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삼국지)

 




陶謙
(132년 ~ 194년)[1]
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2. 서주 자사
2.3. 조조와의 대립, 죽음
3. 연의
4. 가족관계
5. 평가
5.1. 조씨 멸망의 도미노 첫 타자?
6.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 는 공조(恭祖). 단양군 단양현 사람.

2. 정사



2.1. 초기 생애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현 내에서 도겸이 막돼먹은 놈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14살이 되어서도 병정놀이를 해서 동네 아이들이 도겸을 따랐다. 창오 태수를 지낸 적이 있던 동향 출신의 감공이 도겸의 용모를 보고 비범하다고 여겨 이야기를 나눈 후에 도겸에게 딸을 주어 부인으로 줄 약속을 했으며, 감공의 부인이 이를 알고 따지자 감공은 도겸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면서 딸을 도겸에게 내어줬다.
젊어서는 유생으로 주군에 출사해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에 임명되었으며, 옮겨서 서현 현령을 지내는 등 각지의 지방 장관을 맡았다. 이후 무재로 천거되었다가 여현령, 유주 자사 등을 역임했다.
오서에 따르면 같은 군 출신의 선배인 아버지의 친구이자 여강군 태수인 장반은 도겸을 특별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도겸은 장반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무리와 더불어 성으로 돌아와서 공무를 이유로 장반을 만나고 자리가 파한 이후에 장반은 항상 사사로이 도겸을 불러들여 더불어 연회를 즐기고자 하였지만 도겸은 혹 거절하여 남지 않았다. 장반이 항상 춤을 추라고 부탁하자 도겸은 춤추려 하지 않았다가 끈질긴 강요로 겨우 춤을 추면서도 억지로 추는 모습이 역력해 춤을 추면서 도는 동작을 하지 않았다.[2] 이로부터 장반이 불쾌하게 여겨 끝내 두 사람의 사이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도겸은 관리로 있으면서 청백하여 꼬투리 잡을 게 없었는데 영성(靈星)에 제사지내고 남은 돈 500전이 있어 (장반이) 이를 장물로 삼고자 하니[3] 도겸은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의랑을 지내다가 후한의 서쪽 변경에서 군무 경력을 쌓았다. 도겸은 강족을 토벌하러 서쪽으로 향하던 정서장군 황보숭에게 발탁되어 양무도위에 임명하고 황보숭과 함께 강족을 크게 무찔렀다. 변장 · 한수의 난 때 토벌군 대장인 사공 행 거기장군 장온의 참군사[4]로 종군했다. 장온은 도겸을 불러 후히 대우했다. 도겸은 장온에게 속으로 불복하였으나, 술자리와 같은 자신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모인 사적인 자리에서는 되려 장온을 욕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장온은 분노하여 도겸을 변방으로 유배보냈으나, 어떤 사람이 장온에게 "도공조는 본래 재략으로 공에게 중용받았는데 하루 아침에 취해서 한 실수를 가지고 관용을 받지 못하고 멀리 불모지에 버려져 두터운 덕이 끝까지 가지 못한다면 사방의 인사들이 어찌 기대하고 의지하겠습니까! 원한의 감정을 풀고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 멀리서도 아름다운 덕이 들리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도겸을 풀어줄 것을 진지하게 간하고 한편으로는 도겸에게 "족하께서 가벼이 3공을 모욕하였으니 스스로 자기의 죄를 지은 것으로 지금 용서를 받았으니 덕이 이보다 두터운 것이 없습니다. 응당 뜻을 내리고 말을 공손하게 하여 사과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망할 놈의 성질머리 좀 죽이고 장온에게 사죄하라고 한다. 도겸은 알겠다고 하였다. 그는 "도공조가 지금 깊이 스스로의 잘못을 탓하고 바꾸고자 합니다. 천자에게 가서 사죄하는 예가 끝난 다음 반드시 공에게 올 것 입니다. 공께서는 응당 만나보고 그 뜻을 위로하셔야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화해했으며 도겸은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에 장온이 공궐의 문에서 도겸을 만났는데 도겸이 장온을 바라보고 말하길 "도겸은 스스로 조정에 사죄하러 온 것이지 어찌 공을 위해 왔겠습니까?"장온이 말하길 "도공조의 어리석은 병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구나" 하고는 마침내 도겸에 대한 장온의 대우는 처음과 같았다. 이는 도겸의 인격이 좋지 않았다는 증거기도 하지만 거기장군이나 되는이가 욕한 후배를 너그러이 용서했을 정도로 도겸의 능력이 출중했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도 된다.
이때까지 그가 쌓은 군무경력은 손견 다음으로 가는 수준으로, 당대의 그는 주변으로부터 제법 기대를 받는 유망주였던 것 같다. 두 인물 모두 강동 출신이며, 서북변에서 벌어진 군사적 활동에 참여한 것도 그들이 가진 공통점이다. 다만 도겸이 손견보다 더 나이가 많았기 때문인지 도겸의 민정경력은 손견에 비해 더 오래되었고 그의 관위도 손견보다 높았다.[5][6]

2.2. 서주 자사


조정의 명령으로 도겸은 서주의 황건적 잔당들을 토벌하였고, 서주 지역을 장악하고 지방호족들과 연계하고 조정으로부터 이를 승인 받아 서주의 자사가 되었다.
동탁과 맞서 싸우는 주준을 지원하기도 했다. 동탁이 왕윤, 여포에게 죽은 후 이각, 곽사 등이 조정을 장악하자 공융 등과 함께 주준을 추대하여 연합군을 이끌고 이각과 곽사를 치고 황제를 받들어 모시고자 함을 권유했으나 주준은 이를 사양했다. 도겸은 공물을 보낼 사자를 조정에 보내고, 사자에게 일러 샛길로 가게 하였다. 이로써 그는 안동장군·서주목으로 옮겼고, 율양후에 봉해졌다.
어렸을 때 도겸은 공부를 잘했고 인망도 있었는데, 정작 서주 자사가 되자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조욱을 소원하게 여겼고, 조굉과 같이 아첨하는 소인배들을 가까이하여 형벌과 정치는 형평을 잃어 선량한 사람 대부분이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당대의 명사로 유명한 허소가 도겸을 찾아 서주로 왔을 때 도겸은 그와 면담을 하였다. 허소의 평에 따르면, "도겸은 겉으로 겸손하고 깨끗한 명성을 추구하지만, 정직하지 못하다. 남을 후대하고 있지만 끝내 그는 반드시 변할 사람이었다"고 한다. 실망한 허소는 도겸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의 초빙을 거부한 장소를 잡아들였다가, 휘하의 조욱이 권하여 풀어주었다.
정치에서 인사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실권이다. 그의 인사 능력 나쁘지 않았다. 왕랑, 조욱, 미축, 진등 과 같은 인물은 모두 도겸이 조정에 추천하여 관직에 나서게 된 사람들이었다. 또 당시 서주 백성들은 부유하여 충분한 먹을 거리가 비축된 상황이었으므로, 매우 많은 유민들이 서주에 몸을 의탁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겸은 혹설처럼 연산군과 같이 막무가내로 정치를 한 인물이 아니었다.

2.3. 조조와의 대립, 죽음


원술과 원소가 사이가 벌어지자, 공손찬과 동맹을 맺어 공손찬 수하의 유비, 전해, 선경과 함께 포위망을 형성[7]하여 원소를 압박했으나 이들은 모두 원소와 조조에게 격파당했다.
천자를 자칭하던 궐선이라는 도적과 손을 잡아 함께 약탈을 일삼다가 그를 배신해서 죽이고 군대를 흡수했다. 도겸은 천자를 자칭한 역적과 어울렸던 반역도당이면서도 동시에 동료를 배반한 저열한 배신자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겸이 역적을 속여 넘김으로써 별다른 피해 없이 난을 진압한 탁월한 지략가라고도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손찬과 협력하여 조조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조숭을 죽게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조조에게 공격당해 연전연패했다. 한때는 고향 단양으로 도주하려고 했을 정도. 전해와 유비가 원군으로 오고 여포가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퇴각하자, 사망하기 직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객장으로 와 있던 유비에게 서주를 양도했다. 향년 63세. 도겸이 죽자 장소 등이 도겸을 위해 애도하는 글을 지어주었다.

아아, 사군(使君)이여. 그대(君侯)는 장군(將軍)으로 뛰어난 덕행을 지니고, 그에 마땅한 문과 무를 지녔으며, 풍체는 족히 강직한 데다, 온화하고 어짊을 지켜, 서현(舒縣)과 노현(盧縣)에는 백성에게 인애(仁愛)를 남겼다.

유주에서 목牧직을 수행하고 서주의 목牧이 되어도 《감당(甘棠)》처럼 공정하였으니, 아득히 먼 이(夷), 맥(貊)마저 그대(侯)에 힘입어 잠잠해졌다.

어지러이 요사스러운 도적들이 일어나고, 이 도적들은 그대(侯)를 안녕치 못하게 하였으나 오직 황제의 치적만을 생각하고, 작명(爵命)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목(牧) 또한 후(侯)가 되니 율양(溧陽)을 봉토로 받고, 마침내 상장(上將)에 올라 안동(安東)의 호를 받게 되니 장차 세상의 어지러움을 평정하고 사직(社稷)을 숭봉하였다.

천수가 영원치는 않으나 갑자기 조훙(殂薨, 죽음)하였으니 믿을 곳을 잃어 백성이 곤궁함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혹은 일찍이) 열흘도 되지 않아 오군(五郡)이 무너져 내림에 애닮픈 우리 백성들은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추사하노니 슬퍼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네. 아아! 슬프도다!

장소의 애도하는 글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 도겸은 인망이 자자한 인물로 그려진다. 예주 지역을 평정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게된 조조는 전란을 피해 남하하였던 조조의 부친 조숭에게 서신을 보내 모시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도겸은 조조와 사귀고자 하여 자신의 부장인 장개와 군사를 보내 조숭의 일가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숭이 가진 재물에 욕심을 낸 장개가 조숭과 그 일가를 살해하고 보물을 차지하고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도겸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제후들에게 공문을 띄우고 군사를 이끌어 단숨에 서주로 진군한 조조와 싸우게 되었다. 정사에서 도겸은 조조의 군세에 맞서 끝내 서주를 지켜냈던 것과 달리 연의에서 그는 조조의 군세가 서주를 침략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심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는 허수아비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급기야 "차라리 나 혼자 죽겠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묶어 조조에게 보내려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후에 이어진 그의 행적은 유비의 도움을 받았다가 얼마 뒤 세상을 떠나며 유비에게 서주를 맡긴다는 식으로 정사와 같다.
한마디로 연의에서 그려지는 도겸은 통솔력과 용병술은 낮추어졌는 데 반해 인의와 덕망은 상향되도록 조형된 인물이다. 이는 도겸뿐 아니라 유표, 공손찬[8] 등 유비에게 우호적이었던 인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변화이며, 유비 본인에게도 똑같은 보정이 걸려 있다.
참고로 연의에서는 도겸에게 2명의 아들이 있다고 나온다. 연의에서 유비가 도겸을 이어 서주를 다스려달라고 도겸 본인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받을 때 거절하면서 했던 말이 "도겸 공께는 2명의 아들이 있는데 어찌 내가 그들의 자리를 도둑질한단 말이오?"라고 하며 거절했다. 그런데 이 도겸의 아들들은 그 뒤 전혀 등장도 없고 언급도 없으며 유비가 서주목이 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실제로 도겸에게는 도상(陶商)과 도응(陶應)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 모두 출사하지 않았으며 도겸은 서주를 자신의 아들들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출처는 정사 삼국지 도겸전. 도겸이 죽기전 유비가 아니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한 대로 명망 높고 능력 또한 뛰어난 데다 한 황실의 말예이기도 했던 유비가 서주를 안정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고 믿고 자신이 다스리던 서주의 안정을 위해 물려줬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장면은 훗날 유비가 제갈량에게 유언으로 내 자식이 못났으면 제갈량이 대신해달라는 장면과 비슷하다.

4. 가족관계


  • 부인 감씨[9]
  • 장남 도상
  • 차남 도응

5. 평가


도겸에 대한 재평가
연의에선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줬다는 것 때문인지 선역으로만 묘사되나 정사에서는 평이 꽤나 복잡하다. 자치통감에서는 "도겸은 서주의 지배자이자 의로써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그가 어찌 궐선의 몇 천 무리와 손을 잡았겠는가?"라고 평가했고 삼국지 주석 오서에서도 도겸을 강직하고 절개가 있다 평하며 연의와 비슷한 평가를 냈지만 후한서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반대로 입에 거품물며 죽어라 도겸을 비판하는 모양새. 정사 삼국지의 특성상 서주 대학살이라는 죄업을 약간이라도 줄여내려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와는 별개인 후한서에서도 우호적인 서술은커녕 부정적인 서술이 주로 존재한다.[10]
정사에서의 도겸의 언급을 보면 병약하고 늙은 선비로만 묘사되는 연의와 달리 나름대로 문무를 겸비한 호걸로서, 유생으로서 효렴으로 천거된 이후 출사할 때 군무에서도 활약했다는 등 단순한 선비와는 일선을 긋고 있다. 거기에 장반의 일화에서 보듯 젊은 시절부터 자존심이 강했고 아무리봐도 '좋은 사람'이라고 단언하긴 힘든 성격이었으며 정치적 야심과 카리스마가 강했다. 즉 난세 초기에 서주의 지배자로 있을 정도의 재량은 있던 인물인 셈. 심지어 원술과 공손찬이 각각 무너지기 전의 한때엔 이 둘과 동맹해서 원소, 조조 세력에 맞섰는데 그 조조조차 함부러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한 세력 중 하나였으며[11] 자신이 통치하는 서주만이 아니라 인접한 연주, 예주, 양주에 두루 영향력을 미칠 정도였다.[12]
천자동탁에 의해 강제로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제후들과의 연락을 끊었을 때, 왕랑의 조언에 따라 도겸은 샛길로 공물을 바쳐 안동장군과 서주자사로 승진하였고 율양후에 봉해졌던 사실을 문제로 삼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동탁이 집권하여 폐쇄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중앙정권에 근왕을 하지 못하니 공물을 보낸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도겸이 서주에서 이룩한 공로와 서주의 사회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입지를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은 것이다. 동탁이 패망한 다음 이각곽사가 집권했을 때 도겸은 주준을 태사로 삼도록 추천하였고 이각 등을 토벌하여 천자를 맞이하려고도 했다. 조조보다도 먼저 협천자를 시도한 것이다. 즉, 도겸은 한황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황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는 셈이다. 이보다 이전에 반동탁연합이 궐기할 당시 영천에 있던 주준을 맹주로 받들어 동탁에게 대항한 것을 생각하면 도겸은 확실히 천자가 지닌 상징성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꿰고 있었다.
그리고 무작정 동탁에 굴종한 것도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반동탁연합군에는 처음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동탁이 수도인 낙양을 태운 뒤 연합군을 막을 병력을 주둔시켜두는데 그 주둔군의 사령관이 다름 아닌 황건봉기 당시 공을 세웠던 주준이었다. 주준은 자진해서 낙양에 남아있었는데, 병력을 인솔해 주둔군을 장악하고 동탁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에 동탁은 이각, 곽사 등을 보내서 주준을 공격했다, 병력 차가 심했던 것인지 주준은 이각과 곽사 등에 밀려 연주와 예주 사이로 후퇴하게 되는데 여기서 가만히 있던 도겸과 공융이 제각각 병사와 물자를 보내 주준을 지원, 원소 등의 연합군이 와해된 뒤에 한동안 주준을 중심으로 한 반동탁연합군이 유지되기까지 했다. 한황실을 중시했던 만큼 한황실을 쥐고 흔드는 동탁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후일 서주를 구원한 방계 중 방계황족인 유비에게 서주를 넘긴건 이런 원인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도겸이 서주에 대한 지배권을 유비에게 이양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 서주의 주요 호족이나 주요 관료들(미축진등 등)이 유비를 지지했다. 도겸 스스로도 미축에게 "유비가 아니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 고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서주에는 유비를 지지하는 여론이 폭넓게 퍼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치로 조조가 서주를 칠 명분을 없앨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도겸 휘하 세력들이 단합하여 유비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조표는 소패의 진궁, 여포와 내통하여 유비가 함양의 원술과 싸우러 출정하였을 때 성문을 그들에게 내주었을 정도로 유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튼 유비는 도겸을 도운 일로 인하여 잃은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서주 대학살로 인하여 조조야말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조숭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후대를 하다가 부하가 욕심을 내서 조숭을 살해하여 오해를 덮어쓰게 된 연의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역사적으로는 조숭 살해 당시, 당시 정세는 원소와 조조의 연합과 원술, 도겸, 그리고 공손찬의 연합이 대립하였다. 193년 가을 이전에 조숭이 장개에게 살해당했다. 조조가 서주를 침략했으나 군량이 부족해 군대를 잠시 물렸다. 조조는 다시 서주를 침공하였으나 여포가 반격하여 퇴각하였는데, 조조의 군세가 돌아가며 일으킨 서주 군민들에 대한 무단학살이 벌어진 때는 진수의 삼국지와 자치통감 그리고 후한서의 기록이 다르다.
일본의 삼국지 창작물들에는 도겸이 마치 대대로 서주를 다스린 것마냥 묘사되어 있기도 한데[13], 실제로 도겸은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서주를 세력권으로 삼아 당대에 군벌로 성장한 것이다. 즉 도겸 역시 당대의 호걸이자 효웅이라고 볼 수 있다[14]. 그리고 당시 많은 유민들과 백성들이 곡식을 풍족히 축적한 도겸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적어도 연의에서처럼 백성들에게는 괜찮은 군주였던 셈이다. 한 마디로 도겸은 한나라의 충신이면서 동시에 야심가이기도 했다. 인재 등용을 중요시했으면서도 소인배들과 친하게 지냈다. 또 한편으로는 유민이 된 백성들을 돌보는 훌륭한 목민관이기도 했다. 어쨌건 이런 저런 한계점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존재감을 무시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조조의 업적 중 하나라고 알려진 둔전제를 처음으로 시행한 사람이 도겸이라는 재미있는 설이 존재한다. 도겸은 삼보의 난 전후로, 도겸은 갑작스럽게 발생해 서주 내로 이주하기 시작한 수백만의 난민과 그 원인인 기근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당시 동양현의 장을 지내고 있던 진등을 전농교위로 삼아 둔전을 진행하도록 했다. 물론 그 이전인 192년에 조조 진영에서 모사인 모개에 의해 경작지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조조가 둔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4~5년쯤 즉 조조는 논의에 그쳤던 둔전을 한 발 앞서서 진등을 통해 상당한 양의 벼와 보리 등을 비축하고 회복세에 들어간 셈인데 이 시기도 조조보다 한참이나 앞서 있었다. 다만 둔전의 개념은 그전부터 있었고 조조가 처음으로 실행한 것은 민둔이다.

5.1. 조씨 멸망의 도미노 첫 타자?


조숭은 측간으로 달아났으나 첩과 함께 해를 입었고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조숭이 죽으면서 조조의 동생 조덕 등의 조씨 일족들은 몰살 당했다. 즉 조씨에게만 군권을 나눠주는 위나라의 관행에서 잠재적인 정권 핵심 엘리트 층이 멸종당한 급의 충격이었다. 그후 조비 대로 가면서 가까운 조씨 황족들은 억누르면서 방계친척이나 양자인 조진, 조휴등이 황제를 수호하는 황족이 된다. 만약 조씨가 서주에서 죽지 않았더라면 방계 황족들이 조씨를 수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떡밥이다.

6. 미디어 믹스



[1] 후계자인 유비랑 똑같은 햇수를 살았다.[2] 삼국지집해를 보면 '후한서 채옹전에 이르길 삭방으로 유배되어 사면받아 돌아올 때에 (오원) 태수 왕지가 전송했는데 일어나 춤을 추고 채옹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였다. 채옹은 답무를 추지 않았으므로 왕지가 증오하였다.' 이는 주인과 손님이 즐겁게 노는 일반적인 태도였다. 또 '한서 주에 이르길 장사정왕이 조정에 오자 천자가 조서를 내려 장수를 축원하고 춤을 추도록 하였다. 정왕은 다만 긴소매속의 팔을 약간 들어 움직였을 뿐이므로 좌우에서 춤추는 기술이 서툴다고 비웃었다. 황제가 기괴하게 여겨 물으니 정왕이 대답하길 신은 나라가 작고 땅이 협소하니 족히 돌 수가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는 곧 춤출 때 고의로 돌지 않아서 자신의 뜻을 보인 것이니 도겸의 이 일과 같은것이다. 두가지 기록을 참고해보면 장반이 도겸에게 춤을 시켰다는 것은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 봤을 때에 장반이 먼저 추고 도겸에게 시켰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도겸이 그걸 채옹같이 거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례한 것인데 왜 몸을 돌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다른 사람을 이길까봐 라고 한 것은 내가 몸까지 돌리면 장반, 당신을 이길지도 몰라 돌리지 않았다고 대답한것이므로 장반을 대놓고 모욕한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 삼국지집해를 보면 "한서에 무릇 장(贓)이라는 글자는 더불어 장(臧)이라고도 썼다.또한 하작이 말하길 '장(臧)이라는 글자 아래에 혹시 핵(劾)이라는 글자가 있었는지 의심된다. 집해의 견해를 따라 장반이 도겸을 미워하여 남은 돈을 고의로 도겸이 장물로 사용하기 위한것으로 덮어씌우고자 했다 보인다.[4] 참고로 손견도 똑같은 직책에 있었다.[5] 같이 장온의 참군사가 되기 직전 손견은 군승 · 별부사마였고 도겸은 태수였다.[6] 공손찬과도 유사한 커리어를 쌓았다. (공손찬)서자출신>태수의 눈에 띄어 사위가 됨>선비족 토벌 (도겸)아버지가 일찍 사망>전직 태수의 눈에 띄어 사위가 됨>강족 토벌[7] 도겸은 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였고, 상술된 세 인물도 원소와 조조 주변에 주둔하였다.[8] 다만 공손찬은 다소 애매할 수 있다. 원인은 해당 문서 참조.[9] 창오 태수를 지냈던 감공의 딸.[10] 조위 이후 쓰여진 만큼 정사 삼국지가 그 당시 조위의 입장을 아예 배제할순 없다손 쳐도 후한서는 조위의 숙적 중 하나였던 원소에 대해서도 정사와 달리 나름 현실적이며 자세하게 묘사했고 단순한 악당으로 몰아가지도 않았다. 도겸이 서주를 얻은 것부터가 황실에 돈을 바쳤기 때문인데 그 당시 황실은 사실상 동탁군이 점거한 상황이므로 역적이랑 결탁해 매관매직한 거나 다름없다고 여겨서 불충한 자로 봤을 수도 있다.[11] 다만 이땐 조조도 원소 휘하의 일원으로 보는 게 일반적일 정도로 자체적인 세력이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12] 정확히는 각주의 인접지방인 연주의 태산군, 패국, 그리고 본인의 고향인 단양과 그의 치중인 왕랑이 태수로 있던 회계까지 영향력이 미쳤다고 볼 수 있고 아예 태산군의 화현과 비현, 임성국은 본인이 점령하기까지 했다. 조조의 부친 조숭이 죽은 곳도 태산군이었다.[13] 물론 애초에 봉건제가 아닌 한나라에서 대대로 한 가문이 지역의 지배자로 지낸다는건 변방의 몇몇 경우를 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14] 애초에 한나라 조정의 권위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무슨 봉건영주처럼 한 지방을 다스리다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한나라의 중앙집권제는 시대상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까지 발달해 있었고, 각 지방을 다스리는 것은 세습적 봉건영주가 아닌 황제가 임명한 관리였던 것. 이 점은 일본인들에게 익숙한 일본 시대물의 영향을 받아 왜곡된 묘사라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