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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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 목록 문서.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들은 프랑크족의 게르만 전통에 따라 투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후보가 되는 인물들은 전임 황제 가문들과 생판 다른 남이 되는 게 아니고 가급적이면 조금이라도 혈연 관계(부계, 모계, 방계, 먼 친척, 사위 등등)가 있는 사람이 후보로 추대되었다. 물론 그에 걸맞은 세력과 지지는 필수였다. 이러한 선거 관습은 대공위시대 이후 선제후 제도가 정착되어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투표로 선출되면 일단 로마왕(Rex Romanorum) 또는 독일왕(Germaniae Rex)이 되었으며, 이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야만 황제로 부를 수 있었다.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받지 못한 경우 로마왕(독일왕)이라는 칭호에 그쳤다.
그러나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교황이 대립하는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파문을 남발하거나 대관식을 집전하지 않는 수법이 악용되자 점차 교황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방안이 강구되었다. 그 결과 1356년 카를 4세의 금인칙서(golden bull)로 황제 선출에 있어 교황의 개입을 막으려 했으며, 이어 막시밀리안 1세 황제부터는 교황 대관식을 하지 않고 선출과 동시에 그냥 황제 칭호를 썼다.[1] 막시밀리안 1세는 황제의 공식 명칭으로 Imperator Romanus Electus(Elected Roman Emperor; 선출된 황제, 선출황제)를 사용했으며, 이 명칭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승, 유지된다. 막시밀리안 1세 이후 모든 황제는 선출 후 교황 대관 없이 황제가 되었다.[2] 막시말리안 이후 로마왕이라는 작위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태자, 즉 차기 제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2. 카롤루스 왕조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에 관해서는 오토 1세의 대관식을 그 출발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는 이전에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은 카롤루스 대제의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도 오토 1세 당시에 수립된 것이 아니며, 오토 1세 본인은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할 뿐이었다. 이것이 11세기 무렵 "로마 제국(Römisches Reich[3] )"으로 발전한 것이며, 12세기 무렵 "신성[4] 제국(Heiliges Reich)", 13세기 이후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이라는 명칭이 완성된다. 이 이름 또한 수세기 후 바뀌게 되는데, 16세기에 "도이치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된다.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 로마 제국이나 카롤루스의 프랑크 왕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의미이므로, 이 정치체제의 군주는 정식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프랑크 국왕, 후에는 로마 국왕이며, 이 직함을 얻은 사람이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로마 황제로 취임했던 것이다.
이 관점을 견지하는 학자들은 800년 12월 25일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서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축성된 뒤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된 이후를 제국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이후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암살 이후 제관 수여가 일시 중단다가 962년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정복하고 로마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제관을 수여받으며 황제의 지위가 복원된다. 이 시각을 따를 경우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아니라 단지 황제 지위를 작센 왕조로 복원시킨 군주라 볼 수 있다.
- 루도비쿠스 말더듬이왕(루이 2세) (877 ~ 879): 샤를 2세의 아들로 교황으로부터 제관을 받았으나 취임을 거부했다.
- 프리울리의 베렝가르(베렝가리오 1세) (887 ~ 891): 명목상의 황제. 카를 3세 사후 이탈리아 왕위를 획득
[1] 다만 대관식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독일 대주교가 대관식을 치뤘다.[2]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황제 중 그의 손자인 카를 5세가 교황 대관을 유일하게 받았지만, 카를 5세는 선출로 황제가 된지 11년이 지난 후에 포로로 잡은 교황에게 받은 대관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3] 독일어 'Reich'는 라틴어 'Imperium'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제국"을 의미한다.[4] '신성'이라는 형용사는 1157년에 프리드리히 1세가 제후들에게 발포한 소환장에서 처음 나타난다.[5] 상속으로 일시적으로 부르군디를 제외한 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했으나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큰형 카를로만의 아들인 조카 아르눌프에게 축출당했다. 나머지 작위는 모두 분할상속되어 완전히 프랑크 왕국은 갈라졌다.[6] 부왕인 카롤루스 대제가 공동황제로 임명했으나 단명[7] 대관을 거부하였다.[8] 4대손 루이 5세를 끝으로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되었다.[9] 루트비히 2세의 장남으로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사촌인 루도비코 2세에게 제위를 약속받았으나 삼촌인 샤를 2세가 먼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대관식을 받았다. 단명하여 이탈리아와 제위를 막내 카를 3세에게 상속하였다.[10] 카를로만의 서자 아르눌프가 일시적으로 제위를 얻었으나, 그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 4세를 끝으로 동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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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 시대의 프랑크 계 작위의 계승은 프랑크 살리카법에 의한 아들 사이의 분할 계승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는 생전에 다른 적자 아들을 모두 잃고, 경건왕 루트비히 1세를 말년에 공동황제에 임명하며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작위를 수여한다. 크로아티아와 바이에른 등은 반란으로 신성 로마 제국 지배에서 벗어난다. 이탈리아는 잠시 둘째아들 쪽의 손자에게 계승되었으나 몇년 후 루트비히가 다시 상속받는다.
카롤루스 왕조 때의 신성 로마 황제는 대체로 중프랑크(이탈리아)의 왕위를 겸직한다. 분할 상속 계보가 너무 복잡하다 싶으면 누가 이탈리아(롬바르디아)의 왕위를 얻는지만 알아도 신성 로마 제국 황위의 행방을 쉽게 알 수 있다.
경건왕 루트비히는 처음에는 이탈리아 왕을 제외한 모든 작위를 받았고 조카의 사망으로 4년 후 이탈리아 작위까지 모두 가지게 된다. 분할상속을 없애려고 했으나 실패했으며 결국 많은 아들딸을 성직자로 만들어 후환을 없애려 했다. 그럼에도 아들들은 작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첫 아들 로타리우스 1세에게는 롬바르디아 황제와 공동황위를 주어 같이 통치하였지만 역시 반란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루트비히는 실권을 잃고(이후 다시 전쟁을 해서 찾고 잃는 것을 반복), 843년의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3분할 되며 로타리우스 1세는 중프랑크와 신성 로마 제국 작위를 갖게 된다. 중프랑크는 로타르 사후 이탈리아, 프로방스와 로타링기아로 다시 분할된다. 로타링기아는 왕 로타르 2세 사후 메르센 조약으로 동서프랑크에 분할된다.
로타리우스 1세는 아들 이탈리아의 루도비코 2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위와 이탈리아 왕위를 계승하도록 한다. 분할에 분할을 거쳐 황제의 직접적 영토는 고작 북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에 불과하였기에 그는 실질적으로 다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한다. 이후 동생(로타링기아 왕 로타르)과의 협상, 다른 동생(프로방스 왕 샤를)의 사망으로 인한 상속으로 로타링기아(로트링겐, 로렌) 및 프로방스 지방을 일부 가져온다. 다만 전쟁과 병환으로 메르센 조약으로 인한 로타링기아 분할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이탈리아 남부(카푸아, 베네벤토, 바리 등)로의 끊임없는 사라센 인의 침공으로 인해 중부유럽의 복잡한 정치 구도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이는 독일과 프랑스가 사실상 남남의 길을 걷게 하는 발단이 된다.
아들이 없는 이탈리아의 루트비히는 결국 이와 같이 평생에 걸쳐 지켜낸 신성 로마 제국 황위를 사촌이자 루트비히 독일왕의 아들 카를로만(후에 바이에른의 카를만)에게 넘기고자 한다. 그러나 삼촌이자 서프랑크왕 대머리왕 카를(샤를2세)은 재빨리 알프스를 넘어와 신성 로마 황위를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받아 가져갔고 동프랑크와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탈리아, 프로방스, 부르군트(브루고뉴) 왕위 및 신성 로마 제국 황위를 모두 가져간 대머리왕 카를(카를 2세 또는 샤를 2세)은 동프랑크와의 전쟁 도중 사망한다.
카를 2세의 아들 루이 2세는 서프랑크 왕위만을 받았다. 이탈리아 왕위는 바이에른의 카를만, 부르군트와 로타링기아 등 역시 모두 분할되어 다른 사람이 왕위를 가져간다. 황제위의 권한은 카를만에게 넘어가지만 교황이 인정을 해주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4년간 공석이 된다. 카를만은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황제위를 동생 뚱보 카를에게 상속한다.
스폴레토 공작에게 위협받던 교황청은 881년 당시 슈바벤과 이탈리아 왕이자 프로방스의 보호자인 뚱보 카를(카를 3세)을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인정한다. 카를 3세는 즉위 직후 수 년간의 전쟁을 통해 북으로는 네덜란드 지방의 바이킹들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서프랑크의 섭정임을 주장하며 일시적인 프랑크 왕국의 재통일을 이루어낸다. 하지만 통치력 및 건강 문제로 순식간에 몰락하면서 887년 실각, 이듬해 사망하여 프랑크 왕국은 완전히 해체된다.
루트비히 독일왕의 서자이자 카를 3세의 조카뻘인 아르눌프가 알레마니아, 작센, 슈바벤, 로타링기아 및 바이에른까지 통합한 동프랑크의 왕이 되며 서프랑크 왕위는 파리공작 외드, 아키텐은 루돌프 2세, 부르군드는 루돌프 1세, 프로방스는 맹인왕 루트비히로 산산조각난다.
이탈리아 왕위 및 황제위는 베렝가리오 스폴레토 공작 귀도와 아들 람베르토, 아르눌프, 부르고뉴의 루돌프 1세, 맹인왕 루트비히 3세가 놓고 다툰다. 아래 왕들을 보듯이 황제위의 의미는 사라지고 사실상 이탈리아 왕위를 놓고 제후들이 다투는 모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3. 귀도 왕조
4. 카롤루스 왕조
5. 보종 왕조
6. 운로크 왕조
7. 궐위(924 ~ 962)
베렝가리오 1세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위는 약 40년간 궐위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탈리아의 군주들을 명목상의 황제로 간주하기도 한다. 베렝가리오 1세 사후부터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정벌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를 보종 가문과 안스카르 가문이 계승하게 된다.
한편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 마지막 후계자 루트비히 유아왕(아르눌프의 아들)이 후사 없이 죽자 콘라트 1세가 왕으로 뽑히지만 그 또한 아들 없이 죽어 작센의 하인리히 1세가 새롭게 국왕으로 지명된다. 이때부터의 동프랑크 왕국을 독일 왕국이라 부른다. 하인리히 1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936년 독일 왕위에 오르고 962년 베렝가리오 1세의 외손자로서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베렝가리오 2세를 격파하여 이탈리아 왕위를 겸한 뒤 교황에게 제위를 받으면서 작센 왕조가 시작된다. 이탈리아 왕위는 이후 16세기 카를 5세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겸임한다.[15]
독일 중심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따질 때는 작센 왕조의 오토 1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보기도 한다.
8. 오토(작센) 왕조
9. 잘리어(프랑켄) 왕조
10. 주플린부르크 왕조
11. 호엔슈타우펜 왕조
12. 벨프 왕조
13. 호엔슈타우펜 왕조
14. 대공위시대(1254 ~ 1273)
콘라트 4세가 죽으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대통이 끊긴 후 제후들 중 누구도 황제로 선출되지 않으면서 약 20년간 대공위시대가 이어진다. 호엔슈타우펜 황제들와 교황권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유력제후들이 서로를 견제해서 황제선출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교황 역시 자신의 권력에 가장 큰 위험 요소가 될 황제가 선출되지 않는 상황을 반겼다. 그러나 황제의 공석 상황이 지속되자 독일 내에서 혼란이 지속되었고, 이제는 교황의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이 제후들에게 제발 황제를 선출해달라고 닥달하는 상황이 되었고, 1273년 교황이 어렵사리 마련한 선제후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godson)이자 다른 가문에 비해 큰 세력이 없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루돌프 1세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유력 가문 출신들은 아무래도 서로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콘라트 4세가 죽은 뒤 정식으로 황제가 뽑히지 않고 독일왕 작위만 가지고 있었다. 정식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괄호안의 연도는 재위년도가 아니라 '''생몰년'''이다.
- 빌렘 2세 (1227~1256) - 홀란드 백작, 독일왕 ,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콘라트 4세의 대립왕으로 선출됨
- 리처드 (1209~ 1272) - 콘월 백작, 영국왕 헨리 3세의 동생. 플랜태저넷 가문으로 호엔슈타우펜의 모계친척.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의 대립왕,
- 알폰소 10세 (1221~1284) - 카스티야 국왕. 호엔슈타우펜의 모계 친척.
15. 대공위시대 이후
16. 합스부르크 왕조
17. 비텔스바흐 왕조
18.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이 왕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군주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프랑수아 에티엥) 로트링겐(프랑스어로 로렌) 공작의 결혼으로 시작된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 전까지만 해도 남자만 계승권이 있었으나 이 당시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고 딸만 있자 딸에게 가문을 물려줄 심산으로 규정을 바꿔 여성 군주를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문의 규정일 뿐, 신성 로마 제국은 여황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 때에 와서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독일 접경지대의 공작 가문인 로트링겐 가문에 비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위와 후광이 워낙 강대하여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을 합스부르크로 칭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로 부른다.
19. 기타
- : 그가 득세할 때 그를 신성 로마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개신교 제후들 사이에서 있었다.
[11]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에게 영토와 황제의 권력을 기증한다는 내용의 위조문서[12] 카롤루스 대제의 먼 모계후손 (요절한 아들 피핀의 딸 아들리아드의 손자)으로 카를 3세가 축출당하자 교황에 압력을 가해 이탈리아 왕위와 황제를 강탈했다.[13] 귀도의 아들. 불법으로 강탈된 제위라 하여 교황에게 박탈당한다. 아르눌프에게 패하고 정적에게 암살당함.[14] 루트비히 1세의 자손인 바이에른의 카를만의 서자이다. 887년 숙부 카를 3세를 축출하고 동프랑크 국왕 즉위, 896년 이탈리아를 원정해 귀도를 격파하고 황제에 즉위함.[15] 단, 이탈리아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완전히 탈퇴한 시기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이다.[16] 독일 왕국의 하인리히 1세에 이어서 하인리히 2세로 센다.[17] 오토 1세의 모계 후손이며 동프랑크 왕국의 콘라트 1세에 이어서 콘라트 2세로 센다.[18] 오토 1세의 모계 후손으로 순전히 실력으로 제위에 오른 경우이나 단명했다.[19] 로마왕, 잘리어 왕조의 모계 후손이다.[20] 로마왕, 하인리히 6세의 동생, 바이에른 백작 오토 8세에게 암살당함.[21] 로타르 3세의 외증손자, 호엔슈타우펜의 모계 친척, 필립의 사위, 독일왕, 1209년부터 단독 황제, 1215년 폐위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