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가수)

 




'''부활의 초대 보컬리스트
김종서
金鍾書, 金钟书 | Kim Jong Sheo, Gim Jongseo
'''
'''출생'''
1965년 2월 23일 (5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적'''
[image] 대한민국
'''본관'''
김해 김씨
'''신체'''
166cm[1], 58kg, AB형
'''학력'''
서울아현초등학교
동도중학교
한성고등학교
대유공업전문대학[2] 기계학과
'''형제자매'''
7남 2녀 중 여섯째
'''가족'''
배우자 구정옥, 아들, 딸
'''데뷔'''
1987년 시나위 2집 'Down And Up'
'''종교'''
무종교
'''SNS'''
[3] [4]
1. 개요
2. 초기 그리고 시나위
3. 파고다 레전드의 시작 부활
4. 시나위로 금의환향
5. 카리스마
6. 또 다시 시나위로
7. 솔로 활동과 현재까지
9. 불후의 명곡
10. 가족 관계
11.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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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귀곡성이라 불리던 1980~1990년대 한국 최고의 락스타이자 당대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 한국 1세대 헤비 메탈 뮤지션으로, 부활, 시나위, 카리스마 초대 보컬리스트로 활동했다. 가창력 뿐 아니라 작·편곡 능력이 탁월해 가요계에서 대단한 입지를 구축했다.
'''그는 차트 1위곡을 여럿 보유한 작곡가다.''' 솔로 앨범의 사실상 모든 곡을 본인이 직접 작곡했으며, 히든 싱어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곡을 다른 사람에게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가요계에서 손꼽히는 하이 테너로, 80년대에 살인적인 초고음을 최초로 선보여 엄청난 충격을 불러왔다. 남자 노래에서 높은 음이라봐야 기껏해야 '''2옥타브 시(B4)''' 정도였던 시절에[5] 김종서는 3옥타브대를 꽉 채우는 초고음을 난사했다.[6] 때문에 여성 보컬들에게도 벅찬 음역대를 너무 쉽게 소화해버리는 그의 존재는 국내 메탈 키드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였다고 한다.[7] 당시 그의 고음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곡으로 시나위 2집의 빈 하늘과 시나위, 카리스마 1집의 warning과 빛 바랜 옛 사진 속에서를 들 수 있다. 이는 여전한지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무려 '''3옥타브 파♯(F♯5)'''까지 치솟는 체리필터낭만고양이를 무리없이 소화하는 기염을 토했다.[8]2017년 개최된 서태지 25주년 콘서트에 사용된 환상속의 그대 재녹음 버전에선 92년도에 보여줬던 3옥 솔의 샤우팅을 또 다시 원키로 무난히 소화하는가 하면, 2019년에는 유튜브를 통해 데뷔곡인 새가 되어가리를 원키로 소화하는 위엄을 보여주기도 했다. 최근 행사에선 Led Zeppelin의 전설적인 명곡인 Immigrant Song을 원키로 완벽히 소화하고 있다. 김종서의 뒤를 이어 나온 고음 보컬인 김경호박완규가 2020년 현재 고음을 잃어버린 걸 생각하면 얼마나 자기관리가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 가요계의 음역대를 높인 주범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를 필두로 한 헤비메탈 뮤지션들이 80년대 후반에 붐을 일으키면서 그에 영향을 받은 보컬들이 가요계에 등장, 그 이전에는 정말 보기 힘들었던 3옥타브대의 고음이 등장하는 곡들이 훨씬 많아졌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김종서에게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고음형 보컬들은 박완규, 김경호, 임창정, 김지훈(가수), 박기영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서태지, 유승준, 이승환, 이승철 등이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 80-90년대를 보내면서 락커의 꿈을 키운 사람이라면 김종서의 영향을 안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
80년대 중후반의 헤비메탈 전성기 시절부터 김경호, 김바다(시나위), 박완규(부활) 등의 후배들이 등장하는 90년대 후반까지 정상의 자리를 지킨 유일한 인물. 여러 가지 불미스런 사고로 유명 뮤지션들이 줄줄이 자리를 뜨는 와중에도 90년대 내내 록씬을 홀로 이끌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후술된 대로 구설수는커녕 사생활 자체도 크게 알려진 것이 없을 만큼 주변 관리를 잘한 편이다. 서태지가 회고하기를,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천재가 되고 싶어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을 때 김종서가 '가짜 음악' 이라며 그를 제지했다고 한다. 해피투게더-김종서에게 서태지는 어떤 의미?.20141009

2. 초기 그리고 시나위


학창 시절부터 하드록, 헤비메탈을 무지 좋아하고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를 가진 소년으로 유명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첫 밴드생활을 당시 커버밴드로 명성이 높던 시나위에서 했다.
본인이 배기성, 이세준과 함께 진행하는 팟캐스트 라디오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고교 졸업 후[9] 밴드 활동을 하고 싶어하던 김종서는 시나위 드러머였던 친구의 소개로 시나위에 들어가[10] 첫 밴드 생활을 했는데, 그 동안 혼자 집에서 연습하던 아마추어였던 본인과 이미 프로 수준이었던 시나위 멤버들과의 실력 차이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결국 첫 라이브 때 자기는 도취되어서 열심히 불렀는데 알고보니 모니터링이 하나도 안 되고 있어서 신대철에 의해 해고되었다고 한다.[11]그 충격으로 시나위에 재합류하는 1년 동안은 잘 때도 음악을 들으면서 자며 낮에는 산이나 마포대교 아래에서 발성 연습을 하면서 득음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목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였다고. [12]
신대철의 증언과 엇갈리긴 해도 첫 공연 이후 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3. 파고다 레전드의 시작 부활


해고된 후에 김종서는 피가 나도록 연습을 했고, 결국 당시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대유공전 스쿨밴드 '로거스', '검은진주'라는 밴드를 하며 종로 파고다 연극관, 이태원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사실상 김종서의 데뷔시기는 이즈음으로 1984년에서 1985년으로 보는게 맞으나 본인 스스로 시나위 2집을 데뷔 시기로 잡았기 때문에 1987년으로 알려져있다.
이에 탄력을 받아 1980년대 초중반, 서울 파고다 중심의 록 뮤지션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결국 언더그라운드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안가 그는 이 계통에서 가장 유명한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시절의 그는 워낙 전설적이어서, 당시 그 씬에서 김종서보다 유명한 보컬리스트가 없었을 정도였고, 그를 선망해 록 보컬을 꿈꾸던 이도 많았다고 한다.[13] 또한 그 당시 공연하는 김종서를 보고 락커의 꿈을 접은게 이승환이다. 그때 당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가 바로 '''김태원'''. 김태원은 김종서가 레드제플린의 'Black Dog'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면서[14] "한국에도 이런 보컬이 있구나"하며 바로 자신의 밴드 보컬 자리를 제의했고 그 밴드가 바로 현재의 부활의 전신인 'The End (디 엔드)'다. 그 당시 김종서는 앨범도 안 낸 밴드가 매니저까지 두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는데, 디 엔드는 이미 강북에서 속칭 가장 잘 나가는 인디밴드[15]였고 강남의 시나위에 대적할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김종서와 디 엔드가 통합하며 비로소 부활이 결성되었다. 이로서 김종서는 대한민국 음악 역사에 영원히 남을 밴드인 시나위와 부활의 (초대) 보컬을 모두 맡게 된다. 자작앨범을 내기도 전인 카피밴드인데도 파고다 연극관 전석매진을 달성하는 등 소위 대박을 터트려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부활의 무대는 김종서를 제외한 이태윤 김태원 등 나머지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보컬을 맡는 약간 심심한 1부, 그리고 김종서가 보컬로 짜잔 등장하여 레드 제플린 레퍼토리로 임팩트를 주는 2부의 특이한 구성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이때 팬 겸 스탭 겸 으로 구경하던 사람들이 이승철신해철등 훗날 한국 음악계의 거물들이었다.
하지만 정규앨범을 내기 바로 직전 부활에서 매니저와의 불화로 탈퇴했다. 이 때에 시나위와 부활 두 밴드가 다른 보컬로 앨범을 발매한 것에 대해 굉장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불행의 아이콘이라고 볼 수 있는데, 김종서는 임재범이나 이승철에 비해 소위 말하는 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두 보컬리스트보다 이른 시기에 음악과 밴드를 시작했고 대한민국 헤비 록의 가장 큰 기대주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부활의 경우는 기반을 다 닦아놓고 성공이 이미 확정되어있는 앨범만 이승철이 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김태원이 김종서한테 곡을 주기도 하였고 불후의명곡에서 김태원과 함께 부활의 곡인 회상 Ⅲ을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

4. 시나위로 금의환향


부활 탈퇴 후에도 여러 밴드를 거치게 된다.이근형 강기영 이호규 와 파고다의 슈퍼밴드 '작은하늘'[16]을 결성해서 활동했고, 이 시기에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김종서 밴드'로 활동했다.
당시 다른 헤비메탈 밴드들의 보컬리스트는 가요에 샤우팅을 첨가한 충분히 관객이 예상할수 있었던 (당시의 이승환, 이승철 같은) 보컬들 아니면 임재범 같은 중저음 보컬들이었다. 김종서와 같은 하이톤 보컬이 없지는 않았지만 음색과 음역대 면에서 비교 될만한 수준의 보컬은 보이지 않았다. 김종서의 음색은 레드 제플린로버트 플랜트, 러시의 게디 리, 그리고 머틀리 크루의 빈스 닐을 연상 시켰다. 이런 목소리는 그때까지 한국에서는 들어보지 못 한 것이었다. [17]음색 자체는 게디 리와 가장 많이 유사하지만 창법(기교)에 있어서는 로버트 플랜트를 많이 의식하고 연습하여 그와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며 보컬 사운드의 칼칼함이나 가벼운 느낌(이건 프로듀싱의 문제지만)은 빈스 닐을 닮았다. 거기에 비음에 의해 특유의 '소년' 같은 목소리(당시에는 동요 같다고 까이기도 했다고...)가 되어 서구에는 또 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보컬이 된 것.
어쨌든, 결국 신대철이 다시 불러 시나위 2집 앨범 녹음에 참여했고 드디어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첫 앨범을 내게 되었다. 시나위에서의 첫 앨범[18]인 2집 '''새가 되어가리''' 는 대히트를 쳤고 현재까지도 한국 헤비메탈의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여겨졌다. 사실상 완성도 면에서는 김종서가 활동했던 2집이나 4집이 더 뛰어나다는 평이 당대에 다수였으나 이후에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다가 10년도 전후에 임재범의 성공적인 재기와 맞물려 1집이 시나위 전체 커리어를 대표해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당시 시나위 라인업은 4집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라인없으로 평가 받을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 앨범과 더불어 한국 헤비메탈 음반의 최고 명반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 앨범에서 메가 히트곡 '''새가 되어가리'''뿐만 아니라 '''빈 하늘''', "시나위" 와 같은 곡에서 무시무시한 초고음대역을 보여주었으며 다만 라이브 때는 너무 고음역대다 보니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다. 그 뒤 신중현 Remake라는 2.5집까지 참여 후 신대철과의 갈등으로 탈퇴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대급 명반이 탄생했다. 신중현의 한국적 락 멜로디에 김종서의 샤우팅 창법, 신대철의 연주가 만나 기묘한 합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앨범은 소속사와의 계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조한 앨범이었기 때문에 앨범의 존재가 잘 알려져있지 않다.

5. 카리스마


시나위 탈퇴 후, 백두산을 그만두고 매니지먼트 사장으로 변신한 유현상이 기획하고 있던 '카리스마'라는 밴드에 합류했다.
카리스마는 유현상이 락계의 슈퍼밴드[19]를 키워볼 생각으로 김종서와 이근형[20]을 불러모아 만든 밴드였다. 때문에 당대 헤비메탈씬에서도 톱 클래스의 연주가 뽑혔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며, 보컬 김종서는 그 실력이 정점에 오르기 시작해, 'Warning' 이란 곡에선 강력한 성량을 뿜어내며 최고음 '''3옥타브 라'''를 찍는가하면 '빛 바랜 옛 사진속'에서라는 곡에선 저음과 초고음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완벽히 소화해내는등 무지막지한 실력을 뽑냈다.[21]
하지만 1980년대 잠깐 불타오르던 락의 불씨는 꺼져가고 있었고, 특히나 록의 불모지로 여겨지는 대한민국에서 밴드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결국 공연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같은 소속사의 당시 최고 인기 여가수였던 이지연의 백밴드 대우를 받기도 하는 등의 굴욕을 겪으면서 팀은 해체되었다. 어느 정도로 나쁜 대우를 받았는가 하면, 해체 후엔 지급받았던 악기도 소속사로 다시 반납하라고 지시했다고. 김종서와 카리스마 멤버들은 이때의 기억 때문에 유현상을 상당히 증오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모두 응어리가 풀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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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은 나중 김종서가 솔로데뷔후 김종서의 폭발적인 인기를 틈타 '김종서 IN 카리스마'라는 앨범으로 재발매되었다.

6. 또 다시 시나위로


카리스마가 해체 될 시점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메탈 옴니버스 프로젝트중 하나인 ROCK IN KOREA 앨범에 보컬로 참여한다. 이후 또 다시 신대철의 연락을 받고 시나위 4집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때 당시까지 김종서의 팬이자 그의 커리어를 동경해왔던 서태지와 만나게 되었다.
이 앨범부터 김종서는 고음을 조금 절제하는 대신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강약조절과 깔끔한 음정 처리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4집 앨범은 2집에 비해 급락한 판매량을 보여 당시엔 실패한 앨범이라는 이야기가 많았으나 완성도로만 보자면 2집못지 않은 완성도를 보여주고있다. 때문에 시나위 역대 최고 앨범으로 치면 일반적으로 상징적인 1집을 제외하고 2집 또는 4집을 언급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Farewell to Love, Set My Fire, 김종서 솔로 2집에 수록된 '''겨울비''' 원곡이 수록되어 있다. 겨울비엔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에 김종서가 적어놓은 멜로디를 우연히 신대철이 보고 "괜찮네?? 같이해보자"라는 말을하고 직접 작사해서 4집에 수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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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위 4집 시절'''[22]
하지만 이내 신대철과의 갈등으로 시나위를 세번째로 탈퇴하게 되는데, 갈등의 가장 큰 문제는 대중성 있는 곡을 하고 싶어했던 김종서와,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연장선에 남고 싶어하는 신대철의 음악적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또한 신대철은 밴드 내에서 강한 장악력을 보이고 있고, 이에 연장자이기도 한 김종서와의 갈등이 커졌으며, 4집 때 들어온 어린 베이시스트인 서태지가 김종서의 편을 들었는데 신대철 본인은 서태지를 짜를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이러한 인간적인 갈등 역시 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서태지와 김종서는 동반 탈퇴하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 시나위 역시 매맞는 아이 이후 희망가 등으로 대표되는 대중성 노선으로의 변화를 꾀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종서와 신대철은 매우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고, 음악적 교류도 하고 있다. 방송에서 김종서는 항상 자신의 음악적 고향으로 시나위를 언급하고 있다.
다음은 신대철의 김종서 탈퇴에 대한 인터뷰다.

'''기자''': 김종서 씨와는 84년에 헤어졌다가 87~90년 다시 작업했고, 또 갈라섰습니다. 굉장한 애증관계인데요.

'''신대철''': 밖에서 보기엔 치고받고 싸웠나 보다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스무살 언저리의 애들이었으니 인내, 배려는 없고 타협을 모르잖아요. 그렇게 헤어졌다가도 ‘이번 건 그 친구가 하면 좋겠는데?’ 그러면 또 같이하고 그랬어요. 바닥이 좁으니까요.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방법은 나이 들면서 배우는 거죠.

이로써 소위말하는 대한민국의 3대 또는 4대 기타리스트와 모두 밴드를 했다는 진기록을 세웠다. (신대철, 김태원, 이근형) 이 후 연예계에서 깡통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가수 장혜진의 남편 강승호를 만나 솔로 데뷔를 준비하게 된다.

7. 솔로 활동과 현재까지


1992년에 솔로로 전환, MBC '''특종 TV연예'''[23]에서 솔로 데뷔곡인 '''대답 없는 너'''[24]를 불러 패널들과 방청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곡은 김종서 커리어 뿐만 아니라 한국 락 역사상 대단히 상징적인 곡이다. 이전까지 락이란 장르는 마니아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것과는 달리 이 곡은 메인스트림에서의 성공한 거의 최초의 곡이라고 보면된다. 결과는 대히트하면서 가요톱텐에서는 10위 권까지 올라갔고 그 뒤 후속곡인 '''지금은 알 수 없어'''가 1위 수상의 영예를 안게 해 준 뒤 자신의 음악인생 최고의 인지도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히트에 힘입어서 김종서의 솔로 데뷔 앨범은 당시 94만장, 도합 총 1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록한다.
1집의 성공에 힘입어 소속사는 그의 차량을 교체해주는 등 대중적인 성공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에 탄생한 2집은 1집을 뛰어넘는 판매량을 보여줬다. 공식 기록으로 134만장을 기록함과 동시에 김경호가 한국 락 역사상 손가락에 꼽을 만한 베스트 락 발라드라고 언급한 겨울비가 재탄생한 것이다. 본래 소속사와 김종서 본인은 '''그래도 이제는'''을 타이틀로 활동을 준비했지만 라디오 등 매체에서 '''겨울비'''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급하게 타이틀 곡을 교체해서 활동했다고 한다. 앨범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자 소속사는 앨범 재고가 없어 급하게 공장 4개를 가동시켜 수요에 맞춰 판매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앨범 팬매가 정지된 순간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93년 서태지의 등장 순간부터... 그래도 앨범 수록곡의 히트는 계속 진행형이었다고 한다.
이후 3집에서는 악몽, 세상의 눈물 마를 때까지, 남겨진 독백이 좋은 호응을 받으나 방송 출연 제한과 방송국과의 약간의 갈등 속에서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2집에 비해서는 주춤한 판매량을 보였다. 그럼에도 라디오나 입소문을 타고 전해져 앨범과 수록곡이 꽤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김종서가 꾸준히 시도해온 실험작이자 서태지와의 교류 속에서 탄생한 4집이 발매되는데, 이 앨범에 수록된 김종서의 실험의 성공을 알리는 곡이 바로 '''플라스틱 신드롬'''이다. 이 곡은 당시 임진모는 이 곡을 락 정통에 머물면서 대중성을 확보한 곡으로 김종서의 헤비메탈로 단련된 보컬이 어우러져서 탄생한 곡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난 사는거야''', 서태지와 함께했던 '''Free Style'''이 수록되어 많은 사랑을 받으며 당시에 83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4집으로 김종서는 전세대에서 사랑 받는 락 장르를 대중에 최초로 보였고 이에 따라 서태지와의 빅쇼가 성사되어 KBS에 방영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95년 대한민국 락커 역사상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다만 이 시기 목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발매된 실황 앨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김종서 본인은 4집에 이어 5집에서는 좀더 실험적인 곡을 선보이길 원했고 서태지와의 교류 속에서 힙합락을 선보이려고 했다. 이에 탄생한 곡이 바로 '''추락천사'''였다. 그러나 대중들의 관심은 이 곡 보다는 영원과 아름다운 구속에 반응을 보였고 또다시 급하게 활동곡을 교체해 활동하게 된다. 아름다운 구속은 흔히 알려져있듯이 당시의 인기에 힘입어서 김종서의 가장 대표곡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시기부터 김종서의 목 상태에 무리가 보다 더 도드라져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방송에 출연해 한 곡을 소화하는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으나 목소리에 힘이 과거보다 많이 빠져보였고 더욱 불안한 목상태를 자주 보였다.
1996년-97년 '''아름다운 구속'''의 성공에도 김종서는 휴식기 없이 곧바로 1998년 6집을 발매한다. 이 앨범에 타이틀은 당시 유행하던 락 발라드에 맞춰 작곡한 '''에필로그'''였다. 에필로그는 락 발라드 팬들을 비롯한 마니아 층에 호응을 얻는데는 성공했으나, 아름다운 구속에 이어 대중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심지어 앨범 커버도 구매 욕구를 이끌어내기엔 무리수였다.
1999년 김종서는 7집을 선보이며 플라스틱 신드롬에서 시도했던 실험을 이전보다 좀 더 강하게 시도했다. 브라스 세션과 함께한 빠른 템포의 스카#s-3 펑크 장르인 '''실연'''을 선보였다. 스카 자체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너무 낮았던 탓에 호불호가 많이 갈렸고, 뮤직비디오에서 코믹한 컨셉을 잡는 바람에 일각에서는 코믹송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신비주의 락커의 무리수라는 부정적 평가와 역시 새로운 실험이라는 평가가 엇갈렸고, 사실상 이 시기부터 김종서의 커리어는 정점에서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001년 8집 Odyssey를 발매했다. 당시 평단의 호평과 기대속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Starry Night'''은 팬들과 마니아층이 선호하는 곡 중 하나로 자리잡고있다. 이 앨범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있는 '''절대 사랑'''이란 곡도 극강의 난이도로 잘 알려져있다. 또한 이 시기부터 방송 출연을 자주하기 시작했으나 아직까진 개그적인 컨셉을 보이지는 않고 뭔가 독특한 매력의 뮤지션 정도로 자주 비춰졌다.
2005년 김종서는 8집의 예상 밖 부진에 4년간 음악적 방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40대에 접어든 나이도 나이지만 나이에 따라 떨어진 보컬 능력에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까지.. 이 시기에 더이상 자신이 설 무대가 없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는 인터뷰를 자주하고는 했다. 이미 김종서 본인의 커리어는 80-90년대를 점령했던 락계의 전설이었지만 본인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음악적 욕구에 따라 이미 만들었던 40여곡을 폐기 처분하고 다시 앨범을 새롭게 제작해 9집을 발매했다. 이 앨범의 수록곡 중 '''별'''이란 곡은 팬들에게 주는 곡 같은 인상을 주며 숨겨진 명곡이란 평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종종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린 세대를 보며 충격을 먹고, 심지어 본인 보고 김종서 닮았다고 하는 등의 인지도를 겪고 충격 먹었다고 하며, 자신만의 락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현실 인식에 따라 이 앨범 활동 이후 2007년 즈음부터 개그 컨셉을 바탕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후 신비주의 록커 컨셉을 버리고 다가가기 쉬운 대중적 연예인 컨셉을 택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많았으나 본인은 그런 비판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런식의 방법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다. 장르는 다르지만, 공일오비 객원가수로 출발해서 솔로가수로 자기 자리를 굳힌 윤종신의 경우 초기의 가녀린 미성을 잃고 이후 IMF 사태로 돈까지 잃은 뒤 본격적인 버라이어티 예능계로 뛰어들었고 이후 한 손에 예능, 다른 손에 노래(월간 윤종신)를 쥐고 있다. 부활 리더 김태원의 경우는 마약 후유증 등으로 인해 골골거리다가 남자의 자격 등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건강진단을 받아 건강회복에 도움을 얻기도 했고 예능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올려 부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백두산의 기타리스트 김도균 역시도 놀러와, 나 혼자 산다, 불타는 청춘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대중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90년대 전체는 그의 전성기중에 전성기라고 볼수 있는데, 그가 발매하는 음악마다 히트를 쳤고 가요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등 당시 한국에서의 록의 기준, 표준은 김종서 자체 또는 김종서라는 가수가 하는 음악 자체였다. 다만, 이전의 커리어와의 차이가 있다면 80년대 초고음을 난사하며 헤비메탈의 샤우팅 창법이 주를 이뤘다면, 90년대는 80년대 이후 다소 상한 목으로 절제되면서도 여전히 시원시원한 곡 위주로 활동한 것이다. 또한 김종서 본인이 끊임없이 시도했던 음악적 실험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플라스틱 신드롬'''이었다.
이로써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록 음악의 침체기에 파고다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록 보컬 리스트로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하며 자존심을 지켜낸 것이다. 임재범은 발라드로 전향했고, 유현상은 트로트로 성공했기에 대중적인 인지도나 성공면에서 김종서에 비할 수가 없다.
지금 세대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그는 '''신비주의''' 1세대 격인 연예인으로 음악에 비해 대중 매체에 많은 노출이 없었다. 그런 노출이 없이도 음원과 앨범을 냈다 하면 히트를 치니 그 위상을 짐작케 한다. 이때 우스갯소리로 흑역사지만 몰래카메라에도 출연했는데, 그 당시 몰래카메라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수 있다.
또한 서태지와의 친분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곡에 피처링을 해주었고 Rock’Roll Dance의 헤비믹스 버전에 나오는 ‘락엔롤~ 락엔롤 댄~~스~’와 '환상 속의 그대'[25]와 '하여가'[26]에서 들을 수 있는 특유의 고음 백보컬이 바로 김종서의 목소리. 또한 Free Style이라는 곡은 서태지와 김종서가 공동 작사, 공동작곡을 해서 김종서 4집과 서태지와 아이들 4집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지금도 서태지가 Free Style 라이브를 할 때는 종종 게스트로 나온다. 내일은 늦으리 '93에서는 '상실'이라는 곡을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마지막 히피인 블루스의 전설 한대수의 마지막 꿈이라는 곡에도 피처링을 해 줬다. 자신의 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시나위와 함께 공연을 했으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자신의 뿌리를 지켜나가기 위해 애썼다.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박완규김경호 같은 록 발라드 스타일의 보컬리스트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받은것에는 김종서의 공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팬이건 안티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 묘하게 이미지가 겹쳤던 김경호와 라이벌 플래그가 세워지기도 했는데[27], 이러한 비교는 사실 무리가 있다. 보컬 경력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커리어 자체도 이미 김경호가 데뷔할 땐 김종서가 음악활동을 시작한지 10년차에 접어든 시기였고 이미 김종서는 김경호와 같은 샤우팅 창법, 최고음을 난사하던 시기를 지나 과거에 비해 상한 보컬로 상당히 절제된 음역으로 자신의 음악을 실험하던 시기였다. 또한 음색도 김종서가 시원시원하고 날카로운 음색이라면 김경호는 좀 더 화려한 음을 구사하는 편이다. 또한 김경호처럼 고음역대의 지르는 가수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 가수가 초고음의 창법을 구사하는 김종서였다.[28] 스타일 면에서도 김경호의 장발 컨셉은 김종서를 의식했다고 보는게 맞다. 그러나 2001년 김종서가 머리를 자르고 부터는 지금까지 그 스타일을 고수해왔던 김경호가 본래 컨셉으로 알고 있는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지금보다는 다양한 장르가 히트를 공존했던 90년대에 수많은 록발라드 가수들이 생겨난것도 김종서의 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답없는 너로 시작해 겨울비 등의 메가 히트곡 뿐만 아니라 다시 난 사는거야, 에필로그, 영원, 절대사랑까지 이어지는 락 발라드 곡은 김종서 솔로 커리어에서 빠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사실상 록의 최초의 인기와 지금 대다수가 알고있는 한국형 록발라드 포맷의 시초가 김종서의 '''대답없는 너'''이다.
2000년대 초중반 부터는 예능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멀티 엔터테이너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음반 판매의 저조와 전성기가 저물다 보니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자신을 몰라보는 것에 충격을 받고 연예인으로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거라고 한다. 하지만 후배 록커들이나 록씬에서는 락커의 자존심을 버렸다며 비아냥이나 질타도 많이 받았고,[29] 그의 골수 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30]
록커라는 특수성을 떠나서라도 뮤지션으로서만 살아 온 그가 예능계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우려되었지만, 실제 방송을 타 보니 의외로 성격이 매우 유쾌하고 입담도 괜찮아서 예능계에서 상당히 먹히는 바람에, 여러 예능 프로에 출연하게 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31] 2008년에는 SBS 드라마 행복합니다에서 비중있는 조연을 맡으며 연기자로 도전해 괜찮은 연기력을 선보이긴 했으나 이후 다른 작품에 출연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단발성 출연으로 만족하는 듯하다.[32]
그러나 이러한 예능 출연이 2010년 나가수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이 예능으로 쏟아져 나오기 이전이라 너무 시기상조가 아니었나하는 견해가 있고, 장기적으로는 잦은 예능출연, 개그 컨셉이 커리어에 큰 데미지를 입힌게 아니냐는 우려스러운 주장도 다수 존재한다.
2009년 이후로는 예능 출연이 뜸하기 시작했고 다시 뮤지션의 길로 돌아간 듯하다.[33] 스타킹 출신의 김일병이라는 별명을 가진 짹킴과 REI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2010년 말에는 연기자로써 오랜 공백(?)을 깨고 김태원의 자전적 드라마인 락 ROCK 樂에 특별출연하기도 했다. 2014년 추석 특집 나는 가수다에 출연해 김광석의 '일어나'를 선곡해 좋은 평가를 이끌어 냈다.
다만 김종서는 1집 대답없는 너 시절에도 이미 예능에 곧잘 출연하곤 했었다. 00년대 중반부터가 아니라 90년대 초반에도 김종서를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40대에 접어든 후 나이 탓인지 호흡 조절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한 동안 침체기에 있다는 평을 들었으나, 성악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성량이 풍성해지고 저-중-고음 처리가 능숙해지며 '역시 김종서' 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싱데렐라라는 프로그램에선 체리 필터낭만 고양이를 원키로 소화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본인이 털어놓았는데 ,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 했기 때문에 라이브의 기복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심해졌고, 결국 벽에 부딪쳐 한동안 음악을 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우연히 성악인들이 노래를 하던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스토킹 수준으로 그들을 쫓아다니면서 발성법을 체득했다. 과거보단 시원하고 뻗는 음색은 찾기 힘들지만, 대신 안정적이고 훨씬 원숙해진 모습으로 대중에게 돌아왔다. 한 시대를 풍미한 뮤지션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며 자기 자리에 머물다 퇴보하는 경우가 허다한 세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 닦는 그의 모습은 후배 뮤지션들이 눈여겨야 할 부분이다.
최근에는 여러 OST 등을 커버한 영상을 유튜브를 활용해서 올리고 있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새가 되어가리'''는 평이 좋다.
최근엔 김태원박완규와 뭉쳐 부활 콘서트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0대 보컬 김동명이 합류한 이후 콘서트에 출연했던 보컬들은 정동하,박완규,이성욱,정단,그리고 김재기의 동생 김재희(가수). 사실상 음악을 접은 6집의 김기연과 이승철을 빼면 전부 출연한 셈. 부활 멤버들은 언젠가 그 모든 보컬들이 다 모여서 노래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최정상급의 실력을 지닌 굴지의 보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독 저평가되는 뮤지션 중 하난데, 보컬 능력이 최정점이던 80년대 90년대 초반일 때에는 지상파 방송보다는 주로 언더에서 활동 했었고, 전성기를 맞이한 92년부터는 솔로로 전향해 인지도를 쌓았으나 이미 나이로는 28이었고 보컬기량도 80년대에 비해 비교적 떨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실제로 목에 문제가 있어 의사가 95년 겨울부터는 노래부르지 말고 쉴 것을 강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속사와 김종서 본인은 스케줄을 강행했고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라이브에서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이후 김종서 본인의 목상태가 01년도 부터는 성량도 떨어지고 비음이 강해지고 음정도 불안해졌는데, 이 시기의 김종서의 모습을 전부라고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간혹 저평가하는 이들도 있고는 하다. 또한 이후 10년대에 나는 가수다로 성공적인 복귀를 해낸 가수들의 새로운 팬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을 추켜세우기 위해 비교하고 깎아내리고는 하지만 그들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당대 압도적인 커리어를 갖고 있다. '''밀리언셀러 앨범만 몇장에.. 자신이 쓴 곡으로 한 지상파 1위곡만 몇곡에.. 3옥타브를 꽉 채우는 진성고음 음역대에.. 최초 록의 대중화 기여에.. 스트레이트 장발[34] 패션의 선도자..?? 등'''
결과적으로 뮤지션으로서 따져본다면 김종서는 불세출의 보컬역량과 작사,작곡,편곡 능력면에서 80-90 년대에 가장 괄목할 가시적 성과를 냈으며, 당시 언론은 .'한국 록계의 최고'라고 지칭했다. 명실공히 진정한 록의 전설이란 칭호가 부끄럽지 않다. 오죽하면 김경호가 2집부터 명성을 얻었을때 김종서의 아성을 위협할 만한 보컬로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김종서는 연령면에서도 보컬면에서도 그 시기엔 전성기에서 내려오는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컬로서의 평가도 위대할진대 특히나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로서의 자질은 동일선상의 그 어느 록 보컬리스트 중에서도 김종서를 따라올 이가 없다. 록커로서가 아니라 싱어송라이터로서 다른 싱어송라이터들과 비교한다 해도,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밖에 없는 음악성[35]은 제하고 봐도) 보컬로서도 탑으로 평가받으면서 본인의 곡으로 음악프로 1위를 찍어본 히트곡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는 정말 별로 없다. 즉 당대 가창력, 예술성, 대중성의 황금 트라이앵글을 가졌던 아티스트. 90년대 이후 신비주의 컨셉과 00년대 이후 잦은 예능 출연, 그에 반해 과거 아티스트가 재부각되던 10년대에는 다시금 뮤지션으로 돌아간 행보로 인해 아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80년대부터 시작한 록보컬의 전설이다. 지금 세대에겐 덜 와닿겠지만 그저 짬밥으로 대우받는게 아니라 대중성은 물론이고 실력까지 모두 겸비한 대가수였다.

8. 음반



9. 불후의 명곡


2014년 2월 8일에 방송된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주현미편의 경연에 참가했다. 전설로도 섭외가 왔었는데 자신은 아직 전설로는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데다가[36], 더 뛸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수로 출연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네번째 순서로 나와 '눈물의 부르스'를 열창하여 무려 '''442점'''을 받으면서 종전 최고기록인 정동하의 439점을 경신하여 클래스를 증명했으나, 다음 가수로 나온 거미에게 '''단 3점 차이로''' 패했다.
본인도 기록 세운지 5분 만에 바로 깨졌다면서 아쉬워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주에도 출연했으며 이번에는 후아버지에게 밀리며 2주 연속 콩라인. 하지만 그 다음주인 2월 22일 정미조 편에서 '휘파람을 부세요'를 부르면서 세 번의 도전 끝에 드디어 우승을 거머쥐었고, 무대 외에도 관록있는 입담으로 대기실에서도 맹활약했다. 2014년 4월 12일, 불후의 명곡에서는 이글스Hotel California을 선곡했다. 그 무대의 '''신대철과 김태원의 트윈기타는 그야말로 레전드.''' 정말 다시는 안 나올 것만 같은 역대급 무대를 선보였다.
그 뒤 경연자가 아닌 '''전설'''로 출연했으며 2016년 2월 22일에 녹화를 한 뒤 2016년 3월 5일에 방영되었다.
'''부른 노래'''
'''전설'''
'''곡명'''
'''승패'''
'''점수'''
주현미
눈물의 부르스
1승 1패
442
박건호
무정부르스 (강승모)
1승 1패
398
'''정미조'''
'''휘파람을 부세요'''
'''1승'''
'''412'''
'''3.1절 특집'''
'''내 나라 내 겨래 (김민기) + 발해를 꿈꾸며 (서태지와 아이들) + 조국찬가'''
'''3승'''
'''423'''
내한가수 특집
Hotel California (이글즈)
1승 1패
411
3주년 특집
애모 (김수희)
1패

트로트 특집
허공 (조용필)
2승 1패
378
왕중왕전
창밖의 여자 (조용필)
1승 1패
414
조수미
Champions
1승 1패
391
기네스 특집
겟세마네 (Gethsemane)
1패

불후의 스타 7인, 서로를 노래하다
내 생애 봄날은()
2승 1패
421

10. 가족 관계


90년대는 신비주의에다가 인터넷이 활발하던 시기가 아니라 그의 정보가 많이 부족했었지만, 2000년대부터 미디어가 발달하고 김종서 본인도 예능프로 활동을 늘리며 이목도 더 집중되는 와중에 조금씩 그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발굴되기 시작했다. 특히 밴드를 탈퇴하고 솔로로 전환하여 활동할 당시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이제껏 가족들을 공개한 적이 없다. 다만 부인과 자녀들이 일본에서 학업을 하고 있어 기러기 아빠라는 점 등이 알려진 사실[37][38].부인 구정옥은 일반적으로 재일교포로 알려져있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혼혈 일본인으로 일본국적이었고 자녀들도 일본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대부분 보냈다 한다. 한국으로 와서 적응을 못해 일본에서 계속 생활하는게 낫겠다 싶어서 기러기 아빠생활을 하고 있다.

11. 여담


  • 이승환은 원래 록 음악으로 데뷔하려고 했으나 김종서라는 거물이 있었기에 록을 접고 발라드로 데뷔했다고 한다. 당시 이승환에게 김종서는 충격에 가까웠다고 한다. [39]. 이후 이승환은 4집의 프로그레시브 록 넘버 '너의 나라'를 만들며 김종서에게 피처링을 맡긴다.
  • 복면가왕 2차 경연에서 자나 깨나 산불조심이라는 가명으로 참여한 뒤[40] 15차 경연에서 판정단으로 나온 적이 있다.
  • 김경호의 롤모델로 알려져있다. 김경호 본인이 직접 한국 락계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으며 김종서의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한때 자신의 애완견 이름조차 종서였다고... 히든싱어 김종서 편에서 4라운드에서 65표를 못 넘으면 자신이 동생을 하겠다고 했다가 41표로 간신히 우승해 65표에 한참 못 미쳐서 경호 형이라고 했는데, 김경호가 민망해하는 걸 넘어 아예 황송해하는 모습을 보일 지경이었다.[41]
  • 잘 알려진 비틀즈의 광팬이다. 트위터에 링고 스타의 내한 소식에 기뻐하는 글을 올리기도.
  • 5집의 아름다운 구속, 6집의 희망가 7집의 러빙유는 비틀즈식의 방식으로 녹음한 곡들이다. 또한 5집, 6집 앨범은 김종서 앨범이 아니라 김종서 밴드의 앨범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멤버가 보컬 김종서, 드럼 김민기, 기타에 타미 킴.
  • 실버스푼이라는 밴드를 기획 프로듀서하였다. School이란 노래는 당시 초.중.고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되며 인기를 몰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는 잠잠하다. 사실상 해산. 현재 멤버들은 다른 뮤지션들의 서포트 멤버/세션 등을 하며 활동하고 있다.
  • 스펀지 123회 방송분에서 목소리로 와인 글래스 깨기 실험을 성공시킨 적이 있다. 글래스의 진동수와 같은 음을 내서 깨트리는 원리인데, 몇시간을 연습한 끝에 개발살. 참고로 서문탁 같은 락가수, 성악가, 명창들도 몇 시간 동안 했지만 깨지 못한 걸 말이다.
  • 이선희의 12집 'My life+best(01)'의 수록곡 '아마' 작곡. 소녀적인 감성이 잘 드러난다.
  • 의외로 손석희가 김종서의 굉장한 팬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 미국에 갔을 때 유일하게 김종서 3집 테이프 하나만 들고 가서 주구장창 들었다고, 예전 MBC 아나운서 국장시절에 후배 아나운서들에 따르면 회식자리에서 김종서 노래를 자주 부른다고 한다.
  • 한때 국수가게 사장인 적이 있었으며 인천 송도신도시에서 국수의 신이라는 국수집을 운영한 적이 있다.[42] 본인이 직접 면을 뽑고 육수를 내고 음악뿐만 아니라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사업수완은 좋지 않아 반년 만에 문을 닫아서 김종서 본인의 어두운 과거로 남게 되었다.
  • 스노보드와 올드 카 매니아로 알려져 있다.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경제야 놀자'에서 김종서가 소장한 연식이 꽤 되는 차(트라이엄프의 검정색 스포츠카) 한 대를 감정했는데 감정가가 700만 원이었다.
  • 전성기에 비하지는 못하지만 실제로 라이브를 들어 보면 정말 깜짝 놀라는 가수 중 한 명이다. 목 관리를 얼마나 잘 했는지 느껴지고 07년 부산 락 페스티벌 당시 본인의 히트곡 겨울비 한 곡 부르고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며 헤비메탈 음악으로 공연을 이어 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 유리상자 이세준, 홍경민(시즌2에서는 하차후 배기성), KBS 불후의명곡 PD와 음악이 없는 뮤직쇼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했었다.
  • 서태지와 아이들이 트로트계를 포함해서 가요계를 초토화시키던 당시 모든 가수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을 피해 앨범을 발표했다. 유일하게 김종서가 서태지와 아이들과 같은 날 음반을 발표했고 당시 음반 순위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1위, 김종서가 2위였다. 모든 여심이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몰렸을 때, 모든 남심은 김종서에게 몰렸다고..
  • 조용필과 관련해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조용필은 전성기 시절 담배를 하루 3갑을 피울 정도로 골초였는데, 조용필을 존경하던 김종서는 '아, 선배님처럼 노래를 잘 부르려면 담배를 더 많이 피워야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하루 1갑이던 흡연량을 3갑으로 늘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조용필이 금연했다는 사실을 듣고 자신도 금연했다고 한다.
  • 경기도지사 이재명 지키기 범국민대책위원회 1차 발기인에 이름을 올려 선거법 위반으로 2심에서 도지사직 상실형을 선고받은 이재명 지사에 대한 무죄 탄원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9년 6월 경 경기도 홍보대사에 위촉되기도 하였고 경기도가 주관하는 행사에 적극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것으로 보아 진보적 성격, 더 나아가 친 이재명계 성격인것으로 추정된다.
  •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꽤 오래전부터 앓아왔다고 하며 오페라스타에 출연할 당시에는 의사가 수술을 권유할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만 얼마나 휘었는지, 이후 수술을 진짜로 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수술을 권유할 정도면 꽤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 현재까지도 라이브에서 모든 곡을 원키로 부르는데 키를 낮춰서 부르면 팬들이 추억을 잃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철저한 자기관리로 많은 나이임에도 모든 노래를 원키로 부른다.
[1] 네이버 프로필은 172cm이지만, 2005년 드라마 하늘이시여에서 출연할 때 박예진과 비슷한 걸 감안한 키다. 참고로 박예진은 165cm.[2]동서울대학교[3] 다만 이 링크로 들어가면 싸이월드는 전혀 하지 않고, 트위터로 놀러오라는 문구가 뜬다.[4] 2019년 7월 9일 첫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5] 마그마조하문이 3옥타브의 음역대를 소화하긴 했지만, 김종서 등 후대 헤비메탈 씬의 보컬리스트들만큼 높은 음을 내진 않았다. 로니 제임스 디오처럼 중고음의 음역대를 유지하면서 3옥타브대 초반의 고음을 조금씩 섞는 식으로 노래했지(대표곡인 해야 역시 이런 구성이다), 김종서처럼 여성의 음역대를 가진 보컬은 당시에 없었다.[6] 그의 데뷔작인 시나위 2집을 들어보면 She's Gone, 18 and life에 버금가는 음역대의 곡들로 도배되어 있다. 특히 빈 하늘은 정말 극악의 고음들로만 구성된 무시무시한 난이도의 곡이다.[7] 똑같이 로버트 플랜트를 동경했던 임재범은 그의 미성을 엄청 부러워했다고 전해진다.[8] 심지어 잘 모르는 노래인데도 즉석에서 불렀다; 이 모습은 싱데렐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9] 김종서가 다니던 학교는 엄한 학교라 밴드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10] 당시에는 레드 제플린 등의 고음역대 곡들을 소화할 수 있는 보컬이 매우 드물었는데, 오디션에서 외국 하드록 음악을 너무 쉽게 소화하는 김종서의 모습을 보고 시나위 멤버들이 바로 합격 통보를 내렸다고 한다.[11] 하지만 신대철은 라디오에서 "실력 부족으로 해고됐다고 표현한 건 종서씨가 겸손하셔서 그런거고, 그냥 다들 젊을 때니까 의견이 안맞아서 헤어지게 된거였어요. 그리고 나중에 뜻이 맞는 때가 오면 다시 같이 하고 그랬죠."라고 밝혔다.[12] ‘그들이 날 다시 부를 때까지 연습했다’고 표현했을 정도.’[13] 언더그라운드 시절부터 김종서의 공연을 쫓아다니며 그를 선망했던 대표적인 보컬리스트가 바로 박완규다. 시나위 1집부터 4집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었을 정도로 김종서의 팬이라고 한다.[14] 여담으로 박완규도 같은 곡을 부르다 김태원에게 픽업 되었다.[15] 당시는 인디밴드라는 단어가 없었고 보통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렸다[16] 이근형은 나중에 김성헌을 받아 들여 작은하늘 1집 앨범을 발표.[17] 신대철은 한 인터뷰에서 ‘그 당시엔 김종서 씨처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 아예 없었어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8] 시나위 1집 당시 임재범이 탈퇴한 후 김종서가 바톤 터치하게 되었고, 김종서가 녹음한 시나위 1집이 LP판으로 있고 매우 레어한 소장품이라는 루머가 있으나 이병문이 녹음한 초판 1집이 와전된 소문인 듯 하다.[19] 당시 멤버가 보컬 김종서, 기타 이근형, 드럼 김민기, 베이스 박현준(훗날 김영진으로 교체).[20] 밴드 작은하늘의 기타리스트였으며 당시에도 엄청난 실력의 기타리스트였으나, 이후 실용음악쪽으로 선회하여 한국 굴지의 세션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작곡가로도 유명하다.[21] 보통 메탈 보컬 김종서의 최전성기를 이야기할때 이 때나 시나위 4집 때가 많이 이야기된다.[22] 좌로부터 오경환, 서태지, 김종서, 신대철[23]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데뷔 방송이자 굴욕을 줬던 방송다.[24] 1집 앨범 녹음이 모두 마친 다음 프로듀서인 강승호가 뭔가 부족한 느낌이라고 지적을 하자 본인도 이에 수긍하여 머릿속에 있는 멜로디를 우연히 조합하여 15분 만에 작곡한 곡이다. 그리하여 1집에 맨 마지막으로 녹음된 곡이다.[25] ‘환상속에~ 그대가 있다~’ 부분에서 나오는 ‘하하하아~ 부분’[26] 예이예이예이 야이야[27] 실제로 김경호가 남부러울 것 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당시에 듣던 말 중 제일 달콤했던 말이 김종서와 비견된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비교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계신 분이다, 그런 분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스스로 건방져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며 존경심을 표했다.[28] 실제로 김경호는 공연에서 김종서 시절 시나위의 곡인 "Farewell To Love"을 자주 불렀으며, 애견의 이름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김종서라고 지었다고 한다.[29] 이게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게 가수들이 예능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던 때다. 특히 신비주의가 관건인 록 장르의 뮤지션으로서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었다.[30] 박완규는 시나위 1~4집 앨범을 모두 버렸다고 한다. [31] 10~20대 젊은 층들은 김종서의 뮤지션으로서의 위상을 잘 알지는 못해도, TV에서 재밌는 아저씨로 잘 알고 있다.[32] 재밌게도 이 드라마에 같이 나왔던 이가 바로 '''우리의 평창댁'''. 그래서 서태지의 버뮤다 트라이앵글 MV에서 주연배우 선정 때 직접 평창댁을 추천한 것. (그 당시 경쟁자가 서우였단다.) [33] 이때부터 김태원, 유현상을 비롯한 락 뮤지션들의 예능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어찌보면 락커 출신 멀티 엔터테이너계열에서는 선구자인 셈.[34] 김종서 이전엔 록커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더라도 생머리가 아니라 퍼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김종서 본인도 커리어 초반엔 퍼머를 했었다.[35] 평론가들이 매기는 객관적 음악성으로 비교해도 김종서와 김경호 박완규는 급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김경호나 박완규는 음악적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은 적이 딱히 없다. 박완규 부활 시기는 제외하고[36] 사실 김종서의 짬과 커리어면 당연히 전설로 나오고도 남아돈다. 그냥 겸손의 표현.[37] 사실 그 지역 재일교포나 일본 거주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다. 자세한 지역이나 정보는 생략하나, 딱히 숨기거나 한 건 아니었고 관심을 못받았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김종서가 기러기 아빠라는걸 그동안 수차례 언급했으나, 항상 당시에만 마치 숨겨진 사생활이 밝혀진것처럼 잠깐 화제가 되고 잊혀진다(...) 그리고 다시 밝히고 잊혀지고의 반복. [38] 데뷔 초 '대답없는 너'로 한참 잘나가고 있을 때 연예정보프로그램에서 '''첫 아이를 낳은''' 김종서(물론 김종서가 출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득남의 의미이다.)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인터뷰한 적도 있다. 당연히 총각일줄 알았던 여성팬들은 방송을 보며 경악했다. 보도 내용은 '''충격! 김종서 알고보니 유부남!!''' [39] 이승환과 김종서는 파고다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특히 그 시절에는 이승환도 록 밴드 활동을 했기에 미묘한 경쟁의식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이 좀 사는 편이었던 이승환은 당시 아마추어에서는 드물게도 집에 연습실과 녹음시설이 갖추어진 편이라 같이 녹음을 해본 적도 있다 한다.[40] 처음부터 자신을 너무 숨기려 하다 보니 본 실력이 거의 나오지 않았던 게 패인으로 보인다.[41] 히든싱어 김종서 편에서 1라운드에서 김경호가 4번은 절대 김종서가 아닐 거라고 말했는데 4번에서 김종서가 나오자 김경호가 싹싹 빌고 김종서가 저도 강아지 한 마리 살거에요. 김경호라고 이름 지을거에요.라고 말했다.[42] 강원도 장칼국수집에서 먹은 국수 맛에 반해 창업했다고 수요미식회에서 후일담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