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헤스

 





'''나치의 국가지휘자
나치당 지도자 대리[1]
루돌프 헤스
Rudolf Heß
'''
'''본명'''
Rudolf Walter Richard Heß
루돌프 발터 리하르트 헤스
'''출생'''
1894년 4월 26일
이집트 케디브국 알렉산드리아
'''사망'''
1987년 8월 17일 (93세)
서독 서베를린 슈판다우
'''정당'''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시민권'''
독일인
'''학력'''
뮌헨 대학교 졸업
'''신체'''
175cm
'''배우자'''
일제 프뢸[2]
'''자녀'''
볼프 뤼디거 헤스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1918년 이후
2.3. 히틀러와의 만남
2.4. 영국으로
2.5. 구금 이후와 사망 이후
2.6. 타살 의혹
3. 기타
3.1. 개인적인 성격
3.2. 정신 상태
3.3. 다른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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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당 초기부터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한 인물이다. 히틀러가 나치당 호구였던 시절부터 히틀러와 함께한 인물로, 히틀러의 출세에 힘입어 그 자신도 출세했다. 히틀러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은 어느 누구에도 뒤쳐지지 않았다. 알려진 대로 대학은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지식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뮌헨 폭동 때 참가했다가 체포, 감옥에서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받아 적었으며 나치의 각종 정책과 인종 탄압에 열렬히 참여했다. 히틀러의 신임을 받으려 전쟁 중에 영국으로 가서 강화 협상을 벌이려다 체포되었다. 전쟁 초기에 체포된 탓에 전후 전범 재판에서도 다른 대부분의 고위 나치들과 달리 사형을 면하고 대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덕분에 '최후의 나치' 취급을 받아 네오 나치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 루돌프 회스(Rudolf Höss)랑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둘이 다른 사람이니 주의하자.

2. 생애



2.1. 초기


1894년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상인 아들로 태어났다. 재외 독일인이지만 아버지[3]는 독실한 황제빠이며 게르만 민족주의자였다. 당시의 막상 독일 내에서는 빌헬름 2세가 경박함과 잦은 실수로 인해 별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면 좀 묘한 대목. 어머니는 그리스계 독일인이었다. 유년기에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순종적이어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독일에서 기숙 학교를 다니다가 스위스에 상업 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평범하게 가업을 물려받을 운명은 아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아버지의 뜻을 처음으로 거스르고 독일 제국군육군 으로 자원 입대했다. 대체로 열심히 용감하게 싸웠는지 1915년엔 하사로 진급하고 1917년엔 소위로 임관한다. 이때 잠시 서부 전선에 배속할 때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부대 상관으로 만난다. 1918년엔 당시 독일에서 엘리트 급만 배속되는 육군 항공대로 전속되고 전투기 조종사 교육을 받았지만 이미 전쟁이 끝물이었던 때라 격추 수는 없다.[4]

2.2. 1918년 이후


다른 독일인들처럼 패전으로 멘붕에 빠진데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가업은 영국의 몰수크리까지 당한다. 때마침 바이마르 공화국은 심심하면 폭동이나 혁명크리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5]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뮌헨의 "게르만 고대 연구회"라는 환빠스런 단체에 가입하는데 이 단체는 실은 '툴레 협회'라는 극우 민족 성향 반유대주의 비밀 결사 조직이었다.[6] 이때부터 독일을 재탄생하고 구원할 "총통" 사상에 물들었다. 그나마 안습이던 형편에 조금 숨통이 트여 제대 군인 지원으로 아비투어(대입 자격시험)가 면제되고 뮌헨 대학에 들어가 경제학과 역사학을 전공신청한다. 여기서 만난 스승이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드립의 선구자인 지정학자 카를 하우스호퍼 교수이다. 하우스호퍼 교수의 조교였던 루돌프 헤스는 물론, 히틀러 역시 나의 투쟁에서 동부 생활권 드립을 치는 등 하우스호퍼 교수의 영향을 상당 부분 받았다.[7]

2.3. 히틀러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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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호프 브로이하우스에 들렀다가 독일 노동당이라는 지역구 군소 정당의 '화가' 출신이라는 한 연사가 내뱉은 연설에 감화된다. 급기야 그가 독일 민족의 구원자라고 여기게 된 헤스는 그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물론 그 연사는 아돌프 히틀러다. 당시 히틀러는 당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굳히지 못한 유력 인사 수준이었지만, 헤스는 툴레 협회 시절의 인맥을 동원해서 히틀러가 당권을 잡는데 기여했다. 히틀러의 명령으로 돌격대 안에서 "대학생 100인회"도 결성한다. 1923년 뮌헨 폭동 후엔 체포돼서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히틀러와 수감되는데 다시 간수들의 배려로 히틀러의 바로 옆방을 쓴다. 이때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해서 히틀러의 구술을 바탕으로 나의 투쟁이 저술된다.
이런 게 가능했던 것은 재판 과정 자체도 코메디였기 때문이다. 좌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폭동과 다른 애국심의 발로였다는 히틀러의 주장에 재판관은 '''아니 히틀러 선생처럼 애국자가 있다니''' 하면서 무제한의 변론권을 허용하고 전국에서 기자들이 몰려서 듣보잡에서 일약 전국구급 네임밸류 난동꾼으로 출세(?)한다. 히틀러의 형량도 6개월뒤에 석방이 가능한 5년금고(헤스는 18개월)이었고 노역도 없고 평상복을 입고 교도소 내에서 돌아다니는것도 자유였다. 간수들도 깍듯하게 독립 투사 대하듯 하고 접견도 무제한. 히틀러의 후원자들이 충성심을 보이려고 매일 얼굴 도장 찍으러 드나들었고 감방 안에도 꽃이나 가구가 꾸며질 정도였다.
사실 헤스는 히틀러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절 이후의 별다른 업적이나 공로랄 것은 없다. 히틀러가 그랬듯 헤스 역시 행정이나 사무에 대해선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재능이나 군사적 재능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젊은 시절의 공로로 인해 의전상 서열이 나치당 인사 중 2, 3위였을 뿐이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뮌헨 당사의 '총통 대리인'으로 임명되지만 히틀러와 지리적으로 멀어지면서 권력은 한층 더 멀어졌다. 헤스를 대신하여 급부상한 인재가 본래 헤스의 비서였던 마르틴 보어만이었다. 심지어는 히틀러 역시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후계자인 괴링에게 유고가 생길 시 그 권한은 헤스에게 계승될 거라고 선언했었지만, 실제로는 괴링을 따로 불러 괴링이 총통만 되면 헤스를 축출해 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2.4. 영국으로


히틀러의 부관이자 다음다음 3순위 후계자이자 '''총통 대리인'''[8]으로 서열은 높았지만 보어만의 급부상으로 가뜩이나 없던 권력은 안습이 되어 간다. 다른 나치 고위 인사들은 물론 과거의 부하였던 보어만에게도 완전히 무시당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어졌다. 이에 한번 튀어보고자 전쟁 초기에는 45살이나 드신 '''총통의 대리인'''께서 직접 전투기 몰고 참전한다고 히틀러에 졸라대어, 놀란 히틀러가 헤스를 1년간 비행 금지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1941년 나치가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원래 영국과의 동맹을 철썩같이 믿었던 헤스는 조급해진다.[9] 프랑스 전역이 정리되고 영국에 평화 제의가 씹히자 히틀러와의 상의도 없이 (스승 하우스호퍼를 통해) 포르투갈에서 영국 외교관과 접선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헤스가 미쳤다고 생각한 히틀러는 헤스를 엄중히 감시할걸 명령한다.
결국 메서슈미트기를 한대 훔친 다음 개조해서 부관에게만 알리고(부관은 이 일로 수용소행) 1941년 5월 영국으로 평화 협정을 하러 간다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영국군에게 스코틀랜드에서 잡혀서 억류 당했다.[10] 물론 아무도 안 시킨 짓이었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나치 측에서도 '''그 놈은 원래 미친 놈이다'''라며 변명했을 정도. 독일 측에서는 그가 독일의 작전 계획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즉 독일의 작전 계획이 영국에 어느 정도나 새어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의미에서 심각하게 당황스러운 사건이었다. 히틀러는 혹시라도 영국에서 그를 돌려보낼 경우 수용소로 보내거나 즉각 총살 시키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후에 밝혀진 설 중 일부는 이렇다. 루돌프 헤스가 갑작스럽게 영국으로 망명한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 고위 인사 보좌관이었던 이언 플레밍(007 시리즈의 저자)이 기획한 작전이었다. 그는 루돌프 헤스가 광적으로 오컬트에 심취하여 점 보기를 좋아한다는 자료를 보고, 점술가[11]를 매수하여 '당장 영국으로 가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소련과의 전쟁에서 협력을 구하면 돌아와 영웅으로 추대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했고, 루돌프는 그에 홀딱 넘어간 것이다.

2.5. 구금 이후와 사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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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12]에서는 소련의 강력한 요구로 영국에서 옮겨져 피고로 출석하게 된다. 당시 헤스는 심각한 기억상실증 증상을 보였으나 가끔씩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고 재판을 받아도 된다고 판단되어 결국 법정에 서게 된다. 거의 모든 전쟁 기간 내내 구금되어 있었으므로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로는 처벌이 불가능하여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전쟁 교사죄와 반평화적 범죄를 공모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한편 소련은 헤스도 사형에 처하고자 했으나[13] 이 정도로는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다른 연합국 판사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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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전쟁 후엔 베를린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살게 되었다. 그가 쓰는 모든 글과 편지들은 검열 당했으며 가족들의 면회는 한달에 30분밖에 허락되지 않았다가 나중엔 1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정작 헤스는 1969년까지 가족 면회도 거부했다. 1970년대엔 이미 죽을 때가 다 됐고 더 이상의 형벌 집행 의미가 없는 그를 풀어줘 가족에게 돌려보내자는 의견이 영국과 미국에서 나왔지만 소련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다른 두 인물인 에리히 레더 제독발터 풍크는 50년대에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석방 당시에 중병을 앓고 있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둘 다 몇 년 못 가 죽었으므로 굳이 수감 생활을 무리하게 지속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죄질이 헤스에 비해서 낮았기 때문에 일찍 풀어준 것이다. 그러나 헤스는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도 무려 '''93세'''[14]까지 장수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건강에 큰 문제가 없었으므로 건강 문제로 풀어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원래 정원이 '''300명'''이던 그 넓은 슈판다우 교도소의 시설을 수십년간 '''혼자서''' 이용하게 됐는데, 나치즘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슈판다우엔 관련 전범만 수감한다는 원칙이 이런 '''세금낭비'''를 초래해버렸다.
연합국이나 서독 정부 모두 헤스가 열악한 교도소 환경에서 90을 넘겨 장수하며 장장 40년간 세금을 축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 하고(...) 금방 골골대다 죽을 거 같으면 다른 전범들처럼 적당한 시점에 가석방을 시켜 줘서 금방 교도소 문을 닫을 생각에 이리 했던 것이다. 그런데, 헤스는 골골대긴 커녕 정정한 몸으로 잘만 돌아다니고, 그렇다고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기를 강요하면 또 인권 문제로 욕먹을까봐 늙어갈수록 의료 문제도 신경쓰는 등 처우를 조금씩 개선해야 했는데, 이 또한 세금이었다. 게다가, 헤스는 반인륜 흉악 범죄와는 관련이 없고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리지도 않고[15] 인성도 괜찮은 모범수였으며, 나이도 들 만큼 들어서 교도소 측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소 내 대부분의 공간을 맘대로 다니게 하거나 딱히 일과표를 강요하지 않는 등 편의를 봐줬다. 그래서 노년에는 사실상 양로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사는 수준의 생활을 했다고 한다. 밖으로만 못 나갈 뿐. 도망칠 능력도 없는 사람을 일일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거 자체가 교도관 인건비나 보안장비, 유지보수비 등 세금 낭비 요인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헤스가 80줄에 접어들었을 때 취임한 슈판다우의 마지막 교도소장은 가끔 본인이 직접 헤스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시켜줄 정도로 돌봐줬다.
대표적인 사례로, 1966년, 71살이 된 해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선 소내 정원에서 당근, 고구마, 해바라기 농사도 지어서 원예 방면으로 상당한 실력에 이르렀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심심해서 씨앗 받아다 길러 본 모양인데, 상술했듯 모범수고 당시에는 꽤 고령인 71세라 죽을 때도 다 되었다 판단한 교도소 측에서도 노인 배려 차원에서 씨앗을 구해다 준 듯하다. 교도소 입장에서도 재소자가 이상한 짓 안 하고 저런 얌전한 취미를 즐기는 건 환영할 일이다. 출처 대한민국 교정본부에서도 징역형을 받은 이들 중 고령 혹은 소위 범털로 불리는 정제계 유명 인사 출신들에게 주로 부과하는 교도소내 노동이 바로 원예이기도 하다. 일이 크게 힘들지도 않으면서도 재소자의 심신 안정에도 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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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교도소 침대의 헤스. 91세.
결국 1987년 고르바초프 때의 소련에서도 93세라는 헤스의 나이를 근거로 석방에 동의하게 되었으나 바로 그 해 헤스는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다만 집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너무 오래 갇혀 살았고 그렇다고 뭘 적극적으로 하는 스타일도 아니라 사회에 적응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라, 차라리 이렇게 교도소에서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로써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은 인물들 중 유일하게 형기를 채운 인물이 되었다. 공식 발표된 사인은 자살. 그의 유족들은 타살 의혹을 제기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헤스는 이미 워낙 나이가 많아 오늘내일 하던 상태였던 데다 네오 나치들에게 숭배받는 것 외에는 이미 정치적 영향력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죽일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정 죽여야 한다면 암살보다는 공식적으로 사형 선고를 내려 죽이는 게 훨씬 깔끔했을 것이다. 그의 사망에 대해 '''실제 헤스는 영국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고 감옥에 갇힌 헤스는 그의 대리'''라는 등 별별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 물론 헤스의 가족들조차 감옥에 갇힌 헤스의 존재를 인정했음을 고려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
죽은 뒤에는 장례를 치른 다음 교회 묘지에 묻혔고, 네오 나치들이 성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슈판다우 교도소는 마지막 수감자였던 그가 죽은 후 신속하게 철거되었다. 철거를 확인 사살하기 위해서 잔해는 대부분 바다에 뿌려졌다고. 반면 그의 무덤은 항상 네오 나치들과 스킨헤드로 붐볐다. 정작 헤스 본인은 살아 생전에 그들이 자기를 그렇게 숭배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멍청한 놈들"'''이라 중얼거렸다고 하지만. 정당한 나치즘을 왜곡시키는 자들이라고 싫어했다고 한다.
2005년 바이에른 주에서 헤스의 묘에 단체 참배를 금지하는 조례를 만들었으나 통제 불능이었다. 결국 2011년 7월 20일, 네오 나치의 참배를 막으려는 바이에른 주정부의 결정에 따라 무덤이 철거되고 유해는 다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 화장되어 인근 호수에 뿌려졌다.#

2.6. 타살 의혹


  • 슈판다우 교도소를 철거한 부지에 쇼핑몰을 세우려는 회사가 헤스의 생존으로 계속 준공이 미뤄지고 손해를 보자 간수를 매수해서 헤스를 살해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교도소 부지에 들어선 쇼핑몰은 베를린 주둔 영국군을 대상으로 하는 군복지 쇼핑몰이라서 굳이 거물 전범의 암살 같은 무리수를 두어야 할 만큼 금전적 손해를 보는 권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상업 쇼핑몰이 들어선 건 그 후의 이야기다.
  • 영국 데일리 메일에서 미국 정보부가 헤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를 냈는데 출처가 출처이니 만큼 걸러들을 필요가 크다.(...)
  • 승전국들은 어떻게든 나치 추종자들의 성지가 되는 걸 막으려고 장장 42년 동안 헤스를 붙들고 먹여살렸다. 굳이 암살 같은 가성비 떨어지는 짓을 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었다.(...) 안 그래도 이 자살로 나치 추종자들은 헤스가 살해당했다고 믿는 자들이 많다.
  • '죄수가 딱 1명 밖에 안 남은 교도소에서 어떻게 감시를 피해 목을 매고 자살하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상술되었다시피 말년의 헤스는 그냥 양로원 치매노인 수준의 감시만 받았다.(...)

3. 기타



3.1. 개인적인 성격


헤스 본인은 상당히 여리고 섬세한 여성적인 사람이라서 친구도 많았고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헤르만 괴링과도 사이가 나빴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도 헤스를 가리켜 "다정다감한 사람"이라고 평했고 아들도 평생 그를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성격 때문에 나치의 인물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히틀러와 동성애 관계라는 추측이 있다. 실제로 히틀러는 헤스를 가리켜 나의 사랑스러운 엠마(여자 이름)라고 불렀고, 당시 여론도 헤스를 가리켜 헤스 부인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그런 소문 때문에 일제 프륄과의 결혼을 서둘렀지만, 결혼 후에도 총통에 대한 충성심을 넘어선 해바라기는 여전했다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자 관계에 대해선 깨끗을 떠나서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 아직 헤스와 히틀러 사이가 멀어지기 전 헤스의 아들 볼프-뤼디거[16]가 태어나자 히틀러가 대부(代父)가 되주었다.
나치당 간부 중에 거의 유일하게 예의바르고 검소하고 청렴해서 국민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좋았다. 별 권력도 없던 헤스가 의전 서열 상 3위에 해당했던 것은 이런 인기 탓도 있었을 듯...
한때 스승이던 하우스호퍼 교수의 아내가 유대인이라 박해를 막아줬고[17] 장검의 밤때 자기 친한 친구가 살생부에 오르자 히틀러에 애걸해서 빼 달라고 했다가 거절 당하자 옆방에서 울기도 했다고...
아들의 유아기 시절 영국 망명과 이후 슈판다우 교도소 투옥 등으로 처자식과 몸이 멀어졌음에도 아내와 아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고 옥중에서도 꾸준히 일제, 볼프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초기에 헤스는 가족과의 면회를 거부했으나 본인의 나이 74세, 아들의 나이 31세에 첫 면회를 하고 그 이후 열차례 넘게 가족들과 짧은 면회로나마 교감을 이어간다. 하지만 일제 프륄이 <루돌프 헤스, 평화의 수인>이라는 책을 펴냈을 정도로 처자식은 그에게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3.2. 정신 상태


나치당 인사 중에서도 가장 오컬트에 심취했던 인물이라고도 한다. 점성술, 돌팔이 의학[18], 프리메이슨-예수회-국제유대인조직 음모론을 철석같이 믿었다.[19] 심지어 최근에 나온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대한 BBC의 다큐멘터리에서도 사실 약한 정신병이 있던 놈이 점점 악화돼서 최종병신이 되었다는 설을 차용했다. 하지만 재판 중에는 시종일관 정신병 있는 척 하다가 마지막 변론때 나는 아무것도 잘못 없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하면서 최후 변론을 한 걸 봐선 약간 맛이 갔어도 완전히 병에 걸린 상태는 아닌 걸로 판단된다.[20]
영국에 구금 된 이후 연합군 정신과 의사들에게 진단을 수 차례 받았고 그 결과 약한 정신적 이상이 있으나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으며 영국과의 동맹 체결에 실패했다는 후유증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실제로 헤스가 잡혀있는 동안에도 발코니에서 투신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다리만 부러진 일도 있었다.
일설에는 헤르만 괴링하인리히 힘러가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그를 제거했다는 믿기 힘든 얘기가 있다.[21] 어쨌거나 수감 생활 중에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정말 심각한 정신병자가 맞았다면 아무리 전범이라지만 감옥에 가두고 계속 수감 생활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전범 재판 중 받은 웩슬러 테스트 기준 IQ는 120으로 낮지 않은 편에 속한다.

3.3. 다른 매체에서의 등장


지옥의 특전대, 한국에서는 암호명 와일드 기스로 나온 소설의 속편 The Thin Blue Line은 바로 이 헤스 구출 작전을 다루고 있다. 1편의 주인공인 대령의 형[23]이 용병들을 이끌고 슈판다우를 급습해서 헤스를 구한다는 스토리. 물론 와일드 기스가 네오 나치인건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비밀을 밝히려는 영국 정부의 높으신 분들이 용병을 고용한 것이다. 막상 구출은 성공하지만 헤스는 비밀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감옥으로 돌아간다. 이 작품 역시 80년대에 영화화 되었다.[24] 헤스 역은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맡았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다룬 영화에서는 정신 이상자로 등장한다. 다른 전범들이 처형당할 때 안도감과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히틀러 만세를 외치고 사형을 당하자 들었다는 듯이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일찍 일어난 전쟁"에서는[25] 독일의 공식적인 밀사로서 영국으로 파견된다. 안습의 실제 역사와 달리 영국 정부에서는 독일과의 전쟁에 대한 염증으로[26] 헤스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얼마 뒤 윈스턴 처칠이 어이없게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자'''[27](...) 독일과 강화하고 소련에 전쟁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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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연금술사 극장판인 샴발라를 정복하는 자에서 오리지날 캐릭터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실제 역사대로 히틀러의 측근으로, 툴레의 계획을 위해 알폰스 하이드리히의 로켓 연구를 지원해 주지만 중반부에 수틀리자 그를 권총으로 사살한다. 후반부에는 실제 역사대로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걸로 나온다. 근데 실제 헤스와는 전체적인 굴곡만 가져왔을 뿐 그리 닮지는 않았다. 성우는 코야마 리키야/홍진욱.[28]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독일의 정부 수반으로 등장한다. 능력치가 좋은 편인데 시간이 지나면 이벤트가 일어나서 영국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린다. 더욱 가관인 것은 1936년에 힌덴부르크호가 뉴욕에 무사히 착륙하는 이벤트가 떴다면 그 힌덴부르크호를 타고 날아가다 격추당해 죽는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영국을 미리 점령하면 된다.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더욱 취급이 안 좋아지는데, 힌덴부르크호를 타고 날아가든, 그냥 항공기 타고 날아가든 랜덤으로 체포당하거나 사망한다. 개조한 항공기를 타고 가다 격추당한 경우 마지막 문장은 "히틀러는 오랜 친구의 죽음에 눈에 띄게 심란해졌다고 알려졌습니다."라고 나온다.

[1] Stellvertreter des Führers 는 나치당의 당직이었지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의 공직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총통"은 오역이다. 당직과 공직을 겸직한 다른 당간부들(예컨대 당직인 베를린 관구지휘자와 공직인 선전장관을 겸한 괴벨스)과 달리 헤스는 이름뿐인(지도자의 대리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건재한 상황에서는 전면에 나설 근거가 전혀 없다) 이 직책 외에는 변변한 직책이 없었다.[2] 1900년 6월 22일 ~ 1995년 9월 7일[3] 집안 내력을 거슬러가면 스위스 칼뱅주의 개신교 집안이라 한다.[4] 이 시절에 비행 훈련 받았던 게 1941년에 빛을(?) 본다.[5] 이때 헤스와 히틀러가 있었던 바이에른 뮌헨지방에는 공산 혁명으로 일시적으로 정부가 전복되고 '뮌헨 인민 공화국'이 들어섰다가 진압되었다.[6] 나치당 인사들은 죄다 실업자에 사회 밑바닥이란 이미지가 강한데 베를린과 북독일지역 좌파 성향 나치들과 돌격대의 대다수가 그에 해당하지만 뮌헨 나치들은 높으신 분들이랑 번듯한 집안 출신 고학력들도 상당했다. 헤르만 괴링이 대표적인 예.[7] 다만 하우스호퍼 교수는 아내가 유대인이라 과격한 인종론엔 찬성하지 않았다.[8] 당내에서만 한정이다. 나치 당사가 베를린에서 먼 뮌헨에 있었기 때문에.[9]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영국과의 동맹은 히틀러의 초기 노선이기도 했고 헤스가 나의 투쟁 작성시 충실하게 받아 적었던 내용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10] 비행기까지 개조해서 멀리 스코틀랜드로 간건 당시 스코틀랜드 방공 사령관이었던 해밀턴 경을 만나려고 간 것인데, 사실 둘 사이에는 별 친분도 없었다. 이러니 정신 상태가 의심받지...[11] 영국행 길일을 뽑아준 점술사는 코렁탕 먹고 수용소로 보내졌다.[12] 앞줄 좌측에서 두 번째 괴링 옆의 인물이 헤스[13] 소련 입장에서 보면 헤스가 레벤스라움을 건설해야한다고 떠들어대고 다녔는데 그 레벤스라움 영역의 대부분이 소련인 걸 생각하면...[14] 그것도 자연사가 아닌 자살이었다. 안 그랬으면 얼마나 더 살았을지...[15] 사실 슈판다우의 수감자들은 모두 고작 가끔씩 말다툼하는 것 빼고는 얌전히 지냈다. 그런데 헤스는 다른 수감자들과 거의 대화를 안해서 언쟁도 없었다.[16] 볼프란 이름은 히틀러가 자신이 좋아하고 즐겨 쓰던 별명이다. 아버지를 가둔 국가에 복무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해서 인정받고 군대에 가지 않았다.[17] 그러나 이 부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결한다. 하우스호퍼 교수는 레벤스라움을 주장한 인물이었고, 근데 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면서 레벤스라움은 동유럽 및 발칸 반도정도에서 끝내고 소련과의 계속된 동맹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선회하며 독소전쟁을 반대하였다. 본인도 시간이 흐를수록 영미를 막기 위해선 독일과 소련이 동맹관계로 남아 있어야 안정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듯. 그 일과 헤스 때문에 히틀러에게 팽 당했고, 전후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기소될 가능성으로 염려하던 중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18] 권력에서 멀어진 헤스가 히틀러와 오랜만에 식사할 때, 히틀러처럼 채식주의자였던 헤스가 히틀러의 요리사 음식을 거부하고 자신의 돌팔이 의사가 만든 식단을 꼭 지켜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히틀러가 '''그냥 쳐먹어!!'''라고 격분한 일화도 있다. 이 사건 이후로 히틀러의 만찬 시간에는 못 나타났다.[19] 힘러나 나치당에 이용 당하고 버려진 루덴도르프도 중증이었다. 하지만 경중에 차이는 있어도 대다수 나치당원들은 이런 음모론을 믿었다.[20] 그 덕에 형량이 늘어났다고.[21] 실제 권력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뭘 쟁탈할 껀덕지도 없다.[22] 에드워드 폭스 분.[23] 영화판에서 리처드 버튼이 열연한 대령은 원작에서는 마지막에 사망한다. 그래서 그 형[22]이 지휘한다는 이야기.[24] 1편의 성공 때문에 1편의 멤버들로 세계관을 연장해서 만들려고 했으나 대령역을 맡았던 리처드 버튼이 사망하는 바람에 한번 엎어졌었다. 나중에 나온 작품은 거의 듣보잡의 영역, 참고로 어네스트 보그나인과 클라우디아 킨스키가 나온 마약전쟁 관련 영화는 실제 2편은 아니다.[25] 뮌헨협정이 사실상 무산으로 돌아가서 2차 대전이 1938년에 빨리 일어나는 상황이다. 스페인 내전의 수장도 프랑코가 아닌 친독일 인사여서 독일이 공식적으로 스페인에 개입하는 역사.[26] 이 소설의 세계관에서는 폴란드와 독일이 한편으로 소련과 전쟁을 벌이고 전격전의 개념이나 발달된 전차가 없던터라 서부전선에서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해서 지리멸렬한 참호전으로 소강상태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독일과 강화해서 소련에 대항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편.[27] 이런 저런 암시로 대독강화를 꿈꾸는 높으신 분의 암살 음모일 수 있다.[28] 한일 성우 모두 분노의 질주 시리즈루크 홉스전설의 용자의 전설류라 류토르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