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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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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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기
1. 개요
Louis Philippe II Joseph, duc d'Orléans
오를레앙공 루이필리프 2세 조제프.[1]
프랑스의 귀족. 프랑스 혁명 시기에 활동하였다. 별명은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 필리프 에갈리테)".
유력 계승자임에도 자신의 입지를 위해 혁명에 앞장선, 그야말로 교활할 정도로 지능적인 인물. 굉장히 속이 검은 인물이라 평가가 안 좋지만, 어떻게 보면 프랑스 혁명의 물주이기도 하므로 가볍게 보기도 어려운 인물이다.
2. 가계
그의 아버지 루이필리프 1세는 루이 13세의 현손자이자 루이 14세의 외증손자로, 루이 15세와 댓수가 같다. 그의 할아버지 필리프 2세는 루이 14세의 친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들이었고, 루이 14세와 그 첩인 몽테스팡 후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즉 자신의 사촌)인 프랑수아즈 마리와 결혼했다. 게다가 필리프 2세는 루이 15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 공작으로 프랑스를 통치하기도 했다.
즉, 루이필리프는 루이 16세의 먼 친척으로서, 방계 왕족 중에선 왕위 계승권 순위가 1순위였다[2] 그리고 그 자신도, 루이 14세가 몽테스팡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손녀 루이즈 마리 아들레이드와 결혼하였다.
3. 방탕한 귀족/자유 사상의 후원자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는 프랑스 왕국의 5%를 자신의 영지로 가지고 있는 강력한 영주였으며,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어서 부유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왕국 내에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져서 누구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던 오를레앙 공은 마지막 남은 하나를 노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프랑스의 왕위였다.
이 때문에 오를레앙 공은 자택 팔레 루아얄을 평민들에게 개방하고, 많은 자유주의 사상가가 오를레앙 공의 저택에 모여들었다. 왕국 최대의 대귀족이 왕국에서 위험시되는 혁명가와 자유주의자들까지 보호하는 탓에 혁명 세력은 오를레앙 공의 그늘 아래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을 지지했고, 왕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공격하였다.
4. 프랑스 혁명
왕위를 노린 오를레앙 공의 야심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지원하는, 일견 굉장히 모순적인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삼부회에서는 '''제3신분'''에 가담하였고, 진보적인 귀족들을 이끌고 국민의회에 합류하여 귀족들의 반란을 주동하였다. 바스티유 감옥 함락에서도 팔레 루아얄을 파리 민중들의 집결지로 활용하게 만들었다. 그 아들 '''루이필리프'''도 이 때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어서 혁명에 합류하였고 혁명군의 일원이 되기까지 했다.
혁명 결과 왕정이 폐지되자 오를레앙은 스스로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 필리프 에갈리테)"를 자칭하며 귀족의 칭호를 버렸다. 그리고 루이 16세의 처형에 한 표를 던졌다. 하지만 여전히 왕위를 향한 야심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5. 최후
뒤무리에 장군이 혁명 타도와 오를레앙 왕가 옹립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오를레앙 공, 아니 "평등한 필리프"는 뒤무리에와의 친분이 있었던 점 때문에 지롱드 파에 고발당했고 결국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아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나고 만다.
6. 후대
아들 루이필리프(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 3세)는 스위스로 망명했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스위스가 프랑스에 점령되자 이리저리 타국을 전전하였다. 하지만 오를레앙 공이 혁명 중에 쌓아둔 명성 덕분에 왕정복고 이후 작위를 회복하였고, 샤를 10세가 타도된 7월 혁명 뒤에 프랑스 왕위에 올랐지만, 루이필리프도 결국 2월 혁명으로 쫓겨나고 만다.
루이필리프는 오를레앙 공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그를 뜻하는 고유명사로 오를레앙 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굽시니스트는 졸지에 아들 루이 필리프를 빌리 해링턴으로 패러디까지 하면서 오를레Ang으로 만들고 말았다.
7. 미디어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에서는 초반부 흑막으로서 왕위를 노리고 루이 16세 황태자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여러번에 걸쳐 암살 및 사고사로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중반부에 들어가면 공기화. 후반부에 공화 세력에 가담하는 거 같았으나 로베스피에르는 동지들에게 왕위를 노리고자 우릴 이용하는 걸 다 알고있다고 비아냥거리며 그를 혐오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면 아예 사라진다...
오를레앙 공에게는 그레이스 엘리엇이라는 영국 귀족 출신의 정부가 있었는데, 엘리엇은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영국으로 귀국하고 난 뒤 Journal of My Life During the French Revolution라는 회고록을 썼다. 이 회고록을 원작으로 에릭 로메르가 영국 여인과 공작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1] 샤르트르 공작, 발루아 공작, 느무르 공작, 몽팡시에 공작, 그리고 대공 혹은 친왕으로도 번역되는 Prince de Joinville (주앵빌 친왕/프랭스 드 주앵빌)을 겸직했다.[2] 오를레앙 가보다 프랑스 직계왕실에 가까운 가문은 스페인 부르봉 왕가였으나, 스페인 계승전쟁 이후에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 직계왕실이 끊어지면 살리카법에 따라 왕위계승권이 있었다. 오를레앙 가문 다음이 부르봉-콩데 가문으로 앙리 4세 시절까지만 해도 왕위 계승 1순위 가문이었지만 이 가문은 나폴레옹이 이 집안의 마지막 상속자 앙기엥 공을 죽이면서 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