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1. 개요
2. 상세
2.1. 역사
2.2. 교육
2.3. 검술에 대한 오해와 진실
2.3.1. 검술은 모든 무기술의 기본?
2.3.2. 검술과 검의 사회적 위치
2.3.3. 검술은 정말로 배우기 어려운가?
2.4. 스포츠 경기와 진검대결의 차이점
2.5. 영화, 드라마의 검술과의 차이점
3. 관련 문서


1. 개요



검을 쓰는 방법과 기술등을 포함한 무술 및 무기술

2. 상세



2.1. 역사


검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자주 쓰인 무기이기 때문에 정확한 기원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검의 경우 구석기시대부터 만들어 썼으니, 이때부터 단검술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만 있다. 청동기 초기부터 이미 구리나 청동으로 만든 금속제 단검이 있었으며, 구리와 주석의 배합 비율의 조절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중국 진(秦)나라에서는 120cm에 달하는 양손으로 사용하는 청동검까지 만들어졌다. 또한 일리아드 등에서도 영웅들이 특유의 요령과 기술로 검을 사용하는 묘사가 존재하므로, 단순히 휘둘러 베는 것을 떠나 꽤 체계적이었다고 짐작된다.
검술에 대한 묘사는 여러 매체에서 꾸준히 찾아볼 수 있다. 로마시대에 쓰여진 병법서인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논고De Re Militari》에서는 고대 로마군의 글라디우스 검술 훈련 시스템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롤랑의 노래>를 비롯한 여러 중세 무훈시나 북구의 영웅담인 Saga 등에서도 상대의 무기를 막고 공격하거나 속임수를 걸고 공격하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검술 묘사가 다수 있다. 이것만으로 정확하게 파악은 힘들지만, 꽤 정교하고 체계적인 검술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각 문화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검술의 체계가 일부나마 문서로 남거나 검술을 교습하는 무술학교와 같은 시스템이 등장한 것은 13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는 소드&버클러술을 기록한 유럽의 I.33문서(1280)가 존재하고, 일본에서는 넨류(念流)가 이 시대에 창시되었다고 주장한다. 본격적으로 무술 교습이 활기를 띠며 문서가 많이 남기 시작한 시점은 15세기부터인데, 서양 검술의 수많은 문서가 이 시대부터 다량 등장하기 시작하고, 일본에서는 논란의 여지 없이 최초의 유파로 인정받는 가토리신토류가 창시(1447)된 시점이기도 하다. 16세기에 들어서는 돈을 받고 검술을 비롯한 무술을 교습하는 fechtschule, 마치도죠(町道場)와 같은 무술학교 시스템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 시대에는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크게 대중화되었다. 검술의 수준도 이 시대에 정점을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이후로 검술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근대가 오래도록 지속된 비유럽권에서는 비교적 덜하거나 그렇지 않지만, 유럽권에서는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화승총의 등장을 비롯한 무기와 전술의 변화로 칼싸움의 비중이 줄어들어 더 이상 힘들여 검술을 배워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특히 변화무쌍한 운용으로 무술적 가치가 큰 롱소드와 같은 양손으로 사용하는 도검류가 퇴출된 것 또한 검술의 퇴보에 큰 역할을 했다. 18세기가 되면 그러한 검술의 단순화를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사브르 검술항목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동양권의 경우는 화기로 대표되는 신식무장의 보급이 늦어져 전반적으로 냉병기 위주의 구식 전술이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었고, 사회적 요인[1]으로 의해 검술의 쇠퇴가 상당히 늦추어진 감이 있었다. 일찍부터 화기를 운용해온 대표적인 지역인 중국은 전통적인 숭문억무 사상에, 후대로 갈수록 병기분야에서의 기술이 정체되면서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여전히 구식화기와 냉병기를 운용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2] 인도 같은 경우는 대포와 총을 운용하고 자체적으로 플레이트 아머를 생산할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업화의 부족과 경직된 사회구조를 비롯한 내부적인 요인으로 갑옷과 방패, 칼이라는 전근대적인 무기의 비율도 만만치 않았고,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곳은 전술과 무기수준의 극심한 낙후 이외에도 부족적 생활상의 유지와 험악한 치안으로 인해 칼리 아르니스라는 다양한 날붙이와 봉을 사용하는 무술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의 경우도 전술과 무기수준의 낙후가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며 거기에 더해 지배계급인 무사의 정장으로 칼 두 자루를 반드시 착용하도록 하였으며 무술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출세하기도 좋았던 관계로 유파라 불리는 무술학교 시스템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며, 근대화 이후에도 국민 정서로 인해 그러한 사회상의 일부가 살아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권 국가들도 근대화를 거치며 검술이 급격히 소멸하거나 입지를 잃었고, 유럽과 동일한 퇴보의 길을 걷거나 무형문화재화되어 개념화되는 길을 걸었다. 동양권에 유독 검술이 많이 살아남은 것은 전근대적 군사문화가 백여 년 전까지 유지되던 것에 기인하며, 달리 실용성이 있어서는 아니다. 현대에 있어서는 일종의 전통 문화의 향유라는 개념이 검술 수련의 이유 중 하나가 되어 있으며, 상당한 검술 시스템이 이러한 수요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3] 그러한 이유로 유럽에서는 과거에 소멸했던 중세 검술이나 르네상스 검술 등의 복원이 진행 중이다.

2.2. 교육


검술은 주로 다음과 같은 교습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 군대의 군사훈련. 군대에서 가르치는 검술은 기본적으로 병사들을 빨리 훈련시켜 바로 전쟁터로 내보내기 위한 것으로, 기초적인 것만 가르친다. 무기의 기본 사용법, 실전에서의 몇 가지 사례를 간략화하여 숙달시키도록 하는 것 정도로 끝난다. 《De Re Militari》에서 등장하는 훈련 내용이 그렇고, 군도의 조법이라든가가 그러한 경우이며 세이버 검술 시스템 등도 병사용으로 간략화하여 가르친 바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내용까지 폄훼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훈련 시스템은 뛰어난 실력의 고수들이나 고참 군인들이 연구하여 구성하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 혈연 관계의 무인 집단(가문, 문중)에서 구성원들에게만 가르치는 것. 가문, 문중에서 가족 구성원, 혹은 그에 해당되는 수준의 사람에게만 가르치는 경우는 전근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경우인데, 검술 시스템의 노하우는 얻기 어려운 반면 기술이 노출되면 곧바로 대응책이 연구되어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어 버리고, 결과적으로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게 되며 타인들도 비슷한 수준에 올라설 수 있게 되어 버리므로 의미를 상실하게 되므로 폐쇄적으로 기술의 유출을 경계하며 믿을 수 있는 자들에게만 가르치는 것이다. 현대 군대에서 교범이나 미사일, 대공포의 위치나 발사 코드 등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양가창법이라든가 태극권의 경우 진식, 손식 등 전수되는 가문의 성씨를 따서 구분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 도제 관계의 무인 집단(문파, 길드)에서 구성원들에게만 가르치는 것. 문파란 일본이나 중국 무술의 무술 연구, 전수 집단이다. 길드는 중세시대의 동종업자들의 조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업 역사 쪽에서 전 세계적으로 존재했지만 검술에도 길드가 있었다. 이러한 길드는 자신들의 검술을 보존하고 이것을 수단으로 삼아 희망자들에게 검술을 가르쳤으며, 유명한 검술 길드인 마르크스브뤼더(Marxbrüder)나 페더페히터(Federfechter) 같은 경우는 독자적인 검술과 높은 수준을 바탕으로 도시나 왕에게 인가장을 받아 정식으로 공인되어 권위를 가지기도 했다. 검술 교실이 속속 대중화되던 16세기에도 검술 교실을 여는 데 철저한 실력 검증을 하여 그렇지 않으면 길드의 이름으로 교실을 열 수 없게 하는 등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 일본의 고류 유파들도 길드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물론 별로 실력도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박 겉핥기로만 배워 도장을 여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며, 17세기의 이탈리아 검술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당시 이탈리아 검술은 실전성으로 명성이 높아 유럽 여기저기에 도장이 생기는 등 세가 대단했다. 영국의 마스터 조지 실버는 영국에 들어온 레이피어와 이탈리아 검술을 아주 싫어했으며 여러 차례 현피를 떠서 박살을 내기도 했다. 그의 이런 정서는 그러한 세태에 대한 반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현대도 다를 바 없다.
  • 오픈된 학원에서 돈을 내고 배우는 것. 16세기 유럽에선 기존의 가문과 길드, 군사기관에서 양성된 무인들이 일반인들을 상대로 호신용 검술을 가르쳤다. 많은 사람에게 최대한 많은 돈을 받으며 가르쳤기 때문에 교육의 질은 떨어졌다. 또한 이 시기는 정통 무관 귀족들의 권력이 상인 출신 재력가들에게로 서서히 옮겨가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무인과 검술에 대한 인식도 좋지는 못했다. 검과 방패를 들고다니는 스워시버클러의 다른 뜻이 건달패였던 시기다.
비단 검술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술에도 적용되는 항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3. 검술에 대한 오해와 진실



2.3.1. 검술은 모든 무기술의 기본?


검술이 다른 무기들에 필요한 움직임과 운용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검술의 원리는 모든 무술과 통하며, 검술을 배워두면 그 이치에 따라 다른 무기들도 쉽게 쓸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가령 창의 경우 찌르기와 내려치기 정도가 기본 용법이고, 폴암의 경우 찌르기와 베기, 종류에 따라 걸기나 찍기 정도가 가능하며, 무기가 크고 거대하여 자세나 궤도에 제한이 있다. 그러나 검은 크기가 적당하고 찌르기와 베기가 모두 가능하며 검술을 통해 지렛대의 원리와 카운터, 기본적인 몸의 움직임을 배울 수 있다. 즉, 검이라는 무기의 융통성 때문에 훨씬 많은 움직임과 운용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에, 창이나 폴암을 먼저 배운다면 배우지 못할 여러 요소들을 다 배우게 되므로 검술이 모든 무기술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중세 이후 유럽이나 일본에서 나타난다. 중세 유럽의 비리공무원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가 수집한 장서에는 낫술, 몽둥이술이 나오는데, 중세 롱소드 검술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봉도 롱소드처럼 다루고, 쯔바이핸더 같은 대형 무기도 롱소드처럼 다루는 것이라고 하며 달리 다른 검술서가 없다.[4] 또한 한손으로 사용하는 아밍 소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롱소드 검술과 동일한 방식으로 운용한다.
중근세 이탈리아에서 검술을 바탕으로 창작된 스탠딩 유술인 Abrazzre가 존재하거나 이탈리아 출신의 영국 마스터 빈첸티오 사비올로가 자신의 저서에서 검술을 바탕으로 한 권법을 수록하기도 했다. 칼리 아르니스의 맨손기술(Empty hands)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무기술에서 파생된 권법의 특징은 마치 무기 싸움을 하듯이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팔을 이용해 상대의 팔이나 다리를 차단하고 너클파트뿐만 아니라 손바닥이나 손등까지 이용하여 자유롭게 타격하는 것이 특징. 무기술의 전투법이 맨손에서도 적용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무기 전투와 맨몸 전투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현대의 종합격투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단, 무기술을 수련하면서 얻은 센스와 무기가 없는 상황에 대비하다 보니 부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는 중국권법을 포함한 여러 전통무술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일본의 경우 가시마 신류는 검술유파이나 면허개전을 받게 되면 창술을 가르치는데, 자기 유파의 검술 이치를 그대로 창술에 적용하여 다른 창술과 달리 오른손이 앞으로 가고, 창끝을 앞이 아니라 자기 측면 아래로 두어 비스듬히 대각선을 그리게 된다. 이것은 가시마 신류의 검술자세인 "오또나시노 카마에"를 창에 똑같이 적용하는 것이며, 상대가 창을 찔러오면 강하게 때려서 놓치게 하고 찌르는 것을 메인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가시마 신류의 검리와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외에 오와리관류 창술의 경우 검술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야규신음류의 검술체계인 <토노모노 타치:外のもの太刀>를 가져와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무기술은 아니지만 유술 또한 검술에서 파생돼 나온 것이었다. 원래 유술은 검술을 봉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검술이 먼저 있었고, 그것을 봉인하기 위한 유술이며 검술과 유술은 표리 일체의 관계였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검술을 취하지 않고 유술을 습득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었다. 유술에는 검술의 움직임이 그대로 활용되고 있었고, 검술을 배우는 것이 유술의 향상에도 기여했다고 한다. 현재 유도는 맨손으로 싸우는 것이 기본이지만, 강도관 유도의 선조라 볼 수 있는 가노 지고로는 유술의 정의에 대해 "맨손 혹은 무기가 있는 적을 공격 또는 방어하는 기술" 이라고 정의했다. 즉, 가노 지고로가 생각한 이상적인 유술(유도)은 맨손만이 아니라, 칼이나 창 등의 무기를 포함한 것이었으며, 이렇듯이 유술과 검술은 떼려야 뗄 수없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경우 양손으로 검을 운용하는 검술이 대세가 된 지역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 모두 양손으로 검을 운용하는 검술로 유명한 곳이며 이는 한손으로 운용하는 검술로는 알 수 없는 다양한 운용의 방식이 파생되는 점이 그러한 인식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국무술 같은 경우는 무술의 기본을 봉술이나 창술로 보는 경향이 강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권법은 봉술이나 창술을 응용해 만들어낸 것들이 많다. 에 집착한 조선도 무술의 근본만큼은 곤방으로 본다. 따라서 실제로 검술이 무기술의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렇게 보는 관점이 과거 유럽과 일본에 존재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2.3.2. 검술과 검의 사회적 위치


현대인들은 전근대 전술과 전쟁에 대한 이해가 없고 영화나 만화, 소설 같은 서브컬쳐에 의존하므로 검과 검술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그에 대한 반발로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무협지나 판타지를 비롯한 여러 서브컬쳐에서는 검이 주력 무기로 나오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검으로 수많은 병사를 베어넘기거나 하는 묘사가 많으므로, 일반인들도 이러한 내용에 따라 검술도 그만큼 중요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고도로 발전된 검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은 전장보다는 결투와 호신용도에서였다. 수백 수천명이 함께 싸우는 전쟁터에선 개개인의 검술 실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반면 전근대, 특히 르네상스 시대까지는 치안이 매우 좋지 않았고 시가지나 마을 밖에서는 치안 유지가 되지 않았으므로 습격이나 약탈, 살해를 당하는 일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창이나 폴암은 들고 다니기엔 너무 길었고, 거추장스러운 커다란 방패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니, 자연스럽게 아밍 소드 한 자루만 차고 다니든가, 혹은 작은 방패인 버클러를 들고 다니든가 하는 수밖에 없었고[5] 따라서 휴대하기 편한 검이 호신무기로써 큰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범죄자와 여행자 수준의 소규모 전투에선 개개인의 검술 실력이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검술의 유용성과 필요성 때문에, 메서(Messer)와 나무봉을 이용한 민간인 호신검술이 발전했다. 지금도 관련 교범들이 현존하며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교범을 보존하는데 큰 공헌을 한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6]의 문서들에 의해 나무몽둥이술, 낫술, 대낫술, 도리깨술이 존재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16세기부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무술도장이라든가 민간인들의 검술 수요는 이러한 배경을 두고 볼 수 있다. 16세기에는 과거 기사와 직업군인, 검술 길드의 전유물이었던 Sword를 사용하는 장검술이 민간에게도 오픈되어 롱소드검술이 맨몸 전투에서의 유리함이나 높은 검술적 수준에 의해 큰 인기를 끌었으며, 좁아터진 당시의 시가지 내에서의 우발적인 싸움을 위해 레이피어라는 도검까지 등장하고 대세를 차지할 정도이니, 당시 민간인들의 검술 수요와 사용률이 매우 높고 주류 검술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과 함께, 민간계에서야말로 검과 검술의 위치가 드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부터는 도검이 실전용이 아니라 성인 남성의 정장의 필수 악세사리로 취급되어 장식성이 강한 스몰 소드가 주류가 되었으나 가볍고 약한 장식검임에도 이것을 이용해 결투나 호신을 하는 수요가 생기면서 검술 도장이 성행하였다. 18세기까지는 칼뺏기나 드롭킥 등 호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기술은 다 쓰는 실전적인 검술이었으며, 덤으로 세이버와 같은 군용 도검, 짧은 외날도인 헌팅 소드나 쌍두 단창인 예거 스톡을 사용하는 기법도 교육되기도 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스몰소드가 정장의 필수 요소에서 탈락하고 지팡이가 장식 도구를 대체하면서 스몰소드 검술은 크게 쇠퇴하고 귀족의 교양으로써 형식화되어 엄격한 룰과 예절을 따르는 형식화의 길을 걸었다.
다만 민간인이 총을 가지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본의 경우는 막부 말과 같은 치안 불안에 민간인의 검술 수요가 폭증하여 유럽의 16~17세기를 연상케 하는 도장 문화의 전성기가 일시적으로 도래하기도 했다.

2.3.3. 검술은 정말로 배우기 어려운가?


롱소드 물체베기 체험교육
야규신카게류 일반인 체험지도
진실과 과장이 한데 섞인, 루머이지만 루머라고 하기도 뭣한 이야기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꼭 그렇지는 않다. 검술은 배우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퍼지는 바람에 검을 써서 뭘 베기만 하려고 해도 상당한 숙련과 훈련이 필요하며 몇 년 이상씩 수련하지 않으면 전혀 쓸 수가 없다는 식의 인식이 현대인들에게 많이 퍼져 있지만, 기본적인 것만 가르치는 데에는 결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며 빠르면 일주일 안으로 다 배울 수 있다. 특히 군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에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단시간 내에 숙련시키도록 하였는데, 근현대에서 예로 들 만한 것이 바로 일본 육군의 군도의 조법이다.
군도의 조법은 구 일본육군에서 검과 검술을 모르는 장교와 부사관, 병들이 매우 많기에, 빠르고 간단하게 군도를 사용하는 법을 교육하는 속성교육 시스템인데, 기본적인 머리베기와 대각선 좌우 내려베기, 찌르기라는 4개의 공격법과 함께 거합술 7본을 통해 공방의 이어짐을 학습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훈련 계획표 또한 예시로 존재하는데 '''하루 한 시간 반, 일주일 교육으로 군도 사용법 교육을 마칠 수 있는 구조다.''' 이처럼 기본 사용법만 교육하는 데에는 결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반면에 빨리 훈련시켜서 전장에 내보내야 하는 군사훈련용이 아닌, 전문적인 전사 계층이 배우는 검술은 거의 평생 배운다고 해도 무방하다. 검술은 보편적으로 상하좌우, 각 대각선으로 8방향의 베기가 존재하며, 양날로 되어 있는 롱소드검술에서는 베고 그대로 들어올리는 방식의 베기를 포함하여 총 16방향의 베기가 존재한다. 물론 그에 따라 8개 이상의 방어가 존재하며, 여기에 스텝과 카운터어택을 비롯하여 페인트 등의 고급기술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것을 모두 배우는 데에 몇 년 이상씩 걸리고 10년 넘게 배워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검술이란 건 바로 이런 후자를 의미한다.
결국 어느 것이나 그렇지만 기본적인 것만 가르치느냐, 상위의 고급 개념과 기술까지 다 배우느냐는 원론적인 이야기다.

2.4. 스포츠 경기와 진검대결의 차이점


현재는 치안이나 사회분위기상 검과 검이 실제로 대결하는 상황은 거의 없으며, 스포츠로 남아있는 검술 경기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스포츠 경기가 실제 검술과 갖는 차이점은 아래와 같다.
  • 검도 경기에서는 서로 공격이 겹쳐서 맞췄을 경우 상격이라고 하여 득점이 인정되지 않거나, 상대가 저항하지 못할만큼의 확실한 공격으로 득점을 가하면 한판을 인정해주거나, 시간상 먼저 유효타를 친쪽에게 득점을 준다. 펜싱 경기에서는 가끔 몸통에 상대방의 칼에 찔린 상태로 머리를 공격하여 득점을 얻는 경우나 어깨를 찔린 상태에서 몸통을 찔러 득점을 하는 모습이 나오고, 경기규칙상 일정점수를 먼저 채우는 쪽이 승리를 한다. 그런데 진검이라면 상대와 서로 유효타를 주고받았으면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와 상관없이 둘다 죽는다. 상대의 공격에는 온전히 방어를 하거나, 반격을 가하더라도 적절한 찰나에 상대방의 공격궤적을 흘리면서 공격을 해야 생존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맞공격을 허용하면서 반격을 가하면 똑같이 다치어 죽을 수 있다.
  • 진검일 때 살상력이 거의 없는 공격이 득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날붙이라도 길이가 짧아 휘두를 공간이 충분한 나이프와 다르게, 길이가 긴 검은 충분한 공간내에서 정확한 자세로 확실히 쳐야 상대를 살상할 수 있다. 단지 아무 무게감없이 툭치는 것으로는 상대방을 저지할 수 없다. 그러나 검술경기에 따라서는 공격지점에 닿기만 해도 득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스포츠 검술에서는 득점이나 무효 등의 채점 이후에도 경기가 재개된다. 검도경기에서는 서로 손목을 치거나 머리를 공격하더라도 상격이라거나, 강하게 쳤지만 확실한 한판이 나오지 않으면 득점이 안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확실한 득점이 아니더라도 칼로 인하여 신체는 손상되므로 체력과 신체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고, 대결은 스포츠 경기처럼 원활하게 진행되기 어려우며, 자연히 공방의 횟수 역시 스포츠 경기보다 적어진다.
  • 이상의 이유로 대결의 횟수가 매우 적다. 진검 대결에서 패자는 불구가 되거나 그대로 사망할 확률이 높으며, 승자라도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면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역사상 이름난 검호라고 해도 진검으로 겨룬 횟수는 의외로 많지 않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60회, 이토 잇토사이가 33회라고 하지만 둘의 전적 모두 교차검증이 안되어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고, 그나마 상대의 생몰이 정확히 기록되어 신빙성있는 것이 츠카하라 보쿠덴의 진검대결 17회인데, 그정도의 횟수만으로도 보쿠텐은 천하 제일의 검성으로 대우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보통 진검승부를 5번 이상 이겼으면 상당히 많이 이긴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는 연간 평균적으로 3,4회의 시합을 하는데 대체로 1년이내에 죽는 편이었고 운이 좋아야 3년 가량을 버티는 편이었다. 너무 적지 않나 싶겠지만 현대의 기사라고 할 수 있을 전투기 파일럿들은 격추수 5대만 기록해도 에이스로 떠받들여지는데 고중세의 전장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진검을 사용할 때에도 코등이 싸움이 생기지만, 검도경기에서와 같이 코등이 싸움만 오래 교착되기는 어렵다. 날이나 코등이끼리 마주하게 되면, 칼날이 어깨나 머리, 몸에 맞닿아서 조금만 힘을 주면 깊게 베일 수 있으므로, 교착상황을 오래두지 않고 재빨리 공격을 하거나, 자기방어를 위해 반격이나 방어등의 다음행동을 취하게 된다. 상황별 대처요령은 무술마다 다르다.
  • 진검과 다른 수련도구간에 차이가 있다. 목검, 죽도의 경우 무게가 같은 부피의 철검 일본도의 절반이며, 무게중심이 달라 진검으로는 죽도와 목검에서 처럼 빠르게 여러번 공격할 수 없다. 자연히 대결양상에서도 대체도구를 사용했을 때처럼 빠른속도로 연타를 넣으며 견제하는 전법은 쓰기가 어렵고 공격에 보다 신중해진다. 더불어 같은 철검이라도 날을 연마한 진검과, 날을 죽인 진가검 소위 블런트를 썼을 때도 차이가 있는데, 블런트는 칼날끼리 맞닿은 후에도 마찰이 없어서 다음기술을 넣거나 그상태에서 상대방 검을 흘리기가 비교적 쉬우나, 진검끼리는 연마한 날끼리의 마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2.5. 영화, 드라마의 검술과의 차이점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연출된 격투를 '스테이지 컴뱃stage combat' 이라고 한다. 어떤 투기 종목이든 드라마나 영화에서 연출되면다 스테이지 컴뱃이지만, 동작이 과장되는 여러 다른종목과 비교해볼 때도 유달리 영화 등에서 등장하는 검술은 실제와는 매우 달라서 그차이가 프로레슬링과 올림픽 레슬링의 차이보다 더 크다.
우리가 보고있는 영화 검술액션의 토대는 1930년대부터 마련되는데, 이때는 검술액션이 전성기를 누리던 헐리웃 여명기로, 당시 최고 액션스타였던 에롤 플린(1909년 ~ 1959) 등은 화려한 검술 액션으로 은막을 누볐다. 당시 모험물의 클라이맥스는 대개 레이피어나 커틀러스 등의 검을 이용하는 일대일 또는 다대일 검술대결 장면이었으며, 검날을 검날로 막는 패링을 주로 구사하여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목적인지라 검으로 상대의 급소나 손목 등을 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배우들의 안전 문제도 있고 당시에는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당국의 검열이 심했기 때문에 보통은 무장해제 시킨 후에 무방비 상태가 된 적에게 검을 겨누고 항복을 요구하는 식의 결말을 내곤 했다.
나중에 나오는 영화들도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본래 검술은 검이 아니라 상대방의 몸을 타격하는게 목적인데, 주객이 전도되어 영화에서는 검과 검을 부딪히는 유희가 거의 주목적이 되었다. 이는 보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어린이들 장난감 칼싸움은 물론 검도를 배우는 어린이들조차 자유대련을 시켜놓으면 대놓고 상대의 검만 노리고 무한정 부딪히는 경우가 흔하다.
실제검술은 상대방의 신체를 공격하는게 목적이기 때문에 대게 칼과 칼끼리 부딪히는 패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오랫동안 여러번 지속되지 않는다. 오늘날 스포츠 검술인 검도펜싱, 복원되어서 대결이 열리는 롱소드 검술에서 조차 대체로 먼거리에서 공격거리를 잡는 견제전으로 진행되다가 서로 거리나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 됬을 때 그제서야 짧은 시간 내에 공방이 이루어진다. 부상의 위험과 점수제로 인해 상호 안전한 공방이 지속될 수 있는 스포츠경기에서조차 긴 대치전과 견제전에 비해 공방시간은 짧기 때문에 영화에서의 대결장면보다 지루한 편이다.

중세병기를 다루는 유튜버 Skallagrim의 강좌영상
또한 영상미를 위해서 매체의 검술은 관중에게 잘 보여야하기 때문에 팔도 비교적 좌우로 펼친 상태로 공격을 대단히 크게하고, 또 회전 공격도 더러 나온다. 그런데 스포츠 경기에서조차 공격동작에서 한 동작이라도 더 늘어나면, 상대방에게 대응할 틈을 많이 주게되어 점수를 내주고 패배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진검대결에서 그 동작이 더 늘어나고 커지고 거기에 등뒤나 옆등의 사각까지 내주게 된다면 역습으로 목숨이 위태롭다. 그래서 검술 전문가들은 영상매체의 검술이 고증을 잘 하였는지 여부는 보법을 보고 판단한다.
그밖에 영상매체 검술은 거의 웬만한 도검들, 심지어 롱소드와 카타나조차 한손으로 운용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한손으로 운용하는 기법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롱소드와 카타나는 양손 운용이 기본이라 한손으로 사용하면 몸에 피로가 많이 쌓이고, 검신에 신체가 휘둘려서 균형을 잃기 쉽다.

3. 관련 문서


[1] 일본의 경우 신분의 상징으로써 도검 패용을 강제시키는 것 등.[2] 명조 말, 청조 초까지의 중국의 군사기술의 발전은 홍이포라는 자체 컬버린 포의 개발, 신식 화승총의 보급 등 같은 시기의 유럽 국가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여러 방면으로 발전을 이루었지만, 평화기의 지속과 더불어 내부혼란이 본격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 중엽 이후로는 명백하게 뒤쳐지게 되었다.[3]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본의 고류나 중국무술, 태국의 크라비 크라봉 등에서 역사와 국적을 빼내어 본다고 생각해 보자. 그 매력은 크게 감소한다. 당장 어중이떠중이가 불쑥 나타나서 검술이랍시고 휘두른다고 생각하면 명확해진다. 누가 배우겠는가?[4] 골라이어스라는 쯔바이핸더 검술서가 있기는 하나, 내용상 단직의 검술서의 구성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어 쯔바이핸더만의 독특한 내용이 아닌 롱소드 검술서 짝퉁의 의혹을 받고 있다.[5] 최초의 중세 검술문서인 I.33문서가 이 맨몸 소드 & 버클러술을 보여주고 있다.[6] 회계공무원이자 검사, 무술문서 수집가였다. 엄청난 수의 장서를 수집한지라 서양검술 복원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지만, 풀컬러 검술서를 편찬하면서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 재정을 횡령한 사실이 적발돼서 사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