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1]
[image]
2015.03.13~03.17 해리슨 오페라 하우스 상연시 광고 이미지
'''1853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올려진 "라 트라비아타" 초연 홍보용 포스터'''[2]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오페라.
티치아나 파브리치니, 로베르토 알라냐, 라 스칼라 극장 실황, 리카르도 무티 지휘[3]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춘희를 원작으로 했다.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53년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 오페라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오페라는 국내 단원에 의해 정식으로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이기도하다. 카르멘과 나비부인이 먼저 공연된 적이 있지만 이것은 일본 악단의 공연이다. 국내에서 라 트라비아타가 최초로 공연된 것은 1948년 1월이며 장소는 부민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항목으로 들어온 자 중 다수는 축배의 노래를 알 것이다. 혹은 그 항목 때문에 들어왔든가...
라 트라비아타는 사실 베르디의 개인적 사정과 겹치는 오페라이기도 하다. 그 개인적인 사정이 바로 이 오페라의 탄생 계기를 제공한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첫 아내였던 마르게리타 베리치와 세 아이를 잃어버리고, 홀아비의 몸으로 살아가던 베르디는 한 동안 좌절을 겪다가 나부코에서 첫 히트를 거둔 후 명성을 쌓게되고, 뒤이어 에르나니, 맥베스[4] , 루이자 밀러, 아틸라를 작곡하게 되는데, 역시 좋은 평을 얻어갔다.[5] 그 와중에 나부코 초연에서 아비가일레역을 맡았던 주세피나 스테르포니와 눈이 맞아서 동거에 들어갔지만 그 동거가 순탄치 않았다.
[image]
'''주세피나 스테르포니 (1815년 ~ 1897년)'''
우선 당시 사회가 재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주세피나를 만났을 당시 베르디는 이미 첫 번째 아내 베리치와 사별한 상태였긴 했지만, 베리치가 죽었어도 그녀의 아버지는 살아있던 상황이라서 베르디가 그의 후원자였던 장인어른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베르디가 아닌 주세피나에 있었다. 주세피나 스테르포니는 베르디와 만나기 전에 테너 가수와 극장 지배인 사이에서 각각 아이를 하나씩 낳은 미혼모였고 이는 당시 사회에서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게다가 작곡가 도니체티와도 애정 관계가 있었다. 그녀의 이런 복잡한 남자 관계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스폰서의 지원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연예인 가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서로 사랑에 빠졌기에 1848년부터 동거하여 1859년 4월 29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가까운 곳인 프랑스 중동부의 콜롱주수살레브(Collonges-sous-Salève)에서 정식으로 결혼하기까지 11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그 결혼까지 11년동안 다른 이들의 눈치도 많이 살피고 살아가야 했던 것은 당연했다.
눈치 살피기 싫었는지, 베르디는주세피나를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한 동안 거기서 임시주택을 마련하고 살게 된다. 다행히 파리에선 그런 눈치를 볼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베르디와 주세피나가 동거를 하고 있었을 때, 파리에서는 알렉상드르 뒤마[6] 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멜로물 춘희가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7]
[image]
'''알렉산드르 뒤마 피스 (1824년 7월 27일 - 1895년 11월 27일)'''
[image]
'''아르누보의 대표 작가인 알퐁스 무하의 "동백꽃 여인" 포스터.'''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그 연극을 보고 공감하게 되었다. 특히 베르디는 너무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고급 창녀라는 이유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와 이뤄지지 못한 연극의 내용이 자신들의 상황과 너무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당시 리골레토와 일 트로바토레에서 더욱 명성을 쌓던 베르디는 연극을 보자마자 더욱 의욕을 불태웠고, 뒤마 피스의 연극을 오페라화 하기로 결심한다.
연극을 보고 수년간 파리에서의 생활을 마친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는데, 컴백하자마자 베르디는 자신과 절친한 대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에게 파리에서 감상했던 뒤마 피스의 연극 내용을 오페라에 맞게 각색해달라고 의뢰한다.
베르디는 뒤마 피스의 연극이 정말 맘에 들었는지 작곡을 할 때도, 뒤마 피스의 원작에 충실한 재현을 하기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뒤마 피스의 연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는 '라 트라비아타'라는 제목으로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을 가지게 된다. 때는 1853년 3월 6일.
그러나 전작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와는 달리 베네치아 극장에서 초연된 "라 트라비아타"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이라는 흑역사로 찍히고 만다. 그것도 초연하자마자.... 초연 당시에 출연한 가수진들이 미스캐스팅이었다. "라 트라비아타" 초연 당시의 비올레타 역을 맡은 살바니 도나텔리는 결핵을 앓는 청순한 이미지의 여성 역과 전혀 맞지 않은 비대한 몸집이었고, 알프레도역을 맡은 당시의 테너 가수는 감기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전해지고 있다.(....)[8]
[image]
'''"라 트라비아타" 초연 때 비올레타역을 맡았던 살비니 도나텔리 (Fanny Salvini-Donatelli, 1815년 ~ 1891년)'''
그러나 "라 트라비아타" 초연이 실패한 것은 이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요인은 오페라 배경과 당시 사회로써는 납득하기 힘든 스토리에 있었다. "라 트라비아타"의 배경은 1850년대의 파리로, 이 오페라 이전에 나왔던 거의 모든 유럽 오페라들은 빈첸조 벨리니의 노르마의 경우 로마가 갈리아 지방을 지배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있는 작품이고,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는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구노의 파우스트는 괴테의 원작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프랑스에서 전해지던 설화를 바탕으로 작곡된 오페라였다. 라 트라비아타가 나오기 이전에는 신화, 전설이나 역사물 희곡에서 따와 그것을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가 많이 나왔다고 얘기하는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의 경우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으니, 이는 당시로써는 최초의 현대 오페라를 작곡한 셈이 되었지만, 당시 이러한 오페라 배경은 굉장히 파격적이라 생각되었는지 관객들에게 알러지 반응만 일으켜 버렸다고 한다. 시대를 뛰어넘은 시도라 볼 수 있겠다. 스토리에서도 사교 나비와 부잣집 도련님의 멜로물이어서 당시 관객 에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9] 이 두 가지 요인이 "라 트라비아타" 초연 실패의 더 정확한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세계 언론은 "라 트라비아타"가 실패한 것에 대해 베르디를 아주 비꼬았는데, 이에 베르디는 열받은 상태로 거만하고 포스있는 말투로 "내 오페라가 틀리지 않았다. 이해를 전혀 못한 그들이 틀린 거다. 이 오페라가 다시 무대에 올려지면 후에 나를 대표하는 작품이 될테니 두고봐라."라고 되받아쳤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초연에서 쓴맛을 본 베르디는 "라 트라비아타"를 몇 부분 수정했다. 음악적인 부분을 약간 고치고[10] 배경도 1850년대가 아닌 루이 15세가 다스리던 1700년대 파리로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가수진도 대거 교체했다.
그렇게 수정된 버젼의 라 트라비아타는 1854년 5월 6일 지금은 없어진 베네치아의 산 베네데토 극장에서 재공연을 가지게 되고, 초연의 흑역사와는 달리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 성공에 대해 빈정거리는 여론도 있었지만, 베르디는 이를 무시하고 공연을 계속 이어갔다고 한다. 그 후로 라 트라비아타는 파리, 런던, 뉴욕에서도 공연되어 갈채를 받았지만, 베르디는 이 성공에 대해 약간 아쉬움을 가졌다고 한다. 오페라의 배경이 자신이 원했던 '동시대성'이 먹혀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 들어서야 베르디가 원했던 1850년대 의상으로 공연되었지만, 이 역시 베르디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어찌되었건 실패라는 흑역사를 가진 라 트라비아타는 현재까지도 극장에 자주 올라가는 명작이 되었다.
프랑스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던 코르티잔(cortesean) 비올레타 발레리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된 젊은 귀족 알프레도는 그녀를 사모해 오던 마음을 고백하나 비올레타에게 냉소만 돌아오게 된다. 춤을 추러 가던 중 폐결핵으로 인한 발작이 온 비올레타와 그를 걱정하는 알프레도는 둘이 남아 드디어 사랑의 확신이 싹트기 시작하고 비올레타 역시 이상한 기분이 싹트고 있음을 느끼며 그것이 사랑임을 확신한다. 이후 전원으로 거처를 옮긴 그들은 동거를 시작하게 되고 알프레도는 우연히 비올레타가 그녀의 개인세간 등을 처분하며 전원생활에 충당해 왔음을 알고 생활비를 융통하고자 파리로 떠난다. 홀로 남은 비올레타에게 알프레도의 아버지 조르주 제르몽이 찾아오고 그녀를 회유하여 아들의 곁을 떠나게 한다. 절연장을 써둔 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아버지와의 일들을 알프레도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채 파리로 떠나고 뒤늦게 절연장을 읽은 알프레도는 비올레타가 과거의 화려했던 생활이 그리워 다시 돌아갔다고 오해하며 복수심과 질투에 사로잡힌다. 이후 비올레타의 친구 플로라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알프레도가 나타나고 비올레타는 그를 조용히 불러 돌아갈 것을 부탁하나 비올레타에게 그녀의 후견자를 사랑한다는 거짓고백을 들은 알프레도는 사람들을 불러 파티의 도박에서 딴 모든 돈을 던지며 비올레타에게 모욕을 준다. 이런 광경을 뒤늦게 쫓아온 알프레도의 아버지가 모두 보게되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심경을 토로하는 동안 그의 아들을 데리고 그들의 고향 프로방스로 떠난다. 삶의 의지를 모두 잃어버린 비올레타는 죽음을 기다리고, 뒤늦게 아버지로부터 모든 사건의 전말을 들은 알프레도가 찾아오지만 그녀는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제르몽도 그녀를 딸이라 부르며 위로하지만, 비올레타는 자신의 초상이 새겨진 펜던트를 알프레도에게 건넨 후 마지막 기력이 쇠해 그의 품에 안겨 사망한다.
인기 레퍼토리인 만큼 음반과 영상물이 많이 나와있다. 문제는 명연과 졸연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있어서 선택의 고민이 생길 수도 있는 법. 잘 고르도록 하자.
음반의 경우 토스카와 시몬 보카네그라, 메피스토펠레, 노르마와는 달리 딱히 '결정반'이라 불리는 것이 없다. 그 만큼 좋은 연주가 많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연주로 평가받는 음반들이다. 스테레오와 모노 모두 포함해서....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DG반. 이건 예전 표지'''
[image]
'''The Originals 시리즈로 재발매한 버전. 시중에서 가장 구하기 쉽다'''
스테레오 음반중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것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나온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반을 꼽을 수 있다. 클라이버의 지휘는 아래에 소개되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실황반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템포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음반의 매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1막 첫 부분의 살롱 장면과 2막 2장의 발레 부분은 그 만의 매력이 잘 드러난다. 거기다 담백하게 지휘해서 부담없이 전곡을 감상할 수 있다는게 챠밍 포인트.[11] 비올레타역의 일레아나 코투르바스는 아래에 소개되는 마리아 칼라스의 두 음반에 비하면 타오르는 극적 표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코투르바스의 비올레타는 칼라스와는 또다른 매력이 있는 비올레타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칼라스가 유니크한 비올레타라면 코투르바스는 원작 춘희의 마르그리트 고티에를 연상케 한달까? 원작을 생각하면 코투르바스 역시 싱크로율 높은 비올레타임은 틀림없다. 알프레도역의 플라시도 도밍고의 경우 듣는이에 따라 나이들린 울림이 강하겠지만, 도밍고가 많이 맡았던 배역이라서 그런지 심리표현이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비올레타가 쓴 절교 편지를 보고 오열하는 장면은 단연 압권. 조르쥬 제르몽역의 셰릴 밀른즈도 아래에 소개되는 RCA 음반 보다 노련한 목소리 연기를 들려준다. 그의 시니컬하고, 궁상맞은 느낌의 목소리가 조르쥬 제르몽 이라는 캐릭터에 잘 맞아 들어가기도 하고...
지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 바리톤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라스칼라 오페라 (1955 실황) - EMI mono
라 트라비아타 음반 중에 어떤 면에서는 가장 유명하기도 하다. 칼라스의 극적인 표현이 잘 살아있는데다가 실황 특유의 분위기가 좋다. 스테파노의 알프레도는 심리 표현이 잘되있고 당대의 명바리톤 바스티아니니의 제르몽 연기도 들어볼만한 해석이다. 줄리니의 해석은 클라이버의 해석과는 달리 그의 스타일대로 굉장히 정석적이다.
그러나 이 오페라에 입문하는 초심자가 절대 들어서는 안되는 음반일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열악한 음질에 있다. 칼라스는 수많은 실황음반을 남겼는데 1965년 토스카 실황과 함께 이 음반은 최악의 음질을 자랑한다. 심지어 리마스터링해서 나아진게 이 정도일 수준이다. 어떤 평론가는 라 트라비아타와 칼라스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듣기 힘들다고 할 정도. 그러니 이 음반으로 입문할 사람은 주의하도록 하자.
지휘 안토니노 보토,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 테너 지아니 라이몬디, 바리톤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라스칼라 오페라 (1962) - DG ADD
지휘 리처드 보닝, 소프라노 조안 서덜랜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바리톤 마테오 마누게라, 내셔널 필하모닉 (1979) - Decca ADD
많은 평론가들이 이 음반에도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서덜랜드의 청아한 목소리와 완벽한 기교, 파바로티의 열정적인 목소리와 연기톤은 비교할 바가 없다. 마누구에라의 노련한 연기도 훌륭하고 보닝의 지휘도 분위기에 잘 맞다. 그래도 지적받는 것은 서덜랜드와 파바로티의 목소리가 이 오페라에 잘 맞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주 분야는 벨칸토인데 듣는 사람에 따라서 이 오페라와 분위기상 잘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다. 결국 듣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이다.
지휘 리카르도 무티,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 테너 알프레도 크라우스, 바리톤 레나토 브뤼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82) - EMI DDD
영상물
지휘 카를로 리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테너 롤란도 비야손, 바리톤 토마스 햄슨, 빈필하모닉, 연출 빌리 데커 (2005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 DG
이 오페라 무대를 처음 보면 거의 초현실주의급인 무대와 연출에 당황할 수 있는데 오페라를 보기 전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다면 감동을 받을 수도 있는 연출이다. 텅빈 무대와 시계, 그랑빌 박사를 배치한 상태에서 스토리가 흘러가는 것은 비올레타에게 남은 시간과 관련하여 맥락을 잘 짚는다는 평이다. 네트렙코와 비야손이 명성을 얻게 된 무대이기도 한데, 이전에도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호흡을 맞췄지만 더 나은 기량을 보여준다. 네트렙코는 비올레타에 맞는 목소리와 연기를 보여주고 비야손은 열정적인 알프레도를 잘 드러낸다. 햄프슨은 좀 오버하는 연기를 보여주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image]
2015.03.13~03.17 해리슨 오페라 하우스 상연시 광고 이미지
'''1853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올려진 "라 트라비아타" 초연 홍보용 포스터'''[2]
1. 개요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오페라.
티치아나 파브리치니, 로베르토 알라냐, 라 스칼라 극장 실황, 리카르도 무티 지휘[3]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춘희를 원작으로 했다.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53년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 오페라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오페라는 국내 단원에 의해 정식으로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이기도하다. 카르멘과 나비부인이 먼저 공연된 적이 있지만 이것은 일본 악단의 공연이다. 국내에서 라 트라비아타가 최초로 공연된 것은 1948년 1월이며 장소는 부민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항목으로 들어온 자 중 다수는 축배의 노래를 알 것이다. 혹은 그 항목 때문에 들어왔든가...
2. 배경
라 트라비아타는 사실 베르디의 개인적 사정과 겹치는 오페라이기도 하다. 그 개인적인 사정이 바로 이 오페라의 탄생 계기를 제공한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첫 아내였던 마르게리타 베리치와 세 아이를 잃어버리고, 홀아비의 몸으로 살아가던 베르디는 한 동안 좌절을 겪다가 나부코에서 첫 히트를 거둔 후 명성을 쌓게되고, 뒤이어 에르나니, 맥베스[4] , 루이자 밀러, 아틸라를 작곡하게 되는데, 역시 좋은 평을 얻어갔다.[5] 그 와중에 나부코 초연에서 아비가일레역을 맡았던 주세피나 스테르포니와 눈이 맞아서 동거에 들어갔지만 그 동거가 순탄치 않았다.
[image]
'''주세피나 스테르포니 (1815년 ~ 1897년)'''
우선 당시 사회가 재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주세피나를 만났을 당시 베르디는 이미 첫 번째 아내 베리치와 사별한 상태였긴 했지만, 베리치가 죽었어도 그녀의 아버지는 살아있던 상황이라서 베르디가 그의 후원자였던 장인어른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베르디가 아닌 주세피나에 있었다. 주세피나 스테르포니는 베르디와 만나기 전에 테너 가수와 극장 지배인 사이에서 각각 아이를 하나씩 낳은 미혼모였고 이는 당시 사회에서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게다가 작곡가 도니체티와도 애정 관계가 있었다. 그녀의 이런 복잡한 남자 관계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스폰서의 지원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연예인 가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서로 사랑에 빠졌기에 1848년부터 동거하여 1859년 4월 29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가까운 곳인 프랑스 중동부의 콜롱주수살레브(Collonges-sous-Salève)에서 정식으로 결혼하기까지 11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그 결혼까지 11년동안 다른 이들의 눈치도 많이 살피고 살아가야 했던 것은 당연했다.
눈치 살피기 싫었는지, 베르디는주세피나를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한 동안 거기서 임시주택을 마련하고 살게 된다. 다행히 파리에선 그런 눈치를 볼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베르디와 주세피나가 동거를 하고 있었을 때, 파리에서는 알렉상드르 뒤마[6] 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멜로물 춘희가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7]
[image]
'''알렉산드르 뒤마 피스 (1824년 7월 27일 - 1895년 11월 27일)'''
[image]
'''아르누보의 대표 작가인 알퐁스 무하의 "동백꽃 여인" 포스터.'''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그 연극을 보고 공감하게 되었다. 특히 베르디는 너무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고급 창녀라는 이유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와 이뤄지지 못한 연극의 내용이 자신들의 상황과 너무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당시 리골레토와 일 트로바토레에서 더욱 명성을 쌓던 베르디는 연극을 보자마자 더욱 의욕을 불태웠고, 뒤마 피스의 연극을 오페라화 하기로 결심한다.
연극을 보고 수년간 파리에서의 생활을 마친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는데, 컴백하자마자 베르디는 자신과 절친한 대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에게 파리에서 감상했던 뒤마 피스의 연극 내용을 오페라에 맞게 각색해달라고 의뢰한다.
베르디는 뒤마 피스의 연극이 정말 맘에 들었는지 작곡을 할 때도, 뒤마 피스의 원작에 충실한 재현을 하기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뒤마 피스의 연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는 '라 트라비아타'라는 제목으로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을 가지게 된다. 때는 1853년 3월 6일.
그러나 전작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와는 달리 베네치아 극장에서 초연된 "라 트라비아타"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이라는 흑역사로 찍히고 만다. 그것도 초연하자마자.... 초연 당시에 출연한 가수진들이 미스캐스팅이었다. "라 트라비아타" 초연 당시의 비올레타 역을 맡은 살바니 도나텔리는 결핵을 앓는 청순한 이미지의 여성 역과 전혀 맞지 않은 비대한 몸집이었고, 알프레도역을 맡은 당시의 테너 가수는 감기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전해지고 있다.(....)[8]
[image]
'''"라 트라비아타" 초연 때 비올레타역을 맡았던 살비니 도나텔리 (Fanny Salvini-Donatelli, 1815년 ~ 1891년)'''
그러나 "라 트라비아타" 초연이 실패한 것은 이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요인은 오페라 배경과 당시 사회로써는 납득하기 힘든 스토리에 있었다. "라 트라비아타"의 배경은 1850년대의 파리로, 이 오페라 이전에 나왔던 거의 모든 유럽 오페라들은 빈첸조 벨리니의 노르마의 경우 로마가 갈리아 지방을 지배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있는 작품이고,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는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구노의 파우스트는 괴테의 원작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프랑스에서 전해지던 설화를 바탕으로 작곡된 오페라였다. 라 트라비아타가 나오기 이전에는 신화, 전설이나 역사물 희곡에서 따와 그것을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가 많이 나왔다고 얘기하는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의 경우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으니, 이는 당시로써는 최초의 현대 오페라를 작곡한 셈이 되었지만, 당시 이러한 오페라 배경은 굉장히 파격적이라 생각되었는지 관객들에게 알러지 반응만 일으켜 버렸다고 한다. 시대를 뛰어넘은 시도라 볼 수 있겠다. 스토리에서도 사교 나비와 부잣집 도련님의 멜로물이어서 당시 관객 에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9] 이 두 가지 요인이 "라 트라비아타" 초연 실패의 더 정확한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세계 언론은 "라 트라비아타"가 실패한 것에 대해 베르디를 아주 비꼬았는데, 이에 베르디는 열받은 상태로 거만하고 포스있는 말투로 "내 오페라가 틀리지 않았다. 이해를 전혀 못한 그들이 틀린 거다. 이 오페라가 다시 무대에 올려지면 후에 나를 대표하는 작품이 될테니 두고봐라."라고 되받아쳤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초연에서 쓴맛을 본 베르디는 "라 트라비아타"를 몇 부분 수정했다. 음악적인 부분을 약간 고치고[10] 배경도 1850년대가 아닌 루이 15세가 다스리던 1700년대 파리로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가수진도 대거 교체했다.
그렇게 수정된 버젼의 라 트라비아타는 1854년 5월 6일 지금은 없어진 베네치아의 산 베네데토 극장에서 재공연을 가지게 되고, 초연의 흑역사와는 달리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 성공에 대해 빈정거리는 여론도 있었지만, 베르디는 이를 무시하고 공연을 계속 이어갔다고 한다. 그 후로 라 트라비아타는 파리, 런던, 뉴욕에서도 공연되어 갈채를 받았지만, 베르디는 이 성공에 대해 약간 아쉬움을 가졌다고 한다. 오페라의 배경이 자신이 원했던 '동시대성'이 먹혀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 들어서야 베르디가 원했던 1850년대 의상으로 공연되었지만, 이 역시 베르디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어찌되었건 실패라는 흑역사를 가진 라 트라비아타는 현재까지도 극장에 자주 올라가는 명작이 되었다.
3. 등장인물
- 비올레타 발레리 - 파리의 고급 매춘부 (소프라노)
- 알프레도 제르몽 - 시골 출신의 부르주아 청년이자 조르주의 아들 (테너)
- 조르주 제르몽 - 알프레도의 아버지 (바리톤)
- 플로라 베르부아 - 비올레타의 친구 (메조 소프라노)
- 안니나 - 비올레타의 하녀 (메조 소프라노 또는 콘트랄토)
- 뒤폴 남작 - 비올레타의 후견인 (바리톤)
- 가스통 자작 - 알프레도의 친구 (테너)
- 그랑빌 박사 - 비올레타의 주치의 (베이스)
4. 줄거리
프랑스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던 코르티잔(cortesean) 비올레타 발레리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된 젊은 귀족 알프레도는 그녀를 사모해 오던 마음을 고백하나 비올레타에게 냉소만 돌아오게 된다. 춤을 추러 가던 중 폐결핵으로 인한 발작이 온 비올레타와 그를 걱정하는 알프레도는 둘이 남아 드디어 사랑의 확신이 싹트기 시작하고 비올레타 역시 이상한 기분이 싹트고 있음을 느끼며 그것이 사랑임을 확신한다. 이후 전원으로 거처를 옮긴 그들은 동거를 시작하게 되고 알프레도는 우연히 비올레타가 그녀의 개인세간 등을 처분하며 전원생활에 충당해 왔음을 알고 생활비를 융통하고자 파리로 떠난다. 홀로 남은 비올레타에게 알프레도의 아버지 조르주 제르몽이 찾아오고 그녀를 회유하여 아들의 곁을 떠나게 한다. 절연장을 써둔 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아버지와의 일들을 알프레도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채 파리로 떠나고 뒤늦게 절연장을 읽은 알프레도는 비올레타가 과거의 화려했던 생활이 그리워 다시 돌아갔다고 오해하며 복수심과 질투에 사로잡힌다. 이후 비올레타의 친구 플로라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알프레도가 나타나고 비올레타는 그를 조용히 불러 돌아갈 것을 부탁하나 비올레타에게 그녀의 후견자를 사랑한다는 거짓고백을 들은 알프레도는 사람들을 불러 파티의 도박에서 딴 모든 돈을 던지며 비올레타에게 모욕을 준다. 이런 광경을 뒤늦게 쫓아온 알프레도의 아버지가 모두 보게되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심경을 토로하는 동안 그의 아들을 데리고 그들의 고향 프로방스로 떠난다. 삶의 의지를 모두 잃어버린 비올레타는 죽음을 기다리고, 뒤늦게 아버지로부터 모든 사건의 전말을 들은 알프레도가 찾아오지만 그녀는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제르몽도 그녀를 딸이라 부르며 위로하지만, 비올레타는 자신의 초상이 새겨진 펜던트를 알프레도에게 건넨 후 마지막 기력이 쇠해 그의 품에 안겨 사망한다.
5. 명반과 영상물
인기 레퍼토리인 만큼 음반과 영상물이 많이 나와있다. 문제는 명연과 졸연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있어서 선택의 고민이 생길 수도 있는 법. 잘 고르도록 하자.
음반의 경우 토스카와 시몬 보카네그라, 메피스토펠레, 노르마와는 달리 딱히 '결정반'이라 불리는 것이 없다. 그 만큼 좋은 연주가 많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연주로 평가받는 음반들이다. 스테레오와 모노 모두 포함해서....
- 스테레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DG반. 이건 예전 표지'''
[image]
'''The Originals 시리즈로 재발매한 버전. 시중에서 가장 구하기 쉽다'''
스테레오 음반중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것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나온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반을 꼽을 수 있다. 클라이버의 지휘는 아래에 소개되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실황반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템포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음반의 매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1막 첫 부분의 살롱 장면과 2막 2장의 발레 부분은 그 만의 매력이 잘 드러난다. 거기다 담백하게 지휘해서 부담없이 전곡을 감상할 수 있다는게 챠밍 포인트.[11] 비올레타역의 일레아나 코투르바스는 아래에 소개되는 마리아 칼라스의 두 음반에 비하면 타오르는 극적 표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코투르바스의 비올레타는 칼라스와는 또다른 매력이 있는 비올레타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칼라스가 유니크한 비올레타라면 코투르바스는 원작 춘희의 마르그리트 고티에를 연상케 한달까? 원작을 생각하면 코투르바스 역시 싱크로율 높은 비올레타임은 틀림없다. 알프레도역의 플라시도 도밍고의 경우 듣는이에 따라 나이들린 울림이 강하겠지만, 도밍고가 많이 맡았던 배역이라서 그런지 심리표현이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비올레타가 쓴 절교 편지를 보고 오열하는 장면은 단연 압권. 조르쥬 제르몽역의 셰릴 밀른즈도 아래에 소개되는 RCA 음반 보다 노련한 목소리 연기를 들려준다. 그의 시니컬하고, 궁상맞은 느낌의 목소리가 조르쥬 제르몽 이라는 캐릭터에 잘 맞아 들어가기도 하고...
지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 바리톤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라스칼라 오페라 (1955 실황) - EMI mono
라 트라비아타 음반 중에 어떤 면에서는 가장 유명하기도 하다. 칼라스의 극적인 표현이 잘 살아있는데다가 실황 특유의 분위기가 좋다. 스테파노의 알프레도는 심리 표현이 잘되있고 당대의 명바리톤 바스티아니니의 제르몽 연기도 들어볼만한 해석이다. 줄리니의 해석은 클라이버의 해석과는 달리 그의 스타일대로 굉장히 정석적이다.
그러나 이 오페라에 입문하는 초심자가 절대 들어서는 안되는 음반일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열악한 음질에 있다. 칼라스는 수많은 실황음반을 남겼는데 1965년 토스카 실황과 함께 이 음반은 최악의 음질을 자랑한다. 심지어 리마스터링해서 나아진게 이 정도일 수준이다. 어떤 평론가는 라 트라비아타와 칼라스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듣기 힘들다고 할 정도. 그러니 이 음반으로 입문할 사람은 주의하도록 하자.
지휘 안토니노 보토,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 테너 지아니 라이몬디, 바리톤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라스칼라 오페라 (1962) - DG ADD
지휘 리처드 보닝, 소프라노 조안 서덜랜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바리톤 마테오 마누게라, 내셔널 필하모닉 (1979) - Decca ADD
많은 평론가들이 이 음반에도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서덜랜드의 청아한 목소리와 완벽한 기교, 파바로티의 열정적인 목소리와 연기톤은 비교할 바가 없다. 마누구에라의 노련한 연기도 훌륭하고 보닝의 지휘도 분위기에 잘 맞다. 그래도 지적받는 것은 서덜랜드와 파바로티의 목소리가 이 오페라에 잘 맞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주 분야는 벨칸토인데 듣는 사람에 따라서 이 오페라와 분위기상 잘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다. 결국 듣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이다.
지휘 리카르도 무티,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 테너 알프레도 크라우스, 바리톤 레나토 브뤼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82) - EMI DDD
영상물
지휘 카를로 리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테너 롤란도 비야손, 바리톤 토마스 햄슨, 빈필하모닉, 연출 빌리 데커 (2005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 DG
이 오페라 무대를 처음 보면 거의 초현실주의급인 무대와 연출에 당황할 수 있는데 오페라를 보기 전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다면 감동을 받을 수도 있는 연출이다. 텅빈 무대와 시계, 그랑빌 박사를 배치한 상태에서 스토리가 흘러가는 것은 비올레타에게 남은 시간과 관련하여 맥락을 잘 짚는다는 평이다. 네트렙코와 비야손이 명성을 얻게 된 무대이기도 한데, 이전에도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호흡을 맞췄지만 더 나은 기량을 보여준다. 네트렙코는 비올레타에 맞는 목소리와 연기를 보여주고 비야손은 열정적인 알프레도를 잘 드러낸다. 햄프슨은 좀 오버하는 연기를 보여주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6. 기타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를 맞이하여 국립오페라단에서 동백꽃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야외 공연을 하였고, 17년 08월 26일, 네이버측에서 V LIVE와 네이버TV를 통해 20:00~22:20까지 현장실황공연을 생중계하고, 변사로 채시라가 등장했다.
- 영화 귀여운 여인(영화)에서 나오는 오페라가 바로 라 트라비아타 이다.주인공인 필립과 비비안이 보러 가는데,오페라를 처음 보게된 비비안이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가[12] 라 트라비아타의 줄거리(술집 종업원이 부유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본인의 삶과 같다고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공연이 끝난후 귀부인이 '어땠어요?'라고 물어보자 너무 근사해서 오줌쌀 뻔 했어요(...)라고 말한다.
- 2019년 6월에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한양대학교 학생들의 라트라비아타 공연에 관한 비평글이 올라왔다. 미래세대 음악인들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과 객관적인 평가 그리고 한국오페라계 현실의 안타까움과 구조적인 한계를 명확히 짚은 국내에선 보기 힘든 성찰과 통찰이 깊은 비평이다. #
- 2019년 11월 27일 베어프리오페라 라는 타이틀로 1회 공연 되었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만든 라트라비아타였다. 노래는 성악가, 연기는 장막하나를 설치해 성우들이 연기했고[13] , 수어해설도 실시했다. 대부분 무난하다는 평이 있으며 오디오북으로 발매 되었다.
- la traviata는 '탈선한 여자'라는 뜻이다. 요즘은 '춘희(..)'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고 원어대로 부르지만 '라트라 비아타'라고 끊어 읽지는 말자.
탈선한 여자란 잘못된 삶을 살다가 구원받는 비올레타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실 '탈선'한 사람은 알프레도. 멀쩡한 양갓집에서 살다 유흥가에 발 들이고 가출한 진짜 탈선남은 알프레도인 반면, 비올레타는 E strano~ Sempre libera에서 말하듯 생존을 위해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서 매춘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1] 이탈리아어로 '방황하는 여인'을 뜻한다.[2] 여담이지만 얀치홀트에 의해 타이포그래피가 재정립되기 이전이라 꽤 글이 빽빽하다. 이 당시에는 가독성을 무시하는 조판이 흔했다. 광고나 포스터에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3] 라 스칼라에서는 마리아 칼라스 사후 라 트라비아타로 웬만해서는 호평받지 못했다. 카라얀이 미렐라 프레니를 주역으로 세웠을 때는 야유를 받았을 정도... 그런데 그 스칼라 극장에서 대찬사를 받았던 프로덕션이다.[4]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이다. 베르디는 셰익스피어 덕후(...)였다.[5] 리골레토가 나오기 전에 베르디는 졸작도 만들었다.(...) 조반나 다르코 라든가, 알치라 라든가....[6]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뒤마 페르의 아들 뒤마 피스를 말한다.[7] 원래는 동백꽃 여인이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이 맞다. "춘희"는 일본식으로 번역한 제목인데 원작 내용과 동떨어진 제목이라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일본어에서 椿은 참죽나무가 아닌 동백을 뜻하는 글자로 쓰이니 일본에서는 제대로 번역한 제목이다.[8] 심지어 오페라의 결말을 장식하는 비올레타의 죽음 장면에서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기는 커녕 도나텔리의 비대한 몸집 탓에 웃음을 터뜨렸다고(...)[9] 이와 비슷한 예로 조르주 비제의 카르멘도 집시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말이 많았었는데 후세는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 인기 레퍼토리가 되었다.[10] 2막 2장을 약간 손질했다고 한다.[11] 이에 비해 줄리니반은 지휘 템포가 느려서 느끼하다는 지적도 있었다.;;;[12] 옆에서 필립이 오페라는 자연스럽게 보면 이해가 된다.라고 귓띔을 해준다.[13] 성우 배한성, 이선, 전승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