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드-로엡 사건
1. 개요
1924년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두 소년이 인근에 거주하던 어린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사건이다. 세계적인 명문대인 시카고 대학교의 학생인 지능이 천재적인 두 소년이 오직 '''지적 도전'''을 위하여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 때문에 지역사회와 유대인 커뮤니티가 경악하였고, 범죄와 그에 얽힌 흥미로운 전후 이야기로 훗날 뮤지컬이나 영화 등의 매체로 재생산되기도 하였다.
2. 레오폴드와 로엡
2.1. 네이슨 레오폴드
'''네이슨 레오폴드'''는 1904년 11월 19일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촌들 중 나이가 제일 어렸기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베이브(Bab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
첫 가정교사 마리 가이슬러는 5년 동안 네이슨을 돌봤고, 두 번째 가정교사는 폴린 반 데 보쉬라는 기독교인이었는데 폴린의 영향으로 네이슨은 5살 나이에 성인(Saint)과 종교에 관심이 생겼다. 네이슨의 마지막 가정교사는 마틸다 원츠라는 알사스 여인으로 어린 네이슨이 무언가 잘못을 할 때마다 이를 약점으로 잡아 휴가를 달라는 둥 협박을 일삼곤 했으며, 네이슨과 샘 형제가가 말을 잘 들으면 그 대가로 그들과 섹스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병약하게 태어났으나 지적 능력이 뛰어나서 태어난 지 네 달 만에 말문을 트고 IQ가 210에 달했으며[2] 27개 언어[3] 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산후 후유증으로 내내 병마와 싸우다 17세 때 사망하였는데, 레오폴드는 어머니의 죽음에 죄책감을 품었다.
말 그대로 '''천재'''였으며, 그 때문에 다섯 살부터 일곱 살까지 여학교[4] 에 다녔다. 이후 공립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부적응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이후 집안이 시카고의 켄우드로 이사한 뒤 부유한 집 자제들이 다니는 하버드 남학교(The Harverd School for boys)로 전학하였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리차드 로엡을 만났다.
하버드 남학교를 다니던 15세 때, 친구 예닐곱 명과 어울렸는데 그 중 한 명이 리차드 로엡이었다. 레오폴드와 로엡은 처음엔 서로를 싫어했으나 레오폴드가 리차드가 다니는 시카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상황이 변했고, 1921년 2월 즈음엔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사이, 그들의 표현으론 '견고한 친구 사이'로 관계가 발전하였다.
레오폴드는 사회성이 다소 떨어졌다. 지능이 높고 집안이 부유한 영향으로 주변 친구들을 열등하다고 여겼으며,[5] 당연히 친구들은 레오폴드를 거만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회부적응(...)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워낙 로엡에 집착해 따라다녀 동성애적 성향을 짙다고 소문이 난 상태였다.[6]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태도가 거만하여 쉽게 친구, 특히 이성을 잘 사귀지 못하였다.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은 여자들을 싫어했으며 심지어 지적으로 저열한 존재로 여겼다. 이렇게 여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범죄를 저지르던 당시에도 '코니' 라는 여자와 사귀고 있었으며 그녀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있었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심리학자들은 레오폴드가 평범한 소년기를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했다고 판단을 내렸다.
실제로 레오폴드의 IQ가 210이었는지는 논쟁이 있지만, 뛰어난 조류학자였던 건 사실이었다고 한다. 특히 희귀종 '커틀런드 아메리카솔새'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이었기 때문에, 현재도 이 새에 관한 글이나 논문에서 레오폴드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한편으론 박제를 제작하려고 새를 엄청나게 잡아들였다고(...) 또한 니체의 신봉자였다. 잭 런던의 소설 '바다늑대 (The Sea-Wolf)'를 통하여 처음으로 니체의 철학을 접했는데, 니체의 초인론을 지나치게 따랐기 때문에 스스로를 사회를 초월하는 초인으로 생각하여 성격이 거만해졌으며, 결국 로엡을 초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주변에서 그에대해 외모와 성격이 고약했다고 말했다. 소심하면서도 거만한 성격에, 키가 작고 비대칭형 얼굴에 개구리같이 튀어나온 눈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이는 훤칠하고 성격 좋은 리차드과는 완전히 반대였기 때문에, 둘 모두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네이슨이 리차드를 범죄로 이끌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2.2. 리차드 로엡
1905년 6월 11일 시카고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 출신 법조인이었으며 Sears & Roebeck의 부회장이었고, 어머니는 카톨릭 집안 출신이었다. 또한 거대한 맨션과 미시건 주 샤를부아 Charlevoix에 여름 별장 캐슬 팜Castle Farms을 소유하였다. IQ 160으로 레오폴드만큼은 아니지만 분명히 천재적인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과외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네 살에 학교에 입학하였다. 가정교사는 로엡을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고자 작은 잘못이나 실수에도 엄벌을 주었는데, 로엡은 벌을 피하려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거짓말하는 버릇은 평생 지속되었다고.
시카고 대학 최연소 입학자[8] 이자 최연소 졸업자였으며, 이후 시카고 대학 로스쿨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주로 과외교사와 시간을 많이 보냈기 때문에 사회화가 되지 못하였으나, 잘생긴 외모에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과 뛰어난 언변까지 갖춰 네이슨과 달리 주변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서 호감을 샀다고 한다.[9]
2.3. 만남
2.3.1. 시카고 대학교 시기
레오폴드와 로엡은 비록 이웃에 살았고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둘이 친구가 된 것은 1920년 여름이었다고 한다. 로엡은 1919년 열여섯 살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인 1920년 레오폴드가 열일곱 살 나이로 같은 대학에 진학하였다. 이후 둘은 '''이상한 커플'''로 소문나게 된다.
둘의 관계는 지속되었고, 로엡이 완전범죄에 환상을 품자 둘이 같이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주로 로엡이 주도하고 레오폴드는 범죄를 재밌게 (...) 만들기 위한 목격자 역할 또는 도망을 빠르게 가기 위한 운전사(...) 역할을 했다. 레오폴드는 범죄 자체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로엡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에 동참했으며, 이 즈음 둘의 육체적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범죄 대부분은 절도나 방화 등이었으며, 가끔 차를 훔쳐 난폭운전을 하다가 잡힐 뻔한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한다.
'''그러나 둘의 관계도 위기를 맞는데...'''
3. 살인과 발견
1924년 초, 비폭력적인 범죄만 저지르던 레오폴드와 로엡은 완전범죄를 실행하려는 결심을 한다. 이웃에 사는 상류층 남자아이를 납치하여 죽이고, 아이의 부모에게서 몸값을 갈취하려는 계획을 구상하였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반 년동안 계획을 짰다고 한다. 그동안 두 사람은 가명으로 가상계좌를 열었고, 렌트 카 업체에 가서 범행시 사용할 자동차를 시운전하였다. 그뿐 아니라 범죄에 쓰일 협박편지를 어떻게 써야 하고, 옷은 어떻게 입는 등 여러 가지 중요한 세부사항을 논의하였다고 한다. 범행의 희생자를 처음 정할 때에도 여러 후보를 열어두었는데, 로엡의 남동생인 토미도 포함됐다. 하지만 형제를 죽이게 되면 본인들이 너무 주목을 많이 받을까 봐 대신 이웃에 사는 소년 한 명을 무작위로 골라 살해하기로 한다.
같은 해 5월 21일의 어느 오후, 둘은 렌트 카를 몰고 (한때 레오폴드가 다녔던) 하버드 남자학교로 가서,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납치대상이 될 만한 아이가 나타나지 않자 범행을 저지르기까지 몇 시간동안 레오폴드와 로엡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희생자를 찾아다녔다. 몇 시간 뒤, 범행의 희생자로 로엡의 저택 길 아래편에 사는, 당시 14살인 바비 프랭크를 목표로 하였다. 프랭크는 로엡의 저택에서 테니스를 쳤던 적도 있으며,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로엡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그 둘은 프랭크에게 집까지 태워다 준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으리라 예상하여, 길가에 사람들이 없을 때까지 기다리다 프랭크에게 차에 타라고 말을 걸었다. 바비 프랭크가 차에 타고 레오폴드와 로엡은 뜸을 들이다가 곧장 프랭크의 머리를 끌(Chisel)로 여러 번 찌르고 입 안에 헝겊을 집어 넣었다. 프랭크의 정확한 사망시간은 불분명하지만, 프랭크는 몇 분 동안 겨우 몸부림만 치다 사망하였다고 한다.
프랭크가 사망하자 레오폴드와 로엡은 시체를 처리하려고 차를 몰고 인디아나 주로 향하였다. 날이 어두워지기까지 기다리며 둘은 차 뒷좌석에 프랭크를 밧줄로 묶고 차를 세워 저녁으로 핫도그와 루트 비어를 마셨다고 한다. 밤이 되자 레오폴드와 로엡은 인디아나 주 헤먼드 근처에 있는 습지대로 가서 시체를 눕히고 신원을 알아보기 쉽지 않게 프랭크의 얼굴과 몸에 염산을 뿌렸으며, 시신을 배수관에 끼어넣고 범죄현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프랭크의 부모에게 자신이 '조지 존슨'이며 아이는 납치되었고 지시대로 움직이면 아이는 안전하다는 협박전화를 걸었다. 바비 프랭크의 부모는 지시전화를 기다리다가 4시간 뒤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사이 두 범죄자들은 협박편지를 프랭크 집에 부치고 집으로 돌아가 프랭크의 옷을 태웠으며, 렌트 카에 묻은 피 얼룩을 비누와 물로 깨끗히 닦아냈다.
다음날 아침 9시, 프랭크의 시체를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직물제조공장업자가 발견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 첫 페이지에 크게 보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은 시카고 역사상 가장 큰 범죄 수사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둘이 계획한 완전범죄는 완벽하지 않았다. 사건의 실마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풀리기 시작했으며, 수사망은 곧 레오폴드와 로엡으로 좁혀졌다.
가장 큰 단서가 된 안경은 레오폴드가 과거에 머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처방받은 것이었다.[10] 잠깐 쓰다가 아무 데다 둔다는 것이 하필 범행 때 입고 간 옷[11] 안주머니였던 것.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기에 레오폴드도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서야 안경을 기억해냈다.
안경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된 레오폴드는 중요한 사안 같지는 않지만, 일단 로엡도 알아는 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로엡에게 알린다. 로엡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12] 조언으로 '''괜히 입을 열어서 의심을 사지 말고, 그날의 알리바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자.''' 정도만 말하였다.[13] 하지만 그 안경의 중간 부분와 다리 끝 부분이 희귀했기 때문에[14] 용의자는 금세 레오폴드로 좁혀지게 된다.
레오폴드의 형 마이크는 동생이 조사받게 될 줄 알고 변호사를 소개하겠다면서 로버트 프랭크의 사촌, 즉 '''바비의 사촌'''을 알려주려 했다. 그러나 레오폴드는 거짓말을 하게 될 상대가 늘어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를 거절한다. 경찰의 취조를 받게 된 레오폴드는 모르쇠로 일관하려 했지만 계속되는 경찰의 물음에 지쳐 결국 모든 알리바이를 말하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증인으로 '''리차드 로엡'''의 이름을 꺼내었다.[15] 하지만 경찰은 취조를 멈추지 않고 새벽 3시 45분까지 어디서 언제 무엇을 왜 했는지 끊임없이 물었다.[16]
4. 체포와 재판
4.1. 클래런스 대로우
5. 투옥과 그 이후
투옥 후인 1932년, 둘은 죄수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으며, 다른 교육받은 죄수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했다. 둘 모두 갱생의 의지를 드러냈고, 그 기간 동안 두 사람의 지적 능력 을 이용하여 건설적인 일을 하였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마치 한 사람인 듯 모든 일을 함께 했다고 한다. 어딜 가든지 떨어지지 않았다고. 심지어 레오폴드를 다른 감옥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로엡은 레오폴드의 다리를 분질러버려(!)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36년 1월 28일, 로엡과 같은 방을 쓰던 다른 죄수 제임스 E. 데이가 샤워실에서 면도칼로 로엡을 공격하였다. 로엡은 50곳이 넘게 찔려 의사 일곱 명이 달려들어 수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로 사망한다. 이후 로엡을 공격한 데이가 로엡이 자신을 '''강간하려고 했기 때문'''에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엡의 목 뒤에 찔린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강간에 대한 정당방위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17] 그렇지만 결국 데이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추가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레오폴드는 로엡이 사망한 후 복역하는 동안 자서전 'Life plus 99 Years'을 집필하여 1958년에 출판하였고, 복역한 지 33년 6개월 이틀만인 1958년 3월 가석방되었다. 그 직후 푸에르토 리코로 떠나 푸에르토 리코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조류학 책을 내기도 했다. 1961년 2월에는 미국인 미망인인 "트루디" 드 퀘베다 ("Trudi" Feldman Garcia de Quevedo. 1905-1987)와 결혼하였다.[18] 1963년 형 집행이 종료된 이후엔 세계여행을 다녔으며, 1971년 8월 29일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석방된 이후 레오폴드는 범죄 언급을 피했으나, 집에는 재판 당시 변론을 맡았던 변호사 클래런스 대로우와 리차드 로엡의 사진을 계속 두었다고 한다.[19]
6. 관련 미디어
한국에서는 스티븐 돌기노프 원작의 뮤지컬 '''쓰릴 미'''가 이 사건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극적인 전개를 위하여 실제 이야기에서 약간 변경한 부분이 있다. 그 외에도 패트릭 해밀턴이 1929년에 제작한 연극 '로프'와 1948년 알프레드 히치콕의 동명의 영화도 같은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동성애 코드는 빠졌다. 그 외에도 같은 범죄를 소재로 한 한 영화에는 'compulsion' '머더 바이 넘버'와 '졸도(Swoon)' 등이 있다. 세기의 살인마 42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371화 에도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온다.
[1] 가족 중 유일히 어머니만 '네이트'라고 불렀다. 단 혼낼 때만.[2] 이 부분은 약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일단 당시 IQ 테스트와 현대의 IQ 테스트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210이라는 수치 자체가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한다.[3] 투옥 당시엔 1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언어를 배웠다고 한다. 구사할 수 있었던 언어는 영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아랍어, 일본어 등. 그러나 실제로 유창하게 구사했던 언어는 5개였다고 한다. 로엡은 자신이 15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레오폴드를 피곤하게 여겼다고.[4] 원래는 남녀공학이었으나, 레오폴드가 입학할 즈음 여학교로 전환되어 레오폴드와 다른 남자아이 한 명, 총 두 명만이 남학생이었다고 한다.[5] 월반을 계속했기 때문에 친구들보다 나이가 어려 적응이 쉽지 않은 환경이기도 했다.[6] 로엡은 이때문에 곤란할 때가 많았으며 한동안 그를 멀리하기도 했다. 실제로는 그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단 한사람 로엡외에는 여자를 사귀었다.[7] 교도소에서 동료수감자에게 칼로 피습당해 사망하였다.(당시 30세)[8] 14살이던 1919년에 고등학교 졸업, 같은 해 대학 입학.[9] 레오폴드 처럼 로엡 역시 월반을 계속 했지만 나이가 많은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가장 인기있는 친구로 선정되곤 했다.[10] 양쪽 눈의 시력이 많이 차이나면, 즉 짝눈일 경우 어지럼증과 두통이 발생할 수 있다.[11] 레오폴드는 새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봄이 되면 산으로 들로 늪으로 새를 관찰하러 다녔다. 그 중엔 일상복으로 들어가기 험난한 지역도 있었기에 새 관찰용으로 따로 보관하는 헌옷 두 벌이 있었다. 마침 안경을 마지막으로 쓰고 둔 곳이 그 옷들 중 하나였다.[12] 되려 다음 주에 있을 시험을 더 걱정했다.[13] 만약을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어두기는 한다.[14] 제작자가 공장에서 한 달밖에 일을 안해서 단 3개만 제작되었다.[15] 레오폴드는 얼른 알리바이를 말하고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로엡이 더 의심만 산다고 반대했다. 레오폴드는 의견이 갈리는 이유가 '로엡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서 쉽게 생각해서' 라고 여겨 로엡을 자신과 같은 처지로 만들려는 이유도 있었다.[16] 이 시각까지 마이크는 대기실에서 레오폴드를 믿고 기다렸다.[17] 데이와 로엡은 이전부터 충돌해왔었다. 데이가 로엡을 살해한 진짜 이유는 로엡이 가족으로부터 받던, 매달 50달러 영치금으로 자신과 다른 죄수들의 군것질거리와 담배를 제공하였는데, 새 교도소장이 이 영치금을 주당 3달러로 제한여 데이가 더 이상 군것질거리와 담배를 제공받지 못하자,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다며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8] 둘 사이에 아이는 없어선지 주변 사람들은 레오폴드는 '''그 이후에도 자기 성적 지향을 잃지 않았다'''(But he didn't lose his sexual orientation.)고 생각했다. 그는 평생 단 한사람 로엡만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19] 푸에르토 리코에서 살 때 죽은 아이의 친척이 레오폴드를 찾아왔는데, 그 사람은 그곳에서 리차드의 사진을 보았다. 레오폴드는 그 사진을 보며 "디키(레오폴드가 부르는 리차드의 애칭) 로엡, 내 인생을 망친 자식이죠. ...하지만 그는 정말 멋진 놈이었고, 내 최고의 친구였습니다."라고 말했고, 그 사람은 그 후 다시는 레오폴드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