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1. 모양
한글 글자 중에서 굉장히 가로획이 많은 글자이다. ㄹ 자체가 가로 획이 세 개인데 초성/종성에 다 쓰이고 세로로 이어지다 보니 '를'이라고 쓰면 가로획을 7개나 써야 한다. 그래서 작은 글자로 보면 빽빽한 세로줄로 보인다. '핥'이나 '밟' 같은 글자는 田자 모양으로 가로세로가 균형있게 작아지는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 그러면서도 조사로 꽤 자주 쓰이는 글자이므로 폰트를 제작할 때 꽤 신경 써야 하는 글자.
그런 사연으로 '를'은 작은 글자에서는 '룰'이나 '롤'과 구분하기 힘들 때가 많다. 두 글자는 조사로 쓰일 때는 없으니 조사 자리에서는 헷갈릴 일이 없지만, 외래어에서 쓰일 때는 약간 헷갈릴 수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ㄼ[1] , ㄽ, ㄾ, ㅀ은 홀로 있을 때 ㄹ로 소리가 나므로 '륿', '릀', '릁', '릃' 역시 '를'과 같은 소리가 난다. 하지만 모양부터가 매우 이질적인 것이 이 글자들은 한국어 역사를 통틀어서 쓰인 적이 없다.
사소한 특징으로 '를'은 뒤집어서 봐도 '를'이다. 다만 폰트를 제작할 때 보통 아래쪽이 커야 안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래의 ㄹ이 아주 약간 더 클 때가 많다.
2. 쓰임
조사를 제외한 한국어 동사/명사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ㄹ 글자 특성상 두음법칙의 영향으로 어두에선 거의 쓰일 일이 없고 그 외의 자리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편. 명사 중에서 '를'이 쓰이는 사례는 '겨를' 정도뿐이다. -르 동사 + ㄹ이 붙은 꼴로 동사에서는 가끔 찾아볼 수 있다. '고를 게 없다' 등등.
2.1. 한국어의 목적격 조사
'을'과 함께 한국어에서 목적격 조사로 쓰인다. 받침이 있으면 '을'; 받침이 없으면 '를'이 쓰인다(ex: 학생을 / 교수를). 구어에서는 받침이 없을 때 쓰는 이 '를'을 ㄹ#s-2 받침으로 줄일 수 있다(나를→날). 다만 인칭대명사나 의존 명사 등을 제외하고서는 한 글자일 때는 ㄹ받침으로 줄이는 게 조금 어색할 때가 있다. '자동찰 운전하다'라고는 꽤 많이 말하지만 '찰 운전하다'라고는 그렇게 많이 말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어의 주격/목적격 조사의 특성상 그냥 생략하는 것도 가능하다. '너 나 좋아해?' 같은 문장은 주격/목적격 조사가 모두 생략된 사례. 한국어에서는 주격과 목적격의 어순을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둘 다 생략하는 경우에는 주로 주격 - 목적격 순서대로 쓴다. 위의 문장도 그래서 '너(는) 나(를) 좋아해?' 식으로 중간 부분이 목적격 '를'이 생략된 형태로 여겨진다. 반대로 '나 너 좋아해?' 라고 하면 주격과 목적격이 바뀌게 된다.
2.1.1. 역사
한글 전 한국어 표기로는 거의 100이면 100 새 을(乙)을 썼다. 이 글자는 그닥 뜻이 없기 때문에 보통은 이 목적격 조사로 쓰이거나 한국어 고유명사의 ㄹ 받침을 표시하는 데 쓰였다. 유명한 향가 서동요에서도 乙이 목적격 조사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薯童房'''乙'''(서동방'''을''')' 乙이라는 발음만으로는 앞 단어가 개음절일 때의 '를'을 커버할 수는 없지만, 이두/구결의 전통에서는 앞 단어의 변화에 따른 매개모음 추가 등의 조사 발음 변화를 잘 반영하지 않았으므로 주로 乙로 썼다.
현대에 ㅡ로 쓰이는 것들의 몇몇 개가 그렇듯이 이 '을/를' 역시 조선 시대에는 ᄋᆞᆯ/ᄅᆞᆯ로 쓰이는 일이 많았다. 관동별곡(1585)를 보면 ᄅᆞᆯ로 쓰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조선 초에는 모음조화를 지켰기 때문에 양성모음에는 ᄅᆞᆯ을 쓰고 음성모음에는 를을 썼던 것으로 보이나(ex: 정긔를 / 그ᄃᆡᄅᆞᆯ) 성산별곡(1560)에서 '외씨ᄅᆞᆯ' 같은 표현도 보이는 걸로 보아 똑떨어지게 지키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른 아래아에 비해서 을/를에서의 아래아는 비교적 이른 시점에 사라져서 독립신문(1897) 창간사에서도 을/를은 아래아로 쓰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2.1.2. 다른 언어와 비교
일본어에서는 목적격 조사로 を를 사용한다. 이 글자는 조사 이외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는 점이 한글 '를'과 조금 유사하다. 하지만 음가를 아예 상실한 を와는 달리 '를'은 음을 잃어 다른 글자와 발음이 같아진 것은 아니다. 발음은 있는데 그냥 그 문장에서 안 쓰였을 뿐이다. 동사의 활용이 달라서 한국어에서 '을/를'을 쓰는 동사 중 일본어에서는 を를 쓰지 않고 が나 に를 쓰는 동사들도 있다.
터키어에서는 목적격 조사로 ı(으)를 사용한다고 한다.
굴절어에 속하는 언어들은 명사 자체가 변화하여 목적격을 나타내므로 목적격을 나타내는 특정 부분을 지칭할 수는 없다. 라틴어에서 flora(꽃)이 목적격으로 floram이 된다고 -m만 따로 떼서 목적격 역할을 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한편, 영어는 굴절이 약화되어 일반 명사가 주격이나 목적격에서나 같은 형태를 유지하는 게 특징.
고립어인 중국어는 주격 조사와 함께 목적격 조사 역시 존재하지 않고 어순으로 주격/목적격을 구분한다. 我爱你라고 하면 你가 곧장 목적격이 되는 식이다.
2.2. 외래어에서
유럽어에서는 한국어에 비해 자음만 단독으로 쓰일 때가 많은데, 단독 자음을 ㅡ로 적는 한글 특성상 '를' 역시 rl 등을 적는 데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샤를', '오를레앙, '카를', 바를러 등. 창작물의 고유명사이긴 하지만 를루슈처럼 '를'이 아예 어두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1] 넓죽하다, 넓둥글다에서는 ㅂ으로 발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