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연호

 

1. 개요
2.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사용
3. 정부 수립 전후 시기 대한민국에서의 사용
4. 관련 문서


1. 개요


'''서기 2021년은 대한민국 103년.'''
'''대한민국 연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용(公用)으로 사용한 연호이다.
약칭은 '''민국(民國)'''으로,[1] '''대한민국 ○○년''' 또는 '''민국 ○○년'''으로 쓴다.
일제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1919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사용


대한민국 연호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반포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2][3] 같은 해 9월 통합임시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입법, 재정, 외교, 군사문서는 물론 한인애국단, 한국광복군 등 산하기관의 서류를 포함한 모든 공문서에 이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임정 구성원들은 서신이나 휘호 등 사적인 문서에도 거의 예외 없이 이 연호를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 이 연호는 이승만, 안창호, 윤봉길, 이봉창, 김구 등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날짜를 표기할 때에 썼던 연호이다. 광복 이후에도 대한민국 연호는 임시정부에서 아래와 같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image]
1946년 4월 11일 창덕궁에서 열린 제27주년 임시입헌기념식 사진. “대한민국 28년”이라고 적혀 있다.

3. 정부 수립 전후 시기 대한민국에서의 사용


··· 나는 이 대회(大會)를 대표하여 오늘의 대한민주국(大韓民主國)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 나라에 유일한 민족 대표 기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公布)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道)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 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大勢)에 연유해서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우리 애국 남녀가 해내 해외(海內海外)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 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대한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民國年號)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 민족(全民族)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 정부는 완전히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 정부임을 공포하는 바입니다. ···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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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제헌국회 개원 축사 (1948. 5. 31.)

대한민국에서는 초대 국회의장인 이승만이 위와 같이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 축사에서부터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공용연호가 단군기원으로 확정되기 전까지 '정부' 차원에서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헌국회는 초대 의장인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단군기원을 선호하였으나, 임시정부 법통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새 행정부에서는 대한민국 연호를 고집하였다.[4] 따라서 헌법 전문에는 서기 1948년을 단기 4281년이라고 적었는데, 그 헌법을 공포한 정부의 관보는 연도를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하였다. 이후 국회가 의결하는 법률안에는 계속 '단기 4281년'이라고 했지만, 그 법률을 대통령이 공포하는 공포문에는 꿋꿋하게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적는 진풍경이 아래와 같이 계속되었다.
[image]
1948년 9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이 법률 제3호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공포한 공포문. 한자로 '대한민국 30년 9월 22일'이라고 적었다.
정부 수립 이후, 국회와 정부가 연호를 두고 서로 고집부리는 상황은 1948년 8월부터 9월까지 약 한 달간 계속되었다. 이 싸움은 결국 국회가 '연호에 관한 법률'을 1948년 9월 25일에 제정하여, 법정연호가 단군기원이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끝났다. 법률이 제정된 마당에 이승만도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려 한 이유를 '''"우리나라의 민주정치제도가 남의 조력으로 된 것이 아니요, 30년 전에 민국정부를 수립·선포한 데서 이뤄졌다는 것과 기미년 독립선언이 미국의 독립선언보다 더 영광스럽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1980년대 이후 잊혀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학계가 연구하면서, 대한민국 연호를 다시 사용하자는 주장도 나왔다.[5] 또한 이명박 정부 시기부터 불거진 건국절 논란과 결부되어 1919년을 원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가 다시 주목받기도 하였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진영에서는 대한민국 수립 과정에서의 이승만의 업적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이승만 본인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1919년을 원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 사용을 끝까지 고집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6]
2021년은 '''대한민국 103년'''이다.[7] '''서력기원''' 연호로 '''뒷자리가 8로 끝나는 해'''가 '''대한민국 연호'''로 '''10단위씩 끊어지는 해'''다.

4. 관련 문서


[1] 중화민국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민국기년의 약칭과 동일하다. 실제 대한민국 임시정부중화민국의 지원 아래 상하이에서 출범하여 중화민국 영토에서 활동하였으므로, 1919년 당시 널리 쓰이던 중화민국 연호가 대한민국 연호에 영향을 끼친 듯하다. 1948년 이래 공용 연호를 단군기원을 거쳐 서력기원으로 대체한 대한민국과 달리, 대만에서는 중화민국 연호가 여전히 공용연호이고 민간에서도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한다.[2] 참고로 대한민국 연호의 기원이 된 문서인 3·1 독립선언서에는 단기를 사용하여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이라고 날짜를 표기하였다. 3.1운동 당시에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결정되지도 않았으므로 당연한 이치이다.[3] 여담이지만, 2018년까지 임시정부수립일로 알려진 4월 13일은 언론에 공표된 날과 일제가 조사한 날로 알려져 있다. 링크, 링크 참조[4]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및 초대 임시대통령을 역임한 바 있다.[5] 上海臨政이 第1共和國(경향신문/1983.02.27)[6] 한편 정부 수립을 '새 국가의 창설'로 언급하면서도 연호대한민국 30년으로 사용한 신문 기사도 존재한다.[7]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이 연호를 접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2019년을 '100년'으로 알고 있으나, 대한민국 연호는 기년법이기 때문에 1919년이 '원년' 즉 1년이 되고 1920년이 '2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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