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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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BC4년 ~ AD65년 4월)
'''소 세네카(Seneca the younger)'''라고도 한다.
1. 개요
2. 생애
3. 어록


1. 개요


고대 로마의 철학자, 연설가,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를 궁중쿠데타 후 권좌에 올린 네로의 스승이자 권신으로, 권력을 쥐기 위해 황제와 모후 사이의 갈등을 방치, 조장하고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부디카 여왕 반란의 뒷배경을 제공한 , 악랄한 행적 등도 상당히 유명하다.
행적과 별개로 대표적인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중 한명이며, 남긴 여러 작품들이 라틴어 원전으로 사용될 정도로 상당히 수준 높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세네카의 라틴어 작품들은 키케로의 작품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저작과 함께 로마시대 고전 라틴어의 표준으로 여겨져서 중세시대 고전 라틴어 교육에는 세네카의 저작 원전이 라틴어 교과서로 주로 사용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공자논어가 동양 고전의 표준이듯 세네카의 수상집과 서간집이 서양의 라틴어 문화권의 고전으로 여겨졌다.
히스파니아 출신이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자국의 위인으로 생각하고 존경하고 있다.

2. 생애


로마 제국의 지방주인 히스파니아 울테리오[1]의 수도 코르두바에서, 귀족 마르쿠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와 헬비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네카의 아버지 마르쿠스 안나이우스 세네카[2]는 젊은 시절부터 당시 히스파니아 코르두바 지방의 토호이자 지방관으로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의 3대 황제를 보좌했으며 아들에 못지 않은 뛰어난 수사학자였기 때문에 대 세네카(Seneca the elder)라고도 부른다.[3]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나이에 이모의 등에 업혀 로마로 가 그 곳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정치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에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 아탈로스,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소티온에게서 철학을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무대에 나설 나이가 되었을 때, 심한 천식으로 인하여 당시 이집트 지방 지사를 하고 있던 이모부 가이우스 갈레리우스의 집에서 약 6년간 휴양 생활을 했다.
31년경 로마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황제 칼리굴라와 충돌했다. 세네카는 수사학적 웅변 실력이 뛰어났고, 정치적 야심이 상당했다. 따라서 프린켑스의 권한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젊은 황제는 아심가였던 세네카를 미워했는데, 세네카의 비리 등을 이유로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재판 도중 세네카의 변호인들이 천식으로 몸이 허약해 비쩍 마른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변론했기 때문에 칼리굴라는 세네카를 죽이지 않았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는 유달리 부유하고 명성이 자자하지만 고리대금업 등에 손을 대던 세네카 가문을 싫어했다.[4] 따라서 두 황제는 황실에 큰 위협요소가 될 세네카를 정치에서 배제하려 갖은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칼리굴라의 이른 암살과 클라우디우스의 견제 실패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5] 41년에 황제 클라우디우스 때, 황후 메살리나에게 세네카와 황제의 조카 율리아 리빌라 공주가 간통했다는 혐의로 고발됐다. 다행히 클라우디우스가 사형 판결 대신 세네카를 코르시카로 추방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끝냈지만, 세네카는 무려 8년간이나 부적합한 환경의 코르시카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이때 그는 자연과학철학을 공부했고 〈위로문 Consolationes〉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을 썼다. 메살리나가 죽고, 새로이 황제의 부인이 된 소 아그리피나의 영향력 덕분에 49년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50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결혼했으며, 친구이자 측근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Sextus Afranius Burrus)를 신임 근위대장에 임명시키는데 힘을 쓰는 등 로마 내에서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다. 이때 그는 자신의 친아들 네로를 권좌에 앉히고 싶어한 소 아그리피나 측과 연합해 훗날의 황제가 될 네로의 스승이 되었다.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자, 세네카는 소 아그리피나, 부루스 등과 연합해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을 깡그리 무시하고, 친위 쿠데타 형식으로 네로를 권좌에 올렸다. 세네카와 부루스는 권력의 정상에 오른 뒤, 자신의 친구들을 게르마니아와 파르티아 국경 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권을 장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네로는 세네카가 초안을 쓴 첫 대중연설에서 원로원에 자유를 주고 자유민과 여성의 영향력을 끝장내겠다고 약속했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Agrippina the younger)는 자기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따라서 네로 즉위 후, 세네카는 아그리피나 세력과 대립했으며,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젊고 미숙한 네로에게 예술 등 취미활동을 장려하는 등 입맛에 맞는 조언을 하면서 아그리피나의 네로에 대한 장악력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세네카와 부루스가 유능한 섭정들인데도, 네로를 둘러싼 권력 암투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이때 세네카와 부루스는 각각 히스파니아(스페인)와 갈리아(프랑스) 지방 출신이었지만 로마 세계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고, 네로에게 영향력이 점점 커졌기 때문에 네로의 신임 아래 재정·법률의 개혁을 단행했고 노예에 대한 좀 더 인간적인 태도를 장려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브리타니아 원정 전쟁 후, 이 일대의 노예 무역, 고리대금업 등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어, 부디카 여왕이 로마에 반란사건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세네카였다.
62년에 부루스가 죽자 세네카는 권력을 더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부루스에 이은 후임 근위대장이 세네카의 구린 부분들을 포착해 그를 항상 감시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그는 부루스 없이는 자신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직감했으며, 네로의 평소 행실과 그의 직계존비속 살해를 봤기 때문에 나이와 건강 등을 이유로 은퇴를 요청했다. 다행히 네로는 이 은퇴를 허락했다. 따라서 세네카는 정치 쪽에 일부러 끼어들지 않으면서 남은 생애 동안 매우 뛰어난 철학책 몇 권을 썼다. 그러나 65년 세네카는 피소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됐다. 이때 자신의 미래를 직감한 그는 네로에게 자살을 명령받고 꿋꿋하고 침착하게 최후를 맞이했다.[6]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부를 경멸했지만, 모순적으로 생애 브리타니아(영국) 속주에서 고리대금업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여 자산이 3억 세스테르티우스[7]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디오(Dio)에 따르면, 세네카가 가차없이 거둔 과도하게 비싼 이자가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부디카 반란이 확대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8]

3. 어록


스토아 학파의 거장으로 많은 명언들을 남겼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야 한다. 인생의 목표는 더 많은 일이 아니라 더 많은 한가로움이다.'''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하며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는 무엇을 말하는 것보다 무엇을 말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진실은 진실된 행위를 통해 전달된다.'''


'''분노라는 병은 모든 악을 압도한다. 가장 해로운 것은 숨겨진 분노이다. 분노를 떨쳐내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분노는 동정에 의해서 치유된다. 분노에서 자기 자신을 구하려면 다른 사람이 화내고 있는 모습을 냉철하게 관찰하면 된다.'''


'''스스로 비참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민중을 따르기만 하면 민중과 함께 망할 것이고 민중을 거스르면 민중에게 망할 것이다.'''


'''감사함을 표현하는 마음은 선을 베푸는 마음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다.'''


Non qui parum habet, sed qui plus cupit, pauper est.

'''가난하다는 말은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루키우스에 대한 서간집(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참으로 위대한 일은 언제나 서서히 이루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성장하는 법이다.'''


실제로는 에드워드 기번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인용된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The various modes of worship which prevailed in the Roman world were all considered by the people as equally true; by the philosopher as equally false; and by the magistrate as equally useful).

'''최악의 결정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짧은 이야기와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가 아니라, 가치다.'''[9]


Non exiguum temporis habemus, sed multum perdidimus. Satis longa vita.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충분히 길다.'''

''삶의 짧음에 관하여(De Brevitate Vitae)''

"인간은 항상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Quemadmoeum gladis nemeinum occidit, occidentis telum est.

'''검은 살인자가 아니다. 그저 살인자의 손에 들린 도구였을 뿐이다.'''

''루키우스에 대한 서간집(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죽기 전에 산 사람의 집단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극단적인 악이다.'''


Ignis aurum probat, miseria fortes uiros.

'''불은 황금을 시험하고, 역경은 강한 사람을 시험한다.'''

''섭리에 대하여(De Providentia)''


'''인생을 한탄하는 것보다 인생을 비웃는 것이 더 적합하다.'''[10]


'''설사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고 해도 가치 있는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If one does not know to which port one is sailing, no wind is favorable.

'''누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항해를 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될 수 없다.'''


[1] 현재의 스페인.[2] 기록에 따르면 80세가 넘는 나이로 장수했다. 만약 그 아들도 네로에 의해 자결을 명령받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만큼 오래 살았을 지도 모른다.[3] 당시 세네카 가문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가문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세네카가 그리스의 대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로마의 위대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의 거부(巨富)로도 불리는 이유이다.[4] 고대 로마에서 고리대금업은 공화정 시절부터 법적으로 이율을 정해 제한해 국가에서 통제했고, 사회문제가 되던 ‘사업’ 중 하나였다. 고리대금업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얻는 행위는 귀족, 기사계급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던 일이었다. 따라서 카이사르 암살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같이 명문귀족임에도 고리대금업에 손을 대는 이들도 꽤 있었다. 당시 로마 민중들과 농민들은 이들의 최대피해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같은 평민 계급 중에서 일정 재산 이상을 모은 기사계급 중에서 고리대금업, 세금징수대리, 경매업에 종사한 이들을 증오하고 가장 파렴치한 부류로 여겼다. 이런 생각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제들을 비롯해 원로원 내 귀족이나 지식인 중에서도 상당히 많았고, 이런 행동이 사회 엘리트로서 비도덕적이고 악랄한 행위라고 격렬하게 혐오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등 황제들은 법적 이자를 넘어가는 고리대금업을 인신매매 등과 마찬가지로 관용없이 강하게 처벌했다. 당시 세네카는 고리대금업 등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는데, 브리타니아에서 이런 고리대금업과 인신매매 등으로 원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부디카 여왕이 반로마 운동을 전개한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했다.[5] 훗날 세네카는 칼리굴라의 여동생, 클라우디우스의 조카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아들 네로의 편에 서서 클라우디우스의 죽음 후 네로가 친위대 쿠데타 형식으로 제위에 등극하자 그의 스승이 된다.[6] 자살을 명령받고 유언장을 작성하려 했으나 유언장을 작성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듣자, 그는 슬퍼하는 가족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지상의 부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 덕이 높은 삶의 본보기를 남긴다."[7] 약 300만 파운드, 한화로 45억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위 내용을 참조한 책이 1945년에 나왔으니, 1945년과 현재 사이의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하면 상상 이상의 금액일 수도 있다. 참고로 칼리굴라 황제가 '기행'을 저지를수 있었던 밑천이 티베리우스가 남긴 국고의 흑자 2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였다고 한다. 이것이 칼리굴라가 2년여에 걸친 기행을 하는데 밑천이었다. 네로는 티베리우스의 사후 20년도 안 돼서 로마 황제에 올랐으니 세네카의 재산 3억 세스테르티우스는 엄청난 금액임이 분명하다.[8] 버트런드 러셀 『서양 철학사』 중.[9] 이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K 롤링하버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도 인용했던 말이다.[10] It is more fitting for a man to laugh at life than to lament over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