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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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39년 5월 20일
'''사망'''
2013년 2월 13일 (향년 73세)[1]
1. 개요
2. 언론
3. 선거
4. 숭배
5. 관련 문서

東條由布子(とじょう ゆうこ

1. 개요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2] 본명은 이와나미 요시에(岩浪淑枝). 일본전범 중 하나인 도조 히데키의 손녀이다. 생김새도 나름대로 조부를 닮았다. 하인리히 힘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딸 구드룬 부르비츠와는 달리 도조 히데키에 대해 인간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얼마 없지만[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범을 열심히 미화하는 데 앞장서며 살았다.
"아돌프 히틀러도 조국을 사랑한 독재자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답변했다. 즉, "히틀러유대인도 죽이고 인종청소 등 별 쓰레기 짓을 했지만, 우리 조부님은 자상하시고 애국적이신 분"이라는 뜻으로 비춰진다. 과거 세탁에 앞장서는 일본 우파들한테도 무시당했던 것을 보면, 얼마나 이 분이 대단한 말씀을 한 건지 잘 알 수 있다. 도조 히데키의 나머지 자손들, 즉 그녀의 가족과 친척들조차 이런 행동을 비웃고 조롱했다고 한다.

2. 언론


한겨레신문의 인터뷰에 따르면, 인상 자체는 전범의 손녀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부드럽다고 한다.# 이게 특별할 건 없는 게, 원래 악인들 중에서도 생각보다 인상이 부드러운 사람은 꽤 있는 편이다. 아돌프 히틀러만 해도 특유의 콧수염만 빼고 보면 평범한 독일인 아재처럼 생겼고, 유영철도 희대의 살인마답지않게 훤칠한 미남 얼굴이다. 일단,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도조의 손녀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이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사회적 불이익도 받은 등, 전후 인생을 나름대로 힘들게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이 전범국가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이 인터뷰를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이 2차 대전 때 저지른 죄는 일언반구도 없고 그로 인해 입은 피해만 앵무새처럼 조잘대던 사람이니, 본인 인생에 대해 말해 달라는 질문에도 자기가 힘들었던 일들만 강조해서 인터뷰에서 언급했다고 볼 수도 있다.

3. 선거


2007년에는 참의원 선거에 나가기도 했는데 낙선되었다.#

4. 숭배


천황에 대해서는 여느 일본 극우들과 마찬가지로 극도의 숭배를 보인 바 있다. "천황은 일본의 '상징' 정도가 아니라 '근간'이다"라고 우기는데, 이는 현행 일본국 헌법 제1조에도 어긋나는 주장이다. 그러나 도조 유코가 숭배하는 '폐하' 는 어디까지 쇼와 덴노이며, 그의 큰아들이자 현재 상황[4]인 후임 천황 아키히토는 아예 '황태자'로 격하하여 부르면서 그의 행보에는 나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의 상징 천황을 규정한 현행 일본국 헌법은, 바로 도조 유코가 숭배해 마지않는 쇼와가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쇼와는 전후에 도조 히데키 총리의 개전을 허가했던 것에 크게 후회했으며,[5]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이 합사되자 매우 불쾌해 하며 1989년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야스쿠니에 두 번 다신 찾아가지 않았을 정도로, 도조에 대한 원망감과 악감정이 엄청났다. 참고로 도조는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적이 없다. 자세한 내용은 순국7사묘 문서를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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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립서울현충원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눈물을 보였다. 전사자가 모셔지고 참배가 자유로운 국립서울현충원에 오자, 참배가 어렵고 하면 비난을 받는 야스쿠니 신사의 생각이 나서 "대한민국은 전사자에 대해 조의를 갖출 수 있는 것이 부럽다."라는 이유였던 것이다.[6]

5. 관련 문서



[1] 사인은 간질성 폐렴.[2] 아버지(도조 히데키의 장남)가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전쟁터로 가는 대신 만주의 풍만발전소로 가면서 서울에서 태어나게 되었다.[3] 도조 히데키의 사형 집행 당시에는 9살이었다.[4] 2019년 5월 1일 아키히토의 큰아들 나루히토가 일본의 새 천황으로 즉위하였다.[5] 심지어 쇼와는 평화주의자에 반전주의자였던 친동생 노부히토다카히토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특히 노부히토의 경우 그가 전쟁을 개전 승인한 일에 대해 형을 비판을 하면 할수록 쇼와 본인도 반박조차 못했을 정도였다.[6] 히로히토는 어릴 때부터 야스쿠니 신사에 자주 참배하곤 했지만, 패망원흉인 전범들이 합사된 이후로 발길을 끊었다. 히로히토 본인부터 큰아들인 아키히토와 함께 도쿄 대공습때 죽을 뻔하다가 살아남아서 그렇다. 그 영향으로 아키히토는 단 한 번도 야스쿠니에 간 적이 없다. 장손인 나루히토 현 덴노도 자주 들은 게 있어서 자민당평화헌법 개정에 간접적으로 태클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