 논리가 통한다면 '학술용어고 뭐고 단어 및 문장을 상황에 맞게 얼마든지 재단해서 쓸 수 있다'라는 논리가 나오는데, 이거 당연하지만 학계에서 제일 하면 안 되는 거다. 연구논문들(경제학뿐만 아니라 특히 이공계)에서 단어의 정의로만 수십페이지를 할당하고, 학회에서 단어에 대한 정의 통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게 무엇때문일까? 그냥 그렇게 읽히는 인상대로 '나쁜 것이 좋은 것의 자리를 빼앗는다'라는 의도로 사용하는 것은 정의도 틀렸을 뿐 아니라 문맥 속 의미를 읽지 못한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게다가 이 이론에 대한 걸 단순히 말만 따와서 '나쁜 것이 좋은 것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뜻으로 쓰는 건 한국정도다. 영미권에서는 당연하지만 bad money의 정의를 다른 거랑 비유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bad money에 대한 정의가 뒤에서 충분히 수식되어 있고(exchange rate is set by law), 중·일어권에서는 애초에 한자로 읽기 때문에 오해할 여지도 없고 구축이라는 단어도 한국보다 빈번하게 쓰므로 뭔가 아리송해보이고 현학적으로 보이는 효과가 없다.
결정적으로, 아래에도 실제 사례가 나와있지만 이런 식으로 오용해봐야 결국 제대로 된 의미로 쓰지 않으면 실제 의미를 아는 사람한테는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7. 기타


  • 허지웅JTBC에 출연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말을 짝퉁 한류가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에 완전히 잘못 빗대어 설명했다. 흔히 그레샴의 법칙을 구축(驅逐)을 구축(構築)으로 이해하곤 하는데, 이것이 대표적인 예. 그리고 허지웅의 스마트한 이미지는 이 한마디로 완전히 박살나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위 '자주 하는 오해들' 문단 참조.
  • 일본라이트 노벨늑대와 향신료에서도 등장. 1권에서 트레니 은화의 은 함량을 낮추고 시뇨리지를 시도하자, 은 함량이 높은(=가치가 높은) 트레니 은화들을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장면이 나오며, 10권에서는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해 밀 부족 사태가 벌어지자, 질 좋은 밀은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고, 대신 질 나쁜 밀가루만 유통되고 있다는 말이 등장한다.


8. 관련 문서


[1] 쌓아(築) 만든다(構)는 뜻이다. 세력을 구축하다, 기반을 구축하다 등등.[2] 정작 양화의 사전상의 의미는 이런 뜻은 없고 오히려 악화의 유의어(釀禍)가 있다(...).[3]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 이론의 약방의 감초인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예.[4] 당백전의 액면가는 상평통보의 100배였지만, 금속가치는 5~6배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