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의 밤

 

독일어 : Kristallnacht, Novemberpogrome 19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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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데부르크의 파괴되어버린 유대교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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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유대교 회당

수정의 밤 당시 바덴의 부엘 마을을 찍은 영상. 친위대원들과 돌격대원들이 보이며, 시나고그(유대교 회당)가 불타고 있다. 영상에는 안 나왔지만 유대인 상점들 또한 이미 공격받아 파괴된 상황이었다.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유대인들은 도합 70명 가량으로, 이들 중 대부분은 후에 남프랑스에 설치된 귀르스(Gurs) 강제 수용소[2]로 이송되었다.[3]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학살되었다. 위 영상은 마을의 소방수에 의해 촬영되어 2000년대 와서야 발견되었다.
(영상 출처: 이스라엘 야드 바셈 센터 공식 유튜브)

"모든 유대인이 두드려 맞고, 쫓기고, 약탈당하고, 모욕과 굴욕을 당했다. SS는 유대인들을 침대에서 끌어내려서 무자비하게 유대인들의 아파트에서 그들을 때렸으며, 그리고 나서 ... 유대인들이 거의 죽으려고 할 때까지 쫓았다. 피가 도처에서 흘렀다."

1. 개요
2. 배경
3. 진행


1. 개요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 나치 대원들이 나치 독일 전역의 수만개에 이르는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2백 50여개 시나고그(유대교 사원)에 방화했던 날. 당시 깨진 유대인 상점의 진열대 유리창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거리를 가득 메웠던 데서 '수정의 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치의 유대인 축출 과정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이 사건을 다룬 책 중 국내에 나와있는 것으로는 <크리스탈나흐트-대학살의 전주곡>등이 있다.

2. 배경


이 사건의 발단은 독일 내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 출신 유대인들을 무조건 추방하려는 나치당의 조치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자국 출신 유대인들의 강제 송환을 골자로 하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추방 정책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폴란드 정부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오스트리아 영내에 살고 있던 2만 명의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귀국하지 못하도록 5년 이상 아무런 왕래 없이 외국에 거주하던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여권을 무효로 만드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조치는 독일 내에 거주하고 있던 5만명의 폴란드계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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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독일에서 추방되는 폴란드인
이로 인해 더 이상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추방할 수 없게 되자 이때까지 이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외무부는 모든 책임과 권한을 비밀국가경찰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비밀국가경찰은 폴란드 측의 입장과 관계없이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국경 너머로 내몰았다. 물론 폴란드는 이들의 입국을 거부했다.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편지를 보내서 자신들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마침 프랑스 파리에 불법 체류하고 있어서 화를 면했던 17세의 소년 헤어셸 그린츠판(Herschel Grynszpan)[4]은 가족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난 후 매우 분노했고 11월 7일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을 찾아가서 3등 서기관이였던 에른스트 폼 라트(Ernst vom Rath)를 권총으로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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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사건의 가해자 헤어셸 그린츠판(Herschel Grynszpan)
총격사건의 피해자 에른스트 폼 라트(Ernst vom Rath)

3. 진행


그러나 사건은 이 소년의 체포로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곧 독일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틀 후 라트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사건을 확대시킨 주범은 괴벨스였다. 물론 라트가 숨을 거두기도 전인 11월 8일부터 이미 전국적으로 유대인 회당과 상가, 자택에 대한 무분별한 테러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사실상 독일 지역의 정치깡패로 전락해버린 돌격대였다. 물론 나치당 조직이 돌격대를 지원하였으며 언론들은 이 사건을 과장하여 보도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열심히 부추기던 중이였다. 그리고 마침내 수정의 밤 사건이 1938년 11월 9일에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15년전 아돌프 히틀러가 일으켰던 뢰벤브로이 맥주홀 폭동 15주년을 기념하여 뮌헨 구 시청에서 열린 공식 행사를 진행하던 중에 이 소식을 접한 괴벨스는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피의 보복을 주장했고, 곧이어 괴벨스의 명령은 말단 시군 조직까지 하달되었다. 그날 밤과 다음 날 새벽 독일 전역에서 수천 개의 유대인 상점이 파괴되고 유대교 회당은 거의 대부분 불타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살해당한 사망자 수만 91명에 달했으며,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뒤이어 힘러의 명령으로 약 3만명에 달하는 유대인 남성들이 체포되어 다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몇달뒤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부족한 물자 때문에 수백명이 사망한다. 이것이 바로 수정의 밤에 일어난 포그롬(유대인 박해)의 전말이다. 또한 독일 거주 유대인에게는 10억 마르크의 벌금을 부과하고 보상보험을 몰수하여[5] 수정의 밤에 피해를 입은 '''비유대계''' 사람들의 소유물을 변상하는데 적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치당은 더 이상 거추장스럽기만 한 법치국가의 허울을 유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 유대인을 박멸하자는 주장은 선전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렸다. 히틀러가 묵인하고 괴벨스가 연출하여 자발성이라는 탈을 쓰고 조직적으로 행해진 11월 밤의 이 유대인 학살은,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 독일의 조치가 이제는 확실하게 물리적인 폭력과 축출로 바뀌게 되었음을 확인시킨 사건이였다. 유대인에 대한 격리 정책은 다윗의 별을 겉옷에 달게 하는 것부터 시작되었고, 모든 유대인이 표식을 달고 다닐때 쯤 추방이 시작되었다. 나치 체제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이 1938년 10월에 열린 경제와 군비 확충 계획을 위한 회의에서 요청했던 것처럼, 유대인 문제는 "모든 수단을 통해"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유재산의 완전 몰수와 거지가 되어버린 유대인들의 강제 이송, 그리고 이들을 잠정적으로 수용할 게토의 설치뿐이었다.
이런 조치들의 실행을 반대할 만한 세력은 독일 내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다만 나치 독일 내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어떠한 방식으로 일을 추진하는가 정도였다. 사유재산 몰수는 포그롬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11월 10일에 이미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할 이익을 둘러싸고 4개년계획부 장관으로써 국가를 대표했던 헤르만 괴링과 당을 대표했던 선전부 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러자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와 더불어 포그롬 때문에 발생한 모든 피해에 대한 배상과 보상 책임은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각 부처 장관과 관료들은 이에 동의했다. 곧이어 우선은 유대인 소유의 상점들이 그리고 공장과 회사들이 그들의 말대로는 "아리안화"되었다.
유대인 소유 사업체들은 싼 값으로 독일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거나 해체되었다. 유대인들은 처분금조차 직접 관리할 수 없었고, 사업체를 처분한 대가로 받은 돈은 은행 계좌에 입금되었지만 그 계좌는 인출이 금지되었고 그 후 국가가 몰수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은 살기 위해서 갖고 있던 사치품과 보석들을 시중에 내다팔아야 했고, 당연히 정상가보다 헐값에 매매되었다. 유가증권주식은 매매조차 금지되어 강제 기탁금 형태로 보관해야 했다. 관청들은 일자리를 잃은 유대인들 가운데 노동 능력이 있는 일부를 군수 산업과 기타 부문에서 값싸게 착취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 때 반유대주의에 현혹되지 않고 유대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려 한 양심적인 사람들은 있었다. 물론 이들의 노력 만으로 독일 전역의 유대인 박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편 명분을 제공한 사건을 일으킨 헤어셸 그린츠판은 이후 교도소에 갇힌 뒤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그의 행방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960년에서야, '1944년쯤에 교도소 측의 학대 및 질병으로 죽었으며 시체는 대충 파묻혔다'는 교도관들의(이들도 자세한 건 몰랐고 전해들었다고) 대략적인 증언이 나타나서 1944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증언이 나온 같은 해에 법원에 의해 정식으로 사망이 선언되었다.

[1] 1938년 11월 학살. pogrom(포그롬) 자체가 폭동, 학살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 유래 단어다. 현재 독일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명칭을 많이 사용한다.[2] 원래 프랑스 정부가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하여 국외탈출한 스페인 공화파 인사들을 억류하기 위해 세운 수용소다. 1940년 본격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독일 등의 적대국 외국인들을 수용하였다. 나치의 점령 이후에는 비시 프랑스의 관할이 되어 유대인, 동성애자 등 나치가 적으로 지정한 이들을 가두는 강제 수용소가 되었다. 1942년 나치가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을 절멸시키기로 결정하자, 5500명에 달하는 이곳의 유대인들은 모조리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3] 참고로 이 이동은 유대인 이송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루어진 거의 유일한 경우다. 보통 유대인들은 서쪽에서 부헨발트와 같은 독일 영내의 노동 수용소들, 또는 거의 무정부 상태여서 증거 인멸이 쉬웠던 폴란드에 세워진 절멸수용소들로 이송되었기 때문이다.[4] 그의 가족은 뉘른베르크 인종법 직후 독일을 탈출, 프랑스에 거주했는데 비슷한 시기 폴란드에서 자국 바깥에서 5년 이상 거주할 경우 시민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졸지에 무국적자이자 불법체류자가 되었던 상태였다. 이들은 서프로이센의 폴란드 편입 당시 정든 고향을 버리고 자신의 조국인 독일을 택했던 유대인이다. 폴란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부터 유럽에서 유대인에게 가장 우호적인 곳이었으나 폴란드 독립 이후 폴란드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차츰 반유대주의 성향이 강해졌다.[5] 처음에 나치는 보험사들에게 유대인 가입자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보험사들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신용도에 문제가 생긴다고 항변하자 방침을 바꾸어 보험사들은 규정대로 보험금을 지급하고 대신 지급된 보험금을 국가에서 몰수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