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소드 검술

 


1. 개요
2. 역사
2.1. 유파와 계통
2.1.2. 이탈리아의 피오레
2.2. 사회인식과 대우
2.3. 실전검술의 쇠퇴와 스포츠화
2.4. 현대의 복원 시도
3. 관련 항목


1. 개요


'''롱소드 검술'''(Langschwertfechten)은 양손으로 쥐는 장검인 롱소드를 사용하는 검술을 가리킨다.

2. 역사


양손으로 쥐는 롱소드는 1200년부터 있었지만, 롱소드 '검술'은 14세기에 독일 검객 요하네스 리히테나워가 동유럽의 각국을 여행하면서 익힌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1][2]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 피오레 디 리베리에 의해 롱소드 검술이 정립되었고, 리베리의 영향을 특히 강하게 받은 마스터로는 필리포 바디가 있다. 그 외 사이드 소드 전문으로 알려진 볼로냐의 다르디 학파 마스터들도 롱소드 기예를 일단 관련 서적에 기록해놓기는 했다.
영국에도 롱소드 검술이 존재하고, 영국만의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림 해설이 없어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1. 유파와 계통



2.1.1. 독일의 리히테나워


현재 독일의 리히테나워 유파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는 다른 유파도 많아 리히테나워 유파의 한코 되브링어(되브링엔의 사제 한스)는 다른 유파의 검술을 비난한 바 있다.[3] 따로 비난을 할 정도로 그렇게 싸우는 검객들이 많았겠지만, 다른 계열 검객들이 남긴 문헌은 현재 남아있는 전체 문헌의 20% 밖에 안 되므로 제대로 복원할 수 없는 실정이다.
추세가 그랬던 것인지 요하네스 리히테나워도 따로 책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그는 검술을 배운 사람은 이해할 수 있는 구결(Zedel)을 말로서 남겼고, 이것을 한코 되브링어가 해석을 덧붙여서 1389년에 문서로 기록하였다.[4] 이후 본격적으로 리히테나워 검술서들이 간행되었다.
리히테나워 검술은 15세기까지 단일 계통으로 전수되다가[5] 16세기부터는 성 마르코 형제단과 피더페히터 등 두 검술 길드를 통해 2개의 계통으로 나뉘었다. 물론 분파가 되어 둘은 용어나 설명 방식에서 차이를 두었지만 검술의 근본 원리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리히테나워 검술은 주로 독일 남부와 동유럽에서 발전했다. 15세기 검술서는 독일어일 경우 남독일 사투리로 적혀 있으며, 피오레 디 리베리의 스승인 요한의 출생지 슈바벤도 남독일이다. 16세기 리히테나워 검술 전통의 양대 산맥을 이룬 성 마르코 형제단과 피더페히터의 경우, 피더페히터는 체코 프라하에서 창설되었다.

2.1.2. 이탈리아의 피오레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 피오레 디 리베리에 의해 롱소드 검술이 정립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스승을 찾아다니며 검술을 배웠고 그중 독일인 스승인 슈바벤 사람 요한에게 리히테나워 검리를 전수받았었다. [6] 피오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마스터로는 필리포 바디가 있으며 그 또한 검술서를 출판하였다. 그 외 다르디 학파 사람들인 아킬레 마로쪼와 안토니오 만촐리노도 롱소드를 다루기는 다루었으나 이들의 주 골자는 '''사이드 소드'''였다.
이탈리아 롱소드 검술은 독일식과 똑같은 것을 이름만 다르게 부르거나, 자세나 상태를 일컫는 명칭이 더 많아 다른 검술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검술이었다. 단지 마스터의 기호나 취향에 따라 가르치는 방식이 각기 달랐을 뿐이다. 애초에 이탈리아에 롱소드 검술을 전파한 피오레 디 리베리의 스승 중 한 명 요한[7]이 독일인이었다. 사실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롱소드 검술들 모두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는 없고,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스타일만 조금 다른 형태였다 [8] [9]
이는 국경이 오랫동안 단절되어 각국의 문화적 차이가 뚜렷한 동북아시아와는 달리, 유럽은 각국이 모두 옛 로마의 후손이라 여겼고, 같은 기독교 문화권이라 국경을 넘어 많이 교류를 나눴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 영국 등에 건너가 검술 도장을 차리는 등 외국인이 다른 나라로 가서 활동하는 것이 매우 흔했다. [10]

2.2. 사회인식과 대우


검술 학교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어떠하였는지 하나만 예로 들자면, 영국에서는 일종의 '''깡패 양성소'''로 취급되었다. 굳이 영국만이 아니더라도 몇몇 도시에서는 포고령을 내려 검술을 가르칠 수 없게 하였던 적도 있는데, 이유는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만드는 <사악한 기예>를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당시 삽화에서도 검술 학교는 창녀촌, 목욕탕과 함께 그려졌는데, 이는 퇴폐의 온상으로 여겨졌던 목욕탕이나 창녀촌과 똑같이 취급되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독일에서만은 검술가들이 제빵사, 회계사, 출판공 등 전문 기술을 갖춘 장인 그룹과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당시 장인 그룹들이 길드를 형성하고 독점권을 얻은 것과 같이 도시에서 검술 교습에 대한 독점권을 받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사회적인 대접도 보다 나은 편이었다.
대개 경제적으로 성공한 자들이 책을 내고 지금까지 이름을 남겼고, 그들보다 훨씬 많은 마스터들이 배를 곪으며 객사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기도 했다. 당시는 자기의 도장을 열고 도시에 정착해서 검술을 가르치는 자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언제까지 일해 준다는 계약을 맺고 기사나 시민,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계약이 연장되지 않으면 떠나야 했다. 명성을 떨치거나 잘 알려진 마스터들은 사정이 나았지만 그렇지 못한 마스터들은 마땅한 일자리도 찾지 못한 채 구걸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6세기에는 이런 경향이 더 심해져서 검술 수요는 사이드 소드, 레이피어가 다 가져가 버리고, 롱소드 검술은 구시대의 유산으로 여겨져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물론 레이피어도 인식은 좋지 않아서 영국에선 레이피어버클러를 차고 돌아다니는 불한당들을 스워시버클러(swashbuckler)라고불렀는데, 움직일 때 버클러가 칼과 부딪혀 나는 쇳소리에서 유래된 말이다.

2.3. 실전검술의 쇠퇴와 스포츠화


16세기가 되자 인구가 밀집된 도시가 늘어나면서 좁은 도심에서는 롱소드같은 큰 무기를 호신용으로 사용하기 힘들어졌고[11], 또 전쟁터에서는 칼들고 설치려 하다가는 총맞아 죽기 십상이었으므로 파이크화승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방진을 형성하여 싸우는 일이 많아져 롱소드를 휘두를 일이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에 따라 더 작고 가벼운 사이드 소드가 주력 도검이 되고 인기를 얻으면서 롱소드는 찬밥신세가 된다.
본산인 독일에서도 처지는 비슷했으나 그래도 워낙 롱소드 전통이 확고해서 실전검술로는 배우지 않더라도 <모든 무기술의 기본>으로써 반드시 롱소드를 교육시켰다. 그러나 찌르기를 금지하는 등 실전검술이 아닌 도장검술로써 안전에 보다 치중하는 변화를 보이게 된다. 17세기에 들어서면 독일에서조차 롱소드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다만 18세기에도 독일의 검술학교를 묘사한 판화에서는 롱소드 검술과 메서가 스포츠화된 종목인 두삭(Dussack)이 보인다. 물론 그 그림에서도 몇몇을 제외하면 절대다수가 스몰소드와 같은 근대 검술을 훈련하고 있으며, 롱소드는 17세기 말에는 완전히 스포츠화되어 날이 아닌 평면으로 때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16세기의 주스팅 토너먼트 대회에서도 롱소드 검술 대회가 열렸으며, 여기에서는 방어구를 착용하고 승부를 겨루는 방식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특유의 룰이 존재하여 실제 검술이 활약하기는 힘들었다. 손과 하체 타격은 금지, 상체와 머리만 타격할 수 있으며 찌르기는 금지되었고 칼날로 쳐서도 안되고 평평한 옆면으로만 때려야 했다. 가드나 퍼멀로 타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런 안전 룰이 존재했고, 왕과 도전자 룰과 같은 게임을 흥미롭게 만들기 위한 룰도 있었다. 왕과 도전자 룰이란 챔피언이 왕이고 도전자들이 왕을 상대하는데, 왕은 기회가 2번 있어서 도전자에게 한 대 맞더라도 바로 직후에 도전자를 맞추기만 하면 왕이 이긴 것으로 간주되는 룰이었다. 이런 토너먼트만 찾아다니며 참가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검객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검술 마스터들은 토너먼트가 인위적인 룰로 진행되는 게임이라는 이유로 토너먼트는 검술이 아니라고 했으며, 실제로 검술 길드끼리의 친선 대결에서는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고 평소 훈련하던 방식으로 진행했다.
16세기 들어 롱소드 훈련에서 찌르기는 안전 문제로 금지되었으며, 법률에 의해 연습중의 찌르기는 살인미수, 사적인 결투에서는 일종의 특수폭행으로 처벌받았다. 반대로 레이피어나 사이드소드, 봉으로는 찔렀다고 문제삼지는 않았다.
검술 도장을 가진 검객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광장이나 적당한 빈터, 혹은 야외에서 지도가 이루어졌다.
당시에도 도장 검술(Schulfechten)과 실전 검술(Ernstfechten)의 차이와 인식이 있었다. 슐펙텐은 영어로 스쿨 파이팅에 대응되는 단어이며, 검술학교에서 유술기를 비롯한 여러 기술을 다칠 정도로 거는 것이나 찌르기, 강한 타격을 금지하여 다양한 룰을 이용하여 안전을 우선시하여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에른스트펙텐에서 Ernst는 실전에서의 진지함을 뜻하는 단어로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허용된 살인 실전을 의미했다. 이러한 인식이 등장한 것은 안전상의 이유로 검술학교에서는 진검이나 진검 타입의 블런트를 사용하지 않고 피더슈비어트 만을 활용하여 연습하고 다양한 안전 규정이 있었던 탓에 실전과는 어느정도 괴리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15세기에는 찌르기까지 포함해서 연습하였기에 그래도 실전 검술에 더욱 가까웠지만 16세기에는 찌르기를 일체 금지하고 봉인함으로써 일부 기술들의 변질이 이루어졌으며[12] 이로 인해 양자의 인식의 간격이 더 벌어진 감이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유행한 다르디 학파에서도, 비록 사이드소드 검술이기는 하되 도장에서는 손을 때리지 않고 몸만 때리며, 모든 자세와 기술을 다 써서 연습하지만 시합이나 실전에서는 손부터 먼저 때리고, 오른발만 앞에 내민 상태에서 싸우는 경향이 컸다고 하며 이에 따라 다르디 학파의 마스터들도 이 두가지를 분류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2.4. 현대의 복원 시도


현재 서양 검술계의 중심이다. 과거 독일을 비롯한 유럽각국에서 롱소드를 기본무기로 여겼기 때문에 자료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13] 그 덕에 세계 각국에 많은 강사들이 있다.
다른 무술을 하다온 경우나 운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접근해오는 일이 많은데 비해, 처음부터 롱소드로 시작하여 실력을 쌓은 경우가 드물어서, 메뉴얼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룹이 적다.[14] 게다가 300년 전에 계보가 끊겼기 때문에 누구를 딱히 정통이라고 하거나 맞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인터넷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그룹끼리 키보드파이팅이 벌어지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현재는 옛날처럼 방어구 없이 피더슈비어트만으로 훈련하는 곳이 거의 없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기술 연습을 하는 곳도 많으나, 스파링까지 마스크를 쓰지 않는 옛 방식을 고수하는 곳은 서양 검술 단체 중에서도 ARMA와 그 중에서도 존 클레멘츠가 운영하는 IronDoor Studio와 한국의 서울 스터디그룹 정도 뿐이고, 대개 안전 문제 때문에 보호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한다. 피더슈비어트로도 충분히 피를 볼 수 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조치.
대회나 토너먼트에서도 방호구를 철저하게 갖추고 피더슈비어트를 사용하여 대결한다. 대회로는 자본을 갖춘 스폰서가 후원하고 실력자들이 참여하는 미국의 Longpoint, 유럽의 Swordfish 등이 유명하다. 그런데 스폰서가 붙은 시합양상에 대한 의견도 가지각색이다.
부정적인 측에서는 보호구가 잘 갖춰져 있고, 먼저 쳐야 득점이 인정되므로, 방어나 보호에는 신경쓰지 않고 어떻게서든 더 빨리 공격을 가하려고만 하여 15세기 검술가들이 추구한 방향과 맞지 않은 양상을 보인다며 불만을 나타낸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에서는 현재 롱소드 검술은 많은 사람들이 부상이나 사망의 위험 없이 안전하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레져 스포츠의 목적이 강하고, 시합 양상도 현재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발전된 것인데, 왜 굳이 살인이 목적이었던 과거 방식에 매달려야 하냐며 반발한다.


토너먼트 대회 SWASH 2013 하이라이트 영상


ARMA-korea 팀 올드 스타일 스파링
민족주의적인 관점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다. 이탈리아인은 피오레 계열 매뉴얼만 보면서 독일식 개념이나 기술은 절대로 써서는 안된다는 식. 독일인들 중에서도 비슷한 무리가 있다. 민족주의적인 <우리나라 검술>이라는 관점에서 나오는 행동이나 근대시대까지 유럽에는 민족주의가 없었고 자유롭게 교류와 전파가 이루어졌으며 본질적으로 같은 검술을 포커스만 좀 달리 보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검술 성취에서는 마이너스가 된다. 여기에 폴란드나 체코 같은 동유럽 국가에선 리히테나워가 동유럽에서 검술을 배웠고 피더 폰 단직 같은 마스터가 폴란드 영토인 단치히 출신이기도 하며, 16세기 양대 길드 중 하나인 페더피히터가 체코 프라하에서 창설되기도 했으니, 자연히 자기네(폴란드, 체코 등) 검술 아니냐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3. 관련 항목



[1] 가장 오래된 것이 1389년 되브링엔의 사제 한스(Hanko Doebringer)가 작성한 문서번호 MS 3227a이며, 이 문서 이후로 리히테나워 검술을 기록한 문서들과 마스터들이 확인된다. 리히테나워류 검술을 전수받은 마스터들이 게젤샤프트 리히테나워(리히테나워 협회)를 설립하여 일종의 길드를 형성하고 "공인된" 마스터들의 이름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나, 다양한 경로로 리히테나워류 롱소드 검술이 전파되었다. 길드에 속하지 않는 계통의 검객으로는 1570년에 검술서를 출판한 요아힘 마이어(Joachim Meyer)가 대표적이다.[2] 당시 리히테나워에서 가르친 것은 검술뿐만 아니라 검을 사용하는 유술, 갑주 전투술, 마상검술, 캄프링겐, 단검술을 포함한 종합무술이었다. 이는 당시에 특정 무기의 사용법뿐만 아니라 모든 싸움 방법을 다 가르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종종 리히테나워 마스터들의 책에서는 리히테나워가 아닌 다른 중세 검술인 소드&버클러 검술이나 메서 검술까지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 방법을 모든 싸움의 방법을 다 다룬다는 뜻으로 '''전투의 예술(Kunst des Fechten)'''이라고 불렀다. 이는 당시에 『Matial arts』라는 단어가 없어, ∼전투술, 전투의 예술, 방어의 예술, 방어의 과학으로 부르는 게 흔했기 때문이다.[3] 예컨데 한코는 먼 거리를 유지하고 길게 뛰어들어가거나 상대의 무기를 막거나, 의미없이 여러 번 휘둘러대거나 속임수 공격을 쓰는 검객들을 Leychmesiter(시체사범, 송장사범)라고 일컬었다.[4] 문서의 작성 시기와 요하네스 리히테나워의 생존 시기에 관하여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한코 되브링어가 자신의 책 MS 3227에서 리히테나워를 언급하면서 당시 고인에게 붙이던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쓰여지던 시점에는 리히테나워가 생존해 있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며, 1960년대의 연구자인 힐스도 되브링어 집필 당시 리히테나워가 생존해 있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었다. 이로 인하여 요하네스 리히테나워는 14세기에 활약한 가장 오래된 롱소드 검술가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HEMA 계통의 유명한 연구자인 크리스티안 토블러는 MS 3227이 제작연도가 1389년으로 추정된 것은 책에 1390년부터의 종교 축일 달력이 실려 있기 때문이었지만, 단지 종교적 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과거의 달력이 실린 것일 수도 있고, 또한 책의 구조가 여러 사람들의 진술을 한데 모은 형태이므로 한사람이 쓴게 아니라 이름모를 다른 사람에 의해 집필된 문서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MS 3227에는 "니콜라스 폴, 1494"라는 낙서를 근거로 리히테나워가 15세기 인물일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래서 중세-르네상스 검술 위키피디아인 Wiktenaur에서는 한코 되브링어와 요하네스 리히테나워를 15세기 마스터로 재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반론도 존재하는데, MS 3227을 제외하고 리히테나워 구결(Zedel)이 실린 가장 오래된 문서가 1410년대에 작성되었으므로 리히테나워 검술이 어느 정도 퍼지려면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는 기간이 있어야 함을 감안해야 하며, 15세기에는 비밀스럽게 전수된다는 구결 자체가 상당히 대중적으로 퍼져있던 것을 감안하면 리히테나워의 사망 년도 자체를 아무리 늦게 잡아도 1420년 이전으로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요하네스 리히테나워가 14세기 마스터라는 것은 여전히 정설로 취급되고 있다.[5] 처음으로 문서를 남긴 한코 되브링어의 내용과 같이 5가지의 기본베기, 4가지의 자세와 4가지 버셋젠 등 개념과 가르치는 방식등이 동일[6] 자신을 가르친 스승의 이름을 자신의 책인 전투의 꽃에 기록하여 알 수 있다.[7] 독일계의 대종사인 요하네스 리히테나워일 가능성이 높다고 유력하게 추정된다[8] 예를 들어, 바인딩과 5가지 베기는 독일계 서적에서 조금 더 집중적으로 다루며, 칼싸움 중 쓸 수 있는 유술들에 대해서는 피오레가 조금 더 자세히 취급하였다.[9] 이후 근대 유럽 검술은 용어까지 통일되어 각국이 같은 검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10] 이탈리아인으로 영국에서 도장을 차린 살바토레 파브리스(Salvator Fabris)나, 네덜란드 사람이면서 프랑스에서 활동한 티바울트(Gérard Thibault d'Anvers)등이 있다.[11] 어느 정도였냐면 현대 한국의 다세대주택 사이의 좁은 골목이 당시에는 평범한 수준의 길이었다. 이런 곳에서 1.2m가 넘어가는 롱소드를 자유롭게 휘두를 수는 없었다.[12] Kurtzhau라는 기법이 그러하다. 15세기의 안드레 파렌하잇 매뉴얼에서는 상대 검 아래쪽으로 돌려서 바이코니오로 끝나는 찌르기이지만, 16세기 후반의 요아힘 마이어 매뉴얼에서는 다 똑같으면서도 찌르기가 아니라 더 높이 칼끝을 들어서 상대의 검을 가드로 받아내면서 베기로 끝낸다. 실제로 해보면 안드레 파렌하잇의 기술은 자연스럽지만 요아힘 마이어의 쿠르츠하우는 상당히 부자연스럽다는 평.[13] 15세기에 작성된 고문서 교본들은 대충 쓰여있거나, 근대 검술서들처럼 체계적이지 못해 길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가장 상세하게 쓰인 요아힘 마이어의 검술서(1570)를 중심으로 다른 서적의 내용도 서서히 밝혀졌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14] 매뉴얼대로 하는 그룹 중에서는 동유럽쪽 그룹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 그룹이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