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테쿰세 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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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Tecumseh Sherman 1820년 2월 8일 ~ 1891년 2월 14일
이 사진은 남북전쟁 이후 찍은 사진이고 팔에 단 검은 리본은 링컨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달았다.
1. 개요
2. 상세
3. 바다로의 진군
4. 비판
4.1. 비판에 대한 반론
5. 40에이커와 노새
6.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태도
7. 전후 행적
8. 명언
9.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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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 육군 장군. 남북전쟁 당시 전설적인 파괴왕.

2. 상세


테쿰세의 저주는 그와는 상관없으나 셔먼의 아버지가 유명한 원주민 족장처럼 강인해지 라고 테쿰세의 이름을 붙였으니 관련이 아주 없지는 않다. 특히 그에게 초토화된 남부지방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주가 아니라 지옥이 생각날 수준이었다.
1820년 2월 8일 오하이오 주 랭커스터 시에서 성공한 오하이오주 대법원 판사인 찰스 로버트 셔먼[1]아들로 태어났으나 9세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재혼한 어머니와 양부 토마스 어윙[2] 밑에서 자랐다.[3]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해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으나 병참 장교와 행정 역할이었기에 전투 경험이 없어 성과와 명성은 미미했다. 이후 소령으로 예편한 뒤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제대로 되는게 없었다. 그러다가 루이지애나 군사학교 [4]교장으로 1860년에 부임해서 일하다 1861년에 루이지애나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자 바로 그만두고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잠시 철도회사일을 한다. 이후 남북전쟁이 발발하여 연방 육군에 여단장으로 복귀하면서 그의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
이 때 셔먼의 연방 육군 재입대도 당시 미 의회 의원이었던 동생 존 셔먼의 입김이 작용했다.[5] 존은 이후 미 국무부 장관 자리까지 올라가 반독점법의 효시인 셔먼법을 발의, 제정한다. 당시 군에 대한 정치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그랜트 장군도 링컨 대통령의 도움이 있었기에 해임 위기를 면하고 무사히 진급했다.
전쟁 초기에는 동부전역에서 1차 불 런 전투에 참전, 그랜트보다 먼저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승진 이후 서부전역의 켄터키 주에 배치되었지만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적군에 비해 전력이 부족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였고, 잠시 전장을 떠났다가 그랜트의 포트 헨리, 포트 도널슨 공략전에서 보급을 맡아 그랜트와 안면을 트게 되었다. 1862년 이후로 셔먼은 그랜트 휘하에서 샤일로 전투, 빅스버그 포위전, 채터누가 전투 등 주요 전투들을 치렀으며 그랜트와 친분을 쌓고 그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랜트 휘하에서의 그는 전반적으로 전술적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지만 뛰어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랜트가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고 동부전역으로 이동한 후 셔먼은 그랜트와의 친분에 힘입어 서부전역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랜트가 리의 발목을 잡는 동안 셔먼이 남부를 휩쓴다는 대전략은 그랜트와 셔먼이 함께 마련했다고 여겨진다. 1864년 셔먼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조지아로 남하하지만 남군의 조지프 존스턴의 공간으로 시간을 버는 전략을 마주하게 되었고, 애틀랜타 근처까지 진격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전술적으로는 존스턴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존스턴도 셔먼이 애틀란타 코앞까지 도달하면서 심한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젊고 저돌적인 존 후드로 교체되었다. 후드는 셔먼의 보급선을 위협하고 여러 적극적인 공세와 기만을 시도했지만 셔먼은 이에 넘어가지 않았고, 후드가 애틀랜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애틀랜타 함락 이후로도 후드는 테네시로부터 이어지는 셔먼의 보급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후드는 셔먼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테네시를 침공해 셔먼의 후방을 위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셔먼은 후드를 끝장내는 대신 조지 H. 토머스를 테네시로 파견해 후드를 상대하도록 한 후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 주를 가로지르는 '바다로의 진군'을 시작했다. 방해를 받지 않게 된 셔먼은 마주치는 소규모 남군을 박살내며 보급을 현지조달, 조지아 주를 초토화시키며 대서양 연안의 서배너에 도달해 충분한 해상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랜트는 셔먼의 대군이 바다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와 포토맥군을 지원하기를 원했지만 셔먼은 대신 육상으로 북진,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노스 캐롤라이나를 초토화시키고 리의 후방을 위협했다. 이는 피터스버그와 리치먼드의 함락, 애퍼매톡스에서의 리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능력은 전략가에 치중되어 전술가로서의 능력만 따진다면 별로 보잘 것 없었다는 평가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싸우기 전에 이기는 조건을 조성, 확보해내는 능력'은 탁월했지만, '전장에서의 직접적인 싸움'에서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순수한 전술가로서의 기량은 '치카모가의 바위'로 불리는 조지 H. 토머스 쪽이 셔먼보다 더 유능하다고도 하는데, 그는 치카모가에서 몇 번이고 전군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부대를 유지하여 반격의 기회를 만들었고, 채터누가나 내슈빌에서도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선보였다. 남부 육군에 워낙 뛰어난 전술가들이 많다보니 남북군을 통틀어 평가하자면 셔먼은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였다는 주장도 있으며, 애틀랜타 전역에서의 상대였던 조지프 존스턴에게 어려움을 겪은 것을 예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프 존스턴은 유능한 장군이었고 로버트 E. 리보다 더 계급이 더 높았다.[6] 이런 존스턴의 뛰어난 방어진을 피하고 계속 전진한 셔먼은 유능한 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7]
그러나 그의 전략가적 능력, 특히 전략적 식견은 남북군 어떤 장군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선진적이었다. 이는 1864년의 대결로 셔먼의 숙적 취급을 받는 조지프 존스턴의 경우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존스턴은 전략적 식견 측면에서 셔먼의 의도를 읽어낼 수는 있었고 실제로도 계속 우월한 교환비로 계속 승리하여 1:3 정도 되던 남부 육군과 북부 육군의 비율을 거의 1:1.5까지 끌어내렸다. 그러나 셔먼은 계속 지면서도 꾸준히 애틀랜타까지 진격했고,[8] 셔먼이 애틀랜타의 코 앞까지 진격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남부연맹 정부는 존스턴을 해임했다. 존스턴은 지치고 규모가 줄어든 북부 육군을 애틀랜타 근처 유리한 지형에서 쳐부수려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9] 애틀랜타를 무사히 함락시킨 이후 그의 전략은 더욱 빛을 발했는데, 후방에서 깔짝대던 후드를 쫓는 대신 토머스에게 병력을 맡겨 북부의 우월한 전력으로 후드를 끝장내는 한편, 바다로의 진군으로 조지아 주를 박살내며 전쟁 수행 의지를 꺾고 보급선에서 자유롭게 기동하며 해상보급을 활용할 수 있었다. 항구에 도착한 이후에도 단순히 북부로 귀환하는 대신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를 휩쓸며 리의 후방을 압박하면서 남부군의 마지막 주전력인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항복시키고 전쟁을 끝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존스턴 해임 후 남부 정부는 좀 더 공격적인 성격의 후드 장군을 서부전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런 도박은 어찌 보면 남부로서는 근거가 있는 선택이었다. 이전에 동부에서도 존스턴이 전투에서 계속 이겼음에도 북부 육군이 남부연맹의 수도인 리치먼드 코앞까지 진격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 때 존스턴을 해임하고 좀 더 공격적인 성향의 로버트 리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재미를 본 전적이 있었다.[10] 어쨌든 전임자였던 존스턴이 야금야금 북군을 갉아먹어놓은 것도 있고, 남부 육군이 애틀랜타를 지키기 위해서 주위에서 병력을 닥닥 긁어모은 것도 있어 후드는 더 우세한 병력으로 애틀랜타 전투에 임할 수 있었으나,[11] 셔먼을 쫓아내기 위해서 무모한 공격을 계속 감행한 끝에 전술적, 전략적 양쪽 면에서 다 패했다. [12]

3. 바다로의 진군


그의 전략가적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현대전을 정의하는 총력전에서 상대방의 전투수행역량과 의지를 뭉개버리는 '''초토화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오늘날의 전략 폭격인 셈.
전략기동의 달인으로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중심지 조지아사우스 캐롤라이나 를 말그대로 '''쑥대밭''' 으로 만드는 일종의 초토화 전술인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Sherman's March to the Sea)을 선사했는데, 이 시기를 무대로 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이맥스에서 불타는 애틀랜타 거리가 그의 전술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에 묘사된 애틀랜타의 파괴는 셔먼 본인이 한 게 아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애틀랜타 불바다 상황은 바다로의 진군 전에 애틀랜타 전역에서 남군 육군 사령관 후드가 퇴각하는 와중에 청야전술로 군수물자와 군사시설에 불을 지르고 도망갈 때의 상황이다. 그 후에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의 시작을 개시하면서 병원과 교회만 남기고 다 태워먹었다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후방은 조지 H. 토머스에게 맡기고 본인은 빠르게 당시 조지아의 최대 항구였던 서배너로 동진하여 바다를 장악한 연방 해군의 지원을 받으러 갔다. 물론 중간에 가면서 툭하면 불지르고 때려부수고 파괴하면서 다녔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셔먼은 남부 경제를 개발살내고, 남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셔먼은 휘하 병력들에게 일부러 20일치 식량만 준비시키고, 나머지는 필요한 식량 및 물건들은 모두 '''현지조달'''을 지시했다. 그리고 약탈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무거운 물건들은 모두 부수고 불태웠다.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그 때까지 철도에만 보급을 너무 의존해서 북부 육군이 제대로 진격할 찬스를 놓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남부의 전쟁수행능력 말살에 주 목적이 있었다.[13] 따라서 이런 명령을 받은 장병들은 당연하게도 명령서의 허용범위보다 더 많이 약탈하고 더 많이 파괴하고 다녔으며, 결국 북군은 지나치는 곳마다 민간인을 빼고[14] 전쟁 수행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파괴하였다.'''
특히 식량은 셔먼이 작정을 하고 계획을 짰다. 셔먼은 1860년 인구조사 기록을 토대로 조지아 주에서 식량 생산이 가장 많은 지역들을 일부러 골라 지나갔고, 가을 추수가 시작될 무렵에 타이밍까지 치밀하게 맞춰서 진군을 시작했던 것이다. 어찌나 약탈을 체계적으로 잘 했는지, 북군 장병들이 숙영지에서 채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고 간 고기들이 썩어나가는 모습도 있었다.
조지아 주를 가로지르면서 지나간 곳을 인간계에서 헬게이트로 만드는 동안 셔먼의 북부 육군이 남긴 것은 철도선로뿐이었는데 이마저도 확실하게 못 쓰게 하려고 '''녹여서 나무에다가 둘러놓았다(...)'''. 이것을 보고 남부인들은 셔먼의 넥타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존스턴은 숫적으로 남군이 불리한 상황에서[15] 포레스트가 지휘하는 기병대를 시켜 후방에서 북부의 물자를 약탈하는 작전을 지속적으로 폈는데, 이에 북군은 그 보복과 물자 확보를 위해 지나가는 마을마다 더 씐나게 약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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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소위 말하는 셔먼의 넥타이.
남부에서 셔먼이 한 짓이 얼마나 심했는지 남부에서 셔먼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남부인들은 그에게 '''북부의 악마''', '''파괴자 양키''' 등 온갖 저주섞인 별명을 붙였다.[16] 아이러니하게도 셔먼이 가장 많이 박살낸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셔먼이 꽤 오래 살았고 무척 좋아하는 고장이었다고 한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남북전쟁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한데, 분리독립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머물던 셔먼은 '''전쟁이 나면 다 작살날 때까지 싸워야 할 거다'''라고 지인에게 경고했고, 결국 그걸 자기 손으로 직접, 그것도 바로 그곳에 와서 감행한 셈이 되었다(...).
셔먼이 어찌나 심하게 남부를 파괴했는지 남부가 입은 손실은 그 당시 '''1억 달러'''였다. 이를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00억 달러(10조 원 이상)'''에 달한다. 이 피해를 복구하는 데만도 남북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은 족히 걸렸다. 복구 사업의 대부분이 셔먼이 때려부순 걸 다시 복구하는 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1년 여 간의 전략기동중에 약 6만 규모인 그의 부대가 입은 피해는 100여 명의 전사자와 600여 명의 부상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군에 대해서도 최대한 달아나거나 항복하게 만드는 데 주력하여 '''많은 인명을 해치지는 않았다.''' 물론 파괴활동 중 저항만 안하면 민간인을 학살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남부의 물자와 시설을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에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남겨놓는 것'''이 셔먼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자국의 기반시설이 완전히 파괴되고 자신들의 가족들이 셔먼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두려워진 남부 육군 장병들의 탈영도 늘어났는데, 1865년 초반에 무려 10만 명이 탈영했을 정도였다.
결국 셔먼의 예상대로 이런 초토화 작전에 시달린 남부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고, 이는 남부연합의 수도였던 버지니아 주리치먼드 근처에서 대립하던 리와 그랜트의 싸움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당장 탈영이 없기로 이름이 높았던 리의 군대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셔먼이 파괴한 후방 주에 속한 장병들이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탈영하기 시작했으며,[17] 리의 군대는 커녕 수도인 리치먼드조차 식량과 무기, 장비가 다 떨어져서 더 이상 리의 남군이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주요 전장으로 역사적인 명전투들이 벌어지던 동부와 달리,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것은 의외로 서부전역이었다는 평.[18]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정식 사령관인 조지 미드를 직접 제어했던 포토맥군은 일견 무모해 보일 정도로 리의 남군에게 계속 싸움을 걸었고 종종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북군의 최고의 강점인 무한한 보급역량을 잘 살리고, 남군의 장점인 우수한 장교단을 봉쇄하고 약점인 빈약한 보급을 압박한 것이 효과적인 수단임은 틀림없었다. 이렇게 북버지니아군 주력이 붙들려서 소모되어 가는 동안 서부에서 셔먼의 테네시군이 남부 중심부를 휩쓸어버렸다.[19] 서부전역의 존스턴은 증원을 요청했지만,[20] 남부에는 더이상 그럴 자원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 일을 가리켜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그랜트가 리라는 곰에게 손을 물려 있는 동안, 셔먼은 그 곰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버렸군."

4. 비판


셔먼의 초토화 전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역사학자들은 셔먼이 '바다로의 행진'을 개시하기 이전부터 전세는 북부 쪽으로 기울어 있었으며 공업생산력이 북부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수입에 의존하던 남부의 실질적 전쟁지속능력이 해군의 패배로 인한 제해권 상실과 뒤이은 오랜 해상봉쇄로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식량의 경우도 이미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가능 인구의 대부분과 흑인 노동력의 감소[21]농업이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애초에 파괴를 하든 말든 북군 점령지역에서 남군으로 군량미 송출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민간인 피해도 대대적인 학살만 없었다 뿐이지 사상자 수는 결코 적지 않고, 초토화 전술이라는 명목 아래 수없는 약탈, 방화 등 거의 전쟁 범죄에 준하는 폭력이 가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래에 인용된 명언들처럼 그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필요악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4.1. 비판에 대한 반론


J. MacPherson의 "Battle Cry of Freedom."를 읽어보면 이 주장이 틀렸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공업생산력 및 제해권 문제는 개전 초기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남부의 골치거리였지만, 지상에서 남군은 잘만 싸웠고 거의 링컨을 실각시키는데 성공할 뻔 했다.'''[22] 그러나 서부로의 진격의 예고편격인 애틀랜타 전투를 통해 남부주의 교통 및 물류의 거점으로서 보급을 책임지던 대도시 애틀랜타를 점령했고, 덕택에 북부주들에서 전쟁에 대한 지지가 매우 높아졌다. 이후 재선에 성공한걸 상기하면 이건 정치적으로 필요한 진격이었다. 특히, 서배너같은 경우 사실상 남부의 몇 안 되는 마지막 항구였고, 남군이 철도를 파괴하는 통에 보급이 부족했던 셔먼의 군대 입장에서는 항구로의 진격은 군사적으로도 필수적이었다. 물론, 여기에 남부의 후방을 휘저으면서 그랜트와 리가 대치하고 있는 동부전선을 흔들겠다는 계산도 깔려있었다.[23][24] 또한 셔먼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뒤쫓고 있었던 존스턴/후드 군대를 거꾸로 자신을 쫓게 만들어서 유리한 지형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남군도 기회만 있으면 방화 및 약탈을 자행했다. 신사적인 포로교환도 남부측이 자유 흑인 병사들을 멋대로 노예로 삼고 전쟁포로 취급도 안 해주는 등 워낙 비인간적인 짓들을 많이 벌였다. 게다가 남군도 북군 포로(백인 포함)[25]나 연방에 붙은 민간인들을 상당히 잔혹하게 고문하고 죽인 기록이 있다. 또 남군 역시 북부의 물자보급선을 끊기 위해서 우월한 기병대를 이용, 계속해서 북군이 장악한 도시와 마을, 항구나 기차역들을 약탈하고 다녔고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의 후방 주들까지 급습했다.

5. 40에이커와 노새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865년 1월, 셔먼은 군정장관 자격으로서 특별행정명령을 통해 조지아주와 연안 섬들에서 해방된 흑인 자유민이 40에이커의 땅과 노새 한마리씩을 받을수 있도록 선포했는데 이는 흑인들이 앞으로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립기반이 필요함을 깨달은 바에 의한 매우 전향적인 조치였다.이로인해 약 4만여명의 흑인들이 자신의 경작지와 경작 수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조치는 링컨의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앤드류 존슨에 의해 없던일로 되었고 흑인들은 다시 백인 농장주들의 소작농으로 돌아간다. 이후 "40에이커와 노새"는 좌절된 미국 흑인들의 꿈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6.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태도


같은 미국인들끼리의 남북전쟁에서는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주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쟁에서는 그런거 없고 '''더 심했다'''.[26]

"we must act with vindictive earnestness against the Sioux, even to their extermination, men, women and children."

"우린 수족에 대해서 진지한 복수심을 지니고 행동해야 합니다. 남자건, 여자건, 애들이건 모조리 씨를 말리더라도요."

"hostile savages like Sitting Bulland his band of outlaw Sioux...must feel the superior power of the Government."

"시팅 불과 그의 무법자 수족 같은 적대적인 야만인들에게는 정부의 우월한 힘을 느끼게 해줘야합니다."

보다시피 수족에 대해서는 그 역시 전쟁광 같은 태도로 나오고 있다. 다만 토벌이 끝나자 나바호족에게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땅(원래 영토의 알짜배기는 뺏겼지만)을 확보해 주고 남은 땅에서는 정말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고 그 덕에 나바호족은 지금 최대 부족 중 하나가 되었다.[27] 그렇다고 해도 매우 호전적인 발언인 건 사실이지만... 어쩌면 그 당시 미국인이 할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저 발언은 일종의 기선제압 및 엄포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표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무리인 것도 있다. 당장 링컨도 남북전쟁에서 원주민들이 남쪽을 돕자 전략적 차원에서 쓸어버리기도 했다.

7. 전후 행적


남북전쟁 이후 셔먼은 중장으로 진급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율리시스 S. 그랜트는 그를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육군대장으로 진급시키고 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렸으며, 셔먼은 그 후 64세에 은퇴할 때까지 15년간 그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남북전쟁에 관해 그가 쓴 회고록은 명저로 평가받아 문인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편지 쓰기를 좋아해 거의 평생, 전쟁중에도 매일 편지 여러 장을 쓰고 받았기에 필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은퇴 후 셔먼은 정계 진출을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조용히 살다가 은퇴한지 7년이 되던 1891년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가족으로는 아내 엘레노어와 8명의 자녀, 11명의 형제들이 있다. 그의 장례식 때는 남북전쟁 당시 적수였던 남부 육군의 조지프 존스턴도 참석했는데, 비가 오는 추운 날인데도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자를 벗고 있었다.[28] 존스턴의 친구가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모자를 쓰라고 권유하자 존스턴은 '만약 내가 관 속에 있고 빌리(윌리엄의 애칭으로 셔먼을 말한다)가 자리에 있었다면 빌리 역시 모자를 벗고 있었을 것'이라고 답하였다. [29] 다만 그 때문에 존스턴은 폐렴에 걸려서 몇 주 후에 사망했다. 참고로 이건 향간에 떠도는 이야기고, 실제로 조지프 존스턴의 사망원인은 폐렴이 아니라 심장마비였다. 그리고 존스턴은 매우 고령이었다.
리델 하트와 같은 전사가에게 '최초의 현대적 장군'이라는 평을 받았다. 총력전(Total War)의 선구자로 칭송받기도 한다.
휘하 육군 장병들은 그를 '빌리 아저씨'라 불렀다고 한다. 빌리는 셔먼의 이름인 '윌리엄'의 애칭.

8. 명언


"Its glory is all moonshine. It is only those who have neither fired a shot nor heard the shrieks and groans of the wounded who cry aloud for blood, for vengeance, for desolation. '''War is hell.'''"

"전쟁의 영광이란 건 완전히 헛소리다. 오직 총 한 번 쏴본 적 없거나 부상병의 비명과 신음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들만이 큰 소리로 더 많은 피와 복수, 파괴를 외친다. '''전쟁은 지옥이다.'''"


"War is cruelty. There's no use trying to reform it, the crueler it is the sooner it will be over."

"전쟁은 잔악행위이다. 그걸 바꿀 필요는 없다.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더 빨리 끝나니까."


"You cannot qualify war in harsher terms than I will. War is cruelty, and you cannot refine it."

"나보다 더 가혹하게 전쟁을 정의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전쟁은 잔학행위이며 아무도 그걸 개선할 수 없습니다."


This war differs from other wars, in this particular. We are not fighting armies but a hostile people, and must make old and young, rich and poor, feel the hard hand of war.

"특히 이 전쟁은 다른 전쟁과 다릅니다. 우리는 군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국민과 싸우고 있으며, 늙건 젊건, 부자건 가난하건 전쟁의 고통스런 손길을 느끼게 해 주어야만 합니다."

같은 오하이오 주 출신인 미 공군대장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와 맞먹는 후덜덜한 발언.
하지만 자국 병력의 보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적측 민간인이건 도시건 뭐건 다 때려부쉈던 르메이와는 달리, 셔먼의 경우에는 '''최대한 안 하되, 하려면 끝장을 봐야한다'''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도 셔먼은 전쟁을 싫어했으며(이 점에선 그랜트와 비슷하다), 무의미한 파괴와 학살을 가장 증오했다. 그가 파괴와 학살을 좋아했다면 애당초 남군의 존스턴이 셔먼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는커녕 잘 죽었다고 축제를 벌여도 시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전쟁에 대한 생각이 어땠는지 그가 죽기전에 남긴 말이 잘 묘사하고있다.

There is many a boy here today who looks on war as all glory, but, boys, it is all hell.

"전쟁을 명예로운 일처럼 생각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여, 그것은 모두 지옥이었다."

I’ve been where you are now and I know just how you feel. It’s entirely natural that there should beat in the breast of every one of you a hope and desire that some day you can use the skill you have acquired here.

Suppress it! You don’t know the horrible aspects of war. I’ve been through two wars and I know. I’ve seen cities and homes in ashes. I’ve seen thousands of men lying on the ground, their dead faces looking up at the skies. '''I tell you, war is Hell!'''

"나 또한 자네들 자리에 있던 적이 있고 지금 자네들 기분이 어떤지 정확히 알고 있네. 자네들 가슴 속에 언젠가 여기서 배운 것들을 바깥에서 써먹을 수 있으리란 희망 내지는 소망이 두근거리고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집어치우게! 자네들은 전쟁의 끔찍한 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네. 전쟁을 두 번 겪어보니 확실히 알겠더군. 난 잿더미가 된 도시와 집들을 보았네. 죽어버린 얼굴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수천의 시체도 보았지. '''똑똑히 말해두는데, 전쟁은 지옥이야!'''"

-1879 미시건 주방위군 육군사관학교 졸업반 연설의 출판시의 변형-

In our Country...one class of men makes war and leaves another to fight it out.

"우리나라에서, 한 계층의 인간들은 전쟁을 벌이고 다른 계층의 인간들을 끄집어내서 싸우게 한다."

군사 관계자들에게는 금과옥조라 할 만하다. 특히 군주국끼리의 전쟁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끼리의 전쟁[30]을 처음으로 드러낸 발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이에 대해 군사연구가 데이브 그로스먼(D.Grossman)은 자신의 저서 "전투의 심리학" 에서, 셔먼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전투 자체를 원하고 즐기는 군인들도 있을 수 있으며 그들을 이상한 사람 내지는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셔먼은 정치인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을 때도,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If nominated I will not run; if elected I will not serve."

"만약 후보로 지명된다면, 난 유세를 안할거요. 만약 당선되면, 일을 안할 거고."

선정적 보도를 일삼는 언론에 대한 반감도 숨기지 않았다.

"I hate newspapermen. They come into camp and pick up their camp rumors and print them as facts. I regard them as spies, which, in truth, they are. If I killed them all there would be news from Hell before breakfast."

"나는 신문기자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막사로 처들어와 뜬소문을 모아서 사실인 양 기사를 낸다. 나는 그들을 스파이로 간주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만약 내가 그 작자들을 다 잡아 죽인다고 해도 그들은 아침식사를 먹기 전에 지옥에서 기사를 내보낼 것이다."


9. 기타


후에 그의 이름미국 전차M4 셔먼, 구한말 대동강에서 난동 부린 상선 제너럴 셔먼호,[31] 그리고 그의 이름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나무세쿼이아중 가장 무거운 나무에 붙여졌다.
당대 기준으로 봐도 지독한 인종차별가였다.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자신의 부대에 흑인 병사들은 일정 받지 않았다고 하며, 흑인 노예들을 해방하는 것도 '''촌부 놈들의 방아쇠를 당겨줄 손가락을 하나라도 더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는 그가 보낸 서면들에 잘 나와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밑의 어록에도 있듯 노예찬성파였는데 미국이 분리되는것은 용납못한다고 북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난 깜둥이들의 해방을 위해 참전한 게 아니다. 난 조국의 시민으로서 책임감을 느꼈기에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깜둥이들은 친구로 두기엔 좋은 녀석들이다. '''하지만 그 녀석들이 나랑 함께 투표소에 가서 내가 찍은 후보를 찍을 정도로 좋은 녀석들이라 보진 않는다.'''

이러한 차별은 유대인과 원주민(인디언)에게도 통용되어서, 병사들을 소집하던 중에 이런 대화를 했을 정도.

동료 장교: 유태인들과 인디언을 소집할 생각은 없소? 그 친구들도 '''총알 막는덴 백인들 만큼이나 쓸모있소만.'''

셔먼: '''모래 주머니가 더 효과적이오.'''

그런데 괴팍한 그 성격 만큼이나 인종관마저도 배배 꼬여 있어서, 인종차별주의자면서도 인종차별적인 법안엔 반대하는 등 여러모로 모순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노예제에 대해서는 그리 반대하지는 않으면서도, 동시에 흑인 가족을 분리하는 정책이나 흑인들을 문맹으로 만들자는 법규조항엔 강력하게 반대했다.
생전에 Marching Through Georgia[32]라는 자신의 서부로의 진군을 기념하는 노래를 매우 싫어했다. 셔먼이 전쟁을 매우 싫어했다는 걸 상기하면 그답다고 할 수 있겠다. 어찌나 싫어했는지, 이 군가에 대해서 셔먼은 '내가 조지아로 진군한 것 때문에 이 노래가 만들어진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조지아를 피해서 갔을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지겨워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이게 셔먼의 전공을 아주 잘 묘사한 노래여서 셔먼이 공식 석상에 참석할 때마다 이 노래가 나왔기 때문이다. 셔먼이 사망한 뒤의 장례식에서도 이 노래를 연주했다.
상관이었던 율리시스 그랜트와 성격은 상극이었지만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알다시피 셔먼은 매우 거칠고 다혈질인데 그에 반해 그랜트는 전쟁터에서 울만큼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랜트는 총사령관이 되자 셔먼에게 서부지역 사령관을 맡겼으며,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셔먼을 군 장성에 앉혔다.

[1] 이 사람의 조상이 로저 셔먼이라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중 한 사람이다. 게다가 이 사람의 아들들, 즉 셔먼의 형제들도 성인이 돼서 다들 한 자리씩 해먹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을뿐 집안 자체는 굉장히 좋았다.[2] 미국 상원의원에 미국독립전쟁 배터랑인 조지 어윙의 자손으로 역시 정치적으로 대단한 가문이었다.[3] 이 양부는 딸까지 있었는데, 셔먼은 이 양부의 딸을 사랑하게 되어 양부가 죽고나서 결혼하게 된다. 참고로 이 양부의 딸인 엘렌은 셔먼보다 4살 이상 연상이었는데 집안이 좋아서 교육도 많이 받았으며, 이 때문에 여성인권운동가이자 링컨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또한 연방 지지자이기도 했다. 남편이자 남동생이나 다름없던 셔먼을 끔찍하게 아껴서, 셔먼이 파면당하게 생기자 직접 링컨을 만나서 셔먼의 파면을 철회시키고 오히려 다시 전쟁터의 요직에 앉게 해줬다.[4]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의 전신[5] 존 셔먼 뿐만 아니라 셔먼의 형제들은 모두 정계, 법조계, 은행가의 거물들이었다. 형인 찰스는 연방법원 판사였고, 동생 존은 언급되었다시피 상원의원, 그리고 또 다른 동생인 호이트는 성공한 은행가였다. 또한 의붓형제들도 다들 한가락 했고,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으로 참전했다.[6] 조지프 존스턴은 웨스트 포인트 1829년 졸업생들중에서 최초로 별을 딴 인물로 로버트 리보다 최종 계급이 더 높았다. 즉, 훨씬 뒤에 졸업했고, 최종계급도 대위급이었던 "셔먼"은 조지프 존스턴에 비하면 그야말로 애송이였다.[7] 여기에 셔먼이 계속 불리한 교환비 결과를 냈다는 점에서 셔먼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으나, 셔먼은 어디까지나 '''적진'''에서 '''유리한 지형을 끼고''' '''방어진'''을 치고 있는 적을 돌파한다고 생긴 어쩔 수 없는 피해였다. 조지프 존스턴조차도 야금야금 셔먼의 병력을 갉아 먹었으나 애틀랜타 코앞까지 와서 병력상 우위를 점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승부를 망설였을 정도로 셔먼의 진군은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8] 사실 이것만 봐도 셔먼이 전술적으로도 바보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불리한 교환비를 내면서도 어쨌든 목표로 삼은 지역을 점령하여 존스턴의 군대를 물러나게 했으므로.[9] 그래도 예상보다 셔먼이 많은 병력을 온존하여 존스턴은 이 승부를 망설였다. 실제로 존스턴은 동부에서도 이렇게 이기고 있었는데도 계속 후퇴를 거듭하여, 남부 수도인 리치먼드 코앞까지 몰린 적이 있었다.[10] 다만 로버트 E. 리는 존스턴급 고참이었지만, 후드는 원래 용감하기만 하지 짬밥은 겨우 중대장급으로 나이도 비교적 어려서 경험도 전술적 실적도 매우 부족했다. 북이나 남이나 현장을 지휘했던 1선급 장군들은 로버트 E. 리나 존스턴같은 장성급 고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10~20년대 생들이었는데 후드는 30년대 생이었다.[11] 애틀랜타 전투에서는 5천명, 즉 15% 가량 더 많은 병력으로 셔먼을 상대했다. 단, 이 전투에서 상대한 것은 셔먼의 주력인 테네시군뿐이었고, 스코필드의 오하이오군과 토머스의 컴벌랜드군은 애틀랜타 포위를 위해 분산된 상태였기에 전체 전력은 연방군이 훨씬 우세했다.[12] 역전의 노장 존스턴이 원했던대로 셔먼의 휘하 병력을 많이 줄여 놨는데도 함부로 공격하지 않은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존스턴은 데이비스의 닥돌 명령을 거부하면서, 지구전을 끌고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리 장군이 동부전역에서 그랜트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급한 결과를 내야 하는 쪽은 셔먼이고, 급해진 그를 자연스럽게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3] 물론 최초는 셔먼이 아니라 셰리든이 했다. 그래서 셰리든도 셔먼만큼 남부에서 증오를 많이 받았다. 적국의 국력을 망가트리기 위해 점령지를 파괴 약탈하는 행위는 고대부터 자주 있었고, 특히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는 쿨타임 돌 때마다 프랑스의 국력을 깎기 위해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했다.[14] 남부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항복하면 죽이지 않고 받아주었다. 물론 저항하면 다 죽였다.[15] 인구에서 북부가 남부를 압도하여 숫자가 불리했다.[16] '남부 출신 2차대전 미군 중에서는 신형 전차에 M4 셔먼이란 이름이 붙자 탑승을 거부하는 전차 승무원 나올 정도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하는데 이 일화는 거짓말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M4라고만 불렀고 셔먼이나 스튜어트라는 명칭은 영국에서 쓰던 것이었다. 그 어디에도 미국 남부사람들이 이 전차에 타기를 거부했다는 공식기록은 없다. 이 일화는 벨튼 쿠퍼의 책 『데스 트랩』에서 인용된 오류이다. [17] 이 때문에 남군은 민병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행태는 전형적인 민병대식 행태이기 때문이다. 정규군은 자신의 고향이 박살나더라도 후방에 '''국가'''라는 굳건한 존재가 있기 때문에 증원군이나 구원군을 파병하여 고향을 수복할 것을 기대할 수 있어 이를 악물고 전략적인 목표에 집중하지만, 민병대는 영웅주의적 생각에 빠져 자신만이 고향을 지킬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 전쟁의 전략적 목표보다는 자신의 고향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군에서 정신교육이라는 것을 하는 이유중 하나이다.[18] 그렇다고 동부전역의 전투가 헛짓이었던 건 아니다. 동부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로버트 리의 군대를 막아주었기 때문에 셔먼이 서부전역에서 휩쓸고 다닐 수 있었다.[19] 사실 셔먼은 서부를 진군하면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셔먼이 조지아의 가장 큰 항구인 서배너를 향해 바다로의 진군을 시작하자, 애틀랜타 전역에서 패배했지만 아직 병력을 보존했던 후드는 셔먼이 서배너로 진군한다는 걸 알고 "헐ㅋ 그러면 우리도 질 수 없뜸. 북부의 배후를 친다!"하고 오히려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 후드의 남군이 셔먼이 파견한 조지 H. 토머스 휘하 북군에게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완전히 박살나며 서부전역의 남군은 거의 말소된다.[20] 이 시점에서 후드가 서부전선의 남부 육군을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완전히 말아먹는 바람에 그 잔존병을 이어받은 존스턴의 부대는 전투수행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에 리는 뻘짓하지 말고 동부전선에 합류하라고 했으나 결국 합류하러 가던 도중에 전쟁이 끝났다.[21] 북부로의 이탈뿐 아니라 주인들이 전쟁터에 데려간 흑인노예들이 군대에서 일을 했다.[22] 1864년 대선에서 남부주들이 대부분 다 빠진 상태였는데도, 전체 득표수에서 40만표밖에 차이가 없었다. 선거인단 수로 보면 링컨의 압승이었지만, 북부 일부 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아슬아슬한 경합주들이 되어 링컨도 진땀을 흘려야 했다.[23] 이 때문에 탈영병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던 리의 군대에서 자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탈영병이 속출한다.[24] 이건 쓸 수 있는 병력과 자원이 한정되어 있던 남군이 실행했어야 했던 전략이다. 그런데 빅스버그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미시시피 강에 대한 통제권을 완벽히 상실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서 뒤치기가 불가능해졌고, 리는 그랜트에 발이 잡혀있었다.[25] 북군에 복무한 자유/노예 흑인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백인 포로들도 예외없이 학대를 당했다. 거기다 남군은 식량공급이나 위생관리가 열악하여 수만명의 북군 사병 포로가 수용되었던 앤더슨 빌 수용소의 참상이 지금까지 유명하고 영화(1996년작, 앤더슨 빌)로 제작될 정도였다. 전후 남부인들에 대한 처분에 있어서도 이곳의 수용소장은 연방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할 정도였다. 북군 장교 포로(장성급 포함)들은 격리 수용되었는데 마찬가지로 구타와 학대를 당하고 계급대우를 전혀 해주지 않았다.[26] 그의 미들네임인 테쿰세가 아메리카 원주민 저항운동가 테쿰세에서 따온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 해진다.[27] 원주민과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전쟁에 앞장선 연방 육군 장교들이 전시 상황이 아닐 때는 오히려 원주민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꽤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주 접하다보니 자연스레 원주민들의 사정에 밝아졌고 지역 민병대와 달리 원주민들과 직접적인 이해, 원한관계로 얽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8] 참고로 존스턴이 10살 이상 나이가 더 많은 삼촌뻘이었다. 웨스트 포인트 졸업 기준으로 하면 10기 이상 차이 나는 대선배(...).[29] 전쟁 이후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고, 존스턴이 워싱턴 D.C.로 여행 올 때마다 저녁 식사를 통해 서로 만날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남북전쟁이 한 식구끼리 갈라져 싸웠다가 다시 합쳐진 전쟁이라 적이지만 우정을 나눈 사례가 꽤 있다. 존스턴과 셔먼 못지 않게 유명한 일화가 게티스버그에서 피켓의 돌격을 지휘한 여단장 중 한명이었던 루이스 아미스테드 준장과 그 돌격을 저지한 북군 2군단장 윈필드 핸콕 소장의 우정.[30] 이게 문제가 되는 게, '''범국민적인 전쟁수행 의지'''에 기반한 '''국민군끼리의 전쟁'''이 총력전의 양상으로 진행된 것은 남북전쟁이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국민들이 먼저 전쟁을 요구하고 정부가 이에 질질 끌려간 사례는 사실상 없었으며, 이후에도 매우 드물다는데, 국민의 의사란 무엇인가? 매스 미디어나 수도 국민의 시위로 표현되기 일쑤기 때문에 어느 체제든 선전을 중시하게 된다.[31] 브루스 커밍스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가리켜 '애틀랜타의 원한을 갚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미국의 역사서술에서 자주 보이는 유머다.[32] 이 곡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신독립군가의 곡조로 채용되어 사용된다.