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주(정치인)

 



李成株
1911년 3월 29일 ~ 1994년 11월 23일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 정치인이다.
1911년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면(현 북한 함경남도 신포시)에서 태어났다. 북청 대성중학교와 청구대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 북청군에 신포중학교를 설립하였다.
8.15 광복 후 우익 단체인 대한청년단 총본부 부단장,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이사, 제주도청경상남도청충청북도청의 경찰국장을[1] 재임하다가 내무부의 치안국장(1950년대~1960년대의 이사관급 경찰총수)으로 승진했다.
1956년 민주당 한동석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별세하자 경기도 고양군 선거구에서 재보궐선거가 치러졌다. 자유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정우회 장택상 국회의원을 공산당 대변인이라고 운운하여 대한민국 국회에서 징계동의안이 제기되었으나 투표에서 부결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1959년 신 국가보안법 파동 때 무술경위를 진두지휘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류광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 등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이후 해금되었다.
[1] 지금의 지방경찰청(행정자치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제1공화국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와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을 내무부의 치안국과 10개 도청의 경찰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한 경찰관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렸지만, 내무부가 모든 도청의 고위직(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통령도지사/국무총리→부지사/내무부 장관국장/내무부 차관과장)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방식으로 경찰국을 통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