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인생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주인공 P가 아들을 인쇄소 직공으로 취직시키며 뱉은 말.[1]
1. 개요
채만식의 단편소설. 신동아#s-2에서 1934년 5월호부터 7월호까지 연재된 작품이다.
2. 상세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단어는 만들어진 기성품을 뜻하는 단어다. 작품 제목의 의미는 학교를 졸업해 사회에는 나왔지만 취직이 되지 않는 불안정한 인생을 완성됐지만 팔리지 않는 기성품에 빗댄 표현이다. 1930년대 당시 지식인들의 높은 실업률을 반영하듯 당시 지식인들의 비애를 그린 소설이다.
당시 채만식은 태평천하가 히트치기 전까진 그다지 형편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전적인 요소도 깔려있으며 일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지식인들에게 연민과 동정의 시선이 있다. 또한 방세도 못내면서 담배가게 주인에게 체면이 깎이는 것은 싫다며 비싼 해태 담배를 억지로 구매한 후 후회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책 및 양복도 모자라 친구의 책까지 저당잡아 얻은 돈을 유흥으로 탕진하는 모습에서는 어쩔 수 없는 구제불능이라는 풍자적인 시선도 드러난다. 뭐 당장 아들을 맡아 키운답시고 학교도 아니고 인쇄소로 일 시키게 된 연유부터가 꼴도 보기 싫은 처가 쪽에는 절대 아이를 못 맡기겠다며 형편도 안 되는 자기 친가 쪽에 어거지로 아이를 맡겨놓았다가 거기서도 도저히 못 데리고 있겠다 싶어서 올려보낸 애를 그 꼴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전 부인이 사정사정을 하면서 애만 자기에게 맡기면 잘 키우며 최소 중학까지는 보내주겠다고 했는데도[2] 그 꼴은 못 본다며 저런 짓거리를 한 거니 명백한 아동학대....[3] 주인공도 이래저래 별로 좋은 인물로 그리진 않았다.
3. 특징
이전의 한국 소설들과 이 작품을 비교해보면 꽤나 흥미롭다. 이광수의 무정이나 흙은 교육을 받으면 조선이 계몽되고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농촌에 내려가서 농민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설파한다. 하지만 채만식이 보기엔 그런 소리는 헛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채만식의 인식은 신문사에 취직자리를 알아보러 간 주인공에게 일자리를 주기 싫어서 이리빼고 저리빼던 신문사 사장이 '''농촌에 가서 계몽운동이나 해라'''라고 하는데서 드러난다. 실제로 작중에서 주인공은 농촌계몽운동은 허상에 불과하며 '농민이 우매하다든지 문화가 뒤떨어졌다든지 또 생활이 비참한 것이 근본 원인이 기역 니은을 모른다든가 생활 개선을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데서도 이런 인식을 볼 수 있다.
3.1. 레디메이드 인생은 왜 생겼는가?
간단히 말해, 당시 일제가 만들어낸 사회 구조가 조선 지식인들의 레디메이드 인생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초반부에도 작가 채만식은 레디메이드 인생이 만들어진 스토리를 서사식으로 서술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집어삼킨 이후, 조선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교육을 장려하였다. 소설에서도 나오듯이 "배워라, 배우면 누구나 양반이 된다." 이런 신학문 풍조가 생기면서, 전국 각지에서 신식 학교들이 만들어지고 전문학교 진학률이 높아졌으며 집안 좀 잘 사는 사람들은 일본까지 유학을 가서 대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일제는 조선 식민지인들에게 교육을 그렇게 강조했지만, 실상은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저항 의식이 꺾인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을 키워내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이공계''' 쪽의 진로를 크게 제한하였다. 당시 전문학교에서는 농학, 건축학 등 일제 주도의 인프라개발 인력을 육성하는 것에만 중점을 두었으며, 경성제국대학은 종합대학이라는 명목 하에 설치는 하였으나 조선인 쿼터제를 두었고 석박사급 취득에도 많은 제약사항을 걸어두었다. 이조차도 원래는 설치하지 못하게 했으나 일제 말기인 1938년에 들어서야 겨우 설치했을 정도. 조선인들이 전자, 기계, 자연과학 등 전문 과학기술을 배우게 되면 일제 산업에 대항할 수 있는 조선 고유의 산업이 만들어지고, 일제의 효율적인 식민지 통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현대에도 다르지 않아서,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 인문/경제/문화적 교류 등 다른 것은 몰라도, 자국의 과학기술 지식만큼은 반드시 철저하게 보호한다. 산업 스파이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자국의 과학기술 해외 유출자는 법적으로도 엄중 처벌할 정도이니, 당연히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의 식민지 에게 고급 기술을 쉽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때문에 해방 때 한국에는 이공계 출신들이 적었고 그나마 몇 명 남은 사람들도 월북하거나 미국유학 등의 명목으로 탈조선하여, 1970년대에야 제대로 된 이공계 교육이 시작되었다.
실제로도 작가 채만식을 비롯하여 일제시대에 대학물 좀 먹었다는 지식인들은 절대 다수가 '''문과''' 출신이었다. 물론 우장춘이나 도상록같이 일부 이공계 출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극소수였을 정도.[4] 게다가 우장춘은 반 일본인이고 해방후에나 한국땅을 밟았으며, 도상록은 월북해버렸다. 문제는 '''1930년대를 비롯한 일제 강점기 때에도 문과 나와서는 취직할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가난하고 빈약한 식민지(조선) 산업에서 매년 수천명씩 늘어나는 인텔리를 수용할 만한 일자리 확보가 어려운 점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식민지인(조선인) 차별도 취업난에 한몫을 하였다. 특히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행정계/법조계 계통에 취직을 하고 싶어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사상관계를 철저히 조사받는 등 제약 조건이 많았고, 은행이나 증권회사 같은 상경계 일자리는 빽이 있는 소수의 친일파나 말단급 고원/용인(심부름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일본인들이 차지할 정도로 조선인 인텔리는 사무직 일자리 하나 얻기가 아주 힘들었다.
결국 당시 조선인이 대학 나와서 취직할수 있는 계통은 학교 선생님/대학 강사 정도밖에 없었고[5] , 그게 아니면 신문/잡지사에 취직해서 기자가 되어 틈틈히 시/소설/수필 등 글을 쓰면서 원고료를 받아먹으며 경성부 등 도시에서 생활할 수 있으면 그나마 양반이었고[6] , 이도 저도 못한 대부분의 대학 나온 인텔리(지식인)들은 대학가서 배운 것을 하나도 써먹지 못하고 낙후한 시골로 내려가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시골로 내려가면 도시보다 더 낙후되었기에 인텔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농업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현실에 절망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영원히 팔리지 않는 레디메이드로 인생을 마감[7] 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현실에 타협하여 친일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일제의 목적대로 저항의식이 꺾인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심지어 채만식 본인도 일제 말기에는 친일의 유혹에 무너질 정도였으니... 윤동주나 이육사, 한용운, 신채호, 안창호 같이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지식인들이 지금까지도 괜히 존경을 받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신채호, 안창호는 1930년대에 죽었으며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도 해방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리고 저항한 몇명이 있긴 했지만 해방후 친일지식인들이 주류가 되는 과정에서 월북해버려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알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 구조가 극에 달했던 1930년대에《레디메이드 인생》이라는 소설이 나왔다. 일제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신교육=신분상승' 이라는 환상향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인들을 치밀하게 조종하였으며, 결국 그 신기루에 낚인 조선인 '인텔리'들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으면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레디메이드 인생, 즉 잉여인간이 된 것이다.
4. 현대 사회와 레디메이드 인생
'''이 소설이 발표된 지 80여 년 뒤 한국에서도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되는 현실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던 일제 강점기 이후를 보면 대한민국은 비약적인 경제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1980~90년대 중반까지는 대학진학률이 낮아서 일단 졸업만 하면 그런대로 취직이 된다고 말할 정도로 호경기였다. 그러나 1997년 IMF 사태가 터지고 난뒤 고용안정성이 떨어지고 대학진학률이 높아지면서 구직난에 허덕이는 대졸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1930년대는 세계 대공황 상태였고 오늘날도 세계금융위기를 맞고 있으니 여러 모로 공통점이 많다. 특히 소설 말미에도 아들을 인쇄소에 취업시킬때 인쇄소 사람은 우리같이 못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식 공부 잘 시키려고 하는데 오히려 배운 당신이 왜 자식을 이런 일로 내모냐고 말하고 화자는 공부는 해봐야 쓸 데가 없으니 차라리 기술이나 배우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다.
이는 현대에 어중간한 4년제나 대학원 나와 노느니 전문대나 고졸 후에 기술직 다니는 게 낫다는 현 세태와 놀라우리만치 비슷하다. 작품의 메시지가 현재에 이르러서도 적용된다는 건 오늘날의 세태를 다시 곱씹게 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1] 고향집에서 아들을 도시로 보낸 의도는 일종의 유학이었는데, 화자는 바로 학교가 아닌 공장에 보내버렸다. 아들을 취직시키며 대가를 받거나 한 것은 아니므로, 일부의 견해처럼 '팔아먹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다만 아들의 취직을 통해 자신의 '레디메이드한 삶'이 겨우 '팔렸다'고 표현한 것이기에, 어떤 의미로는 아들의 취직 = 현재 자신의 처지를 타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판단은 독자 스스로 하자.[2] 전 부인 쪽은 주인공보단 좀 더 잘 산다고 나온다.[3] 아동학대 유형 중 '유기 또는 방임' 에 부합한다. 물론 이 시절까지만 해도 아이는 부모가 여차하면 마음대로 해도 되는 물건 비슷한 인식이 크긴 했다. 동북아권에서 아동 인권이 본격적으로 중요시되고 신장된 세월은 서양보다도 더 짧다.[4] 해방 이후 이공계 출신 조선인 인텔리들은 거의 대부분 국가의 중요 인재로 대우받았으며 대학교수로 임용되었지만, 그 후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70% 정도가 월북했다.[5] 무엇보다 대학 강사를 한다해도 정식 교수가 될수 있는것도 아니다. 왜냐면 당시 대학의 정/부교수는 99%가 일본인이었다. 유진오 같이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1등으로 졸업한 사람도 처음으로 취직한 곳이 비정규직 시간강사였다.[6] 설령 운이 좋아 언론사 기자가 된다고 해도, 직업 안정성이 보장될 수 없었다. 당시 인구 100만이 안 되고 문해율도 50%에 한창 못미치는 서울의 경성부에 잡지/신문사만 수백 단위가 운영될 정도로 업계가 워낙 레드오션인지라 경영난으로 정간/폐간 크리를 겪으면 기자는 실업자가 되기 십상이었으며, 표현의 자유가 철저히 억압당하고 통제되었던 시절이었던지라(특히 일본 본토의 언론들과 기자들도 탄압당하는게 예사였다.) 자칫 조금만 실수해도 경찰서와 헌병대에 끌려가 죽도록 고문당했으며, 석방되더라도 전과자 꼬리표가 붙어 정상적인 직장은 가질 수도 없는 것은 물론 고문 후유증과 PTSD에 시달려 폐인이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7] 희망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