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제6대
전진한


제7대
''' 유진오 '''

제8대
권중돈

'''고려대학교 총장'''
초대
현상윤

'''제2~4대
유진오'''

제5대
이종우


[image]
1. 개요
2. 일생
3. 여담
4. 관련 항목


1. 개요


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는 대한민국의 법학자, 소설가, 교육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기계(杞溪)[1], 는 현민(玄民)이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의 초안을 기초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일생


1906년 5월 13일 대한제국 한성부에서 출생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일 때 이효석 작가를 만났다. 이효석은 소설을 유진오는 시를 서로 보여주고 평가하면서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효석이 글을 써서 받은 고료로 자주 술을 먹었다고 한다. 이효석 작가가 임종하기 전 그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 중 하나일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가졌던 이효석 작가의 친우였다.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경성제대 시절에는 사회주의 서클 '경제 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때 유진오와 함께 활동한 사람으로는 최용달을 들 수 있다.
경성제대 수석 졸업 후 경성제대에서 강사를 했다. 1931년부터는 리강국 등과 함께 '조선 사회 사정 연구회' 활동도 하였다. 1933년부터는 동아일보 객원 기자를 지냈다.
1937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작품 활동을 병행, '김강사와 T교수', '여직공' 등의 작품을 썼다. 거기서 일제에 야합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노동운동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좌파 탄압이 심해지자 사회주의자의 비참한 말년을 그린 '행보'라는 단편 소설을 마지막으로 친일 반공 노선을 택했다. 친일 단체에도 가입했고, 언론에 친일 칼럼을 싣는 등 친일 행동을 하였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 사회주의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태준에 의해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 이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대한민국 광복 후에는 우익 진영에 가담해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였고, 그의 헌법 초고가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광복 후에도 과거의 좌익 행적으로 인하여 의심을 많이 받았다. 그 예로 제헌헌법 초안에 '인민'이라는 단어를 썼는데[2] 이승만의 측근인 윤치영이 "그건 공산당이 쓰는 단어잖아."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3][4][5]
유진오가 만든 제헌 헌법 초안은 의원 내각제를 기초로 하여 양원제를 채택한 것이었다. 원래 대한민국은 독일처럼 의원 내각제로 총리가 실권을 가지며 대통령은 그저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성만 갖는 존재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이런 실권 없는 대통령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제헌국회는 이승만과 미군정의 강력한 주장으로 유진오의 초안을 급하게 수정하여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게 되었다.[6] 오늘날까지 한국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의원 내각제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헌법과 관련하여 유진오는 헌법 전문(前文)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지금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데 이는 단순한 연합 각국의 승리와 후원의 선물이 아니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나라 국민이 3·1 정신과 같은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종시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한 결과이며 금반 헌법을 제정하여 수립하고자 하는 정부도 기미년에 삼천만의 민의에 의하야 수립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계승하여 재건하는 것이라는 것을 웅장하게 선언한 것이다."[7]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후신 고려대학교로 복귀해 법대 학장을 거쳐 '''15년 간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총장 재임 당시 매우 유능한 교육 행정가였으며, 학교의 기강을 다잡아서 고려대학교의 강의와 교육이 옛날 일본의 제국대학 수준으로 충실하게 이루어지도록 기틀을 마련하였다. 강의 능력도 뛰어나서, 그의 헌법 강의는 대한민국 최고로 불릴 정도였다.
고대 총장으로서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된 고려대 4.18 의거 당시에는 시위 중인 고대 학생들을 보호하고자 몸소 시위 장소인 국회의사당 앞에 나아가 학생 대표들을 설득하여 경찰의 안전귀가 약속하에 해산하게 하는 노력을 하였으나 학생들이 돌아가는 길에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 시민들이 분노했고 이는 결국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고대 총장직을 그만 둔 후, 1967년 민중당에 대통령 후보로 영입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신한당 윤보선 후보와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 후에는 통합 야당 신민당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3선 개헌안이 날치기로 통과된 것에 충격을 받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후 당권을 유진산에게 넘겨준 뒤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 때만 해도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사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친일 전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들과 대학생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의원직 사퇴 이후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1979년 10.26 사태 후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내다 1980년부터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자문위원 제의에 응해 활동하여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1983년 5월 29일에 유치송 민한당 총재, 김수환 추기경 등과 함께 김영삼의 단식 투쟁을 중단하자고 권유하기도 했다.
1987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고려 대학교가 전직 총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성대하게 치러주었는데, 당시 NL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총학생회는 "민족 고대가 변절자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것은 수치"라고 주장하며 장례식장에서 농성을 벌였다.[8]

3. 여담


  • 1919년 성진순과 결혼하였다가 1926년 사별하였고, 1928년 박복례와 재혼하였으나 다시 사별하여, 1956년 이용재와 재혼하였다. 부인 이용재는 "이명래 고약"을 개발한 이명래의 딸이다.
  • 3남 4녀를 두었는데, 차남 유완은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 명예교수이고, 삼남 유종은 첼리스트로 포항시립교향악단 지휘자를 역임했다.
  • 맏사위 한만년은 유명한 출판사인 일조각의 창업자이고, 둘째 사위 박동진은 외무부(現 외교부) 장관을 지냈다.
  • 좌파성향 역사학자 한홍구가 그의 외손자이다. 또한 조카 유기준은 제일화학 대표 이사 겸 제13대 국회의원이었다.
  •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 고경표가 연기한 유진오는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에서 따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사람과의 공통점이 생각보다 많다.[9] 일제 시대 상류층 출신 엘리트에다가 항일운동을 하다 나중에는 항일운동세력을 배신[10][11]했다는 속성때문에 극중 인물의 모티브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 한국 대학 100년의 역사를 다룬 책, 대학과 권력(2018)의 161페이지에 따르면, 1950년대 말 교육망국론을 제기한 유진오의 지적처럼 대학교육보다 대학 간판을 더 원했던 건 여자대학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 혼수용 학벌로서 가장 인기 있는 모 여자대학의 경우에는 정원의 두세 배에 달하는 입학생을 뽑았다. 왜냐하면 입학하는 그때부터 결혼으로 자퇴하는 수가 늘어나 4년 뒤에는 정원에도 못 미칠 정도의 졸업생만이 배출되기 때문이었다.

4. 관련 항목


[1] 35세손 '진(鎭)'자 항렬이다.[2] 유진오 헌법초안의 제2조가 “국가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한다.”이다. 현행헌법 제1조 제2항에 해당한다.[3] 결국 '인민' 부분은 모두 '국민'으로 변경되었다.[4] 참고로 일제강점기 시절 좌우 가리지 않고 사용하던 '인민'이란 단어가 이 사건 이후로 대한민국에선 완전히 금지어가 돼버렸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 (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 65쪽, 일조각 刊)[5] 참고로 이후 제2공화국 때 민주당 구파가 탈당하고 창당한 "신민당" 역시 처음 당명을 정할 때는 '자유인민당'이 유력한 후보였다. 물론 김도연 등은 "빨갱이 같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안된다." 하며 반대해 낙마했다.[6] 당시 유진오는 이승만에게 대통령제가 되면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며 의원 내각제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으나 이승만은 계속 대통령제 만을 고집하여 결국 이승만의 뜻대로 대한민국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가 되었다. 유진오의 말과 달리 정작 쿠데타는 내각제이던 장면 정부에서 일어났다.[7] 이를 두고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도 많다. 왜냐하면 이전에 친일행적 당시 대동아 전쟁 운운하던 사람이 광복을 하기 무섭게 이같은 행보를 보였고, 이로 인하여 다른 학자나 정치인들의 의심을 쉽게 받았다.[8] 단순히 총학생회뿐만 아니라 행정학과 이문영 교수를 비롯하여 여러 교수들도 저항했다. 이유는 유진오가 일제 말기 친일파로 활동하였으며, 정당성이 결여된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을 맡는 등 이 같은 기회주의자에 대하여 민족 고대로서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요지였다.[9] 유진오가 무명의 역사 인물은 아니므로, 제작진이 유진 오닐만 알고 진짜 유진오를 모르는 채 작중 인물의 이름을 유진오로 지었을리는 없다. 작중 인물과 실제 유진오의 나이도 비슷하고, 작품을 위해 항일사에 대해 조사하다 보면 알게 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친일파였던 시절이 있기 때문에 논란을 피하고 싶던 작가와 제작진이 유진 오닐만 언급하고 유진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10] 작중 유진오가 항일세력을 배신한것도 1930년대, 실제 유진오가 친일행보를 시작한 것도 똑같이 1930년대.[11] 물론 드라마 인물과 몇몇 속성들이 다르긴 하다. 드라마는 실제 유진오가 가진 속성(일제시대 상류층 조선인, 엘리트 조선인, 작가, 기자, 항일세력 배신 등)을 작중의 유진오와 서휘영이 나눠 갖는 느낌이다. 드라마 속 유진오는 독립운동 동지이자 짝사랑하는 여자가 일본군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녀를 살리려고 배신했고, 결국 그의 배신을 용납 못했던 그녀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드라마 속 유진오는 겉으로 친일파인 척하면서 뒤로는 항일세력에게 큰 돈을 대주는 돈줄 역할이고, 실존 인물 유진오처럼 뛰어난 작가는 아니다. 뛰어난 글재주를 가진 작가라는 속성은 유아인이 연기한 서휘영이 가져갔다. 대신 서휘영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법학자 겸 작가였던 현실의 유진오와 달리, 경성제대 의학부를 자퇴한 작가 겸 항일운동가로 나온다. 그래도 역사의 유진오처럼 작중 서휘영도 경성제대 시절 수석도 했고, 기자생활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