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1세(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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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레오 1세(Leo I)
'''휘'''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레오 아우구스투스
또는 트라키아인 레오(Leo the Thracian)
'''생몰년도'''
401년 ~ 474년
'''재위기간'''
457년 ~ 474년
1. 개요
2. 이름에 관해
3. 생애
3.1. 황제가 되기 전
3.2. 즉위 과정
3.2.1. 아스파르
3.2.2. 대관식
3.3. 황제 레오 1세
3.3.1. 아스파르와의 대립
3.3.2. 대외정책
3.3.2.1. 서로마 제국
3.3.3. 아스파르의 반격과 후유증
3.3.4. 종교정책 등 내정
3.3.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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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55대 황제. 레오 1세(라틴어: Flavius Valerius Leo Augustus, 401년 - 474년), 또는 트라키아의 레오 1세(그리스어: Λέων Α 'ὁ Θρᾷξ, 영어: Leo I the Thracian)로 불린다. 457년에 즉위하여, 474년에 사망할 때까지 동로마 황제로 재위했다. 마르키아누스가 사망한 이후, 단절된 발렌티니아누스-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뒤를 이어 새로이 레오 왕조를 열었다.

2. 이름에 관해


트라키아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함한 수도권이었는데, 이렇게 '트라키아 출신'인 것이 특징이 되었다는 것은, 역으로 되짚어 보면 아직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세 시대의 인구 50만 되고 그런 으리으리하고 짱짱한 위세를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 마찬가지의 현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중앙정치 무대, 언론이 서울에 있는 만큼, 정치인을 출신별로 분류할 때 수도권 외의 타 지방은 xx도, xx도, 이렇게 분류하지만 정작 서울 출신은 은근슬쩍 통계에서 빼거나, 아니면 '''aa도 몇 명! bb도 몇 명! 대탕평인사''' 이렇게 강조하면서도 서울 출신은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서울이 기본값(디폴트)이기에 당연하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대중문화(노래제목, 각종 예능, 드라마 등)에서도 서울의 지명들은 청담동, 대치동, 평창동, 여의도, 광화문 이렇게 서울이라는 언급 없이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찬가지의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키아'라는 출신지가 특징으로 잡혀 있다는 것은, 수도권으로서의 우월한 지위가 아직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더 나중의 동로마 황제들도 아르메니아인, 이사우(브)리아인, 프리기아인 등의 출신지명이 특징으로 잡혀 별명으로 붙어 있는데, 다들 수도권(콘스탄티노폴리스 및 마르마라 해 연안 지역) 및 동로마의 핵심지(앞의 수도권+에게 해 연안의 그리스와 소아시아 서부)와 거리가 다소 있는 지방들이었다.

3. 생애



3.1. 황제가 되기 전


트라키아에서 레오 마르셀루스라는 이름으로 401년에 트라키아계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레오는 정식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건강하고 주체적이며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직업군인으로써 황제가 되기 전 살았으며, 정통파 그리스도 교인이었고 당시 막후의 실력자인 아스파르 집안의 막후 집사로 있다가 제위를 잇게 되었다.

3.2. 즉위 과정


457년 1월 또는 2월 초,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황제 마르키아누스의 사망으로 테오도시우스 혈통의 남자가 대가 끊기게 되었다[1]. 이미 453년 풀케리아 역시 아틸라 사망 직후 사망하였기에 테오도시우스 2세 사망때처럼 후계자 공백 상황을 돌파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제 원칙에 따라 새로운 황제는 군대에 의해 선출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결정은 동로마 제국 군대의 실권을 쥐고 있는 사령관(마기스테르 밀리툼) 아스파르에게 달려 있었다.

3.2.1. 아스파르


파트리키우스(patricius, 최고 귀족)이라는 신분을 가진 아스파르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군이었다. 그는 424년 라벤나 원정에 참여하여 서로마 황제를 참칭한 요한네스를 폐위시키고 아이에 불과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제위에 옹립했을 당시부터 제국 내에서 명성을 쌓은 유능한 장군이었다. 8년 뒤인 43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가서 반달족의 침략을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물론 이 작전은 실패했지만 이때 그가 보여준 용기와 지도력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집정관으로 재직했고[2], 무일푼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마르키아누스는 20년 동안 그의 가신으로 복무했고 그의 도움으로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2가지 약점이 있었고, 이는 그가 유능하고 가장 인기있는 장군이었음에도 테오도시우스 2세 사망 당시 제위를 잇지 못했던 이유가 되었다. 먼저, 그는 흑해연안 출신의 게르만족 일파인 알라니족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는 종족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로마인[3]이 아니었고 이는 그가 황제에 오르지 못하는 결점이 되고 말았다. 다음으로는 종교적인 부분인데 아스파르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게르만족들이 대개 그렇듯 아리우스파에 속한 인물이었다.[4] 동시에 아스파르 본인 역시 성향상 60년 전 서로마의 프랑크족 태생의 장군 아르보가스트와 마찬가지로 꼭두각시를 내세워 장막 뒤에서 실권을 가진 실력자로서의 삶에 만족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에 따라 아스파르는 자신의 집안에서 집사로 근무 중이었던 직업군인이자 집사 레오를 새로운 황제 후보로 뽑은 뒤 그를 추천했다. 이는 본인의 미래에 있어서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제국의 황제를 정하는 기준에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레오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트라키아계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나 정통 그리스도교이며 건강하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새 황제로 마르키아누스의 사위였던 안테미우스[5]를 지명하고 싶어했지만, 안테미우스는 테오도시우스 왕조 입장에서 사위의 사위라[6] 왕조와 직접적인 연이 없었다는 점이 그가 제위후보에서 기각당했던 데에 작용했다고 한다. 한편 아스파르로 위시되는 군부의 힘에 밀려서 안테미우스가 황제가 못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는 사정이 달라졌는지는 몰라도, 후대의 마우리키우스도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실제 혈통상 황제였던 유스티누스 2세의 사위의 사위였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점이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를 계승받는 데 전혀 흠이 되지 않았다.

3.2.2. 대관식


아스파르의 결정에 동로마 군대는 새 황제를 박수로 환영했다. 군대는 전통에 따라 방패 위에 레오를 올리고 그를 인정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정통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레오는 동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황제관을 받아 대관식을 거행한 것이다. 457년 2월 7일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인 아나톨리우스에게서 공식적으로 제관을 받고 대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와 함께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에 있어서 큰 사건이었다. 먼저 레오 1세 즉위 이후,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는 대주교가 집전하는 대관식을 거행해야 하는 관행이 생기게 되었다. 다음으로 칼케돈 공의회 이후 높아진 총대주교의 위상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즉, 레오 1세의 대관식은 '임페라토르'라는 유래에서 보이듯 군대 베이스의 즉위식에서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주권을 가진 즉위식으로의 변화를 뜻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사실 아스파르의 부하장수 출신이 갑자기 황제로 급 신분상승이 되었던 사실에서 기인한, 취약한 정통성을 종교적인 절차를 통해서 보완하고자 했던 정치적인 고려도 있었다.

3.3. 황제 레오 1세



3.3.1. 아스파르와의 대립


아스파르는 그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워 자신의 권력을 누리려 하였으나 레오 1세는 호락호락한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레오 1세가 즉위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불화로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아스파르의 요구[7]를 황제가 거절한 것이 시작이었다.
레오 1세는 아스파르를 중심으로 한 게르만계 군부와 게르만적 요소를 제국 내에서 무력화시키고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황제는 인사조치에서 게르만족 군대를 숙청하고 새로운 군대 주축으로 이사우리아족을 기용했다. 이사우리아족은 칼리카드누스 강 연안과 이코리움, 리스트라 남쪽의 타우루스 황야 출신의 거친 산악민족이었다. 이러한 레오 1세의 조치에 아스파르는 자연히 반대하였고, 그는 현상유지[8]을 주장했다. 이에 맞서 레오 1세는 이사우리아 출신의 제노[9]을 등용하고 그를 트라키아 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아스파르를 견제했다. 동시에 황제 근위병들 역시 게르만족에서 이사우리아 출신들로 교체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스파르의 지지자들은 궁정 내에 많았다. 레오 1세의 황후 베리나의 오빠 바실리스쿠스가 대표적이었다. 바실리스쿠스는 헬레니즘에 익숙한 로마 상류층 스타일의 전형적인, 교양많은 로마인이었다. 그는 열성 단성론자로 게르만족출신이자 교양이 떨어지고 독실한 아리우스파인 아스파르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사우리아족에 대한 증오심으로 뭉쳐져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3.3.2. 대외정책



3.3.2.1. 서로마 제국

레오 1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마요리아누스를 승인하여 즉위시켰다. 그러다가 461년, 마요리아누스가 죽고, 서로마에서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서방 황제로 추대되자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전임황제 마르키아누스의 사위이자 테오도시우스 2세 재위 초 휼륭한 섭정 겸 친위대장 안테미우스의 손자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했다.

3.3.2.2. 반달 왕국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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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세워진 반달왕국의 영역)
레오 1세는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세운 뒤, 467년 반달왕국의 가이세리크(또는 가이세릭, 겐세리크)를 공격할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대규모 공동 원정 계획과 동시에 뚜렷한 황제만의 독자 노선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황후와 아스파르는 원정사령관으로 바실리스쿠스를 추천하며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레오 1세는 바실리스쿠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서로마와 연합하여 468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가이세리크 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서로마 제국 말기의 내전을 이용하여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스페인) 남부에 자리잡고 있던 반달족 전체를 이끌고 로마 제국의 곡창지대인 북아프리카을 공격,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이곳에 반달족을 정착시킨 뒤 동로마 함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서로마로부터 반달왕국을 공인받았으며, 북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계 로마인들을 선원으로 부리며 대규모 함대를 조직,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점령하여 해상권을 장악했다. 또한 455년 6월에는 로마를 공격, 서고트족알라리크에 이어 두 번째로 로마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런 그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 바실리스쿠스는 지극히 무능했고 468년의 공격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원정 초반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반달 왕국 세력을 몰아낸 뒤, 헤라클리우스 장군이 카르타고 남동쪽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능한 바실리스쿠스였다. 그가 이끄는 본진은 북아프리카에서 상륙한 이후 곧바로 진군하지 않고 머뭇거리며, 반달 왕국에게 패배 후 한숨을 돌리게 해줬고, 그 사이 경험많고 똑똑한 가이세리크는 연합군 측에 사신을 보내 항복할 테니 닷새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바실리스쿠스는 그 계략에 넘어가 반달 왕국에게 더욱더 시간을 주고 말았고, 닷새후 나타난 가이세리크는 때마침 바뀐 바람의 힘을 빌어 로마군의 연합함대 1,113척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바실리스쿠스는 당황하여 병력을 거의 잃고 겨우 도망친 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다.(본 곶의 전투(Battle of Cape Bon))
결과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처참했다. 레오 1세와 가이세리크는 강화를 맺었고, 13만 리브라(48,750kg 상당)의 황금을 사용하면서 준비한 동로마 제국이 입은 피해는 거의 30년 동안 동로마 제국을 괴롭히고 말았다. 또한 레오 1세의 입지는 제국 내에서 급격히 약화되었다.

3.3.3. 아스파르의 반격과 후유증


레오 1세는 원정 사령관인 바실리스쿠스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였지만 황후의 간곡한 설득에 목숨을 살려주며 용서하였다. 그러나 정적이자 게르만군부의 수장 아스파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즉각 반격하였다. 그는 기회를 포착하여 레오 1세의 둘째 딸과 자신의 아들 율리우스 파트리키우스(Patricius)의 결혼을 강제로 성사시켰다. 그리고 황제의 사위가 된 아들 파트리키우스를 카이사르(황태자)로 선포했다. 이어 아스파르와 아들들은 음모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에 레오 1세와 제노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리고 471년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들을 궁전으로 초대해 환관들이 칼을 들고 공격하게 하여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들을 죽였다. 이때 레오 1세의 사위이자 아스파르의 아들 중 1명인 파트리키우스는 부상만 입은 채 목숨을 건졌다.
아스파르의 살해사건은 레오 1세의 황권을 강화시켜주었지만 공교롭게도 다른 곳에서 불통이 튀고 말았다.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스타라보(Theodoric Strabo)가 아스파르 살해를 구실로 삼아 레오 1세에게 트라키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아스파르의 권한을 넘기고 영토를 동고트족에게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레오 1세는 제안을 즉각 거절하였고, 테오도리크는 트라키아를 공격하여 유린하였다. 결국 레오 1세는 473년 합의를 도출하게 되었는데 조건은 테오도리크가 아스파르의 옛 지위를 받고 동로마 제국이 동고트족에게 매년 금 2천 파운드를 공납금으로 바치는 것이었다.

3.3.4. 종교정책 등 내정


준비되지 않았던 황제답지 않게 내정에도 족적을 남겼다. 농민 곡물수매법과 3심제를 확립했다.
또한 472년에는 '이교'[10]의식이 이루어진 곳(토지, 건물 등)의 주인에게 강한 처벌을 내리는 법을 반포했다. 이는 종전의 마르키아누스보다 더욱 빡세진 것으로서, 그가 사회적 지위나 자산수준 등이 높을 경우 직책, 직업을 박탈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그런 게 없는 경우 몸으로 때우게(...) 시켜서 고문받고 여생 내내 광산에서 노예처럼 일하게끔 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인기가 매우 없었다고 한다.

3.3.5. 사망


473년 10월, 레오 1세는 제노가 자신의 딸 아리아드네(Ariadne)와의 사이에서 낳은 손자 레오(Leo)를 자신의 동료 겸 후계자로 삼은 뒤, 레오 2세로 즉위시켜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5개월 뒤인 474년 1월 18일, 레오 1세는 73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1] 그는 풀케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발렌티니아누스-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일원이 되었다.[2] 그의 아들들 역시 훗날 집정관을 지냈다.[3] 이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필두로 수많은 비 라틴계 종족 출신자가 황제가 되어 온 지 오래였기 때문에 게르만계인 점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부족장 출신으로 귀화(?)한 1세대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미국을 생각하면 쉬운데, '''아놀드 슈워제네거'''도 '''본인이 오스트리아에서 이민온 1세대'''라서, 주지사는 역임했지만, '''태어날 당시부터''' 시민권이 주어진 미국인이어야만 대통령 피선거권을 인정하는 미국 헌법상 본인이 대통령은 될 수 없는 처지인데, 이것과 유사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4] 이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 몇 십년 후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도 비정통인 단성론자였다.[5] 후대 서로마 황제 그 안테미우스가 맞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실제 총책임자였던 프라이펙투스 안테미우스의 외손자였다.[6] 더구나, 마르키아누스와 풀케리아의 결혼은 정상적·일반적인 결혼이 아닌, 순전히 왕위계승을 위한 상징적·법적인 결혼이라, 마르키아누스를 아르카디우스의 직접적인 '사위'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7] 아스파르는 자신의 아들을 봉급이 많은 고위직에 임명해달라고 레오 1세에게 요구했다.[8] 기존처럼 게르만족 중심의 로마군[9] 원래 이름은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데오테스.(...) 이사우리아 족장으로 레오 1세의 딸 아리아드네와 결혼한 이후, 동로마 색채의 이름인 제논으로 바꿨다.[10] 한자어의 본래 뜻인 '다를 이, 가르칠 교'을 넘어, 실제 쓰이는 용례는 특정 종교 외의 다른 종교를 싸잡아 비하하는 뜻이 있으므로, 작성자 및 절대다수의 독자들이 속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속사회인 현대 한국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따옴표를 붙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