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리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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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lieffenplan(독일어)
빌헬름 2세 즉위 뒤 공격적인 대외정책으로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이 결렬되자, 프랑스는 1892년에 러시아 제국과 러불동맹을 체결했다. 이로서 독일 제국은 양면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에 독일 참모본부는 이런 불리한 여건을 타개하려고 전쟁 계획 수립에 착수한다.
당시 독일 제국군 참모본부는 러시아 제국의 전근대적인 행정체계와 부실한 철도수송망을 고려해 예비군의 동원, 편성, 훈련, 최전선까지의 수송까지 최소 2달 이상(6주 이상)이 걸리리라 예상했다.[2] 따라서 러시아 전선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해서 견제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막고[3] , 그와 동시에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서 프랑스를 39일만에 박살내고 42일차에 점령을 끝낸 뒤 주력군을 빠르게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계획을 구상한다.
프랑스를 치기 위해 슐리펜은 보불전쟁 당시 격전지인 스당 등의 중부전선 지역을 회피하고 우익에 전력을 집중, 대우회를 통해 파리를 북부에서 포위한 다음 프랑스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도 보불전쟁으로 상실한 실지인 엘자스-로트링겐의 확보를 위해 우익(독일측의 좌익)으로 주력을 투입한다는 제17계획을 세운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헛점을 찌른, 설정만으로는 잘 짠 계획이다. 정작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독일 본토로 하는 공세야말로 프랑스로서는 가장 안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럴 가능성은 적다라 판단했었다. 프랑스가 제17계획을 만든 까닭은 그래도 독일이 차마 중립국인 벨기에를 못 침공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그 때 독일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더불어 당시 독일의 예비군 동원 능력은 프랑스를 훨씬 상회했으니 전쟁이 터지면 즉각적인 공격으로 평시 전력을 최대한 강력하게 써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이 계획을 간략하게 간추리면,
병력 수송 등 여러 문제점이 있으나 가장 크게 작용한 건 소(小)몰트케[4] 의 수정안(1911)이었다.(마른 전투 이후 몰트케는 해임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임명되었다.)
슐리펜 계획은 단기결전을 염두한 것이었다.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슐리펜 계획에서의 독일은 우익 5개군을 네덜란드, 벨기에, 아르덴 지역으로 대우회시키고 좌익 2개군은 전략적 후퇴를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포위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小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에 초를 쳤다. 그는 수정안을 제시했는데 결론적으로 군사력 집중의 원칙의 이점과 슐리펜의 함정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중립국인 것을 고려하고 영국의 전쟁 불참 방안을 강구하는 것을 생각하던 小 몰트케는, 전 전선에서 동시에 승리하는 것과 러시아의 빠른 군사력 회복에 따라 서부전선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우익과 좌익의 병력 비율을 7:1에서 3:1로 변경하였고 독일 1,2군은 18개에서 13개 군단으로 축소하여 군사력 집중의 원칙의 이점을 포기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승리하기 위해 우익 병력(4,5개 군단)을 일부 동부 전선으로 전환하였고, 우익 전선 후방에 있던 6개 후비군단(예비대)을 좌익 지원 가능 위치로 이동시키면서 우익의 군사력이 슐리펜 계획을 달성할 수 없게 되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프랑스와 러시아, 그리고 벨기에를 침공함으로 영국까지 한꺼번에 상대하는 엄청난 계획인데도 독일 정부 내에서 전혀 소통이 없었다는 것이다. 외무장관이나 재상과 같은 민간 정책결정자는 물론이고 해군이나 육군 내 다른 조직과의 협의도 거의 전무해 일급 비밀인 전쟁계획을 다른 부서와 공유해 문제점을 점검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 슐리펜 계획은 슐리펜이 퇴임한 1906년에 메모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전쟁부는 6년이 지난 1912년이 되어서야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알았다.
먼저 '42일'이라는 시간 안에 프랑스를 잡아야만 했고, 프랑스의 자금지원으로 러시아가 철도망을 확충하면서 실제적인 시간제한은 갈수록 짧아졌다. 이 때문에 계획의 유연성이 아주 떨어져 일단 발동하면 멈추거나 바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실제 계획(소몰트케의 수정안)을 따를 때 여실하게 드러났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빌헬름 2세가 참모총장 소몰트케에게 계획 변경을 요청했지만, 소몰트케는 수많은 시간표로 서로 이은 계획을[5] 그렇게 단시간 안에 못 바꾼다고 답변하며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그날 밤, 뒤늦게 황제 빌헬름 2세가 '''"영국과 타협할 수 있다. 군대를 멈춰라!"''' 라고 명하자 소몰트케는 반쯤 넋이 나가서 이렇게 답했다. '''"폐하, 이미 시작했습니다."''' 이건 이미 못 멈출 수준까지 왔다는 뜻이었지만, 사실 정말로 그 순간 독일 제국군 일부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는 없었는데, 당시 기술의 한계로 정밀시계처럼 맞춰놓은 철도사용체계를 멈추는 그 순간, 한 달 동안은 공격은 꿈도 못 꾸고 방어를 위한 열차동원조차도 불가능해지는 큰 문제가 발생해버린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가 그 타이밍에 독일로 치고 들어오면 독일로서는 얼마 안되는 기병연대들이 자력행군하는 것 외엔 손도 못쓰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직성 때문에 영국의 참전을 불러오는데, 개전 초 영국은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지 않는다면 대륙의 전쟁에 끼어들 의사가 약했다.[6] 개전 초 프랑스의 영국 참전을 위한 외교적 노력은 애처로울 정도.[7] 그러나 독일은 예정한 작전 수행을 위해 당시 중립을 지키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까지 쳐들어갔으니 영국은 독일에 개전을 선포한다. 영국 해군과 육군이 제1차 세계 대전 수행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스스로 패망의 원인을 불러들인 꼴. 게다가 슐리펜 계획(소몰트케의 수정안)은 '''영국의 불참'''을 강구하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시점에서 계획은 이미...[8] 요약하자면 영국은 불러오고, 주력부대는 약해졌단 소리다.
이러한 원초적 약점에 더해 소몰트케는 슐리펜이 유언으로까지 남겼던(죽기직전까지 머릿속에서나마 계획의 업데이트를 하고 있었고 사단 몇 개만 더 있었더라면을 혼잣말을 내뱉던 일도 있었다. 그만큼 이 계획은 그에겐 국가에 대한 마지막 충성이었으며 동시의 그 자신의 혼신의 역작이었다.) 우익강화 방침을 저버리고 우익: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6:2로 약화시켰다.
벨기에 방면 병력의 약 1/7이 서부전선의 좌익인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간 것이라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지만, 네덜란드의 저항을 우려해서 마스트리흐트 돌출부를 점거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줄어든 우익 병력이 이동할 통로가 더 좁아짐은 당연했다.[14] 또한 군대로 위협하면 순순히 무릎을 꿇으리라 생각했던 벨기에가 예상외로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계획은 더 지체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이 동원을 일찍 끝내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부전선에 투입하면서 개전 초 동프로이센이 위험했고, 이에 따라 슐리펜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예비대를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 예비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동부전선은 안정화되었고, 서부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다시 열차를 타고 돌아갔다. 하지만 서부전선도 예비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패배하면서 단기전의 가능성이 사라져고 참호전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어버렸다. 끝내 이 금쪽같은 병력은 철도에 탄채 독일 영토를 동서로 왔다갔다만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 제국군은 단기결전에 실패하고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양면전쟁, 장기전의 늪에 빠저든다.
서부전선에서도 본래 프랑스군을 붙들어 두기로 했던 독일 제국군의 좌익이 예상외로 선전하자, 단익포위에서 양익포위를 위한 전선돌파를 명령하는 등 갖가지 전투지도상의 실책을 연발한다. 괜히 눈 앞의 상황에 매달리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버리면서 단기결전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이다.
전략적으로 포기하기로 한 동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의 시작이자 심장부였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의 실력자들은 불안감이 심했다. 러시아가 생각보다 빨리 참전했을 때, 러시아가 동원한 군대는 70개 사단이었다. 하지만 이에 맞설 독일 제국군은 겨우 12개 사단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몰트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제국을 공격할 때 독일 제국군의 즉각적인 지원 의사를 표명했다. 물론 독일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으므로 명백한 소몰트케의 거짓말.
끝내 뛰어난 전략가였던 참모 막스 호프만의 건의로 탄넨베르크 전투#s-3와 마수리안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대승을 거두지만, 이건 결과론에 가깝다. 슐리펜은 동부전선은 프랑스를 쓰러뜨릴 때까지 전황유지만 하면 된다고 봤기 때문에, 여차하면 동프로이센을 (일시적으로) 내주는 전략적 후퇴도 고려한다는 강경책이었지만,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동부 지역을 근거로 하고 있던 독일 제국의 상층부[15] 는 이를 결코 수용할 수 없었으며 이건 독일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끝내 동부전선의 강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본래 슐리펜 계획은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관계가 틀어진 덕분에 단기간에 결판을 봐야 승산이 있다는 결론에서 세워진 전략이었으니, 끝내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유지한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틀어버린 빌헬름 2세가 모든 배경의 근원임을 빼면[16] , 누가 더 문제라고 일컬을 수도 없었다.
'''망했어요. 현실은 시궁창.'''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완벽한 계획을 꿈꾸는 것이라는 자기네 선조의 금언을 무시한 결과 슐리펜 계획은 1차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초반기에는 슐리펜이 프랑스의 가장 하책이라고 여긴 '''알자스 진공'''을 프랑스군이 기꺼이 해서 장밋빛 미래가 보였으나, 벨기에의 저항으로 이레 가까이 전선이 벨기에 방면에 묶였고, 센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버텨보려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의 작전[18] 을 프랑스군 소장파와 노장 조제프 갈리에니가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어 역사적인 마른 전투가 났다.
끝내 이 싸움에서 측면을 찔린 독일 제국군이 안정적인 고지대를 선점하러 전선을 조금 물리면서, 서부 전선은 북해 연안에서 스위스 국경지대까지 참호가 나왔다. 그리고 피로 피를 씻는 4년 간의 참호전이 열렸다.
그리고 이 참호전 속에서 굴렀던 아돌프 히틀러는 극도로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1939년 전격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키면서 전선을 서쪽으로 한정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어떤 뜻에서 보자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서쪽으로만 급속 진군한 독일 국방군의 모습이야말로 슐리펜 계획의 진정한 형태였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진격할 때 알자스-로렌 방면은 라인 강과 보주[19] 산맥 및 고지대를 지나야만 하니, 신속하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려면 저지대 지역인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한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신속하게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려면 역시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하며, 실제로 1913년의 프랑스군 총참모장은 독일 제국과의 전쟁 시 벨기에를 통과해서 독일 영토로 진격하자는 제안을 총리에게 했다. 슐리펜 계획에서 설정한 돌파경로는 보편타당한 셈. 그러나 이건 프랑스 입장에서나 그럴 듯한 이야기지 예정에도 없는 양면전쟁을 벌여서 시간에 쫓기는 독일 제국에게는 울며 겨자먹는 도박일 뿐이다.
1차대전과 슐리펜 계획은 전쟁에서의 철도의 역할을 보여줬지만 그 한계 또한 같이 드러냈다. 연합군과 동맹군은 철도를 이용해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성공했고, 그 부대를 유지할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철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철도 종단점은 전투부대를 따라가기엔 너무 경직되었으며[20] , 따라서 대부분의 전투부대는 철도 종단점과 한참 떨어져서 행동해야 했다. 게다가 철도 종단점과 전투부대 사이를 이어줄 수송부대는 전쟁 초기의 병력동원 시점에서부터 전투부대와 떨어져버렸다.[21] 결국 철도역에는 피복과 탄약이 굴러다니고 전투식량이 썩어가고 있었지만, 전선에 도달하는 양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당시에도 구데리안이 화물차를 전투용으로 개조하고 싶다고 말했던 일화가 있던 만큼(이 말을 들은 군수장교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럼 밀가루는 누가 옮겨?''')화물차는 있었지만 차량조차도 대중화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고 현가장치들도 기술적 개념 제시는 몰라도 실용화는 저조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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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의 작성자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 장군은 사진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전형적인 독일 장군이었던 듯하다. 새벽녘에 부관과 같이 바깥 순찰을 돌다가 부관이 아침 햇볕에 빛나는 동프로이센을 흐르는 프레렐 강의 경치를 보며 감탄하자, 흘끗 쳐다보고는 "사소한 장애물일 뿐!"이라 일갈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고 한다. 거기다가 시계마냥 철저하게 시간표대로 생활했다고.
만화가 굽시니스트가 프랑스 침공과 슐리펜 계획을 소재로 다룬 적이 있다. 움직이는 일의 어려움
2013년에는 다큐전문 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한 1913년~1917년기의 제1차 세계 대전 때 화성인이 쳐들어와 웰즈의 우주전쟁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The Great Martian War'라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화성인 군대를 피해 모든 독일 제국군 및 독일 민간인들을 프랑스로 대피시키는 작전으로 나온다.
Schlieffenplan(독일어)
1. 개요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1905년 12월 작성해 제1차 세계 대전 초반의 양상을 결정지은 독일 제국의 전쟁 계획. 제2차 세계 대전의 프랑스 침공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계획이다."Kein Plan überlebt die erste feindberührung."
적과의 첫 접촉 이후까지 살아남는 계획은 없다.[1]
빌헬름 2세 즉위 뒤 공격적인 대외정책으로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이 결렬되자, 프랑스는 1892년에 러시아 제국과 러불동맹을 체결했다. 이로서 독일 제국은 양면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에 독일 참모본부는 이런 불리한 여건을 타개하려고 전쟁 계획 수립에 착수한다.
당시 독일 제국군 참모본부는 러시아 제국의 전근대적인 행정체계와 부실한 철도수송망을 고려해 예비군의 동원, 편성, 훈련, 최전선까지의 수송까지 최소 2달 이상(6주 이상)이 걸리리라 예상했다.[2] 따라서 러시아 전선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해서 견제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막고[3] , 그와 동시에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서 프랑스를 39일만에 박살내고 42일차에 점령을 끝낸 뒤 주력군을 빠르게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계획을 구상한다.
프랑스를 치기 위해 슐리펜은 보불전쟁 당시 격전지인 스당 등의 중부전선 지역을 회피하고 우익에 전력을 집중, 대우회를 통해 파리를 북부에서 포위한 다음 프랑스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도 보불전쟁으로 상실한 실지인 엘자스-로트링겐의 확보를 위해 우익(독일측의 좌익)으로 주력을 투입한다는 제17계획을 세운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헛점을 찌른, 설정만으로는 잘 짠 계획이다. 정작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독일 본토로 하는 공세야말로 프랑스로서는 가장 안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럴 가능성은 적다라 판단했었다. 프랑스가 제17계획을 만든 까닭은 그래도 독일이 차마 중립국인 벨기에를 못 침공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그 때 독일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더불어 당시 독일의 예비군 동원 능력은 프랑스를 훨씬 상회했으니 전쟁이 터지면 즉각적인 공격으로 평시 전력을 최대한 강력하게 써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이 계획을 간략하게 간추리면,
- 전선을 양쪽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선 프랑스와의 전면전에 집중해야 한다.
- 일단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승부를 본다. 그 사이에 전력의 10% 가량을 동부로 돌려 최대한 러시아의 공세를 지연시킨다.
- 오스트리아(B계획, R계획)를 내세워 러시아(A계획, G계획)를 막는다.
- 프랑스를 박살낸 뒤엔 남은 전력을 동원하여 러시아를 이기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한다.
2. 문제점
병력 수송 등 여러 문제점이 있으나 가장 크게 작용한 건 소(小)몰트케[4] 의 수정안(1911)이었다.(마른 전투 이후 몰트케는 해임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임명되었다.)
슐리펜 계획은 단기결전을 염두한 것이었다.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슐리펜 계획에서의 독일은 우익 5개군을 네덜란드, 벨기에, 아르덴 지역으로 대우회시키고 좌익 2개군은 전략적 후퇴를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포위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小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에 초를 쳤다. 그는 수정안을 제시했는데 결론적으로 군사력 집중의 원칙의 이점과 슐리펜의 함정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중립국인 것을 고려하고 영국의 전쟁 불참 방안을 강구하는 것을 생각하던 小 몰트케는, 전 전선에서 동시에 승리하는 것과 러시아의 빠른 군사력 회복에 따라 서부전선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우익과 좌익의 병력 비율을 7:1에서 3:1로 변경하였고 독일 1,2군은 18개에서 13개 군단으로 축소하여 군사력 집중의 원칙의 이점을 포기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승리하기 위해 우익 병력(4,5개 군단)을 일부 동부 전선으로 전환하였고, 우익 전선 후방에 있던 6개 후비군단(예비대)을 좌익 지원 가능 위치로 이동시키면서 우익의 군사력이 슐리펜 계획을 달성할 수 없게 되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프랑스와 러시아, 그리고 벨기에를 침공함으로 영국까지 한꺼번에 상대하는 엄청난 계획인데도 독일 정부 내에서 전혀 소통이 없었다는 것이다. 외무장관이나 재상과 같은 민간 정책결정자는 물론이고 해군이나 육군 내 다른 조직과의 협의도 거의 전무해 일급 비밀인 전쟁계획을 다른 부서와 공유해 문제점을 점검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 슐리펜 계획은 슐리펜이 퇴임한 1906년에 메모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전쟁부는 6년이 지난 1912년이 되어서야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알았다.
2.1. 계획 시
먼저 '42일'이라는 시간 안에 프랑스를 잡아야만 했고, 프랑스의 자금지원으로 러시아가 철도망을 확충하면서 실제적인 시간제한은 갈수록 짧아졌다. 이 때문에 계획의 유연성이 아주 떨어져 일단 발동하면 멈추거나 바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실제 계획(소몰트케의 수정안)을 따를 때 여실하게 드러났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빌헬름 2세가 참모총장 소몰트케에게 계획 변경을 요청했지만, 소몰트케는 수많은 시간표로 서로 이은 계획을[5] 그렇게 단시간 안에 못 바꾼다고 답변하며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그날 밤, 뒤늦게 황제 빌헬름 2세가 '''"영국과 타협할 수 있다. 군대를 멈춰라!"''' 라고 명하자 소몰트케는 반쯤 넋이 나가서 이렇게 답했다. '''"폐하, 이미 시작했습니다."''' 이건 이미 못 멈출 수준까지 왔다는 뜻이었지만, 사실 정말로 그 순간 독일 제국군 일부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는 없었는데, 당시 기술의 한계로 정밀시계처럼 맞춰놓은 철도사용체계를 멈추는 그 순간, 한 달 동안은 공격은 꿈도 못 꾸고 방어를 위한 열차동원조차도 불가능해지는 큰 문제가 발생해버린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가 그 타이밍에 독일로 치고 들어오면 독일로서는 얼마 안되는 기병연대들이 자력행군하는 것 외엔 손도 못쓰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직성 때문에 영국의 참전을 불러오는데, 개전 초 영국은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지 않는다면 대륙의 전쟁에 끼어들 의사가 약했다.[6] 개전 초 프랑스의 영국 참전을 위한 외교적 노력은 애처로울 정도.[7] 그러나 독일은 예정한 작전 수행을 위해 당시 중립을 지키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까지 쳐들어갔으니 영국은 독일에 개전을 선포한다. 영국 해군과 육군이 제1차 세계 대전 수행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스스로 패망의 원인을 불러들인 꼴. 게다가 슐리펜 계획(소몰트케의 수정안)은 '''영국의 불참'''을 강구하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시점에서 계획은 이미...[8] 요약하자면 영국은 불러오고, 주력부대는 약해졌단 소리다.
- 대규모 물자를 철도로 날라야 하는데, 철군 시 철도 파괴는 상식적으로 하는 일이었고 철도 지점 중 중요한 곳은 요새가 이미 있는데다 철도 복구 부대는 편성도 제대로 안한 상태였다. 따라서 철도 복구 능력이 전진하는 병사의 속도를 못 따라갔다.[9] 끝내 후방에서 대량의 물자가 부패, 파손하는 사이 주 보급을 마차와 몇 대 안되는 자동차, 인력, 현지 약탈로 충당했다. 이런 현지 약탈, 학살 등으로 독일 제국군은 훈족과 비교당하는 등 이미지가 크게 떨어졌고, 이는 전쟁 기간 사이 외교전에서도 상당한 손해를 유발했다. 특히 미국과의 외교전에서 이 효과가 커서 네덜란드를 거친 교역의 확대에도 실패하고 각종 외교적 실책을 저지른 끝에 미국의 개입까지 불렀다.
- 말이 먹을 마초의 수송 계획은 부족했고[10] , 마초는 현지 약탈로도 못 보급할 만큼 소요량이 많았다. 결국 개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병대에 말이 다 굶어 죽어서 사람만 남거나, 전투용으로 못쓸 만큼 말들이 쇠약해져 버려 낭패를 봤다.[11]
- 계획의 주력이었던 우익부대는 도보로 벨기에를 관통해서 북부 프랑스와 파리 근처를 지나는 대장정을 펼친 끝에 파리를 포위하는 역을 맡았으나, 짧은 제한시간에 무거운 울 코트에 가죽 장화 신고 소총과 군장 짊어진 채 매일 마라톤 풀코스를 전투하면서 도보전진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끝내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끝내 파리 근처까지 온 독일 제국군 병력은 전투 이전에 이미 제대로 걸을 힘도 없었다고. 위의 계획도만 봐도 1군, 2군의 기동거리가 대략 400km 이상인데 이 거리를 병력교체도 없이 전투하고 행군하며 또 전투하고 가야 한다.
- 공간이 없다. 우익부대는 계획의 성패를 좌우하는 주력이라 병력의 규모가 컸는데, 규모에 비해 지나갈 곳(네덜란드, 벨기에, 아르덴 산림지역)은 지나치게 좁았다.(이 때문에 조프르의 제17계획도 프랑스 북부 지역엔 병력을 거의 배치하지 않았다.) 도로망도 모자랐지만 무엇보다도 벨기에 및 프랑스 국경선 일대가 너무 좁아서 문제였다.[12] 이는 우익 강화에 장애물이었고, 나중 소몰트케의 우익 약화의 원인이기도 한 문제이다.
- 파리. 우익의 1차 목표지는 파리였지만 이 파리를 어떻게 지나갈까가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파리는 강력한 요새들로 방어되고 있었고, 이 파리를 어찌할지는 독일 제국의 누구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파리를 공략하면 강력한 요새지대가 지키는 파리시의 방어력으로 시간이 끌려 계획의 최종 목표인 프랑스군 포위 섬멸에 실패할 여지가 있고, 파리의 우측으로 지나가면 파리를 지키는 수비대의 측면 공격을 받으며, 파리의 좌측으로 지나가면 우익과 중앙 사이에 파리 시가 끼면서 전열이 갈라진다. 공간 부족 문제와 함께 슐리펜 계획에서 끝까지 못 푼 문제. 게다가 이미 독일은 보불전쟁에서도 다 이겨놓고 파리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바 있었다.[13] 이런데도 파리를 어떻게 점령할 지 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니 문제
2.2. 실행 시
이러한 원초적 약점에 더해 소몰트케는 슐리펜이 유언으로까지 남겼던(죽기직전까지 머릿속에서나마 계획의 업데이트를 하고 있었고 사단 몇 개만 더 있었더라면을 혼잣말을 내뱉던 일도 있었다. 그만큼 이 계획은 그에겐 국가에 대한 마지막 충성이었으며 동시의 그 자신의 혼신의 역작이었다.) 우익강화 방침을 저버리고 우익: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6:2로 약화시켰다.
벨기에 방면 병력의 약 1/7이 서부전선의 좌익인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간 것이라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지만, 네덜란드의 저항을 우려해서 마스트리흐트 돌출부를 점거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줄어든 우익 병력이 이동할 통로가 더 좁아짐은 당연했다.[14] 또한 군대로 위협하면 순순히 무릎을 꿇으리라 생각했던 벨기에가 예상외로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계획은 더 지체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이 동원을 일찍 끝내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부전선에 투입하면서 개전 초 동프로이센이 위험했고, 이에 따라 슐리펜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예비대를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 예비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동부전선은 안정화되었고, 서부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다시 열차를 타고 돌아갔다. 하지만 서부전선도 예비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패배하면서 단기전의 가능성이 사라져고 참호전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어버렸다. 끝내 이 금쪽같은 병력은 철도에 탄채 독일 영토를 동서로 왔다갔다만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 제국군은 단기결전에 실패하고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양면전쟁, 장기전의 늪에 빠저든다.
서부전선에서도 본래 프랑스군을 붙들어 두기로 했던 독일 제국군의 좌익이 예상외로 선전하자, 단익포위에서 양익포위를 위한 전선돌파를 명령하는 등 갖가지 전투지도상의 실책을 연발한다. 괜히 눈 앞의 상황에 매달리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버리면서 단기결전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이다.
전략적으로 포기하기로 한 동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의 시작이자 심장부였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의 실력자들은 불안감이 심했다. 러시아가 생각보다 빨리 참전했을 때, 러시아가 동원한 군대는 70개 사단이었다. 하지만 이에 맞설 독일 제국군은 겨우 12개 사단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몰트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제국을 공격할 때 독일 제국군의 즉각적인 지원 의사를 표명했다. 물론 독일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으므로 명백한 소몰트케의 거짓말.
끝내 뛰어난 전략가였던 참모 막스 호프만의 건의로 탄넨베르크 전투#s-3와 마수리안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대승을 거두지만, 이건 결과론에 가깝다. 슐리펜은 동부전선은 프랑스를 쓰러뜨릴 때까지 전황유지만 하면 된다고 봤기 때문에, 여차하면 동프로이센을 (일시적으로) 내주는 전략적 후퇴도 고려한다는 강경책이었지만,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동부 지역을 근거로 하고 있던 독일 제국의 상층부[15] 는 이를 결코 수용할 수 없었으며 이건 독일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끝내 동부전선의 강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본래 슐리펜 계획은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관계가 틀어진 덕분에 단기간에 결판을 봐야 승산이 있다는 결론에서 세워진 전략이었으니, 끝내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유지한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틀어버린 빌헬름 2세가 모든 배경의 근원임을 빼면[16] , 누가 더 문제라고 일컬을 수도 없었다.
3. 결과
'''망했어요. 현실은 시궁창.'''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완벽한 계획을 꿈꾸는 것이라는 자기네 선조의 금언을 무시한 결과 슐리펜 계획은 1차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초반기에는 슐리펜이 프랑스의 가장 하책이라고 여긴 '''알자스 진공'''을 프랑스군이 기꺼이 해서 장밋빛 미래가 보였으나, 벨기에의 저항으로 이레 가까이 전선이 벨기에 방면에 묶였고, 센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버텨보려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의 작전[18] 을 프랑스군 소장파와 노장 조제프 갈리에니가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어 역사적인 마른 전투가 났다.
끝내 이 싸움에서 측면을 찔린 독일 제국군이 안정적인 고지대를 선점하러 전선을 조금 물리면서, 서부 전선은 북해 연안에서 스위스 국경지대까지 참호가 나왔다. 그리고 피로 피를 씻는 4년 간의 참호전이 열렸다.
그리고 이 참호전 속에서 굴렀던 아돌프 히틀러는 극도로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1939년 전격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키면서 전선을 서쪽으로 한정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어떤 뜻에서 보자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서쪽으로만 급속 진군한 독일 국방군의 모습이야말로 슐리펜 계획의 진정한 형태였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진격할 때 알자스-로렌 방면은 라인 강과 보주[19] 산맥 및 고지대를 지나야만 하니, 신속하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려면 저지대 지역인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한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신속하게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려면 역시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하며, 실제로 1913년의 프랑스군 총참모장은 독일 제국과의 전쟁 시 벨기에를 통과해서 독일 영토로 진격하자는 제안을 총리에게 했다. 슐리펜 계획에서 설정한 돌파경로는 보편타당한 셈. 그러나 이건 프랑스 입장에서나 그럴 듯한 이야기지 예정에도 없는 양면전쟁을 벌여서 시간에 쫓기는 독일 제국에게는 울며 겨자먹는 도박일 뿐이다.
1차대전과 슐리펜 계획은 전쟁에서의 철도의 역할을 보여줬지만 그 한계 또한 같이 드러냈다. 연합군과 동맹군은 철도를 이용해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성공했고, 그 부대를 유지할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철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철도 종단점은 전투부대를 따라가기엔 너무 경직되었으며[20] , 따라서 대부분의 전투부대는 철도 종단점과 한참 떨어져서 행동해야 했다. 게다가 철도 종단점과 전투부대 사이를 이어줄 수송부대는 전쟁 초기의 병력동원 시점에서부터 전투부대와 떨어져버렸다.[21] 결국 철도역에는 피복과 탄약이 굴러다니고 전투식량이 썩어가고 있었지만, 전선에 도달하는 양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당시에도 구데리안이 화물차를 전투용으로 개조하고 싶다고 말했던 일화가 있던 만큼(이 말을 들은 군수장교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럼 밀가루는 누가 옮겨?''')화물차는 있었지만 차량조차도 대중화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고 현가장치들도 기술적 개념 제시는 몰라도 실용화는 저조한 상태였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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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의 작성자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 장군은 사진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전형적인 독일 장군이었던 듯하다. 새벽녘에 부관과 같이 바깥 순찰을 돌다가 부관이 아침 햇볕에 빛나는 동프로이센을 흐르는 프레렐 강의 경치를 보며 감탄하자, 흘끗 쳐다보고는 "사소한 장애물일 뿐!"이라 일갈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고 한다. 거기다가 시계마냥 철저하게 시간표대로 생활했다고.
만화가 굽시니스트가 프랑스 침공과 슐리펜 계획을 소재로 다룬 적이 있다. 움직이는 일의 어려움
2013년에는 다큐전문 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한 1913년~1917년기의 제1차 세계 대전 때 화성인이 쳐들어와 웰즈의 우주전쟁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The Great Martian War'라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화성인 군대를 피해 모든 독일 제국군 및 독일 민간인들을 프랑스로 대피시키는 작전으로 나온다.
[1] "아무리 훌륭한 전투 계획이라도 첫 포성이 울리는 순간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다."로 알려져 있다.[2] 러시아는 워낙 광대한 영토와 라스푸티차 탓에 장거리 도로수송은 힘들다. 지금도 인력과 물자 수송은 절대적으로 철도에 기댄다.[3] 하지만 1차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쪽수만 많다는 이미지의 러시아, '그' 이탈리아, 열강 반열에 끼지도 못한 세르비아한테 털리고 다녔다. 오-헝 제국군은 하나의 관료제 아래 통일된 국민군보단 각 지방과 민족의 치안군 성격이 강하기도 했고...[4] 1858년에 참모총장이었던 몰트케의 조카로 성이 같으므로 조카는 小몰트케로, 삼촌은 대(大)몰트케로 구분한다. 小 몰트케의 풀네임은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5] 특히 정교하게 짠 철도수송 계획. 독일 내의 모든 철도역과 화차 사용, 각 부대별 이동을 분 단위까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계획하였다. 따라서 한 군데만 건드려도 계획 전체가 마비된다.[6] 단순히 중립국을 침략해서만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자국의 해안선의 맞은 편인 네덜란드, 벨기에로 이루어진 저지대의 독립을 자국 방어의 생명선으로 생각했다. 아울러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은 영국이 보장해준 것이기 때문에 중립국 벨기에에 대한 침공을 그대로 놔두면 영국의 국가적 위신은 크게 떨어진다. 그래서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에 대한 침해는 영국이 절대 허용할수 없는 선이였다. 그런 의미에서 슐리펜 계획이 얼마나 외교적인 환경을 무시하고 순전히 군사적으로만 고려한 계획인지 엿볼수 있다. 프랑스 공격에서 얻는 이점이, 프랑스에 영국을 더해주는 것보다 큰지 고려따위는 되지 않았다.[7] 1차대전 개전 이전, 프랑스의 장군 페르디낭 포슈는 "우리에겐 딱 1명의 영국 군인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가 죽게 놔둘 것."이라고도 말했다. 인계철선 용도의 동맹군 주둔 필요성을 알게 해주는 사례.[8] 게다가 그 당시의 현실도 녹록치가 않았다.[9] 철도 복구 부대가 더 많았다 한들, 원래 모든 일은 부수는 게 만드는 것보다 쉬운 법이다. 파괴 공작의 속도를 복구 속도가 애초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10] 1차 대전 기간 동안 철도로 운송된 화물 중 부피 기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 게 마초다. 나폴레옹 전쟁이나 그 이전부터 마초를 방목이나 현지 약탈로는 수급할 수 없음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말을 먹일 풀밭과 시간이 항상 충분하지도 않을 뿐더러, 전투와 사역으로 말도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에 곡물을 먹이지 않으면 말들이 버티질 못한다.[11] 사실, 기병대의 마초 수요를 현지 조달 없이 수송으로만 해결하는 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역사상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12] 이 문제는 2차대전 초반부 나치 독일이 프랑스 침공을 준비할 때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13] 보불전쟁 개시에서 파리 봉쇄까지는 두 달이 걸렸고 파리를 봉쇄한 후 제대로 항복을 받기까지는 넉달이나 걸렸다. 이미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국민들이 반발해서 독일은 다시 싸워야 했다.[14] 독일이 벨기에와 달리 네덜란드를 놔둔 이유는 여럿이 있다. 네덜란드군은 숫자에 비해 정예로 평가받았고, 지형상의 문제로 독일 제국군 2개 군의 발이 묶일 수도 있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중립국이었지만 이 때만 해도 프랑스보다 오히려 독일과 가까운 나라였다. 애초에 네덜란드는 독일어권이고, 신성로마제국 시절 프랑스가 공격하면 독일이 방어하던 곳이었다.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민족구성은 독일계. 게다가 아직 철도-차도 등 교통인프라가 2차대전 시기보다 못하던 시기, 네덜란드의 전통 댐 폭파를 써버리면 당장 올스톱. 그리고 네덜란드의 침공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독일 정부는 영국 해군이 독일을 해상에서 봉쇄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영국이 감히 미국 상선을 공격하지는 못하리라고 판단했으니, 네덜란드 상선이 미국 국기를 달고 물자를 수송하면 이를 네덜란드를 거쳐서 구매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미국이 영국의 독일 봉쇄에 동의해 실제로는 못했지만 그래도 독일 제국은 네덜란드를 통해서 많은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15] 루덴도르프부터가 포젠 출신이다.[16] 독러관계는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이미 천천히 망가져 갔지만 그렇다고 빌헬름 2세에게 면죄부가 나오지는 않는다.[17] Und so weiter의 준말. '운트 조 바이터' 정도로 발음한다.[18] 이미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이전.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똑같이 해보려다가 끝내 길을 멈추고 비시에서 나치 독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19] 도이칠란트어로는 vogsen(포크젠)[20] 독일은 벨기에의 철도가 조직적으로나(후퇴하는 벨기에군의 파괴공작) 비조직적으로나(사보타주) 파괴될 것을 예견하여, 철도를 신속히 복구하기 위한 인원, 장비 등을 보유한 철도중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철도의 복구 속도가 파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21] 이는 최대한 빠른 병력소집을 위해, 병력동원 시기에서의 철도사용 최우선권을 전투부대에 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