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봉

 


'''초대 천주교 안동교구장'''
'''두봉[1] 레나도[2]'''
'''杜峰''' | '''Dupont'''
[image]
'''출생'''
1929년 9월 2일(만 95살)
프랑스 제3공화국 오를레앙
'''국적'''
프랑스 [image]대한민국 [image]
'''재임기간'''
안동교구
1969년 ~ 1990년

1. 개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소속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주교.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은퇴했다.

2. 생애



2.1. 한국 생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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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났고, 1950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953년에는 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인 1954년엔 한국에 파견되었다. 1969년에는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과 함께 주교로 수품되며 초대 안동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신학교 시절 노동사제가 되고자 생각했다. 당시에는 "신부들은 해로운 존재들이다. 부르주아다.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남의 돈을 갖는다" 라는 식의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 활동이 활발했다. 이에 대하여 몇몇 신부들이 "교우들에게서 왜 생활비를 받아야 되느냐? 스스로 노동자처럼 살면 되지 않느냐?" 라는 생각으로 평일에는 노동하고 토ㆍ일요일에는 본당에서 사목하는 노동사제의 조직을 만들었다.
두봉 신학생 역시 이 문제로 지도 신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결국 "계급투쟁 등 공산당의 주장에 알게 모르게 젖어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노동사제에 대한 생각은 접었다. 대신 그는 선교사제가 되기로 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였던 한국에 파견된 것을 매우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2.2.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2달 반 동안 화물선을 타고 인천항을 통해 전쟁으로 참화가 된 한국에 입국한 그는 천주교 대전교구 대흥동성당 보좌신부, 대전교구청 상서국장,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등을 역임한 후, 1969년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외국인 선교사는 뒷바라지만 하면 된다. 10년 간 교구 자립기반만 닦고 물러나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였다. 유교적 전통이 깊은 지역에서 대화와 상호존중을 통해 선교활동에 전력했고,[3] 특히 관할 구역 대부분이 농촌 지역이라 농촌문제와 농민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가톨릭농민회를 설립하고 농민회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상지전문대학(現 가톨릭상지대학교), 상지여자중학교, 상지여자고등학교 등의 학교들과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 등을 설립하였다.
약속한 10년이 거의 다 채워져가고 이미 사임서를 제출해 두었던 무렵인 1978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이른바 오원춘 사건[4]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았던 두봉 주교에 대한 사임ㆍ추방 압력이 거세졌다. 그러나 두봉 주교는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교구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놓는 것과 이런 상황과는 완전히 다르다.' 라며 맞섰고, 교황청에서도 '지금 사임서를 수리하면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의 두봉 주교 추방에 협력하는 셈이 된다'는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봉 주교의 사임을 철회하였다. 결국 본의 아니게, 이 사건 후에도 10여 년을 더 재직하다가 1990년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2.3. 근황


그는 언제나 가난의 영성을 강조해 왔으며, 주교직을 상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은퇴 후, 행여 후임 교구장에게 부담이 될까봐 안동교구를 떠나 경기도 고양시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 공소에서 14년간 피정 지도 등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달라는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제의에 따라, 2004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손수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이를 인근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피정과 강의에 항상 바쁘다고.
2011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KBS에서는 그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기쁘고 떳떳하게"[5]가 방송되었다. 그외에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인 "미션" 에도 출연하였다.
저서는 아니지만 2011년도 사순시기에 명동성당에서 했던 강론들을 모아 만든 강론집으로 내었다. 제목은 "가장 멋진 삶".
198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나폴레옹 훈장을 수훈받았으며, 2012년 제16회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19년에는 대통령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백남인권봉사상을 수상했다.
201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기사

[1] 귀화 전 이름은 르네 마리 알베르 뒤퐁(René Marie Albert Dupont)[2] 올바른 세례명 표기는 레나토(Renatus). '르네'는 레나토의 프랑스식 변형이다.[3] 그의 신학석사 학위논문 주제가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었을 정도로, 그는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다. 그는 "유림들은 양심에 따라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녔다. 천주교회가 추구하는 것이나 나의 가치관이 잘 맞았다. 내가 부딪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고 말한다.[4] 2012년에 일어난 살인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다. 요약하자면 군청에서 보급한 불량 씨감자에 항의하던 농민 오원춘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모진 고문 끝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다.[5] 사목표어를 따로 내세우지 않는 그가 마음에 담아두는 표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