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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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光烈
1898년 6월 27일 ~ 1981년 11월 1일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8년 경기도 파주군에서 태어났다. 한문을 공부한 뒤 독학으로 외국어를 익혔다. 1914년에 경성부 보성법률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2개월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1917년에는 방정환과 함께 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신청년'''을 발행하며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를 거쳐 다시 매일신보로 돌아와 매일신보에서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언론보국회에 가담하였고, '''조광''' 등에서 친일 논설문을 작성하였다.
8.15 광복 후인 1949년 신익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고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한동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한동석의 별세로 치러진 1956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이성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는 자유신문 주필,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2008년 공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출판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柳光烈
1898년 6월 27일 ~ 1981년 11월 1일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8년 경기도 파주군에서 태어났다. 한문을 공부한 뒤 독학으로 외국어를 익혔다. 1914년에 경성부 보성법률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2개월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1917년에는 방정환과 함께 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신청년'''을 발행하며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를 거쳐 다시 매일신보로 돌아와 매일신보에서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언론보국회에 가담하였고, '''조광''' 등에서 친일 논설문을 작성하였다.
8.15 광복 후인 1949년 신익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고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한동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한동석의 별세로 치러진 1956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이성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는 자유신문 주필,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2008년 공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출판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