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전투
Battle of the Marne, First Battle of the Marne, Miracle of the Marne (영어)
La première bataille de la Marne, Bataille de la Marne (1914) (프랑스어)
Die Erste Schlacht an der Marne, Schlacht an der Marne (1914) (독일어)
Second Battle of the Marne (영어)
La seconde bataille de la Marne, Bataille de la Marne (1918), Bataille de Reime (프랑스어)
La Seconda battaglia della Marna (이탈리아어)
Die Zweite Schlacht an der Marne, Schlacht am der Marne (1918) (독일어)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마른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대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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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빨강이 독일의 우익인 육군 1군(클루크), 2군(뷜로우), 그리고 파랑이 프랑스 육군 6군, 영국 원정군, 프랑스 육군 5군이다. 1, 2군간의 연결이 끊기고 1군의 우측 측면이 6군에게 위협받자 점선 지역으로 전선을 물렸다. >
제1차 세계 대전 초반인 1914년 9월 6일~9월 10일에 난, 추후 대전의 판도를 결정한 대전투. 사실 전투 자체보다는 전투하기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초반은 독일 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양대 국가의 초기 전쟁계획에 기반해 돌아갔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육군을 대포위해 섬멸시키겠다는 계획이었고, 프랑스의 '제17계획'은 보불전쟁 당시 잃은 알자스-로렌 지방 회복을 위해 마찬가지로 우익에 병력을 모아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는다는 계획이었다.
막상 전쟁을 시작하니 프랑스의 제17계획은 바이에른 왕국 왕세자 루프레히트의 독일 육군 제6군에 막혀서 진격이 지지부진했고, 독일 우익의 육군 제1, 2군은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지나면서 쾌진격을 거듭한다. 그러나 전쟁 초반, 독일 육군의 우익은 절대 주력이 아니라는 기대심리에 사로잡히던 프랑스 및 영국 원정군 지휘부가 현실을 직시해 우익에서 좌익으로 미친 듯이 병력을 전용하고 예비군을 편성했으며, 반면 독일은 계획상 7:1이었던 우익:좌익 병력비가 3:1까지 약화하면서 1, 2군의 공세탄력이 둔화했다. 때마침 독일군 좌익의 제6군이 초기 방어전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면서 독일 육군 총참모부는 단익포위에서 제6군의 돌파에 따른 양익포위를 동시에 노렸으며, 동부전선의 러시아 제국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투 태세에 돌입하여 진격해오면서 동프로이센이 함락당할 위기에 놓이자[1] 상당한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차출하면서 우익의 공세탄력은 더욱 둔화했다.
이 때 독일 육군 제1군은 기동 중 접전 뒤 승리를 거뒀던 프랑스 육군 제5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예정됐던 파리 포위기동을 포기하고 파리 북동부로 기동코스를 변경한다. 이 때 독일 육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와 달리 군과 참모부 사이에 집단군급 지휘부가 없어서 제1야전군사령관인 알렉산더 폰 클루크 장군이 독단적으로 이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패전했지만 붕괴되지 않은 프랑스 제5군과 신편 프랑스 제6군, 영국 원정군은 독일 제1군의 측면을 잡았고 이에 독일 제1군과 제2군은 상호간 간격이 50km까지 벌어지며 큰 위기에 빠진다. 독일군은 곧 혼란을 수습하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3면에서 공격받는 상황이라 어느 한 쪽에 반격을 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문제였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는 파리 함락을 기정 사실로 보고 정부를 보르도로 옮긴 후 장기전을 준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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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광장에 집결하는 택시와 병력을 수송하는 택시들 >
그나마 독일군이 연합군을 돌파할 여지가 가장 많았던 전면(프랑스 제6군)은 파리에서 택시 부대가 끌고 오는 신병까지 받으면서 온 힘을 다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2]
한편 독일 육군 참모부는 참모장교 리하르트 헨취(Richard Hentsch) 중령에게 참모총장 전권을 위임해 전선시찰에 나섰는데, 헨취 중령은 전선을 시찰한 뒤 육군 제1군~제2군 간의 간격을 우려, 전선을 뒤로 물러 엔강 북안에서 전선을 정리시켰다.[3]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노도와 같이 밀려오던 독일군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프랑스는 이 전투를 '''마른의 기적'''[4] 이라고 칭송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 단기결전을 노린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각자 측면을 치기 위해 독일군과 연합군 판 바다로의 행진[5] , 즉 참호전을 시작한다. 이 때 독일 육군은 프랑스의 점령지 일부를 뱉어냈지만 미처 못 점령하던 벨기에의 영토 대부분을 흡수하여 악명 높은 예페르(Ieper = 이프르)전선을 세웠고, 여전히 파리에서 10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누아용을 최전선으로 삼아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조기 승전 가능성은 완전히 끝장나고, 그렇게 두려워하던 양면전쟁 장기전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다만 이 전투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독일의 조기 승전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견해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전례없이 거대한 양의 보급을 필요로 했는데, 이러한 보급은 기본적으로는 철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철도역을 최전방 근처로 마련할 수는 없는 노릇에다 적들이 철도 시설물을 그대로 놔둘 이유가 없으니 철도역에서부터 적지 않은 거리(최소 수십 km)의 운송을 인력, 혹은 말이 끄는 마차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슐리펜 계획에선 말이 먹을 마초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없어 이러한 마차를 이용한 수송 자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최전방 전선에서는 병사들이 보급도 제대로 못 받아 빵쪼가리나 씹으면서 탄약, 피복 등의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반면 후방 기차역에서는 기껏 보급품을 받아 놓고도 이걸 최전방까지 실어 나를 수단이 마땅찮아 헛되게 썩어가곤 했다.[6] 따라서 장거리를 진격하는 것은 당시의 보급 능력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만큼(특히나 뭐 이겨서 꽤 많이 진격했다 해도, '''거기까지의 철도 시설은 당연히 후퇴하는 적이 모두 파괴했을 것이고,''' 이러면 몇 안되는 마차, 인력 수송에 의지하는 보급선이 진격 거리만큼 길어지는 결과로 돌아왔을 것이다.), 설령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더라도 조기 승전을 거둘 수 있을 정도의 진격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참고)
제2차 마른 전투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마른강에서 펼친 마지막 대공세로 끝내 패배하였고 독일 제국의 항복을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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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앵-몽디디 전선에 대해 결정적 공격을 계획한 독일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그 전선에서 프랑스군을 빼돌리는 우회 작전을 폈다. 루덴도르프는 프랑스 랭스를 포위하고 프랑스군의 전력 분산을 노렸다. 그러나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랭스 동부에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독일군은 예상 밖의 저항과 역습을 받았다. 독일군은 여러 지점에서 마른 강을 건넜으나 겨우 몇 마일 밖에 진격하지 못하고 이탈리아 왕국군이 독일군이 에페르네를 가는 길을 봉쇄했다. 미군 제3사단도 샤토티에리에서 격렬한 공격을하여 강둑에 있던 독일군을 몰아냈고 독일군은 남서부에 집중화력을 하며 겨우 10km를 진격했으나 결국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 7월 18일에 독일군은 공격을 멈추고 연합군의 역습이 시작되어 프랑스와 미군 부대는 45km의 긴 전선에서 기습공격으로 독일군을 몰아붙여 3일 뒤에 프랑스군과 미군은 마른강을 건넜고 독일군은 엔벨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La première bataille de la Marne, Bataille de la Marne (1914) (프랑스어)
Die Erste Schlacht an der Marne, Schlacht an der Marne (1914) (독일어)
Second Battle of the Marne (영어)
La seconde bataille de la Marne, Bataille de la Marne (1918), Bataille de Reime (프랑스어)
La Seconda battaglia della Marna (이탈리아어)
Die Zweite Schlacht an der Marne, Schlacht am der Marne (1918) (독일어)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마른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대전투.
2. 제1차 마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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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빨강이 독일의 우익인 육군 1군(클루크), 2군(뷜로우), 그리고 파랑이 프랑스 육군 6군, 영국 원정군, 프랑스 육군 5군이다. 1, 2군간의 연결이 끊기고 1군의 우측 측면이 6군에게 위협받자 점선 지역으로 전선을 물렸다. >
제1차 세계 대전 초반인 1914년 9월 6일~9월 10일에 난, 추후 대전의 판도를 결정한 대전투. 사실 전투 자체보다는 전투하기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초반은 독일 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양대 국가의 초기 전쟁계획에 기반해 돌아갔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육군을 대포위해 섬멸시키겠다는 계획이었고, 프랑스의 '제17계획'은 보불전쟁 당시 잃은 알자스-로렌 지방 회복을 위해 마찬가지로 우익에 병력을 모아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는다는 계획이었다.
막상 전쟁을 시작하니 프랑스의 제17계획은 바이에른 왕국 왕세자 루프레히트의 독일 육군 제6군에 막혀서 진격이 지지부진했고, 독일 우익의 육군 제1, 2군은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지나면서 쾌진격을 거듭한다. 그러나 전쟁 초반, 독일 육군의 우익은 절대 주력이 아니라는 기대심리에 사로잡히던 프랑스 및 영국 원정군 지휘부가 현실을 직시해 우익에서 좌익으로 미친 듯이 병력을 전용하고 예비군을 편성했으며, 반면 독일은 계획상 7:1이었던 우익:좌익 병력비가 3:1까지 약화하면서 1, 2군의 공세탄력이 둔화했다. 때마침 독일군 좌익의 제6군이 초기 방어전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면서 독일 육군 총참모부는 단익포위에서 제6군의 돌파에 따른 양익포위를 동시에 노렸으며, 동부전선의 러시아 제국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투 태세에 돌입하여 진격해오면서 동프로이센이 함락당할 위기에 놓이자[1] 상당한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차출하면서 우익의 공세탄력은 더욱 둔화했다.
이 때 독일 육군 제1군은 기동 중 접전 뒤 승리를 거뒀던 프랑스 육군 제5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예정됐던 파리 포위기동을 포기하고 파리 북동부로 기동코스를 변경한다. 이 때 독일 육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와 달리 군과 참모부 사이에 집단군급 지휘부가 없어서 제1야전군사령관인 알렉산더 폰 클루크 장군이 독단적으로 이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패전했지만 붕괴되지 않은 프랑스 제5군과 신편 프랑스 제6군, 영국 원정군은 독일 제1군의 측면을 잡았고 이에 독일 제1군과 제2군은 상호간 간격이 50km까지 벌어지며 큰 위기에 빠진다. 독일군은 곧 혼란을 수습하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3면에서 공격받는 상황이라 어느 한 쪽에 반격을 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문제였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는 파리 함락을 기정 사실로 보고 정부를 보르도로 옮긴 후 장기전을 준비중이었다.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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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광장에 집결하는 택시와 병력을 수송하는 택시들 >
그나마 독일군이 연합군을 돌파할 여지가 가장 많았던 전면(프랑스 제6군)은 파리에서 택시 부대가 끌고 오는 신병까지 받으면서 온 힘을 다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2]
한편 독일 육군 참모부는 참모장교 리하르트 헨취(Richard Hentsch) 중령에게 참모총장 전권을 위임해 전선시찰에 나섰는데, 헨취 중령은 전선을 시찰한 뒤 육군 제1군~제2군 간의 간격을 우려, 전선을 뒤로 물러 엔강 북안에서 전선을 정리시켰다.[3]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노도와 같이 밀려오던 독일군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프랑스는 이 전투를 '''마른의 기적'''[4] 이라고 칭송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 단기결전을 노린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각자 측면을 치기 위해 독일군과 연합군 판 바다로의 행진[5] , 즉 참호전을 시작한다. 이 때 독일 육군은 프랑스의 점령지 일부를 뱉어냈지만 미처 못 점령하던 벨기에의 영토 대부분을 흡수하여 악명 높은 예페르(Ieper = 이프르)전선을 세웠고, 여전히 파리에서 10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누아용을 최전선으로 삼아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조기 승전 가능성은 완전히 끝장나고, 그렇게 두려워하던 양면전쟁 장기전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다만 이 전투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독일의 조기 승전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견해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전례없이 거대한 양의 보급을 필요로 했는데, 이러한 보급은 기본적으로는 철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철도역을 최전방 근처로 마련할 수는 없는 노릇에다 적들이 철도 시설물을 그대로 놔둘 이유가 없으니 철도역에서부터 적지 않은 거리(최소 수십 km)의 운송을 인력, 혹은 말이 끄는 마차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슐리펜 계획에선 말이 먹을 마초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없어 이러한 마차를 이용한 수송 자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최전방 전선에서는 병사들이 보급도 제대로 못 받아 빵쪼가리나 씹으면서 탄약, 피복 등의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반면 후방 기차역에서는 기껏 보급품을 받아 놓고도 이걸 최전방까지 실어 나를 수단이 마땅찮아 헛되게 썩어가곤 했다.[6] 따라서 장거리를 진격하는 것은 당시의 보급 능력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만큼(특히나 뭐 이겨서 꽤 많이 진격했다 해도, '''거기까지의 철도 시설은 당연히 후퇴하는 적이 모두 파괴했을 것이고,''' 이러면 몇 안되는 마차, 인력 수송에 의지하는 보급선이 진격 거리만큼 길어지는 결과로 돌아왔을 것이다.), 설령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더라도 조기 승전을 거둘 수 있을 정도의 진격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참고)
3. 제2차 마른 전투
제2차 마른 전투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마른강에서 펼친 마지막 대공세로 끝내 패배하였고 독일 제국의 항복을 촉진시켰다.
[image]
아미앵-몽디디 전선에 대해 결정적 공격을 계획한 독일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그 전선에서 프랑스군을 빼돌리는 우회 작전을 폈다. 루덴도르프는 프랑스 랭스를 포위하고 프랑스군의 전력 분산을 노렸다. 그러나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랭스 동부에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독일군은 예상 밖의 저항과 역습을 받았다. 독일군은 여러 지점에서 마른 강을 건넜으나 겨우 몇 마일 밖에 진격하지 못하고 이탈리아 왕국군이 독일군이 에페르네를 가는 길을 봉쇄했다. 미군 제3사단도 샤토티에리에서 격렬한 공격을하여 강둑에 있던 독일군을 몰아냈고 독일군은 남서부에 집중화력을 하며 겨우 10km를 진격했으나 결국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 7월 18일에 독일군은 공격을 멈추고 연합군의 역습이 시작되어 프랑스와 미군 부대는 45km의 긴 전선에서 기습공격으로 독일군을 몰아붙여 3일 뒤에 프랑스군과 미군은 마른강을 건넜고 독일군은 엔벨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1] 원래 총참모부의 계획은 프랑스를 항복시킬 때까지는 반격없이 러시아군의 공세를 받아내며 필요하면 동프로이센과 포젠은 러시아군에게 내주자는 것이었으나 문제는 정치계를 주름잡고 있는 인사들 중 상당수가 러시아군의 진격 목표인 동프로이센을 비롯한 동부 지방의 지방 귀족들인 융커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분들이 자기 땅이 적들한테 짓밟히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리가...[2] 택시뿐만 아니라 우유배달차, 자전거, 트럭, 자가용 등등 하여튼 바퀴가 달려서 빠르게 갈 수단이라면 다 동원했다! 이렇게 빨리 채운 팔팔한 전력들은 잇달아 야간공격을 펼쳐, 프랑스 육군의 근성이 넘치는 저항에 지친 독일 육군이 그사이 먹었던 땅을 다 뱉어내게 만들었다. 이는 발리언트 하츠 : 더 그레이트 워에서 간접적으로 체험(?) 해볼 수 있다.[3] 이토록 중요한 결정을 중~대장급 장군들에게 중령이 사실상 명령했다는 사실이 군필자들에겐 잘 이해가 안 갈 텐데, 독일 육군이 유달리 참모의 힘이 강했던데다 선술했듯 육군참모총장에게 전권을 위임받았기에 가능했다. 이는 다른 국가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데, 특정 단위 부대의 참모 장교는 대개 자신이 속한 부대의 예하부대장들보다 계급이 낮지만, 공문 발송시 등엔 자신의 지휘관의 이름을 빌려 "명령문" 형식으로 하여 사실상 자신의 상급자에게 지시를 내릴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 동부전선의 탄넨베르크 전투#s-3에서도 영관급 참모장교이던 막스 호프만 육군 중령이 작전을 짜서 러시아 육군을 물리쳤다.[4] 참고로 폴란드에도 이와 같은 '비스와강의 기적'이 있다.[5] 물론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재현하기에는 둘 다 성과가 그닥이었지만.[6] 반면 2차대전 서부전선에서는 미국의 거대한 자동차 산업에 힘입어 엄청난 숫자의 트럭으로 이러한 보급 소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순 있었지만, 말이 먹을 마초 문제처럼 수송 부대가 필요로 하는 유류 소모량 문제는 여전해서 보급선이 정도 이상으로 길어지면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꽃피는 건 마찬가지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