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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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립육군
이탈리아 왕립공군
이탈리아 왕립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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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군기
1. 개요
2. 이탈리아 왕국군의 제식병기
2.1. 육군
2.2. 공군
2.3. 해군
3. 왕립 육군 (Regio Esercito)
4. 왕립 공군 (Regia Aeronautica)
5. 왕립 해군 (Regia Marina)
6. 이탈리아군의 탄생


1. 개요


이탈리아 왕국군(Royal Italian Army)은 사르데냐 왕국,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 1861년부터 1946년까지 존재했던 이탈리아 왕국의 군대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는 협상국연합군의 한 축을 담당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군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무솔리니의 살로 공화국군과 기존 이탈리아 왕국군으로 갈라져, 이탈리아 전선 곳곳에서 충돌을 벌였고,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군으로 재통합된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같은 추축군인 독일 국방군일본군에 비해서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고,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으로 대표되는 최약체 군대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 등 피치 못할 졸전의 이유가 밝혀짐으로 인해 재평가받게 된다.

2. 이탈리아 왕국군의 제식병기



2.1. 육군



이탈리아군 보병장비 선전영상




2.2. 공군




2.3. 해군




3. 왕립 육군 (Regio Esercito)



3.1. 이탈리아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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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격돌하는 사르데냐 왕국군
이탈리아는 여전히 통일되지 않은 상태로 오스트리아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많은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에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자유주의 정부를 원하고 있었고 1848년 피에몬테 주에서 반오스트리아 혁명이 발생하였고 베네치아, 롬바르디아 왕국의 밀라노에서 연속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북부 이탈리아에 단결을 외치며 오스트리아 제국에 선전포고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사르데냐 군은 12,000명으로 구성된 군단으로 롬바르디아 지역의 혁명을 지원하였지만, 예상외로 혁명을 지원해주는 세력이 없었고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진압되어 패배를 인정하고 롬바르디아 지역에 간섭하지 않기로 서명한다.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이후 사르데냐 정부는 자신들과 함께 싸워줄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다. 유럽과의 관계 형성을 위하여 크림전쟁에 참여 이후 파리 평화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의 간섭행위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하였고 두 국가가 이탈리아 반도에 관심을 두는데 성공한다. 1858년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와 비밀협약을 맺는다. 조약의 내용은 니스사보이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대신에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 정부를 자극하여 그들이 사르데냐 군대를 해산하라고 압력을 행사하자 그것을 무시하였고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170,000명 사르데냐군. 70,000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220,000명의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하게 된다 연합군은 철도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피에몬테 지역에 소집된 연합군은 롬바르디아 지역의 오스트리아군을 진입하기 위해서 타치노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홍수가 발생하여 행군 속도는 둔화하였고 오스트리아군이 토리노 지역에 먼저 진입 연합군을 압박하게 된다. 연합군은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 지역으로 이동하여 포 강에서 도하작전을 하여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 피해를 입자 밀라노의 사각 요새로 후퇴하게 된다. 연합군은 솔페리노 전투, 산마르티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지만, 프로이센군의 전쟁 참여를 두려워한 프랑스는 단독으로 협상하여 사르데냐에 파비아, 롬바르디아 대부분 지역을 양도하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이에 이탈리아 통일을 원하던 사르데냐 정부는 항의하였지만 결국 굴복하고 협상에 수락하게 되었고 원래 약속대로 니스와 사보이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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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타피미 전투에서 시칠리아 저항군과 전투를 하는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프랑스의 독자적인 협상으로 통일의 꿈이 물 건너가고 니스와 사보이 지역이 양도되자 분노한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하여 프랑스를 공격하려고 준비하였지만 카밀로 카보우르가 설득을 하여 남이탈리아로 가도록 유도하였고 때마침 시칠리아 왕국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가리발디는 양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한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가리발디군은 양 시칠리아군과 시칠리아인들의 저항을 받지만 칼라타피미 전투에서 저항군을 분쇄했다. 가리발디의 붉은셔츠단의 활약 이후 양시칠리아 군은 붕괴하였고 붉은셔츠단은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그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 했지만 가리발디는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사르데냐 왕국에 양도한다.[1]
시칠리아 지역까지 손에 넣은 사르데냐는 1861년 토리노에서 대의회를 소집,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제 베네치아와 로마만을 남겨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제국의 소유였고 로마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통일은 또다시 지지부진해졌다. 통일이 느려지자 가리발디는 또다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를 공격하였지만 프랑스군에게 참패하여 카프레라 섬에 구금된다. 이탈리아는 안전하게 로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1864년 프랑스와 협상하여 2년 내에 로마에서 철수한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교황청은 부랴부랴 군대를 확장하였고 로마를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1866년 프랑스군은 로마에서 철수한다.
제 3차 이탈리아 통일전쟁 -작성중-
사르데냐 원정군의 양시칠리아 점령 이후 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통일을 발표, 직후 육군을 통합하여 이탈리아 왕국군을 편성하였다. 하지만 통일 이후 이탈리아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산적들과 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로 인해서 막심한 피해를 보고 새로운 육군 편제를 조직했다. 군을 각각 보병, 기병, 포병으로 나누어 이탈리아 육군 설립 첫날에 32만 명의 병사와 장교 1만으로 구성된 18개 사단을 편성한다.

3.2. 20세기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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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두아 전투에서 고전하는 이탈리아 왕국군
20세기 초반에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식민지가 되지 않고 남아있던 에티오피아에 눈독을 들인다. 이탈리아군이 에리트레아에 1,000명에 군대를 상륙시키면서 1885년 5월에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군의 전력을 무시하고 있었고 소수의 군대만으로도 에티오피아를 쉽게 점령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2] 이후 1896년 아두와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로 에리트레아소말릴란드 지역을 얻는 조건으로 에티오피아를 포기하게 되고 대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린다.
눈길은 돌린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만 제국이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 눈독을 들인다. 1897년 4월 25에 크레타에 상륙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1900년 7월 14일에 중국에서 벌어진 의화단 운동에 진압군으로 참여하면서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1911년 9월 29일에 이탈리아-터키 전쟁이 시작된다. 내부에서 천천히 붕괴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를 막을 힘이 없었고 10월에 트리폴리를 점령, 1912년에는 오스만제국과 강화 협상을 통해서 리비아 지역을 습득한다.

3.3. 제 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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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향해서 포격하는 이탈리아 포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1915년 5월 24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넘어 전진했다. 이탈리아에서 전투기탱크가 전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16년의 여름에 이손초 전투중에 사보티노(Sabotino)산에 전투에서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3] 장군이 지휘하는 4사단의 활약으로 고리 치아 지역을 점령하여 이탈리아 왕국군은 유리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손초 전투 자체가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의 무식하기 그지없는 소모전에 가까웠고,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수행 역량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긴 하였으나, 오스트리아군의 이손초 방어선을 제대로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1917년 10월 24일, 카포레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독일 부대의 맹공에 군단이 분쇄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이탈리아는 전술을 방어전으로 전환한다. 1918년 춘계 대공세를 위해서 독일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빠져나가고 이탈리아 왕국군은 카포레토 전투에서에 치욕을 갚기위해서 피아베 강에서의 방어전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몇배로 갚아줌으로써 복수에 성공했고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자가 될수 있었다. 근데 사실 이 때의 이탈리아군의 승리는 역사적 의미가 굉장히 강하다.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 그 이전의 신성로마제국은 사코 디 로마이래 이탈리아에 상전으로 군림하다시피했다. 심지어 통일 직전에도 북중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땅이다시피했고 통일 후에도 미수복 이탈리아를 점하고 대체로 이탈리아보다는 강하다고 평가받는 열강 대우를 받았는데 1차대전에서 몇백년 묵은 역관광을 해버린 셈이다. 그리고 이후 안슐루스 이전까지는 오히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의 상전이 되다시피했으니 실익 여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역전 사례는 사실 역사적으로 찾기는 어렵다. 물론 역전의 시작은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 프랑스와 짜고 롬바르디아를 얻은 것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918년에 왕립 군대는 해외로 원정군을 보냈으며 프랑스와 알바니아에서 일어나는 전투에 참여하였고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에 이탈리아 군대를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왕국은 전사자 60만 명에 부상자 90만 명 이라는 막심한 피해로 인해서 이탈리아 왕국군을 현재 편제로는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방위군 수준으로 군대를 재편성한다.

3.4. 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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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승리를 자축하는 이탈리아의 신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무지막지한 인명 피해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최소 인력만을 남기고서 규모를 대폭 축소한다. 그 후 전간기 동안 1922년 리비아 독립군과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여 국제사회로 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이탈리아는 여전히 에티오피아 지역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마침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대규모 부대와 많은 수의 장비를 에리트레아와 소말린란드 지역에 배치한다
이탈리아 동아프리카 부대는 소말리아 점령을 목표로 모가디슈와 소말리아 해안을 따라서 군병력을 이동, 배치하였다. 1935년 이탈리아 왕국의 군사적 행동에 에티오피아 왕은 전쟁을 개시하였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 10월에 말레브 강을 건너 에티오피아 왕국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진입하면서 승리하게 된다.[4]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프랑코의 민족주의자들에게 많은 수의 무기와 병력을 파견하면서 내전 기간 동안 자신들의 무기에 대해서 실전 테스트를 한다. 사실 말이 좋아 실전 테스트지, 이탈리아에서 보낸 지원병 군단(Corpo Trupo Volontarie, CTV)은 5만 명이나 되는 완편 군단급 규모에, 전투기도 700대 씩이나 동원했고, 예산적인 측면에서도 3년 내내 이탈리아 일년 예산의 14% ~ 20% 정도의 거대한 예산을 소모하면서, 이탈리아군의 신무기 개발, 편제 재편 등의 각종 군 현대화 계획을 작살내었다.
그러면서도 마드리드 포위전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던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같은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제 11 국제 여단에게 패배하는 등의 졸전을 거듭한 결과, 원래 목적이었던 체제 선전 및 스페인 내 이탈리아의 영향력 강화에 실패하고, 후일 벌어질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약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는 콘도르 여단을 제외하면 대대적인 전투 병력보다는 소수의 군사 고문, 기술자 파견에 주력하면서도 존재감도 부각 시키고, 스페인 내 영향력도 착실히 늘려가던 나치 독일과 대비되어, 프랑코 휘하 스페인 국민군 진영 병사들에게 조롱당하고, 심지어 '''같은 동맹국'''이었음에도 히틀러, 힘러 같은 작자들은 본인들 특기인 인종 품평을 할때마다 '''가난해도 상무정신이 있는 스페인인들에 비해 말이 좋아 열강이지 정신은 썩어 빠진 이탈리아인[5][6]'''이란 식으로 비웃기까지 했다.
1939년 4월 이탈리아군은 그리스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한다.
이후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왕국 수뇌부는 자국의 전쟁 역량을 분석했는데 스페인 내전에도 참여한 군수장관 카를로 파바그로싸(Carlo Favagrossa)는 적어도 1942년이 되어서야 대규모 작전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무솔리니도 군수장관의 판단을 수용하여, 독일과 강철 조약을 맺고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준비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불가침을 선언했다. 에티오피아와 스페인에서의 전쟁으로 군의 현대화가 완료되지 못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판단과는 달리 전쟁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이탈리아도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75개 육군사단을 편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단 편성도 뻥튀기 수준이었고[7] 다른 심각한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났다. 기갑 장비들은 탱켓이나 경전차가 주류였고 트럭, 기관총, 군복은 품질 불량이었고 장비 수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게다가 지역 정보 수집도 제대로 되지 않아, 작전에 들어갈 때마다 작전 지역 현지인에게 의존하는 등의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3.5. 제 2차 세계대전



3.5.1. 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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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산맥을 오르는 이탈리아 알피니 사단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대전이 발발한 후 한동안 중립적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영국에 연합군 쪽으로 참전할 의사가 있음을 타진한 적도 있는데, 이 때 요구한 조건이 지나치게 무리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전세가 독일 쪽으로 기울어지자 독일의 편을 들어 참전한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서부 알프스에 전선을 형성하여 1940년 6월 10일부터 1940년 6월 25일까지 총 15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프랑스군 국경 수비대와 충돌한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예전부터 알프스 요새 같은 방어시설을 갖춰둔 상태였으며, 방어시설을 우회하여 공세를 펼치기에는 알프스의 지형과 교통망이 영 좋지 못했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자신들보다 훨씬 수적으로 열세인 국경 수비대에 역으로 밀리는 추태를 연출하고 만다.
그래도 독일의 낫질 작전으로 인해 프랑스가 항복함으로서 이탈리아 왕국은 니스, 사보이 지방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성과를 얻기는 했지만, 15일이라는 전투 기간 동안 이탈리아 왕국군은 631명 전사, 616명 실종, 2,631명 부상 등의 피해를 입었다.
얻은 이익에 비해 손실이 너무 컸다.

3.5.2. 아프리카



3.5.2.1. 동아프리카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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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 전선에서 희생된 이탈리아군을 기리는 프로파간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 동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영국 식민지에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식민지 치안군 이외에는 마땅한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베니토 무솔리니는 영국의 식민지를 집어삼킬 요랑으로 이집트, 수단, 케냐 지방에 걸친 전면공세를 명령하였고, 영국령 소말릴란드에 주둔하던 소규모 식민지 치안군은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버텨내지 못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군은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영국군은 해군을 동원, 동아프리카 해안을 포위하는것을 시작으로 빠른 속도로 수단, 케냐 방면에서 공세를 펼쳤고, 앰바 알라지 전투에서의 패배와 곤다르 전투에서의 저항을 끝으로 1941년 11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수비대는 영국군에게 항복했고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모두 상실하고 만다.

3.5.2.2. 북아프리카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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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이탈리아군의 세모벤테 75/18 자주포와 지휘차량에 앉아 있는 롬멜
1940년 8월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의 패배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무솔리니는 이집트로의 전진을 명령한다. 하지만 군 지휘부는 보급상에게 문제를 거론하여 작전 수행을 거부했지만 무솔리니는 이집트에 정복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리비아에 파견된 25만에 군대를 동원하여 이집트를 공격하지만 우려하였던대로 보급선이 길어지자 130km 지점에서 더는 전진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 본토 상황이 나아지면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였고 이탈리아는 10주만에 800km이나 전선이 밀려버렸다 바르디아 요새와 토브룩 요새 등 중요한 군사적 거점을 잃어버렸고 많은 수에 장비와 인력을 잃으면서 이탈리아군의 사기는 바닥인 상태였다.
이런 이탈리아군의 상태를 본 히틀러는 북아프리카에 독일군 파병을 결정했고 에르빈 롬멜 중장을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군을 돕게 하였다. 롬멜의 지휘 아래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선전하며 배틀액스 작전은 성공하였고 영국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면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을 목표로 전진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의 패배로 더는 전진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미군이 횃불 작전에 성공하면서 아프리카 군단은 위축되었고 튀니지 전투에서 저항하지만 탈출로가 없어서 항복하게 된다.

3.5.3. 발칸반도



3.5.3.1. 알바니아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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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 알바니아를 토끼로 묘사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침략 야욕을 풍자화한 소련 신문
이탈리아 왕국군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인 알바니아를 무력 침공한 사건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이전부터 이탈리아는 1925년부터 광물 자원 채굴 조약을 시작으로 알바니아 왕국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1931년 알바니아 왕국은 이탈리아에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서 조약 갱신을 거부하였고 1934년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그리스와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영향력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1939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면서 이탈리아 또한 알바니아 합병할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합병이 불필요하다고 반대 하였지만 무솔리니는 왕의 의견을 무시하고 알바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내지만 알바니아는 거절한다. 이탈리아군은 22,000명에 군을 동원하여 알바니아에 상륙한다. 알바니아군은 14,500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탈리아 장교의 명령을 받는 상태였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대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 항복을 받아내고 알바니아의 왕 조구 1세를 해외로 추방한다.
이후 이탈리아는 동군연합 형식에 알바니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설립한다. 몇몇 탈영한 알바니아군과 알바니아 애국자들은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이탈리아군에 대항하였다.

3.5.3.2.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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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내부로 진군하는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병
1940년 10월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를 교두보로 하여 그리스 침공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면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고 '''메탁사스 방어선'''으로 대표되는 방어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그리스에 험준한 산악지형과 그리스군의 견고한 방어전으로 인해서 그리스 내부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역으로 알바니아까지 밀려난다. 그 이후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1941년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그리스에 개입할것을 요청하였고, 독일은 개입하기로 하였다. 마침 영국이 그리스를 지원하면서 독일의 침공 명분도 생겼다.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영국군과 연합한 그리스군을 패배시켰고, 결국 그리스 전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 이후 그리스를 해방하기 위해서 연합군이 그리스에 상륙하지만 그리스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바탕으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계속 저항한 탓에, 1945년이 돼서야 그리스를 해방할 수 있었다.

3.5.3.3. 유고슬라비아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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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에서 도로 검문을 하는 이탈리아군
유고슬라비아가 연합군 편으로 돌아서버리자 이탈리아군은 독일군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감행하고 짧은 시간 동안 전쟁을 수행한다. 그 이후 이탈리아군은 30개 사단을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배치하여 치안유지를 담당한다 하지만 30개 사단이나 되는 막대한 병력을 유고슬라비아에 주둔시킨 것은 이탈리아에게 도움이 안 되는 전력 낭비였고[8]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들은 이탈리아군에 계속해서 피해를 입혔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이탈리아군은 많이 와해된 상태였다. 결국 1943년 네레트바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탈리아 주둔군은 전면 붕괴되어 유고슬라비아에서 밀려나게 된다.

3.5.4. 동부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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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시베리아보병연대에 돌격을 감행하는 사보이 기병연대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이탈리아군에 참여를 요청한다. 하지만 이탈리아군 지휘부는 이탈리아는 현재 많은 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중이며 러시아 원정이 이탈리아의 산업력에 많은 부담이 될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무솔리니는 지휘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원정군의 편성을 명령한다.
신속하게 3 개의 사단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 군단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가 편성되었다. 동부 전선에 1941년 7월 중순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독일 육군의 제1 기갑사단과 함께 활동하였고 두 개의 다른 이탈리아 원정부대는 이탈리아 제8군 ARMIR(Armata Italiana in Russia)으로 재편성 후 1942년 4월에 다시 참가했다. 강의 지역에서 헝가리군 및 루마니아 제 3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전진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고 독일 지휘부는 이탈리아군을 루마니아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북부에 배치되어 돈 강 방어선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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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에 공세 이후 후퇴하는 이탈리아 원정군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소련군이 천왕성 작전(Operation Uranus)이 시작되면서 독일 제6군은 포위되고 루마니아군이 분쇄되어 버리자 이탈리아 원정군은 독일군에 퇴각을 요청하였지만, 독일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1942년 12월 11일 이탈리아가 예상했던 대로 이탈리아군을 소멸시키기 위한 소(小) 토성 작전이 시작된다.
이탈리아군은 소련군에 공세에 맞서서 처절하게 저항하였지만 기갑전력은 경전차세모벤테 구축전차 그리고 대전차무기는 소구경 대전차포산악포가 전부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리아군이 전멸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독일군도 지원물자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몇 정의 노획한 폴란드제 Wz.35 대전차 소총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1943년 1월 14일 이탈리아군의 실질적 전력인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 군단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산악병 군단은 엘리트 사단이였지만 그들이 싸우는곳은 평원이었고(...)[9] 무기 또한 빠르게 분해 조립이 가능한 65mm 산악포가 전부였고 1월 말까지 저항했지만 전멸하게 된다. 여기서 놀라운 건 알피니 사단이 추축군 사단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버틴 사단이였던 것이다. 평소 이탈리아군 이미지가 어땠는지 생각하면 대단한 전투능력이였다.
이후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마저 소련군에게 항복하였고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제6군 전체와 제 4기갑군의 대부분, 루마니아군 5개 사단. 이탈리아군 제8군이 괴멸당했고 이탈리아 군은 87,795명(장교 3,168명, 부사관 및 사병 84,627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34,47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며 전체 235,000명의 병력 중 114,520명을 손실했으며 대부분의 차량과 장비 역시 상실하였고 함께 원정 온 공군 전력 또한 괴멸되었다.

3.5.5. 이탈리아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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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독일 공수부대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이 개시된 지 한 달만에 연합군은 시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고, 곧 이탈리아 본토로 진군한다. 그 이후 이탈리아 정계에서 무솔리니 체제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 이탈리아 원로원 투표에 의해서 무솔리니가 실각하여 구금되고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사실상 항복 서명을 하게 된다.
하지만 휴전 발표 이후 히틀러는 격분하여 독일군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기로 결정하였고, 휴전도 개전만큼이나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었기에 휴전은 발표되었지만 상부로부터 아무런 명령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군은 부대에 그냥 대기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빠르게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북부의 이탈리아군을 장악한다. 독일군은 독일에 협력하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들을 사살했고, 해산되거나 탈영한 몇몇 이탈리아 군인은 파시스트 정권에 반대하는 민중들과 결합하여 독일군에 저항하는 파르티지아노가 되기도 하였다.[10]
대전 도중 반체제 저항 세력이 공개적 활동은 꿈도 못꾸는 살벌한 상황에서 지하에 꽁꽁 숨어있던 소수의 전쟁 이전 정치인, 지식인에 국한되었던 독일, 일본과 달리 이탈리아는 이전까지 중도, 좌익 세력이 정계를 주름잡고 있었고, 이는 무솔리니 집권 이후에도 바뀌지 않아 국내 반 체제 세력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그리고 무솔리니를 지지하던 이들도 끝나지 않는 긴 전쟁에서 이탈리아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자 하나둘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한다.
이는 1943년에 벌어진 봄의 밀라노, 볼로냐, 토리노 등 북부 공업 도시의 대파업을 기점으로 연합군의 진주에 따라 이탈리아 국내 저항세력이 본격적으로 거리로 쏟아 나오기 시작했고, 이 와중 항복한 이탈리아 왕국군 중 많은 수가 해방된 남부의 나폴리에 기반한 연합군 소속의 정부군에 참여하거나, 연합군이 돌파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치 독일과 괴뢰 살로 공화국 정권 아래 놓였던 북부에서는 빨치산에 가담했다. 1944년 가을쯤 되면 연합군 통제 아래 들어간 남부 이탈리아 왕국군과는 별개로 파시스트 점령 아래 지하 활동하는 빨치산만 해도 3만명 가량으로 규모가 크게 늘었다.
이후 북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에 있는 산장에 연금되어 있던 무솔리니를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군 특수부대가 구출하였고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의 살로에 무솔리니를 지도자로 세운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통칭 살로 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만든다. 한편 남부의 바돌리오 정부는 연합군과 함께 싸울 병력을 모집하였고 5사단을 신설하여 연합군과 함께 밀라노와 베니스를 향해서 전진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은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은데다 독일군이 적극적으로 방어전을 펼쳐 진격이 어려웠고 이탈리아 끝까지 올라가봤자 알프스 산맥 때문에 독일 본토로는 갈 수 없어 전략적 중요성도 높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서부전선이 개막되자 모두의 관심에서 잊혀졌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 미군 양측의 전선은 교착되고, 대신 후방의 빨치산 활동이 커지면서 이탈리아 역사학자들은 '''이탈리아 내전'''이라 부르게 된 44년 봄~45년까지 여러 빨치산 공화국 성립과 진압, 대민 학살, 파업과 도시-산촌 유격전이 중심이 된 게릴라전의 비중이 커졌다. 1945년 초 빨치산에 의해 무솔리니가 잡혀 처형된 후에 살로 공화국도 무너지고, 동시에 여러 전쟁 전 반파시스트 정파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 해방 위원회(Comitate di Liberazione Nazionale) 산하 이탈리아 빨치산들이 북부 도시들에 입성하며, 달마티아 일대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이 진주하면서 이탈리아의 전쟁은 끝나게 된다.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왕립 육군은 161,729명이 항복했고 73,277명이 사망하였고 12,000여 명이 실종되었으며 60,000여 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4. 왕립 공군 (Regia Aeronautica)



5. 왕립 해군 (Regia Marina)


자세한 것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 문서로.

1941년, 이탈리아 왕국 해군의 모습. 영상 뒷부분에는 이에 맞서는 영국 지중해 함대의 모습이 담겼다. 출처는 British Pathé.

1943년, 연합군에 항복하는 이탈리아 왕국 함대.
Decima Flottiglia MAS - 유명한 유인어뢰 마이알레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두척을 대파시킨 해군 휘하 특수 부대. 41년부터 43년말까지 다양한 작전을 펼쳤다.

6. 이탈리아군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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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공화국군의 M60 패튼 전차
1945년 11월 14일 연합군의 파리 조약 이후 이탈리아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고 새로운 이탈리아 육군을 설립하기로 하였고 기존에 존재하던 이탈리아 왕국군(남부 이탈리아군)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북부 이탈리아군)을 해산 시킨 후 제통합하였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의 차기 지도자인 움베르토 2세의 결정으로 이탈리아군으로 이름을 변경한다. 이탈리아군은 지역에 따라서 각각 4개의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총 9만 명의 군인이 모집되었고 국토 안보를 위해서 3개의 사단이 신설된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여전히 입헌 군주제 상태였고 움베르토 2세 또한 이탈리아를 입헌 군주제 국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46년 6월 2일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입헌군주정 유지 국민투표에서 46%의 지지밖에 얻지 못하여 움베르토 2세는 이탈리아를 떠나게되고 공화국이 되었으며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었고 새 헌법에 따라 엔리코 데 니콜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이 탄생한다.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는 1949년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면서 이탈리아군은 다시 유럽 국방에 한축을 담당하게 된다.

[1] 하지만 무력으로 점령하였기 때문에 시칠리아 인들이 애국심을 가지기는 힘들었고 현재도 남이탈리아와 북이탈리아의 지역감정으로 남아있다.[2] 에티오피아군은 인식과는 다르게 무기의 질에서도 유럽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다.[3] 무솔리니 축출 후, 국왕에 의해 임시 총리에 임명된 그 사람이 맞다.[4] 하지만 에티오피아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강점 기간 내내 게릴라 전투가 계속되었으며, 1941년 초 영국군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군하는 순간까지도 몇몇 지역은 여전히 하일레 셀라시에 1세를 지지하는 토착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5] 예를 들어 스페인이 파견한 청색 사단은 그 히틀러로부터 '독일군과 동급'이라는 평을 들으며 찬사를 받았으며, 실제로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크라스니 전투에서 숫적으로 압도적인 소련군의 공세를 격파하기도 했다. 물론 청색 사단의 다수가 스페인 내전의 베테랑 출신의 자원병들로 구성되었음은 감안해야 한다.[6] 2차 대전 말기 참전하기 싫다고 땡깡부리는 스페인에 대한 침공을 단념한 이유 중 하나가 스페인인들이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우려해서였다고 한다. 애초에 게릴라라는 말 자체가 스페인어에서 온 것이다.[7] 이탈리아 보병 사단 편제를 예로 들면 보병연대 2개, 포병연대 1개, 야포 36문, 대전차포 24문, 정원 14,600명 수준이고 동맹국 독일은 보병연대 3개, 포병연대 1개, 야포 72문, 대전차포 36문, 총원 18,500명으로 수적으로도 병력 차이가 나지만 야포나 대전차포 등 화포에 숫자도 더욱 적었기 때문에 전투력에 심한 차이가 났다.[8] 뒤에 서술하는 러시아 파병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전선에 귀중한 전략적 자원들을 낭비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전력을 북아프리카와 그리스 방면에 투자하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탈리아가 파병을 한 이유는 무솔리니의 허영심에 의한 행동에서 나온 것도 있었지만 독일의 요구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탈리아는 독일에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독일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없었다.[9] 원래는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코카서스 산맥에 보내질 예정이였으나 히틀러가 코카서스를 독일군 위주로 손에 넣으려 하자 산악병이 전혀 상관없는 러시아 평원에 보내지게 된 것이다.[10] 같은 시기 일본군도 중국에 주둔해 있던 이탈리아군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하여 베이징, 톈진, 상하이 등지의 이탈리아 조계지를 접수하고 주둔 병력의 항복을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