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축
麋竺
(? ~ 221)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문관. 미방의 형, 미부인의 오빠. 자는 자중(子仲). 서주 동해군 구현 사람.
쭉 유비를 따라다니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한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본래 서주의 미씨 집안은 조상 대대로 재산을 늘려 하인과 노비가 1만 명이고, 재산은 엄청나게 많았다(鉅億). 아무래도 과장이 더해진 이야기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서주는 고대부터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통의 요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이는 후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예로부터 서주는 중국의 남북을 잇는 곳이면서 동쪽의 바닷가에서 얻는 막대한 양의 소금을 내륙으로 옮기는 역할도 겸하고 있어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도 많이 사는 곳이었다. 이런 지역에서 첫손에 꼽힐 정도의 부자라면 적어도 당시 중국 전체에서도 쉽게 찾아보지 못했을 부자임은 분명하다.
수신기에 따르면 미축이 한번은 낙양에서 서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에서 수십 리 떨어진 길가에서 한 부인을 보았는데 그녀가 미축을 따라오며 수레에 태워주기를 바랐다. 미축은 기꺼이 마차에 자리를 내어 그녀를 태워 주었는데, 미축은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그녀에게 한 번도 삿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실 '''불을 내려는 목적으로 '''미축의 저택으로 향하던 화덕성군이었고, 화덕성군은 미축의 올곧고 바른 성품에 감탄하여 몇십리 쯤 가던 중 부인이 사례하고 떠나며 미축에게 말하였다.
미축은 나의 집을 피하여 불을 내지 않으면 안되냐며 화덕성군에게 부탁했지만, 화덕성군은 불태우지 않을 수 없다며 자신이 천천히 갈테니 그대는 빨리 마차를 달려 정오 즈음에 날 화재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라고 일러주었다. 집에 도착한 미축은 집안의 재물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신기하게도 집에 불씨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화덕성군의 예언처럼 큰 불이 나 집이 몽땅 타버렸다.나는 천사(天使)로서 동해에 있는 미축의 집을 불태우러 가는 길인데, 그대가 나를 태워줌에 감동하여 이렇게 서로 말하게 된 것이다.
후에 서주목 도겸에게 불리어져 별가종사(別駕從事)가 되었다. 별가종사란, 주 자사를 따라 다니며 보좌하는 직책이었으니, 도겸의 최측근이 곧 미축이었던 셈이다. 화덕성군 일은 과장이겠지만 습유기에서도 불났다는 걸로 봐선 미축이 화재를 겪었을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2.2. 유비 휘하에서
선주전에 따르면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미축이 유비에게 서주를 양도할 뜻을 나타냈다. 도겸이 죽자 미축은 소패에서 서주의 백성들을 이끌고 유비를 영접했다. 유비는 처음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진등과 공융도 요청하니 받아들였다.
196년, 유비가 원술에 대항하러 나간 틈을 타서 여포가 하비를 습격하고, 유비의 처자식을 붙잡았다. 유비는 광릉의 해서 지방으로 군대를 돌렸다. 당시 오갈 데 없어진 유비의 상황은 영웅기에 묘사되어 있는데, 굶주림으로 곤경에 빠져 관원과 군사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미축은 이에 유비에게 누이 미부인을 부인으로 들이고, '''노객 2천 명과 금은 및 온갖 재물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해 도왔다. '''이 때 유비는 곤란하고 궁핍했으나 이에 힘입어 군대를 일으키고 정비하여 다시 떨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여포에게 소패를 얻어내 주둔하기까지 버티면서 재기의 발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명성을 들은 조조도 태산군의 일부 현을 갈라내 영군을 설치하면서 헌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당시 편장군을 지내던 미축에게 영군태수를 맡게 하고, 미축의 아우 미방을 팽성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미축과 미방은 관직을 버리고 유비에게 충성하며 그를 따라 서주를 떠났다. 이로써 그의 중앙 권력 입신양명은 없던 일이 되었다.편장군 미축은 본디 충성스럽고 곧으며, 문무가 환히 빛나니, 청컨대 미축으로 영군태수를 맡게 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위무케 하소서.
유비가 여남에서 형주의 유표에게 가면서 손건과 미축을 사자로 보내 외교를 성취해 유비가 의탁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유비가 형주에 이르자 간옹, 손건과 함께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 정확히는 미축은 좌장군 종사중랑이 되었다. 이런 활약은 삼고초려 이전 소위 말하는 간손미 트리오가 유비의 최측근 참모진으로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축은 온화한 용모에 돈후하고 고상했으나 감독하는 데는 뛰어나지 못했다. 정사에는 미축이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어 그는 문무를 겸비한 장수의 기질이 있었지만, 유비는 통솔을 그에게 맡기지 않았다. 개인의 무력은 상당했던 모양인데, 야전 지휘관에는 어울리지 않는 호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상으로 하사함에 있어 우대와 총애는 그에게 비할 자가 없었다.
최측근 참모의 역할은 수어지교의 제갈량에게 내주었지만, 입촉 이후 그에게 직함을 제수함에 있어 유비가 미축에게 가진 고마움을 모두 갚는다. 유비는 익주가 평정되자 미축을 안한장군(安漢將軍)으로 삼고 반열(班)은 군사장군 제갈량의 오른쪽, 그러니까 군사장군의 위에 두었다. 비록 명예직이지만 미축을 제갈량보다 높은 직위에 올렸으니 20여 년간 유비와 미축이 맺은 군신 사이의 정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비유하자면 손권의 노숙급이요, 한고제의 소하급이었던 것이다.[1] 이름부터 한나라를 평안케 할 것이라는 것이니, 한의 부흥을 부르짖던 유비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 이름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2.3. 죽음
미축의 동생 미방은 남군태수가 되어 관우와 같이 일을 맡아 처리했으나 두 사람은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좋지 않았고(불화했고) 이에 두 마음을 품고는 모반하여 손권을 맞이했다고 나온다. 관우는 미방을 업신여겼고 남군성 내에서 실수로 화재를 놓쳐 기물을 많이 태운 미방에게 질책을 했다. 미방은 이 일로 인해 손권과 내통하고 배반했고 관우의 패망 원인이 되었다.[2]
미축이 동생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를 결박하고 죄를 청했으나, 유비는 미방의 죄는 결코 미축과 관계 없다며 그를 위로하고 존숭하여 대우하길 처음과 같이했다. 그러나 미축은 부끄러움에 병이 나고 말았다. 선주전에 따르면 221년, 유비에게 황제 즉위를 상언한 신하 중 안한장군 미축의 이름도 있다. 이 당시에는 아직 생존해있던 것으로 보이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미축은 부끄러움으로 얻은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미위는 호분중랑장을 역임했으며 손자 미조는 호기감[3] 이 되었다. 미위와 미조 부자 역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다고 한다. 그 밖에 미축의 증손자로 서진 사람 미황이 있다. 미축 자손들이 어쨌든 계속 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미방이 한 짓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는 않은 듯하며, 간손미 중 유일하게 자손에 대한 기록이 남았다.
3. 연의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났다는 정사의 기록은 거의 무시되고[4] 문관으로서의 면모가 많이 부각된다. 심지어 장판파에서 조조군에 사로잡혔다가 조운에게 구출된다.
유비에게 황제 즉위를 건의한 신하 중 하나로 나오다가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정사에서 미방의 투항에 부끄러움과 분노로 분사해버린 비극적인 최후가 나오지 않는다.
4. 평가
양희는 미자중을 찬함(贊麋子仲)이라는 계한보신찬의 평가에서 '안한장군은 온화한 용모로, 어떤 때는 인척이 되고, 어떤 때는 빈객이 되었다. 이 사람은 훌륭한 신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
미축이 유비에게 올인한 시점은 유비가 여포 뒷치기에 근거지를 잃고 알거지 신세로 떠돌아다닐 때로, 보호가 필요해서 유일한 선택지인 유비를 고른 것이라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많다. 미축은 서주의 명사로, 근거도 없는 유비한테 올인할 필요 없이 그냥 서주에서 여포 곁에 있었어도 됐고 원술이나 조조에게 붙었어도 되었다.[5] 어딜 가든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한 명성과 지위, 인맥이 있는 인물이었다. 조조는 실제로 미축을 직접 천거했고, 엄청난 부호에다 중앙 정권에 천거될 정도로 제법 이름이 나 있는 명사여서 유비 '따위'에게 기댈 이유가 없다. 미축은 울며 겨자먹기를 한 게 아니라 분명히 유비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했다.
현대에서는 기껏해야 간손미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실제론 삼국지라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누구보다도 '''과감한 도박'''을 한 자가 바로 미축이었다. 지나가던 방랑군벌 유비를 만난 뒤, 미축은 자신이 평생 살아오던 서주를 바쳤고, 조상 대대로 모아오던 재물을 바쳤으며, 스스로는 물론이고 두 동생까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유비의 길에 몸을 던지게 했다. 조조 휘하에서 중앙 권력으로 진입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평생을 살아오던 서주 땅을 떠나, 끝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올랐다.
이쯤 되면, 유비라는 존재를 믿고 모든 것을 던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촉한이라는 나라는 곧 미축이라는 반석 위에서 세워졌다.
어쩌면 여기에 조조 일생 최대의 실책이자 악행인 서주대학살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데, 시기적으로 미축이 처음 유비를 지지하기 시작한 것은 도겸이 서주를 양도할 때이다. 즉 서주대학살 직후이면서 동시에 조조의 서주 침공이 현재진행형일 때라는 것. 그리고 유비는 본인 스스로가 말하였듯이 조조의 반대되는 정치적 포지션을 잡는 것을 한평생 전략으로 내세웠다. 자신의 고향을 파괴한 조조에게 유비가 맞서주니 그를 지지하는 것이 미축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런 그를 한동안 알고 지내면서 더 큰일을 해낼 인물이라 판단함에 따라 전폭적인 지원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4.1. 공적
이말년의 만화 때문에 간손미라는 안습한 칭호를 얻었지만 사실은 대단한 인재. 팀의 체력을 책임지는 행정가의 능력이 빛나는 인물이었다.
일정한 기반 없이 떠돌던 유비군을 먹여살린 공은 미축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자신의 모든 것을 유비에게 투자한 셈이다. 그것도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유비에게 말이다. 만약 미축이 아니었다면 유비는 그저 작은 군벌로 남아 발전하지 못한 채 다른 군웅들에게 흡수되었을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유비가 세력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건 오직 미축 덕분이었다. 여러모로 전국사군자나 공자를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자공과 비슷한 면이 많다.
이만큼 투자를 했다면 세력의 방향성에 대해 간섭을 하기 마련이건만, 기록상의 미축은 그러지 않았다. 미축은 그가 투자한 재물의 양과 수에 상관없이 그저 자기 업무였던 내부 실무를 묵묵하게 수행했을 뿐이다.
4.2. 명성
조조의 상소로 보아 그는 중앙 권력으로 진입할 수 있을 정도의 명성이 높은 인사였다. 기실 유비군 초창기에 가장 명망이 높은 인사였다.
촉이 위와 오에 비해 월등히 밀리는 부분 중 하나가 '이름난 명사'의 수였다. 세력 자체가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지 못했고 허정의 등용 과정 일화에서 보듯이 유비 본인부터가 헛된 명성을 탐탁찮아 하는 경향이 강했다.
4.3. 정치
조조의 상소에는 미축의 문무가 환히 빛난다고 적혀있다. 무예와 문장적인 측면 양쪽에서 뛰어났던 것이다.
미축전에 따르면 문장이 빼어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인터넷 상에서 퍼진 사서 번역본의 오역이다.[6] 미축의 정치력에 대해서 평가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유비가 여남에서 캐박살나고 형주로 가게 되면서 손건과 미축을 먼저 보내 유표와 외교하게 했다. 갈 곳을 잃은 유비를 유표에게 의탁하게 만든 중요한 외교적 성과는 당연히 인정할 만하다. 단 이는 문관으로서 정치적 능력을 살린 성과라기보다는 당대 유력한 명사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한 성과라고 볼 수도 있고 실무는 함께 파견된 손건이 담당했다는 인상이 짙기도 하다.
4.4. 외모
미축전에 따르면 온화한 용모에 돈후하고 고상했다고 호의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순욱, 제갈량, 주유, 손책, 하안, 맹달, 석포, 양호 등과 같이 직접적으로 미남이라고 기록된 정사 공인 미남들에 비하면 다소 애매한 서술이지만 일반적인 정사 인물평에서 이물에 대한 평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 정도 표현으로 외모에 대한 기록이 정사에 남을 정도면 최소 호감형 외모라는 것은 분명하고 충분히 미남 범주에 포함시켜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5. 기타
수신기에 실린 미축과 화덕성군의 일화와 비슷한 내용의 일화인데, 등장인물이나 사건이 바뀐 점도 있고 돈이 나랏님 곳간에 들어찬것만큼 많았다. 유비에게 바친 황금이 1억근, 보물창고 1천칸, 준마 1만필, 사실 미축은 도주공(범려)를 따라해서 부자가 되었더라 같이 소소하게 추가된 것도 있고 뭐 그런 식이다.[8] 당연히 과장이 심한 내용에 미축은 유비가 서주에서부터 후원했지 삼국이 성립하고 교전하던 시기에 후원하진 않았고 한을 품은 것도 동생 미방의 배신 때문이었으니 뻥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태평광기나 세설신어 같은데도 싣지 않고, 후대에도 소개되지 않은채 습유기에만 나오는 걸로 봐서 당시에나 후대에나 말도 안되는 카더라 정도로 인식됐던 것 같다.미축은 억만금을 매일 벌었는데 이는 도주공(범려)의 계략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가진 재물이 왕가에 견주고 1천칸의 보물창고가 있었다. 미축은 응당 산 자를 구휼하고 죽은 자를 가엾게 여겼다. 옛 무덤이 있었는데 집앞 마구간 옆에 있었다. 밤에 흐느끼는 소리를 내니 안에는 엎드린 주검이 있어 나는 소리였다.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미축이 찾으니 돌연 웃통을 벗어 등이 드러난 부인이 오더니 아뢰기를
"저(妾)는 한나라 말에 적미들에게 해를 당해 관이 끌어내지고 옷이 벗겨졌는데, 오늘날까지 옷이 벗겨져 낮이 되면 누가 볼까봐 두려워한 것이 거의 200년입니다. 지금 장군께 나아가 빌건데 저를 깊이 묻고 낡은 옷으로 형체를 가려주시길 바랍니다."
하니 미축이 허락하며 곧장 푸른 베로 의복을 지어주고 관곽(棺椁)을 만들게하여 무덤에 넣으며 제사를 지내주었다. 1년 후에 홀연 전날의 부인을 구비진 길을 가다가 만났는데 무릇푸른 옷을 입은채 였다. 그녀가 미축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재보는 가히 한 세대를 지탱할 수 있는데 화재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 9척의 푸른 갈대 지팡이로 그대에게 관곽과 의복의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
하니 미축이 지팡이를 끼고 돌아왔다. 이웃의 사람들은 항상 미축의 집에서 용이나 뱀과 같은 형상의 푸른 기운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미축에게 말하길 "어쩌면 귀신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미축도 이를 괴이하게 여기며 가동(家僮)에게 물었다. 가동이 이르길 "때마다 푸른 갈대 지팡이가 문간을 나가는데, 그것이 귀신이라 의심하였지만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미축의 성품은 꺼리는 것이 많았고 염술[7]
의 일을 믿었으며 말을 거스르면 곧장 벌을 주거나 죽였기 때문에 가동이 감히 말하지 못했다. 미축은 모든 동이와 항아리마다 달걀만한 큰 진주를 가득담아 정원에 진열해놓으니 사람들이 이르길 「보물 정원(宝庭)」이라하며 재화가 산과 같아 셀 수 없었고 바깥 사람들이 엿보지 못했다.수 일이 지나 푸른 옷을 입은 동자 수십 명이 와서 말하길 "미축의 집안은 화재의 재앙을 당해 만에 하나도 남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그대가 고골(枯骨)을 불쌍히 여겨 거두었기에 천도(天道)가 그대의 덕을 저버리지 않고 이리 불러 화재를 물리치고 재물을 지켜주도록 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마땅히 방비하셔야합니다!" 하니, 미축이 곧 창고 둘레에 도랑을 둘러 팠다. 열흘 뒤에 화재가 창고 안으로부터 일어나 진주와 옥 10분의 1을 불태웠는데, 모두 양수(陽燧)나 가뭄 때문에 저절로 물건에 불이 난 것이었다. 수십 명의 푸른 옷을 입은 동자들이 나타나 불을 때리니 구름처럼 푸른 기운이 일어 불 위를 덮으니 불길이 거세진 것이 곧 불이 꺼졌다.
동자들이 또 말하길 "황새 무리를 많이 모아 화재를 물리치십시오. 황새는 둥지에 물을 모읍니다." 하였다. 집안 사람들은 이에 해오라기와 푸른 백로 수천 마리를 거두어 연못에서 길러 화재를 막았다. 미축이 탄식하길 "인생의 재운(財運)은 정해져 있으니, 차고 넘치게 얻지 못하고 내게 환난이 닥칠까 두렵구나." 당시는 삼국이 교전하던 때로 군용(軍用)이 만배로 필요했는데, 그는 보물과 의복을 수레로 보내 선주를 도왔다. 황금 1억 근에 비단과 모전이 언덕처럼 쌓였고 준마가 1만필이었다. 촉이 패배한 뒤에 회복하지 못하자 한을 품고 죽었다.
습유기라는 책이 유비는 사실 밤마다 와이프 껴안은채로 옥 인형 구경하는게 취미인 오타쿠였다는 식의 내용을 실어놓은 책이니 그냥 "동진 시절에 이런 이야기가 세간에 떠돌아다녔구나" 하며 그러려니 넘어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